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그냥 아름다움이였다"라고.
분명, 나는 아직 "봄"이 서툴다.
미겔 카브레作 1751년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그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다'
-소르 후아나 이녜스 데 라 크루스 (1651~1695): 중남미 최초의 페미니스트
/ 박 채 연
소르 후아나 이녜스 데 라 크루스 (Sor Juana Iñés de la Cruz(1651-1695)) 이름 앞에 붙는 “소르”라는 말은 수녀라는 뜻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한다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수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어권에서는 그녀를 가리켜 “소르 후아나”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이 글에서도 그렇게 부르겠다.
는 17세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중남미에서 배출한 뛰어난 작가이자 지식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 살에 글을 읽었으며 6세 무렵에는 글을 쓸 줄도 알았다. 일곱 살에는 여성으로서 갈 수 없었던 대학을 남장을 하고 가겠다고 조르기도 하였다.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녀는 외할아버지 서재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라틴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녀의 지식에 대한 욕구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8세에 고향의 백일장에서 종교시, “찬가”를 써서 입상하면서 문학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 재능이 알려지면서 소르 후아나는 13세의 나이로 당시 식민지 멕시코 부왕(副王)의 궁정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나 대학 교수들과 당당히 지식을 겨루어 궁정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궁정의 여러 행사 때 필요한 시를 씀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함과 동시에 문학가로서 성숙해 갔다. 그러나 그녀는 식민지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 사생아 출신의 -그녀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출신인 아버지와 멕시코 태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성으로서 글을 쓰고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곧 깨닫게 된다.
이러한 힘겨운 상황에서 소르 후아나는 결국 수도 생활을 선택한다. 18세에 그녀는 맨발의 갈멜회에 입회했다가 엄격한 규율을 지킬 건강이 허락하지 않자 성 예로니모 교단의 수녀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물을 만난 물고기인 듯, 그녀는 자신의 4000여권의 장서와 각종 악기들, 천체 관측기구 등으로 도서관을 만들어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우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녀의 방에는 식민지 멕시코의 최고의 인문학자였던 시구엔사 이 공고라 (Sigüenza y Góngora)를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드나들었고 부왕이나 왕비 등 권력 상층부 인사들과도 밀접한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르 후아나의 위기는 안토니오 비에이라 신부(1606-1697)의 강론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언약의 설교]라는 제목을 가진 비에이라 신부의 강론은 이미 40년 전에 포르투갈에서 행해진 것이었으나 워낙 유명하여 소르 후아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에이라 신부가 정통 가톨릭 교리를 반박하는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반대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그녀가 쓴 글을 푸에블라의 주교인 마누엘 페르난데스 데 산타 크루스가 [아테나 여신에 필적하는 편지 Carta Atenagórica]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여성의 몸으로, 또 수녀의 신분으로 비에이라 신부의 글에 이의를 제기한 무모함은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푸에블라의 주교는 소르 필로테아라는 가명으로 소르 후아나에게 바치는 서문도 실었는데 그는 소르 후아나의 재능을 극찬하면서도 “학문은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 아니며 어리석고 헛된 것이다...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천상의 것을 구하지 않고 지상의 천박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유감스럽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자신의 입장을 옹호할 목적으로 소르 후아나는 [필로테아 수녀님에 대한 답신](1691)이라는 글을 쓰는데 이것으로 인해 그녀는 종교 재판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침묵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때 교회에서 소르 후아나에게 다음과 같은 성경의 성 바울로의 충고를 인용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가 하고 있는 대로 여자들은 교회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1고린 14,34-35). 이후 소르 후아나는 1695년 페스트가 유행하여 수도회의 자매들을 열심히 돌보던 중에 전염되어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의 역사학자인 아메리코 카스트로는 후아나 수녀의 삶을 말하면서 “지성의 순교 Martir de Inteligencia”라고 정확히 표현하였다.
소르 후아나를 파멸로 이끌었던 [답신]은 자신의 유년기의 삶을 비롯해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 등을 구술한 자전적인 비판서이다. 이는 중남미 산문 문학에서도 흔치 않은 내용으로서 그녀의 시작품인 [첫번째 꿈]과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세속적인 학문과 예술에 경도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분명히 한다.
나에게 최초로 이성의 빛이 비춘 순간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 어떤 외부의 억압에도 -수없이 받아 왔고- 나 스스로의 반성으로도-그것도 적게 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열망을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자로서 학문에 대한 나의 열정이 지나치다고도 하며 심지어는 해롭다고까지 하는 까닭에 나는 하느님께 당신의 법을 따를 정도의 지력만을 남기고 거두어 주십사고 기도 드린 것도 하느님께서만 아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제가 제 이름과 함께 지식에 대한 열망을 묻어버리고 나에게 능력을 주신 분을 위해 희생하고자 했음을 아십니다.
그녀는 모든 학문과 예술이 하느님에 대한 봉사로서 결국 최고의 학문인 신학으로 가는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적인 학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속의 지식을 배울 권리를 수호하며 지식을 통하여 믿음의 신비로 나가는 길이 필요불가결함을 역설한다. 지성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님을 주장하며 자신의 작품 활동과 지식 추구가 믿음의 신비를 알기 위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행위임을 떳떳이 밝힌다. 따라서 그녀의 문학에는 스페인 신비문학의 거장인 테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에서 보여지는 신비의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르 후아나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이성의 빛으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신비 속으로 가고자 한다. 그녀의 종교적 입장은 이성과 신앙의 조화, 즉 지식을 통해서 믿음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로 요약될 수 있다.
교회가 개개인의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수녀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살아가는 것은 지식에 대한 열망을 억압하는 요소였으나 동시에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두 가지의 길, 결혼을 하거나 수녀가 되는 것에서 후자를 택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수녀로서 여성이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은 알고자 하는 욕망, 지식 추구의 열망이었다. 그녀는 한 소네트에서 자신의 열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세상이여, 왜 나를 귀찮게 하는가?/ 아름다움을 위해 지적 능력을 쓰지 않고/ 지적 능력을 위해 아름다움을 소진하는 것이/ 당신을 화나게 했는가// 나는 보석이나 부귀를 원치 않는다네/ 부귀를 위해 나의 사고력을 쓰기보다/ 나의 사고력을 위해 부귀를 쓸 때/ 나는 항상 행복을 느낀다네// 세월이 빼앗아 가는/ 아름다움을 존중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부귀도 나를 즐겁게 못한다네// 허망한 일에 삶을 소비하기보다/ 차라리 허무한 삶을/ 나의 진리를 위해 바치고 싶네
이 시는 소르 후아나의 지식 추구 열망이 허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성으로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상황에서 그녀는 이렇듯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또 그로 인하여 파멸에 이르기도 하였다. 수녀로서의 종교적 헌신은 칭찬 받을 수 있었지만 문학적 행위는 교회 당국의 비난의 대상이었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의 당연한 본성인 순종을 거스르는 반역적 행위이자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느님이 여성들에게 지식 추구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서를 잘못 해석한 탓이라고 반박한다. 또한 하느님의 참된 구원은 수도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으며 지식을 아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남성과 똑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이성의 빛을 받은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녀는 성서와 신화, 역사에 등장하는 40여명의 여성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그 중에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성녀로 순교자이며 학자였던 카타리나 성녀를 언급하면서 이전의 많은 성녀들이 그들의 지식으로 존경받는데 자기는 왜 그럴 수 없는지 반문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비에이라 신부의 설교를 비판한 것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나는 그가 누리는 자유도 없단 말인가? 내가 비에이라 신부와 견해가 다르다는 것은 불경죄이고 그가 교회의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것은 죄가 아니란 말인가?”라며 항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로테아 수녀님에 대한 답신]은 중남미 최초의 페미니스트 선언으로도 간주된다.
후아나 수녀는 비에이라 신부를 반박하면서 “내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있듯이 어느 누구나 나의 의견을 반박할 자유가 있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녀에게 차라리 남자가 되라고 야유하는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나는 그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아무도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 왔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리고 라틴어에서는/ 단지 결혼한 여자들에게만/ 여자라고 부르며/ 처녀라는 단어는 두 성이 공통으로 있다.// 따라서 나를 여자로 보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성에게 봉사하는 그런 의미의/ 여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내 육체는 여성, 남성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직 영혼이 거하는/ 중성적인 것 또는 추상적인 것이다.”
수녀로서의 종교적 의무감과 지성인으로서의 열망 사이에서 그녀가 택했던 길은 언제나 후자였다. 그녀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수녀가 되는 것을 망설이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내 성격과 맞지 않는 점도 있었지만 절대로 결혼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의 구원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고 싶어하며 저의 공부를 방해하는 의무적인 일들을 싫어하고 공동생활의 소음이 나의 책의 고요를 깨는 것을 싫어하는 나의 단점들 때문에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혹은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 보다는 그녀가 되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연민을 느낀다. 그녀는 일생동안 자신을 억압하는 세계와 대립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즉 지식 추구의 자유를 얻고자 투쟁하였고 결국은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침묵하고 말았다. 그녀의 희망이자 목표는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질서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것, 절대 진리, 이성같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고 있었다. 무질서와 혼돈의 세속 세계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고 싶어했다. 이것이 그녀의 최초이자 마지막 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대는 그녀를 표류시키고 말았다. 소르 후아나는 자신을 격침시킨 남성의 세계를 향하여 무언의 저항을 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글쓴이 소개 :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 스페인문학 문학박사.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대학교 출강)=====================================================================중남미 현대시
(1) 모데르니스모
1880년부터 1920년대는
중남미에서 새로운 문학 동향이 탄생한 중요한 시기이다.
이때 생겨난 혁신적 동향의 문학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가
모데르니스모(Modernismo)이다.
모데르니스모는
프랑스
고답파와 상징주의로부터 완벽한 형식에 대한 열망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산문은 더욱 경쾌하고 풍부한 리듬을 갖게 되었으며,
시는 새로운 틀과 운율 및 어휘의 조합을 갖게 된다. 또
한, 모데르니스모는 새로운 감각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현대로 들어선 19세기 말의 인간이 겪게 된 불안스럽고 복잡하며
근원이 모호한 고뇌였다.
(2) 모데르니스 시인들
펠릭스 루벤 가르시아 사르미엔토(Félix Rubén García Sarmiento, 1867~1916)
펠릭스 루벤 가르시아 사르미엔토(Félix Rubén García Sarmiento)의
『푸름(
Azul)』이 발표된 1888년과
그가 사망한 1916년은
모데르니스모의 절정과 쇠퇴를 의미한다.
그는 모데르니스모 운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중남미뿐만 스페인에도 이 시학을 전파했다.
중남미의 모데르니스 시인들로는
쿠바의 시인
호세 훌리안 마르티 페레스(José Julián Martí Pérez),
콜롬비아 시인
호세 아순시온 실바(José Asunción Silva),
쿠바 시인
호세 훌리안 에르쿨라누 델 카살 이 데 라 라스트라
(José Julián Herculano del Casal y de la Lastra),
멕시코 시인
마누엘 구티에레스 나헤라(Manuel Gutiérrez Nájera),
아르헨티나 시인
레오폴도 루고네스 아르궤요(Leopoldo Lugones Argüello), 멕
시코 시인
아마도 네르보(Amado Nervo),
칠레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등이 있다.
(3) 전위주의 시 문학
프랑스의 전위주의(vanguardismo) 시 문학에 영향을 받아 시작된 중남미 전위주의는
유희의 정신,
어휘의 비일관성,
독창성에 대한 열정,
새로움과 놀라움의 추구가 특징이며,
반서정주의, 반일반화주의, 반수사주의가 두드러진다.
(4) 전위주의 시인들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1998)
칠레 시인 비센테 우이도브로(Vicente Huidibro)는
창조주의 시학(詩學, poetics)으로
중남미에서 최초로 전위주의 시운동을 시작하고 전파했다.
이외에도 페루 시인 세사르 세자르 아브라함 바예호 멘도사
(César Abraham Vallejo Mendoza)가 있고,
그의 대표작으로는
『검은 전령(
Los heraldos negros)』과 『트릴세(
Trilce)』가 있다.
쿠바의
니콜라스 크리스토 기옌 바티스타(Nicolás Cristóbal Guillén Batista)는
대표작으로 『두 할아버지의 발라드』가 있다.
칠레 시인으로서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대표작으로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ón desesperada)』,
『총가요집(
Canto general)』 등이 있다. 1
99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는
대표작으로 『태양의 돌(
Piedra del sol)』이 있다.
이 밖에 포스트모더니즘 시인들로
칠레의 니카노르 파라 산도발(Nicanor Parra Sandoval),
에르네스토 카르데날(Ernesto Cardenal)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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