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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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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그림을 그리려면 훨씬 더 많은 습작을 해야 한다...
2017년 01월 02일 03시 01분  조회:5468  추천:0  작성자: 죽림
1888년 12월 23일 밤

반 고호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날 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1.사랑하던 여인과의 관계에서?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에게 줄 것이 없어 고민하다가

 아침마다 자신에게 아름다운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려주는

 귀라도 잘라서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좋아하던 그녀가 볼품없이 생긴 고흐의 얼굴 중에서

 그나마 잘 생긴 부분은 귀라고 했기 때문에.

-사랑했던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면 귀를 선물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투우사가 소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 그 소의 귀를 잘라

 사랑하는 여인이나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치는 풍습을 생각하고

 소가 아닌 자신의 귀를 잘라 그녀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에.

 (고흐의 일생에 고흐와 개인적인 관계로 등장하는 여인은 다섯이다.

 
첫째는 영국에서 로이어 부인 집에 하숙하여 살 때 그 부인의 딸이었던

 열아홉 살 바기 외제니 우르술라였다. 당시 고호는 스무 살이었다.

 고흐가 그녀에게 청혼했는데, 이미 숨겨 둔 약혼자가 있다고 응답했던 여자.


 둘째는 1881년-고흐 나이 28세 때- 만났던 큰 아버지 스트리커라는 목사의 딸 케이.

 남편과 사별한 처지에서 고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여인,

 고흐와 만날 때는 이미 8살된 아들이 있던 그녀,

 끈질긴 구애와 편지들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었고,

 이에 암스텔담으로 찾아갔을 때 목사님을 통해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쪽지만으로 응답을 건넸고

 이에 고흐가 석유 램프 속에 자신의 손을 넣으며

 '제 손이 이 뜨거움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큼 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갈망했고,

 또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손 뿐 아니라 온 몸을 태워버리겠다고 했음에도

 끝내 화상만을 입고 돌아서야 했던 여인.


 셋째는 매춘부였고 이름은 크리스틴 클라지나 마리아 후르닉,

 고흐는 그녀를 시엔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고흐가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3살이나 연상이었고

 다섯 살 난 딸이 있었으며 또 임신 중이기도 했다.

 알콜 중독에 성병을 앓던 여인.

 그럼에도 고호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위로가 되어 주었으며,

 생리적 욕구의 해결사이기도 했던 여인.

 고흐는 두 아기의 엄마이기도 했던 그녀와 한 동안 동거하였다.

 고흐는 그녀에게서 성병을 옮아 한 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생 테오를 비롯한 주변의 압박과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할 현실적인 가난,

 그리고 그녀의 게으르고 문란한 생활,

 돈 문제로 그녀의 동생이 고흐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여러 가지가 겹친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그녀를 버려야만 했었다.

 

넷째 여자는 누에넨에서 만난 이웃 섬유공장 주인의 딸이었던 마호르트.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은 41세의 노처녀였다.

고흐의 집에서나 고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마호르트의 가족의 반대로

마호르트가 정신 불안을 얻게 되었고 이에 곤란한 입장이 되었던 처지.

결국 그녀가 자살 소동을 부렸고 이에 대한 온갖 비난이 고호에게 쏟아져

비극으로 막을 내려버린 사랑 아닌 사랑.

다섯 째는 술집여자 라셸-라헬이라 발음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같은 이름이다.

이 라헬이라는 이름에 관하여는 마태오 복음 2장 18절의

'자식 잃고 슬피우는 라헬'이라는 귀절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1888년 12월 23일 밤 11시 30분경

고흐가 '조심해서 다루라' 하면서 귀를 잘라 건네주었던

라마르틴 광장의 술집 여자였고 창녀였다.)


2.잠시 함께 살던 고갱과의 관계에서?


-고갱과 말다툼을 하다가 고갱에게 심한 말을 들었고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저주스럽다고 여겼기에.

-고갱이 다툼 끝에 집을 떠나자 그 고갱을 죽이고 싶도록 미웠는데

 떠나버린 고갱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생각 끝에 자신의 분을 못 이겨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아를이라는 곳에

 여러 화가들을 초대했으나 이에 고갱만이 응답하여 같이 지내게 되었고,

 얼마가 흐른 뒤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마저 떠나려 하는 것을 듣고

 자기의 진심을 너무도 몰라준다는 심정을 결국 자해로 표현해 낸 것.

-고갱이 다툼 끝에 자기를 피하고 계속 만나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고갱과 다투었고, 그로 인해 고갱이 떠나겠다고 하자

 또 다시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남겨주게 될

 고갱과의 이별이 두려웠고 그 이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을 면도칼로 죽이려고 덤볐으나

 이에 실패하고 분함을 참을 길 없어서.

-사실 고흐 자신이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것이 아니다.

 고갱과의 싸움 끝에 고갱이 옆에 있던 펜싱 검을 들어 자른 것이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갱이 떠나버린 뒤 자신의 물건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펜싱 검만이 없고 마스크와 장갑이 있었는데 이는 고갱이 자신의 행실을 은폐하기위해

 사고 직후 펜싱 검을 챙겨 떠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3.그림을 그리다가?


-자화상을 그리던 중

 자신의 귀가 잘 안 보이고 그림으로서 잘 포착이 되질 않아서.

-자화상을 그리던 중 귀 부분이 이상하다는 고갱의 지적에

 귀 부분을 계속 고쳐도 잘 되지 않았고, 이에 실제 귀를 잘라 그림과 맞춰 보느라고.


4.병적인 이유로?


-귀 울림증을 오래도록 앓던 중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흐는 알콜 의존증이 있었다.

 압생트(absinthe)라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고흐는 술에 취해 일시적인 환각 상태에서 귀를 잘랐다.


5.심리적인 이유에서?


-추락을 두려워하는 비행기 조종사가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 중에 하나가

 그 비행기를 스스로 추락시켜 버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처절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야 말 것 같은 자신의 추락이 두려워

 스스로 자신을 추락시켜 버리기 위해.

-그림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나 끝내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그림,

 그리고 동생에게 계속 생활비를 받아 연명해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뭔가 색다른 돌파구를 마련하고픈 결심과 심정의 표출로서.


6.성서적인 근거에서?


-일찌기 목사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고, 
  전도사로도 활약했던 고호의 과거를 볼 때

  고흐가 성서를 익히 주지하고 있었음은 자명하다.

  고흐는 비탄과 고독의 게쎄마니 동산에서

  어느 날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무리들 중 하나인 말코스의 귀를

  제자인 베드로가 칼로 내리쳐 잘라 버렸으나

  이를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음을 상기했고

  (참조.요한18,10 마태26,52 마르14,47 루까22,51),

  자신의 비참하고 외로운 처지가 예수님과 같다고 여겼고

  이를 구해 주실 분은 진정 예수님뿐이라고 생각했기에.


/Posted by 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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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

 

정확한 것(정설)은 없습니다.

1.제일 신빙성이 없지만 가장 많이 듣게되는 이야기
▷ 자신의 자화상을 본 고갱이 귀가 비뚤어지게 그려졌다고 하니까, 아예 자신의 귀를 잘라 버렸다는 설.
2.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
▷ 고갱과 그림에 대한 이견차이,또는 고흐가 생각했던 아뜰리에 파라다이스에 대한 것을 고갱이 무시하여 큰 마음의 상처를 받고, 분노하여 잘라 버렸다는 설.
3. 더러 평론가들이나 서적들에서 나오는 새로운 이야기
▷ 귀를 자른 무렵은 이미 고갱이 아를을 떠나고 난 뒤여서, 소외감에 대한 폭팔과 자괴감에서 잘랐다라는 설. (여기서의 소외감은 파리의 인상파 화단이기도 함.)
4. BBC 다큐에서 가상해 본 의외의 이야기
▷ 고갱이 아를에 왔을 때, 그림에 대하여 심하게 격론을 나눌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었고, 고흐가 아뜰리에 집세를 반분하자고(이것은 사실 아를에 죽 머물러달라는 제안이기도 했슴.) 했더니 짠돌이(?) 고갱이 놀라 거부하였고, 이에 대한 실망감에 격론에 이어 잘라 버렸다는 설.
-여기에 일반적으로는 자른 귀를 손수건에 싸서 동네 여인(창녀로 알려진)에게 주었다고 알려졌지만 이것 또한, 최근에는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로 거듭 확인되고 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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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정신적인 발작 때문에 귀를 잘랐다고 보는 견해와 귀를 잘랐기 때문에 발작이 시작되었다는등 걷잡을수 없는 해석과 평가가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고갱과 관련이 있다는점이다.
여기에 덧붙일수 있는것은 이미 그에게는 귀를 자를수 있는 요인이 압생트를 통해서 몸에 배어 있었으며 그것도 그의 독자적인 예술을 탄생시킨 찬란한 노란색 빛깔을 얻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반 고흐가 진술한 발작시의 증상들과 압생트에 관한 많은 의학 정보를 감안하면 그의 발작에 압생트가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알수 있다.
그가 압생트를 마시기 시작한것은 파리 몽마르트에 있을때부터였는데 아틀리에서 만난 툴루즈 로트레크가 고흐를 데리고 술 마시려 다니곤 했다.
압생트에 중독되면 그 증상중 하나로 청각적인 환각, 즉 환청과 시각적인 착각, 즉 착시 현상이 나타난다.
또 압생트 중독자는 성격이 혼란해진다.흥분, 권위적 태도 분노등이 나타나 그 성격이 변하는것을 볼수 있다.
또 일단 발작이 일어나면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게 되고 이 공포에서 탈피하기 위해 거칠고 격렬한 공격적 충동을 느껴 남을 해치고 심한 경우에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서슴치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압생트 중독시에는 이러한 살인적 공격성이 스스로에게 향하는 경우도 있는데 반 고흐가 고갱을 공격하는 대신 자기 귀를 자른것도 압생트의 급성 중독으로 인한 발작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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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1월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이렇게 말한다: “산책을 자주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13쪽).

 

1882년 10월 2일의 편지에서 반 고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에 원칙부터 틀린 그림, 거짓된 그림, 왜곡된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더 차원이 높고 더 훌륭한 그림을 그리려면 훨씬 더 많은 습작을 해야 한다”(80쪽).


반 고흐에게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림이란 게 뭐냐? 어떻게 해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눈 것과 같다.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벽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삽질을 해서 그 벽 밑을 파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럴 때 규칙이 없다면,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겠니?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일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을 때 이룰 수 있다. 결코 우연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1882년 8월 22일, 93쪽).

 

반 고흐는 예술가의 성실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돈 버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세가 그 목적에 가장 빨리 도달하는 지름길이 아니겠니. 참되고 가치 있는 작품을 그리는 게 가장 기본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되려면 작품이 팔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작업할 것이 아니라, 작품에 정말 훌륭한 어떤 것이 들어 있어야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정직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79쪽).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야 한다”(91쪽).

 

1883년 8월에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반 고흐는 이렇게 말한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문제는 아니니까.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정기적으로, 집중하면서, 핵심에 접근해서, 완벽한 평온과 안정 속에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99쪽).


같은 편지에서 그는 화가로서의 책무감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이 세상에 빚과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30년간이나 이 땅 위를 걸어오지 않았나! 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어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의 목표다. 이런 생각에 집중하면 해야 할 일이 분명해져서, 더 이상 혼란스러울 게 없다. 요즘은 작업이 아주 느리게 진행되고 있으니, 더욱더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겠다”(99쪽).

 

반 고흐에 따르면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우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1885년, 134쪽).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예술가가 되려는 생각은 나쁘지 않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억누를 수는 없지. 소망하는 것을 터뜨리기 보다는 태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157쪽).


그는 친구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1884년 3월)에서 예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술은 우리의 기술, 지식, 교육보다 더 위대하고 고차원적인 것이라는 인식 말일세. 예술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단지 손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네. 더 깊은 원천에서, 바로 사람의 영혼에서 솟아나온 것 아닌가”(113쪽).

 

아래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을 달래주는 어떤 것을 그리고 싶다. 그리고 영원에 근접하는 남자와 여자를 그리고 싶다. 옛날 화가들은 영원의 상징으로 인물 뒤에 후광을 그리곤 했는데, 이제 우리는 광휘를 발하는 선명한 색체를 통해 영원을 표현해야 한다”(207쪽).


“나는 늘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208쪽).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 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 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1889년 1월).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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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과 공동생활을 하던 중 다툼이 있었고 그 와중에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신경증과 발작증세에 대한 이야기도 있더군요.
이에 대한 글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참고 바랍니다. ^^
 그는 1853년 3월 3일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지방의 한 가난한 마을 그로트 춘데르트(Groot Zundert)에서 태어났다. 16세 때에 백부의 소개로 하아그에 있는 화구상의 점원이 되어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다가 목사의 아들이라는 가정 환경의 영향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고흐 자신의 말) 종교적 정열에 불타 단기 목사 양성소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한때 벨기에에서도 가장 비참한 탄광촌인 보리나쥬를 무대로 헌신적인 전도에 몰두한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천부의 재질(현재 남아 있는 그의 최초 데생은 9세 때의 것이다.)을 숨길 수 없었던 고흐는 화가가 되기를 결심한(1880년) 후, 브뤼셀을 거쳐 1881년 봄에 에텐의 부모 곁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사촌뻘 되는 케이 포스에게 구혼했다가 깊은 사랑의 상처를 입고 집을 뛰쳐나온 그는 헤이그에서 그림 공부를 계속한다. 그 곳에서 우연히 밤거리의 창녀 크리스틴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를 모델로 해서 그린 누드 데생 <슬픔>은 “버림받은 인간에 대한 애절한 공감”을 표현한 매우 감동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1883년 말경부터 1885년 11월 파리로 떠나기까지 약 2년 동안 그는 무려 유화 2백 점, 데생 2백50점을 남기는 본격적이며 열띤 작품 제작에 몰두한다. 이른바 ‘네덜란드 시대’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그려진 고흐의 리얼리즘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후 파리에서 화상으로서의 기반을 갖고 있던 동생 테오도르의 도움으로 코르몽 화실에 출입하면서 툴루즈 로트렉·피사로·드가·쇠라·고갱 등의 인상파 화가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어두운 화면이 갑자기 점묘풍(點描風)의 밝은 색채로 바뀌게 되고, 1888년 2월 남프랑스의 아를르로 옮겨간 뒤부터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해 나간다. <해변의 작은 배> <해바라기> <아를르의 카페> 등은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 해 10월, 고갱이 와서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견해와 작풍이 판이하게 서로 달랐던 두 사람은 잦은 성격의 충돌로 상호간의 우정이 깨어져, 마침내 고흐가 면도칼을 휘두르며 고갱을 죽이려고 쫓다가 오히려 자기의 귀를 잘라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소동을 벌인다. 
아무튼 이 ‘귀 자르기 사건’을 계기로 고흐와 고갱은 헤어지게 되고 그 후 신경증의 발작 증세가 악화되어 아를르의 시립병원을 거쳐, 1889년 5월 생 레미에 있는 생 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다. 요양 생활을 하면서도 작품 제작에 왕성한 의욕을 보여 <버드나무가 있는 보리밭> <추수> <별과 달이 있는 밤> <병원의 안뜰> 등 1백50여 점을 그렸다. 그는 생 폴 요양원으로부터 야외 제작을 때때로 허가받기는 했으나 점점 그 곳이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사랑하는 동생 테오가 있는 파리, 꼭 파리가 아니더라도 그 근방의 시골로 자리를 옮기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흐는 파리 북쪽 34킬로미터 떨어진 조용한 시골 마을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 Sur Oise)에 사는 의사 가셰 박사의 손에 넘겨지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이 완성된 지 얼마 안되는 1890년 7월 27일 오후, 오베르 성에 올라가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에다 권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뒤 “아 내 작품들, … 난 거기에 내 인생을 걸었었지. … 그러다가 내 정신이 거의 다 결딴났어. …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어빙 스톤, 《빈센트 반 고흐》라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다 두 눈을 영원히 감았다. 
여러 차례에 걸친 신경증의 발작과 요양 생활, 특히 ‘귀 자르기 사건’과 ‘권총 자살’로 마감한 고흐의 비극적 생애에 대해서, 범속한 ‘정상인’들은 한편의 광인의 드라마쯤으로 쉽사리 간주해 버린다. 그리고 동생 테오와 가셰 박사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없었던들 광인인 반 고흐가 그 많은 작품들을 제작할 수 없었으리라 단정한다

///건강정보나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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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화가중에 귀가 잘린 일화를 가지고 있는 화가가 있죠? 바로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인데요. 이 화가는 생전에 남긴건 그림과 편지뿐입니다. 또한 무수한 일화도 있는데요. 그 중 귀를 잘른 고흐의 일화에 대해서 알려드릴게요. 
 


"보물처럼 잘 가지고 있어 달라."
이 말과 함께 자신의 귓볼을 잘라서 매춘부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거론되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귀를 왜 잘랐고, 어떻게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고흐가 귀를 잘라 매춘부인 라셸에게 직접 선물했다는 갖가지 추측만 돌고 돌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 12일 영국 BBC방송과 일간지 가디언이 고흐의 귀 사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이 고흐의 귀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담은 의사 펠릭스 레의 편지를 공개했던 것인데요. 펠릭스 레는 고흐의 귀 사건이 있던 1888년 당시 그 상처를 치료했던 의사였습니다. 
 


레 박사의 편지는 1930년대까지 미국 작가 어빙스톤과 주고받았던 내용 중 일부로, 미국의 한 대학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가 최근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에는 고흐가 귀를 자르기 전, 후의 모습이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고흐의 귀는 귓볼 일부분만 남은 채 귀 대부분이 잘려 있었는데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고흐가 귀를 선물한 여성 라셸의 직업이 그간 알려진 매춘부가 아닌 매음굴의 청소부였다는 추정도 제기 됐습니다.  박사의 편지를 제일 먼저 발견한 전직 미술교사 출신의 머피는 라셸의 본명이 가브리엘인 사실을 알아냈고 그녀의 유족을 추석한 결과 가브리엘은 당시 관경병에 걸린 개에게 물려 병을 앓고 있었고, 치료비 마련을 위해 매음굴 청소를 했던 것입니다. 머피는 고흐가 절박한 사정에 빠진 그녀를 도우려고 스스로 귀를 자른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반고흐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감정적이 됐던 인물인데, 마땅히 도울 돈이 없었던 고흐는 그녀에게 선물로 자신의 살을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희대의 명화들을 남겼던 반 고흐. 귀에 얽힌 일화를 포함해 여전히 쉽게 이해되지 않는 천재 화가의 삶은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큰 궁금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출

반 고흐, 귓불 아닌 귀 전체 잘린 의사의 스케치 발견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프랑스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자신의 귓불을 잘라내 매춘부에게 줘버렸다는 이야기는 광기에 스러진 천재 예술가의 말년을 보여주는 일화로 종종 거론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가 이제까지 알려진 대로 귓불 일부가 아닌 왼쪽 귀 전체를 잘라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새로 공개했다고 영국 BBC 방송, 일간 가디언 등이 12일(현지시간) 전했다.
 

공개된 기록은 사건이 일어난 1988년 당시 반 고흐를 치료한 의사 펠릭스 레의 편지 내용이다. 1930년대까지 레 박사와 연락하고 지냈던 작가 어빙 스톤이 소유했던 것으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뱅크로프트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

레 박사는 편지에 반 고흐가 잘라내기 전후의 귀 모습을 그려놓았다. 이 그림을 보면 고흐는 귀 일부만 잘라낸 것이 아니라 귓불의 작은 일부분만 남긴 채 대부분을 잘라낸 것.

또한 반 고흐가 잘라낸 귀를 건넨 여성인 ‘라셸’은 그간 알려진 것처럼 매춘부가 아니라 사창가에서 청소 일을 하던 하녀였다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박사의 편지를 발견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는 본명이 가브리엘인 이 여성의 유족을 추적해 반 고흐가 이 여성을 도우려는 생각으로 잘라낸 귀를 건넨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 여성은 당시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상처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치료비 마련을 위해 사창가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던 여성이다.

머피는 “반 고흐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감정적이 됐던 인물”이라며 “그 여성에게 선물로 살을 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반 고흐 미술관은 이 편지와 반 고흐가 그린 레 박사의 초상화, 반 고흐가 자살할 때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 등을 오는 15일부터 9월 25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출처=캘리포니아대학교 홈페이지]

/김상민기자처] 빈센트 반 고흐 귀 :: 귀가 잘린 일화는?|작성자 그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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