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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모든 "방문객님"들께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2016년 12월 30일 19시 24분  조회:6068  추천:0  작성자: 죽림

국가 운수를 점치기 위해 등장한 『토정비결』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다”라는 속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첫 시작을 특히 중요하게 여긴다. 1년의 계획을 세우는 새해 첫날 설날은 그런 까닭에 1년 중 가장 비중 있는 날로 꼽힌다. 그런 설날에는 늘 간절한 바람이 따랐으며, 자연히 점복·기복(祈福)과 관련된 풍속이 있어왔다. 갖은 방법으로 괘를 만들어 길흉을 점치는 윷점, 오행점, 『토정비결』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점복이 정초 세시풍속으로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1800년경 유득공이 지은 『경도잡지(京都雜誌)』는 윷점만 자세히 다루고 있고, 1835년경 유만공이 지은 『세시풍요(歲時風謠)』에도 윷점에 관한 기록만 있다. 1849년경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윷점과 더불어 오행점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토정 이지함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토정비결』에 관한 기록은 『경도잡지』 『세시풍요』 『동국세시기』 등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조선 후기까지 펴낸 다른 문헌들에서도 『토정비결』에 관한 기록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미국 역사학자 겸 선교사인 호머 헐버트가 1906년에 쓴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도 당사주를 비롯해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다양한 점복이 망라되어 있는데, 윷점과 오행점은 등장하나 『토정비결』은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오행(五行)』, 36.2×31.7cm, 19세기 말~20세기 초, 개인
『오행(五行)』, 36.2×31.7cm, 19세기 말~20세기 초, 개인

오행의 점괘를 풀이한 책이다.

『윳』, 21.6×17.5cm, 19세기, 경상대 문천각
『윳』, 21.6×17.5cm, 19세기, 경상대 문천각

윷점으로 친 점괘를 풀이해놓은 책.

『당사주책』, 1943, 국립민속박물관
『당사주책』, 1943, 국립민속박물관

12성의 운행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방법을 수록해놓았다.

현재까지 『토정비결』이란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황성신문』 1899년 12월 19일자 논설로, 『정감록』과 관련하여 언급된다. 그러나 이 논설에서 말하는 『토정비결』이 지금의 『토정비결』처럼 개인의 한 해 신수를 봐주는 책인지, 아니면 이름만 같고 내용은 다른 비결서(祕訣書)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토정비결』은 『황성신문』 1907년 5월 8일자와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1일자 논설에도 나온다. 이 기사에서도 『토정비결』이 지금처럼 개인 신수를 풀어보는 점술책이 아니라 『정감록』처럼 국가 존망과 풍수도참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는 비결서인 듯이 언급된다.

보국론(保國論): 나라를 지키세, 나라를 지키세. 오늘이 마침내 바로 그날이요, 이때가 마침내 바로 그때로다. 남산 아래 노생원(老生員)도 완고한 꿈에서 조금씩 깨어나서 신서적(新書籍)을 눈여겨보시오. 고을마다 있는 수전노들도 슬기 구멍이 문득 열려서 각 학교에 기부 좀 하시오. 『토정비결』을 손에 쥐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도 지금 차츰 돌아가시오.
- 『황성신문』 1907년 5월 8일

위 신문 기사들의 내용으로 추정해볼 때 지금처럼 개인 신수를 풀려고 했다기보다 『정감록』과 같이 국가 운수를 예언하려던 쓰임새를 지닌 또 다른 『토정비결』이 19세기 초에서 20세기 말 민간에 널리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토정비결』을 손에 들고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나섰다는 표현으로 봐서 그 『토정비결』은 풍수도참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말 정치·사회가 혼란한 시기에 『정감록』과 함께 이 『토정비결』이 전국으로 유포되었으며 사람들이 여기 실린 내용을 믿고 따랐음이 『독립신문』 1920년 5월 1일자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제2보호조약을 늑결한 때: (…) 경복궁 안의 둥둥거리는 무당 북소리는 (1904년 러일전쟁 때) 팔미도의 대포 소리와 서로 화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민 측으로 보면 독립정신은 보부상의 나무 몽둥이 아래에서 남겨진 것 없이 타파되어 우국지사는 거의 절반이 해외로 바삐 달아나 숨고, 그나마 대부분은 『정감록』 『토정비결』에 홀리고 미혹한 바 되어 계룡산과 우복동(牛腹洞)을 찾는 소리가 전국 도처에 왁자지껄하였다.
- 『독립신문』 1920년 5월 1일

이처럼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구한말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토정비결』은 개인 신수가 아닌 조선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예언하며, 18세기 이후 민간에 줄곧 유포되어 사회에 널리 영향력을 끼친 『정감록』과 비슷한 유의 국가 운수에 관한 풍수도참 비결인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이나 『이토정비결(李土亭祕訣)』을 가리키는 듯하다.

『토정가장결』의 이름 뜻은 이지함이 그 후손의 안녕을 위해 가문에서 간직하도록 하며 전해준 비결이란 의미다. 그러나 이것은 19세기 후반 다른 술수가가 자신의 저술을 이지함의 명성에 가탁(假託)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점은 『이토정비결』 또한 마찬가지다.

『토정가장결』
『토정가장결』

풍수도참서에서 신수풀이 점술서로의 변화

당시 조선에는 『삼한산림비기』 『도선비결』 『정북창비결』 『남사고비결』 『서산대사비결』 『두사총비결』 『옥룡자기』 『경주이씨가장결』 『서계이선생가장결』 등 다른 많은 비결이 공공연히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감록』과 함께 『토정비결』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은 토정의 명칭에 가탁한 비결이 당시 사회적으로 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말해준다. 1923년 간행된 『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에 함께 수록된 『토정가장결』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선생이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 40년째 되는 을사년 무자일에 장남이 아들을 얻으면 그 아이가 우리 가문의 성을 이어갈 사람이다. 내가 비록 죽은 뒤일지라도 어찌 자손을 위하여 앞일을 미리 헤아려보지 않을 것인가? 감히 천기를 누설하며 대략 연운을 논하여 너희를 가르치노니 삼가 새어나가게 하거나, 음흉하고 간사한 사람에게 망령되이 퍼뜨리지 말며 오로지 집안을 보존하는 방책으로 삼아야 한다. (…) 내 비록 재주 없으되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며 오랫동안 성수(星宿)로써 운수를 헤아려보니 한양이 5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병란은 신(申)·자(子)·진(辰)년에 있고 형살은 인(寅)·신(申)·사(巳)·해(亥)년에 있으니 이는 피난할 시기로다. (…) 큰 궁궐이 다시 흥하고 남문이 고쳐 세워지며 오랑캐 돈이 통용될 때는 바로 군자가 가야 할 때다. 만약 요동 간방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반드시 삼척부(三陟府)의 크고 작은 궁기(弓基)를 향하고 부지런히 힘을 기울여 곡식을 쌓을 일이다. 그러면 반드시 구조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10년 후에는 또 풍기 소백산 아래 금계 위로 옮기고, 을미년에 이르러 다시 공주 용흥의 서쪽 옥봉 아래로 옮기면 이것이 바로 큰 도회지다.

이 글에서 1592년 임진왜란, 1636년 병자호란,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1865~1872년의 경복궁 중건, 1883년 신화폐 주조를 위한 전환국(典圜局) 설치, 1895년 을미사변 등 역사적 사실이 비유적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토정가장결』은 1895년, 일러도 1883년 이후에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어 예언에 대한 사회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저술된 듯하다. 국모가 시해당하고 국왕마저 다른 나라의 공관으로 피신하는 상황에서 백성도 의지할 곳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당시의 처참한 사정과 훗날을 위한 대비 방책을 잘 표현하고 있다.

『토정비결』의 기원과 관련해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을 시기별로 정리해보면, 먼저 1883~1895년 사이 익명의 지식인(유학자이거나 술수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 저술했던 『토정가장결』 또는 『이토정비결』이 국운을 예언하는 풍수도참서로서 『토정비결』이란 별칭으로 1890~1900년대 항간에 유포되었는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더욱 성행하기 시작했다. 1906년 당시 조선의 정초 점복 풍속을 기록한 문헌인 『대한제국 멸망사』에 윷점과 오행점은 등장하나 『토정비결』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 해 개인 신수를 보는 책으로서의 『토정비결』의 등장은 빨라도 1906년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윳과뎜책』(박문서관, 1918)에 ‘당년신슈길흉보는법’이란 제목으로 한글로 풀이된 『토정비결』이 활자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토정비결』은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토정비결』의 하나인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한문 필사본의 『토정비결』과 내용이 거의 같다. 다만 일반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내용을 한글로 옮긴 것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장서각 소장 『토정비결』은 1918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윷과 뎜책』, 국립중앙도서관
『윷과 뎜책』, 국립중앙도서관
『토정비결』, 연대미상, 장서각
『토정비결』, 연대미상, 장서각

이런 정황을 종합해볼 때, 개인의 한 해 신수를 풀어보는 쓰임새의 『토정비결』은 조선의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가던 1910년 무렵부터 보급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민간에는 이미 ‘토정비결’이라는 통칭으로 국운에 관한 풍수도참 비결인 『토정가장결』 『이토정비결』이 먼저 유포되고 있었다. 이즈음 어느 술수가가 ‘당년 신수 보는 법’에 관한 책을 지어 퍼뜨리면서 이지함과 기존 『토정비결』의 명성에 가탁한 것이 지금 전해져오는 『토정비결』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조선왕조의 멸망을 분기점으로 『토정비결』이라는 동일한 명칭 아래 국운 관련 풍수도참서와 개인 신수풀이 점술서가 약간의 시차를 둘 뿐 비슷한 시기에 있었는데, 조선왕조의 멸망이 현실화되면서 차츰 국운 관련 풍수도참서에서 개인 신수풀이 점술서로 『토정비결』의 의미가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10~1920년대에 발행된 『윳과뎜책』(1918), 『가정백과요람』(박문서관, 1918), 『백방길흉자해』(신명서림, 1923) 등에 ‘당년신슈길흉보는법[토정비결(土亭祕訣)]’이라 해서 ‘토정비결’이 ‘당년신슈길흉보는법’과 함께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지금의 『토정비결』이 개인의 신수를 보는 책으로서 아직 확실히 인식되지 않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백방길흉자해』, 국립중앙도서관
『백방길흉자해』, 국립중앙도서관

애민(愛民)을 몸소 실천한 이지함의 명성에 기대다

1720년(숙종 46) 토정의 현손인 이정익(1655~1726)이 이지함의 유고를 묶어 간행한 『토정유고(土亭遺稿)』에도 『토정비결』은 실려 있지 않다. 또한 이지함의 행적을 채록한 유사(遺事)에서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산수·지음(知音)·관형찰색(觀形察色)·신방비결(神方祕訣) 등에 밝아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위로 배운 바가 없었고 아래로 전수한 바가 없었다”고 기록한 것을 봐도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저술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저술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참고로 이지함의 행적을 살펴볼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대체 어떤 점에서 『토정비결』과 이지함이 연관되었는지를 탐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지함은 목은 이색의 6대손이고, 형은 지번(?~1575)과 지무(?~?)이며, 지번의 아들 산해(1539~1609)는 영의정을, 지무의 아들 산보(1539~1594)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지함은 57세 때인 1573년 유일(遺逸)1) 로 천거되어 만년에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지냈으며, 율곡 이이와 교유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헌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지함은 천문에 밝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술법도 꿰뚫고 있어 조카인 이산해가 해(亥)년에 태어나 장차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도 내다보았다. 재주가 특출해 제갈량에 견주어지기도 했으나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끈기가 없어 일을 하는 데 유시무종할 때가 많아 이이는 크게 쓰일 인재는 아니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지함의 사상과 행적을 살펴볼 때 이이의 평가는 지나치게 절하된 면이 있다.

시(詩), 이지함, 종이에 먹, 25.4×26.5cm, 16세기, 서울대박물관
시(詩), 이지함, 종이에 먹, 25.4×26.5cm, 16세기, 서울대박물관

토정은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주경궁리(主敬窮理)와 실천이행(實踐履行)을 독실하게 할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수양에 있어서는 과욕(寡慾)을 강조해 과욕을 하다가 무욕(無慾)의 경지에 이른다면 심(心)이 허령(虛靈)해져 중화(中和)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이지함의 행적은 『선조수정실록』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는 기품이 신기했고 성격이 탁월해 어떤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지함이 졸할 즈음인 62세 때 아산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토정은 곤궁한 백성의 생업을 영위하게 해주려고 (보령) 바닷가에서 소금을 굽고 있었는데, 그을음이 얼굴에 잔뜩 묻어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 소금을 담은 소쿠리
조선시대에 소금을 담은 소쿠리

이지함은 보령 바닷가에서 소금 굽는 일을 하기도 했다.

여러 문집과 실록의 기사를 볼 때 이지함의 언행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또한 곤궁에 처한 백성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 않고 몸소 실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그의 이름을 빌려 민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토정비결』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토정비결』 괘를 구성하는 체계

『토정비결』의 원저작자가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과연 그가 어떤 인물이었을까를 추정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는 『토정비결』의 구성 체계를 직접 분석해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토정비결』 원저작자의 학식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토정비결』의 구성 체계를 살펴볼 때 『토정비결』 원저작자는 역학과 관련해 상당한 지식수준과 응용력을 지닌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토정비결』은 생년월일을 144가지 괘로 만들어 신수를 보는데, 8괘의 8, 6효의 6, 변수인 3을 근거로 했다(8×6×3=144). 『토정비결』은 언뜻 보면 괘상점(卦相占)으로 여겨지지만 괘를 만드는 토대가 생년월일이므로 시상점(時相占)에 속한다. 『토정비결』은 반드시 음력으로만 보도록 되어 있다.

괘를 만드는 방법은 먼저 신수를 보려는 사람의 그해 나이 수와 신수를 보는 그해의 태세 수(太歲數)를 더해 이를 8로 나누어 남은 수가 상괘(上卦)다. 태어난 달에 해당되는 수(큰달이면 30, 작은달이면 29)와 태어난 달의 월건수(月建數)를 더해 이를 6으로 나누어 남은 수가 중괘(中卦)다. 태어난 날의 수와 태어난 날의 일진수(日辰數)를 더해 이를 3으로 나누어 남은 수가 하괘(下卦)다.

남은 수가 1이면 각각 1, 1, 1이 되어 111괘가 되고, 남은 수가 0이면 각각 8, 6, 3이 되어 863괘가 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괘는 111이 되고 마지막 괘는 863이 된다. 첫 괘가 111이니 모두 144개의 괘라면 마지막 괘는 254라야 할 텐데 863이 된 것은 『토정비결』의 괘가 일련번호로 나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누는 수로서 8은 주역의 8괘를 의미하고, 6은 8괘를 구성하는 6효를 의미하며, 3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그해 신수를 보려는 이의 생년·생월·생일을 가지고 각각 상·중·하괘를 계산하며, 이 세 괘를 합하여 자기의 『토정비결』 괘를 얻는 것이다. 누구나 이 144가지 괘 가운데 어느 한 괘에 해당된다. 수많은 사람의 운세를 144가지로 규정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불합리해 보일지 모르지만 조선 후기의 정초 점복 풍속이었던 윷점이 64괘, 오행점이 32괘였던 것에 비하면 한층 더 세분된 것이다.

『토정비결』의 괘사, 은유적 표현에서 좀 더 단정적으로

144가지가 되는 『토정비결』의 각 괘에는 1년 동안의 운수를 개괄적·은유적으로 예언한, 그래서 두루뭉술하고 애매하기도 한 4언 절구의 글귀가 있다. 예를 들면 111괘는 다음과 같은 괘사(卦辭)를 갖고 있다(장서각 소장본 번역).

동풍에 얼음이 녹으니 고목이 봄을 만나네(東風解凍 枯木逢春). 물이 성가에 흐르니 적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도다(水流城邊 積小成大). 좋은 꽃에 봄이 저무니 꿈이 남쪽 하늘에 깨었구나(好花春暮 夢覺南天). 낙양성 동쪽에는 복사꽃이 빛나도다(洛陽城東 桃花生光).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한문 필사본)과 『윳과뎜책』에 수록된 한글 활자본의 『토정비결』 둘 모두에는 주역 괘가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각 괘사가 4언 4구로만 간략히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토정비결』은 그 내용이 매우 복잡하다. 먼저 주역의 본괘(本卦)·지괘(之卦)가 표기되어 있으며, 괘사도 4언 44구(남산당 『원본토정비결』) 내지 4언 41구(명문당 『원본토정비결』)가 더 추가되었다. 1964년 발행된 명문당 발행 『토정비결』이 주역 본괘·지괘에 관한 설명 외에 각 괘사가 총 4언 26구로만 구성되었던 것과 비교해봐도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생활에 발맞춰 『토정비결』의 괘사도 점차 추가되어왔으며 복잡해졌음을 알 수 있다. 괘사의 내용도 좀 더 단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토정비결』과 『주역』을 연계시킬 때가 많은데, 이것도 점서로서 『주역』의 권위에 의탁해 『토정비결』의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중간에 끼워진 것일 뿐 실제 『주역』과의 관련성은 없다. 『윳과뎜책』에 실린 『토정비결』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토정비결』에서는 주역 괘와 전혀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데, 이후 발행되는 『토정비결』들에서 주역 괘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토정비결』과 『주역』의 연결고리 작업은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역』, 23.5×18.5cm
『주역』, 23.5×18.5cm

『주역』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토정비결』은 이와 관련하여 언급될 때도 많았다.

『윳과뎜책』의 1918년 『토정비결』의 괘 풀이는 은유적이고 개괄적이어서 길흉의 뜻이 분명하지 않으며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반면, 『백방길흉자해』의 1923년 토정비결은 별도의 뜻풀이는 없으나 『주역』 본괘·지괘가 첨부되었으며, 괘 풀이도 “재물은 인해(寅亥, 정월·상달)에 왕성하고 일은 신유(申酉, 7·8월)에 되리로다. 사오월에 난 사람의 구설을 조심”에서와 같이 좀 더 구체적이며 단정적으로 바뀌었다. 점괘가 세분화되고 괘사가 더욱 다양해지면서 농경사회의 특성뿐 아니라 19세기 후반 이후 급속히 모습을 바꿔가던 당시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가정보감전서』(명문당)의 1964년 『토정비결』과 『원본토정비결』(남산당)의 2003년 『토정비결』에서는 『주역』 괘에 대해 별도의 해석이 곁들여져 있으며, 전체적인 괘풀이 외에 월별로 풀이가 추가되었고, 1964년 『토정비결』의 4언 27구에 비해 2003년 『토정비결』은 4언48구로 괘사가 더욱 많아지고 복잡 다양해졌다.

이어령은 『토정비결』 괘사에 나타나는 주요 특징으로 구설수, 관재수, 친구(사람)로부터 받는 피해, 출타하지 말라(不出行) 등을 꼽았으며, 이는 그동안 한국사회가 겪어온 어두운 시대상과 인간관계상을 반영한다고 했다. 즉 인간관계와 사회에 대한 불신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의 폐쇄적인 생활을 반영한 점괘라고 본 것이다.

1982년판 『토정비결』에 수록된 7056개 구(句)의 내용을 컴퓨터로 분석한 김중순은 크게 9개의 특성으로 범주지었는데, 막연한 행운과 불운, 우연이나 요행을 바라는 심리, 대안보다는 금기나 경고가 우선, 소극성, 여자 멸시, 실천 윤리, 벼슬과 재물, 불신, 독립성 결여 등이다.

『토정비결』에 대한 두 가지 평가

『토정비결』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뚜렷한 정설이 아직 없다보니 이에 대한 평가도 분분한데, 대략 두 가지로 그 내용을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 민중의 숙명론적 인생관에 편승한 허무맹랑한 미신이자 점술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실천 강령이나 도덕률을 모은 교육서라는 것이다. 대체로 앞의 것은 『토정비결』을 위작으로 보는 쪽의 평가이며, 뒤의 것은 토정의 저술로 간주하는 쪽의 평가다.

이 둘의 평가 모두 『토정비결』의 모습이긴 하나 극단적으로 치우친 면이 없지 않다. 점복 행위는 인간만이 가진 욕구인 예지욕에 바탕을 두고 어느 시대, 어디서나 널리 존재해온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 현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정초 『토정비결』 보기 풍속을 두고 한국인의 전근대성이나 숙명성 운운하는 것도 일본의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조선의 점복과 예언』(1933)에서 한국의 점복신앙을 한민족의 미개성·타율성과 연결지어 왜곡했던 인식과 다르지 않다. 한편 『토정비결』을 한민족 고유의 인생 지침서 내지 교훈서로 여기는 것도 비결류(祕訣類)에 대한 묘한 기대심리와 우리 것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낳은 과대평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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