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령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간다"...
중국 장애인 예술단(中国残疾人艺术团) ㅡ‘천수관음(千手觀音)’공연...
고통의 바닥/이창화
연도는 없고 2월 25일이라 쓴 메모장에서 ‘내 영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나는 어떤 충격을 받는다. 물론 그 문장은 내가 쓴 것은 아니다. 소설 「좁은 문」의 주인공이 한 말이다.
그 당시의 노트에서는 이런 말들이 맴돈다.
꽃이 말을 한다
나를 잊지 마세요
잊지 마세요라는 말을 잊는다
꽃은 나를 잊고
나는 잊은 것을 잊는다
그리고 지난 3월 아직 부활하지 않은 예수를 생각하는 기간 동안, 고통 속에 예수를 벽에 걸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상념에 빠져 들었다. 인간의 고통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를 고통으로 여기든 즐거움으로 여기든 시는 쉬운 과정을 밟아 태어나지는 않는다. 2월과 3월 그리고 아직 4월의 중턱쯤 나는 고통의 바닥을 느꼈다고 감히 생각했고 그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들판에 쓰러진 허수아비
‘내 영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간다’
좁은 문만 남기고 성문을 닫은 바람의 성
그는 너무 오래 바람의 성 밖에 있었다
그는 이제 그의 말이 없어져 평화롭다
까맣게 타들어간 가슴 밑 하얀 배
아무것도 없이 황폐한 거기
마른 나무 한 그루에 매달린 눈동자
사랑도 타인에게서만 느끼는
육신이 없는
예수 까마귀
나는 예수 까마귀라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내가 놓지 않고 꼭 쥐고 있었던 어떤 사랑의 고리들을 떠올렸다.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예수 까마귀
나는 찌를 놓지 않는 물고기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때를 놓친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찌를 놓지 않는
나는 그에게는 아주 낯선 물고기이다
‘내 영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뱉은 말들이 내 뒤를 따라와 나를 밀어내
나는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 이제
저 좁은 문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나는 너무 오래 바람 속에 살았다
까맣게 타들어간 들판에
바람이 낸 하얀 길 곁
마른 나무 한 가지에 매달려
사랑도 타인에게서만 느끼는
육신이 없는
예수 까마귀가 나를 바라본다
그와 나 서로 말을 잊은 지 오래 되었으니
때를 잊은 건 아주 잘 한 일이다
모든 것의 때는 없다
찌를 놓아도 좋다는 신호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는 신호다
예수의 고상을 보며 그가 내 영혼을 관리하고 있다고 느끼면 때로 나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율법에 맞게 아주 올바르게만 살아왔다는 뜻은 아니다. 내 영혼이 연약하여 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여길 정도로 불손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럴 때 나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겸허하게 더 낮춰야만 나의 진실을 볼 수 있고 그래야만 그가 내게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까맣게 타들어간 그의 가슴이 저 들판처럼 넓다는 것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했던 것처럼 나도 그 하나에 불과한 아주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어딘가 잘못 들어선 것같으면 길을 버리고 또 잘못인 것같으면 고치고 정작 어떤 게 최선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또 아주 최초의 생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또 너무도 진리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는 것이 요즈음 모든 시행착오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기에 대충 이 정도에서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어 보았다.
그에게로만 집중시키는 단순 구조보다는 나와 그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 시를 보는(읽는) 데 좀 편안해지도록 재구성해 보았다. 영혼의 세계를 시로 표현하고 싶었던 욕심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던 게 결국 종교와 관계되는 것같은 감을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나에게 있어 예수에 대한 친밀감은 이상하게도 종교적이라기보다는 고뇌의 인간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창화)
쭑90년 『문학과 의식』 신인상 등단. 시집 『유리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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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눈 ―박용래(1925∼1980)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눈을 좋아하면 어린이, 눈을 싫어하면 어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예외다. 박용래의 ‘저녁눈’을 읽으면 어른들도 눈이 오기를 기다리게 된다. 눈이 오지 않을 때 읽으면 마음에 눈이 오는 듯하고, 눈이 올 때 읽으면 내리는 눈을 음미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단순하고 밋밋해 보인다. 길이도 참 짧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붐비다’라는 구절이 약간씩 변용되면서 총 네 번 반복된다. 반복되고는 끝이다. 그런데 이 반복과 약간의 변화가 범상치 않다.
반복되는 구절은 힘이 매우 세서 읽는 이를 번쩍 들어서는 ‘늦은 저녁의 눈발’ 아래 세워 놓는다. 처음에는 ‘와, 눈이 오는구나’ 생각하다가 이내 눈, 눈, 눈들을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눈은 어느 곳에나 공평하게 내리는데 유독 잘 보이는 부분이 있다. 먼저, 호롱불 밑에는 빛을 받은 덕에 눈발들이 더욱 잘 보인다. 그 옆에 매여 있는 조랑말로 시선을 옮겼는데 발굽보다 눈발이 먼저 보인다. 여물 써는 소리는 저녁, 호롱불, 마구간의 정취를 더욱 진하게 만든다. 걸음을 더 옮겼더니 변두리의 공터가 나왔다. 여기야말로 눈발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다. 빈터를 가득 채우듯이 눈발은 바람과 함께 이쪽저쪽 휘저어가면서 빠르게 떨어진다. 천천히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라면 “붐비다”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기가 많아 빨리 떨어지는 눈, 바람을 타고 몰아치는 눈이어야 ‘바쁜 눈’이 될 수 있다. 그 눈을 맞으면 어깨는 더 빨리 젖을 것이다. 스미는 물기를 느끼며 시인은 오래도록 눈을 바라보고 있다.
이 시는 더할 곳도 없고 뺄 곳도 없는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1969년에 발표되었을 당시에 탁월함을 인정받아 제1회 현대시학상을 받기도 했다. 소설가 이문구가 선배 박용래 시인을 회상하는 글에서 가장 먼저 외웠던 작품도 바로 이 작품이다. 필요 없는 것을 탈탈 털어냈는데 남은 것이 이토록 아름답다. 많은 것, 복잡한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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