1970년대 윤동주 평가절하돼 "공부만 했지 무슨 독립운동" 오해
윤동주 옥사 통고받은 부친, 주위 만류에도 뿌리치고 일본행…
해부 대상 될 뻔한 시신 가져와
오늘도 그의 시를 대하면 절로 숙연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국민시인 윤동주를 다룬 영화 '동주'를 본 내 주위 분들 소감은 다양했다. 그중엔 "영화 제목을 '동주'가 아니라 '몽규'로 해도 되겠던데요"라는 반응도 있었다. 내가 '윤동주평전'을 쓰면서 송몽규(1917~1945)란 인물의 실체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는데, 영화가 그 책을 토대로 제작됐기 때문에 송몽규가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돌아보면 윤동주 시인은 '사람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화계에서 돌연 국민시인 윤동주를 폄훼하고 평가절하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윤동주는 평생 공부만 한 학생이었는데 무슨 독립운동을 했다는 건가", "그는 일제의 과잉단속에 재수 없게 걸려 불운하게 옥사한 것이다" 등등의 주장이 대뜸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건 모두 송몽규를 몰랐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고종사촌 사이다. 윤동주의 고모부가 처가살이하던 때 윤동주보다 석 달 먼저 그 집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늘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다. 그러다가 송몽규는 만 18세 때 무장독립운동에 투신하려고 집을 떠나 중국에 갔다. 그는 임시정부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다가 일제의 항의로 학교가 폐쇄된 뒤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통을 겪고 풀려났다. 그 후 윤동주와 함께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할 때까지 그는 일경의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고초를 겪었다. 요시찰인은 일제 공안당국이 특별히 집중 감시한 인물을 가리키는 용어다.
지난에서 북간도로 돌아간 송몽규는 다시 학업에 몰두했고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현 연세대)을 거쳐 일본에 유학했다. 윤동주는 일본 교토에서 송몽규와 자주 어울리면서 조선독립운동에 관련된 행동을 하다가 요시찰인 송몽규를 밀착 감시하던 일경 감시망에 걸려서 함께 체포됐고 교토재판소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함께 복역하다가 나란히 옥사했다.
따라서 윤동주 시인에 대한 부당한 폄훼를 바로잡으려면 송몽규의 존재와 활약상을 제대로 알리는 일이 필수였다. 나는 '윤동주의 동반자, 송몽규'라는 글을 써서 한 시사잡지에 실었다. 그가 우리 집안 어른이어서 가능했다. 그 기사를 계기로 윤동주 폄훼 현상은 가라앉았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나를 뜻하지 않은 임무로 이끌었다. 그 기사를 크게 평가한 최하림(1933~2010) 시인이 내게 "윤동주 평전을 쓰시오!"라고 강요에 가까운 요청을 했다. 본래 누구건 간에 시인의 평전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던 나는 처음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어난 어떤 특별한 일이 계기가 되어 고집을 버렸다.
내가 평전 쓰기에 착수했을 때만 해도 관계자들이 다수 살아계셔서 큰 다행이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간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밝혀내 책에 담은 것은 매우 큰 보람이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나는 것은 윤동주의 죽음을 맞은 가족들에 관한 증언이다.
윤동주의 옥사를 유족에게 통고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유족이 시신을 가져가지 않으면 규슈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맏손자 동주를 끔찍이 사랑했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뜻밖에도 "동주의 시신 가져오는 것을 포기하자. 시신을 가지러 가다가 산 사람도 죽을까 걱정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태평양전쟁 막판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이 매우 심한 상황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런데 평소 온화하고 내성적이던 윤동주의 부친이 완강하게 거부하고 아들의 시신을 가지러 갔다. 부친의 결단이 아니었으면 윤동주는 규슈제대 의학부 해부실에서 갈기갈기 찢겨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
그의 어머니 이야기도 처절하다.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의 죽음에는 곡(哭)을 하지 않는 조선 법도를 지키느라 어머니는 일절 소리 없이 엄정하게 동주의 장례를 치러냈다. 그러나 장례 후 어느 날 빨래거리를 챙기다가 동주의 흰 와이셔츠가 나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목을 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하면서 마냥 그치지를 못했다.
나는 울면서 그런 증언들을 받아 적었다. 우리 역사는 이런 아픔들을 품에 안고 전진하여 오늘의 번영에 이르렀다. 그걸 생각하면 그의 시를 대하는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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