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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것을 아는 모양이다"...
2016년 10월 31일 22시 49분  조회:3866  추천:1  작성자: 죽림

 

 

온몸의 시학, 김수영을 읽다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위해 / 양심과 정직에 다가가기’

 

 

                                                                                            이나무(사회복지학박사/시인)

 

 

1

 

   김수영을 떠올리면 일순간 떠오르는 한 장의 흑백 사진이 있다. 비범하게 느낄 만큼 퀭하고 형형한 그 눈빛은 어떤 상흔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포스가 있다. 그 런닝구 포스의 깊고 쓸쓸한 표정은 무엇이 크게 결락된 존재적 고뇌에 잠겨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런 바라봄이 김수영에게 다가가는 우리의 첫 시선은 아니었을까. 뺨을 괴고 앉아 그는 묻는다. “나, 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물음은 현재도 유효하다. 시대를 거듭하며 그 시대가 요구하는 화두는 변하게 마련이지만 김수영의 시에 서려 있는 자유와 양심 그리고 정직이 살아있는 동력은 그만의 상징적 메타포로 지금도 파고든다. 그가 떠난 지 반세기가 다 되어 가지만 그 존재의 물살은 내리꽂히는 ‘폭포’처럼 부드러운 ‘풀’처럼 넘실댄다. 오늘 그의 시적 시간성을 따라 그 배면의 울림을 건져보려 한다.

   문인이건 그렇지 않건 이 자리에서 우리가 김수영을 읽는 것은 한 시대의 역사적 지성인을 만나 문학적 향유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그 끝닿는 곳은 그가 서려 있는 배음과 강고한 정신을 공유하거나, 각자의 정신을 회복하려는데 있을 것이다. 김수영의 정신은 자유, 양심, 정직이다. 곧 삶은 시의 텍스트였으며, 현대시의 가장 지적인 것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시인이다. 온몸의 시학으로. 생각해보면, 현시점에서 자신의 삶을 자기 시의 텍스트로 삼는 시인은 얼마나 될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시 따로 인생 따로 가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자기 삶의 비루함, 양심의 부조화, 자기 환멸의 회복을 위해 고투하는 이들이 있다면 기꺼이 김수영의 시를 읽어야 할 것이다.

   보통 우리의 내부에는 여럿의 자아가 있다. 바깥세계와 관계 속에서 정의와 양심, 위선 없는 간절한 마음도 가져보지만, 그것도 잠시 일뿐, 돌아서면 일상의 몸이 익숙한 패턴대로 거짓 자아로 휩쓸려 사는 경우가 많다. 진실한 순간이 짧은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문득 어떤 일을 떠올린다. 종종 양심과 정의를 따르지 못하는 자신이 가끔씩 술자리에서 자신의 태도를 방어하려고 정치인이나 이름난 명사들의 가식적 위선을 목청껏 지적하며 스스로에게 작은 면죄부를 주려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다.

 

 

   돌아가 보면 4.19의 역사적 시간을 김수영시대라 할 만큼 그를 4월혁명과 연동시키는 이유가 있다. 김수영의 모던이즘과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김수영의 문학적 혁명은 1968년 그가 돌연 하직할 때까지 계속됐다. 다른 문인들처럼 현실을 예술로 순치시키려는 문학하고는 차별화가 있었다. 그 동향으로 1970년대 이후 시문학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김수영에 대한 조명은 활발하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서 비롯될까. 살아있는 양심과 정직의 바탕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도 구현된다. 김수영은 자유가 가능하게 되는 조건과 역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는 조건을 시적 공간에서 성찰했다. 그 경계의 천착은 아마도 식민지로서의 왜곡되고 추락된 과거의 시간에 대한 기억, 4.19혁명의 분출과 좌절, 군부독재의 성립이 전면에 드러나며 벌어지는 인간의 위악과 속악함을 삶 전체에 체험하며, 시가 존재가 되어 “반란성”으로 이어진다. 즉 ‘자유’가 화두가 된 것이다. 이런 토대로 김수영의 시는 치열한 자기반성과 실천적 자아가 통일된 명징한 텍스트이다. “먼지야 풀아 나는 정말 얼마만큼 적으냐” 라는 시인의 정직하고 일상적 반성은 우리로 하여금 위선을 들여다보게 한다.

   오늘 우리가 그의 시를 읽으며 스스로 따갑지만, 뜨겁게 응시하는 정직한 환한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수영 문학관이 설립되고 <김수영 문학회>가 결성되면서 ‘김수영 문학 특강’이 오늘이 세 번째이다. 오래 오래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고 가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 김수영의 시를 불러 세워 현재화하고 조명하는 것은 분명 의의가 있다. 우리의 반성과 진정한 진보의 쾌감도 줄 것이다.

 

 

2

 

   김수영 시세계의 변천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크게 보면 1945~49년간의 제 1기, 1953~59년간의 제2기, 1960~61년간의 제3기, 1961~68년간의 제4기 등, 네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기가 등단 및 수업 시대라면, 제2기는 현대성(근대성)의 관념적 추구기로 볼 수 있고, 제3기는 혁명적 양양기로 볼 수 있으며, 제4기는 혁명의 좌절로 인한 현실로부터 퇴각과 일상성의 획득을 바탕으로 풍자와 해탈의 모색 등 다양한 시적 실험이 지속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시대적 흐름에 맞춰 초기시부터 후기시까지 몇 편의 시를 낭독하고 그의 시적 사유의 깊이를 따라가 본다.

 

   

   제1기 시 - <1945>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장난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초기시에서는 ‘본다’는 행위를 두드러지게 의식하는 시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난해성이 두드러지고 시적인 형상화에 있어 추상성이 이 시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다만 시적 화자의 세계에 대한 태도가 단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1연에서 시인은 꽃의 개화와 줄넘기 장난을 병치적인 이미지로 구성한다. 시적 주체가 구하는 것은 “발산한 형상”이지만 그것은 “장난” 같은 것이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느닷없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국수를 잘 먹는 것을 “나의 반란성”이라고 한다면 ‘개화’로부터 “발산한 형상”을 얻는 것 대신에 세계에 대한 다른 태도를 생각하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본다’는 표현으로 축약된다. 그러니까 ‘바로 본다’는 것은 보는 주체의 의지가 강조된 표현이다.

   따라서 이 시는 김수영 시에서 ‘보는 주체’의 자기 정립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선언은 ‘보는 주체’의 자기 의지가 삶을 관통하며 죽음 시간까지 온몸으로 밀고 가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시의 제목이 ‘공자의 생활난’인 것은 기이하다. 한편에서는 이 ‘바로 봄’이 “朝聞道夕死可矣”라는 구절과 연관시켜 김수영의 ‘바로 봄’이 도(道), 진리를 깨침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물의 생리”와 “수량” “명석성”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겠다는 본질 직시의 의지가 이 시작(詩作)의 출발이고 끝인 듯싶다.

 

 

  제2기 시 - <1954>

 

 

  나의 가족 ∣김수영 

 

 

고색이 창연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영(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 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안에서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그가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성북동 집에 돌아와 쓴 한 편의 시가 이 시다. 그 시점에서 시인의 사변(思辨)은 사라진다. 사변의 저장고였던 ‘서책’은 전쟁 후 50년대 초기시에서는 가족들이 묻혀온 세속의 먼지와 장구한 세월의 때에 파묻혀 사라진다. 서책의 장엄한 역사의 위대성이 얼마나 일상에 비해 추상적이고 덧없고 부질없는 것인가를. 이 순간의 일상의 진리를 깨달으며 오래되어 낡고 “고색이 창연한” 단면들이 “억세고도 아름다운” 세월의 지층 속에서 새롭게 머무는 시인의 시선이 이 시에 머문다.

   전쟁을 거치며 부조화와 번잡, 낡은 일상의 색깔을, 그는 ‘사랑’이라 불렀을까. 피난지에서 돌아와 쓴(1954) 작품이니만큼 가정의 평범한 일상과 평화에 대한 안도와 휴식이 드러나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가족주의적 부드러움이 표현된다.

 「나의 가족」은 인간임을 인식하게 하고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는 ‘릴케론’의 핵심적인 구절과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이 가족주의적 시적 어조는 아마도 전쟁을 겪는 와중에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체험에서 최우선으로 다가오는 절대적 목소리가 가족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의 가족주의는 높은 이상과 정신적 지향이 좌초당한 뒤에 오는 운명애적인 느낌을 주는 그런 가족주의이다

   이후, 김수영의 ‘가족’은 물질적 궁핍과 일상적 삶의 생존 경쟁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끝없이 표류한다.

 

 

   제2기 시 - <1956>

 

 

  눈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눈’은 많은 대중들한테 알려져 있는 시다. 치열한 자기 성찰을 보여주는 시로 ‘눈’을 보는 시선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눈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임을 의미한다. ‘눈’에 대한 경의나 깨끗함의 관념을 덧씌우지 않고 그 생명체로서의 어떤 정신을 표상한다. 김수영 시의 가장 특징은 시적 대상에 대한 이념이나 관념을 씌우지 않는 데 있다. 오로지 시의 관심은 그 정신의 움직이는 힘 자체이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은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는 행위이다.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라는 표현에서 보듯 기침을 하는 것은 억압과 싸우는 것이다. ‘눈’은 따라서 주체이면서 대상인 존재이며 ‘눈’은 시선의 대상이며 시선의 또 다른 주체이다. 청유형의 문장으로 ‘젊은 시인’을 끌어들여 표면적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흥미롭다.

                                                                             

 

   제3기 시 - <1960>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우리의 역사적 사건 중 4.19 혁명하면 김수영 시인을 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작가들 중에서 한 역사적 사건과 이토록 연동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단연코 김수영은 4월혁명의 시인이다. 4월혁명을 주제로 쓴 김수영의 여러 시 중에서도 가장 절창이라 할 수 있는 시는「푸른 하늘을」꼽는다. 당대의 시 중 신동엽의「껍데기는 가라」와 함께 가장 훌륭한 시라 생각한다. 1960년 6월 15일에 쓰인 이 시에는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자유를 얻기 위해 치러야 했던 고귀한 희생과 의미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김수영의 시문학이 터져 나오던 당대의 시점을 조금 들어가 보자. 1960년대 초반은 실존주의와 모던이즘의 경향이 혼재하면서 시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대 이와는 대척점에서 동시대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시 안에서 반영하고 현실타개의 의지를 노래한 시인들이 있다. 이때 김수영, 신동엽이 단연 꼽히며 신동문, 박봉우, 조태일, 황명걸 등이 그 목록에 드는 인물이다. 이 열기로 1970년대 이후 사회 참여시를 확장시켜 나가는 발판을 이루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 민중 서정시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푸른 하늘을」다시 읽으며 4월혁명의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미친 현재적 의미를 생각한다.

 

 

  제4기 시 -<1967>

 

 

  사랑의 변주곡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가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욕망-입’의 이미지를 ‘사랑’과 대비시키며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변두리 낡은 집 방구석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희미한 불빛 아래서 시작(詩作)에 몰두하는 시인의 영상이 스쳐지나간다. “아들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사랑을 배울 거다”라는 확신에 찬 선언, 예언이 나오는 맥락은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로서 “혁명의 기술”로 전화(轉化)하는 비밀이 이 시에 있다. 김수영은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이 바로 ‘사랑’과 ‘혁명’의 동력이라고 규정한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은 도시생활의 피로와 우울을 ‘사랑’으로, 그 사랑을 다시 혁명의 열광으로,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환멸을 통해서, 시인은 사랑의 참된 의미를 경이롭게 변주한다.

   “간단(間斷)도 사랑”이라는 구절은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사랑은 자신을 성찰하고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 혁신하는 과정은 사랑을 만들고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김수영의 시선의 기술은 허위의 조작술에서 정직한 바로보기로, 피로와 우울의 삶에서 “단단한 고요함”의 삶으로, 비주체적인 것에서 주체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이 땅의 평범한 시민들인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가 열망하는 것은 욕망과 광신을 넘어 존재하는 진정한 자유와 사랑일 것이다. 없는듯하지만 있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 단단한 고요함의 각질을 뚫고 사랑으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울 주체가 민중이라 생각한다.

 

 

   제4기 시 - <1968>

 

   

  성(性)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튼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마지막으로 이 시는 기만적 화자가 비속한 언어를 가지고 치열한 자아성찰에 이르는 과정의 ‘자의식’에 초점을 맞춘다. ‘그년’하고 외도를 하고 온 ‘나’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나를 의식하고 있는 ‘나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있다. 화자는 여편네가 자신의 위선을 감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의식의 상태는 아내와 나의 성관계를 황홀이 아니라 연민의 순간으로 만든다.

   ‘개관(槪觀)’하는 위치에 서게 될 때 두 사람의 성적인 상호 관계는 비대칭적인 것이다. 주체는 대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주체의 시선과 응시 속에 들어오는 대상에 대한 사랑 혹은 성적 욕망은 벗겨보면 텅 빈 베일 속의 구멍인 바로 그것(the Thing)이란 사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거울 속에 비친 타자(이미지)를 자신인 줄 착각하는 라캉의 거울단계와도 같다. 대상에 대한 그 자체가 착각으로 미혹적 거리를 두게 된다. 여편네에 대한 미혹적 사유, 즉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이 환상이다. 따라서 주체는 대상을 바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속아주고 속이는 잘못된 관계를 의식함으로써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으로 화자는 자기의 위선과 기만을 반성으로 이끌어 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속고 만다”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남을 속이는 것이 곧 자기를 기만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속한 언어로 치열한 자기 성찰에 이르는 이 시의 과정이 어떤 아름다운 시보다도 우리를 바짝 양심의 벌판에 세워 환기시키는 힘을 느낀다. 이것이 김수영의 시힘이고 본질이라 생각한다. 자유와 양심에 다가갔던, 그러나 매끄럽지 않았던, 그 만의 존재성이 지닌 그의 원시성을 우리는 사랑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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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詩는 기존의 삶의 설명서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설계도이다... 2016-12-01 0 3812
1905 스페인 시인 - 후안 라몬 히메네스 2016-11-30 0 4431
1904 요절한 천재 시인 시세계를 알아보다... 2016-11-30 0 5115
1903 詩人은 자기자신의 령혼을 련금할줄 알아야... 2016-11-30 0 3455
1902 스페인 시인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2016-11-30 0 5905
1901 서아프리카 세네갈 대통령 시인 -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 2016-11-30 0 6355
1900 중남미 수녀 시인 - 소르 후아나 이녜스 데 라 크루스 2016-11-30 0 6205
1899 노르웨이 시인 - 비에른 스티에르네 비에른손 2016-11-30 0 5566
1898 아이슬란드 시인 - 스노리 스튀르글뤼손 2016-11-30 0 6576
1897 미국 國歌 "성조기" 작사가, 시인 - 프랜시스 스콧 키 2016-11-30 0 6421
1896 <라면> 시모음 2016-11-30 0 4285
1895 詩人은 일상의 삶을 詩처럼 살아야 한다... 2016-11-30 0 3807
1894 詩는 시인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2016-11-30 0 4095
1893 현대 환상 문학의 대가 아르헨티나 시인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2016-11-29 0 6415
1892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일본 "김삿갓 방랑 시인" - 마쓰오 바쇼 2016-11-29 1 8304
1891 조선시대 비운의 천재 녀류시인 - 허난설헌 2016-11-29 0 4866
1890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멕시코시인 - 옥타비오 파스 2016-11-29 0 5911
1889 詩人은 神이 준 언어를 잘 련금술할줄 알아야... 2016-11-29 0 3648
1888 어머니, 100원, 그리고 모성애... 2016-11-28 0 4082
1887 시인, 시, 그리고 돈... 2016-11-28 0 5324
1886 문학예술인, 삶, 그리고 비극... 2016-11-28 0 3968
1885 시의 건초더미에서 찾은 "바늘" 2016-11-28 0 4206
1884 시인, 시쓰기, 그리고 시암송... 2016-11-28 0 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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