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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축구선수였다...
2017년 03월 03일 18시 42분  조회:5870  추천:0  작성자: 죽림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실존주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축구선수였다.
카뮈는 17세 때까지 프랑스령 알제리의 지역 축구팀에서 골키퍼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결핵을 심하게 앓으면서 축구를 그만두게 된다. 이때 카뮈는 사라진 꿈을 아쉬워하며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어쨌든 이로 인해 불행인지 다행인지 카뮈는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세월이 흘러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뮈에게 친구가 물었다. 

"만일 건강이 허락했다면 축구와 문학 중 어떤 삶을 선택했을 것 같나?" 

"당연히 축구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나." 

카뮈는 살면서 종종 축구에 관한 명언을 남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나는 축구를 통해 도덕과 의무감을 배웠다"는 말이다. 도대체 축구의 어떤 매력이 당대의 지성에게 이런 아포리즘을 던질 수 있었을까. 

언뜻 보면 축구는 원시적인 스포츠다. 이성의 상징인 손을 쓰면 반칙이다. 태클과 몸싸움이 허용되고, 팔을 제외한 온 몸으로 공을 들이받아도 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랑곳없이 경기가 진행된다. 

사실 `원시성`이라는 말 속에는 인간의 본질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식인들은 축구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관심을 가졌다.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그 본성이 어떻게 공동체에 녹아들고 규칙(제도)이라는 틀 안에서 존재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축구였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또 축구가 가진 기회의 평등에 주목했다. 축구에서는 누구도 공을 소유할 수 없다. 단지 공이 내 발에서 가까이 있을 뿐이지 내 것은 아니다. 야구처럼 글러브 안에 공을 가두거나, 농구나 배구처럼 손에 쥐고 있을 수 없다. 축구에서 공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즉 누구의 공도 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축구는 장비가 간단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도 쉽게 즐길 수 있다. 원리 역시 간단해서 두세 명이 할 수도 있고, 수십 명이 해도 무방하다. 

또 축구는 세계 공용어다. 2014년 현재 유엔 회원국은 193개국이지만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국은 203개국이다. 스포츠 중에 축구처럼 전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는 드물다. 육상 정도가 있을 뿐이다. 스키 같은 동계 종목은 눈이 내리지 않는 열대 나라에서는 하기 힘들고, 크리켓이나 야구 같은 경기는 특정 나라 몇 군데에서만 인기가 있을 뿐이다. 다양한 종교와 인종, 이념이 뒤엉켜 있는 지구촌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인정하고 고개 숙이는 룰은 `축구 룰`밖에 없다. 

축구는 인간의 본성과 그 본성들이 모여 만드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실험이다. 그 실험에는 감동이 있고 눈물이 있고, 분노와 애국심이 있으며, 좌절과 기쁨이 있다. 지식인들이 축구에서 감흥을 느끼고, 그 매력적인 실험에 빠져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축구는 희망이기도 했다. 배고프던 시절 축구 한ㆍ일전은 우리에게 국가적 자긍심을 충족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일본 열도 한복판에서 한국팀이 승리하는 걸 TV로 지켜보며 식민의 아픔과 콤플렉스를 이겨낼 수 있었다.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이때, 우리는 최근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너무나 슬픈 일을 겪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실의에 빠졌고, 지금도 직간접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이 많다. 바로 지금 축구가 위로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나아갈 힘을 주었으면 좋겠다. 

영국 작가 프리슬리는 축구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 

"축구는 이웃들과 함께 환호하면서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 또 하나의 근사한 삶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허연 문화부장]
/ⓒ 매일경제

우리 모두 행복한 시지프가 되자 - 알베르 까뮈 
///정윤수

...2002한일 월드컵 이후 축구가 단순히 리모컨으로 즐기는 레저의 차원을 넘어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화 키워드라는 점이 널리 알려졌는데, 이런 정황 속에서 알베르 까뮈의 다음과 같은 말이 여러 매체에서 자주 인용된 바 있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배웠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찍은 알베르 까뮈 초상 사진

이런 식의 전형적이고 공식적인 말은 교장 선생님이나 아파트관리소장 같은 분이 해야 딱 알맞은 것인데, 다름 아닌 알베르 까뮈의 발언이므로 여러모로 생각을 더 하게 만든다. 진실로 축구는 도덕과 의무뿐만 아니라 이 지상의 모든 양식과 가치를 함축하고 있어서 까뮈의 이 말은 사실 누가 했더라도 전혀 틀린 말이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부조리 문학의 대표자인 까뮈, 그러니까 얼핏 보기에는 대단히 염세적이고 절망적인 포즈를 취할 듯이 보이는 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어떤 뜻에서 '도덕'과 '의무'라는 말을 썼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뜻으로 그 단어를 썼느냐에 따라 까뮈의 말은 합숙소 소장의 말이 되기도 하고 한 뛰어난 철학자의 날카로운 직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

이 질문의 첫 번째 답안지는 까뮈의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에 있다. '시지프'는 고대 그리스어 'Σίσυφος' 혹은 라틴어 'Sisyphus'로 옮기자면 시시포스가 되는데, 신화에 따르면, 그는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이며 메로페의 남편으로 에피라(코린토스)를 창건하여 왕이 된 인물이다. 

시시포스는 영리하고 꾀가 많은 인물이었다. 남을 속이기 좋아하였고 끔찍한 살해도 저지른 인물이다.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시시포스는 꾀를 부려 타나토스를 붙잡아 족쇄를 채워버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신 아레스, 저승의 신 하데스까지 속이면서 죽음의 운명을 거역했다. 나중에 헤르메스가 간신히 그를 저승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까지가 시시포스 신화의 기본적인 이야기이고, 까뮈가 그의 에세이에서 인용하는 부분하는 그가 저승에서 형벌을 받는 대목이다. 시시포스는 커다란 바위를 가파른 언덕 위로 올려야만 한다. 까뮈의 글을 인용하자면 "바위에 비벼대는 뺨, 진흙으로 뒤덮인 바위 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 그 바위 덩어리를 고정시키려고 버틴 다리, 다시 시작하려고 쭉 뻗은 팔, 아주 인간적이고 믿음직스런 흙투성이의 양손"으로 시시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곧 의무)를 다한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는 정상에 올려지자마자 밑으로 굴러떨어진다. 시시포스는 다시 내려가서 바위를 끌어올린다. 그 단순한 의무를 끝없이 반복한다.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프란츠 폰 스턱이 그린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로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휴식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혹시 까뮈가 축구에 관하여 말한 '의무'는 바로 이런 무게를 지닌 말이 아닐까. '끝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시시포스처럼 인간은(그의 동료이자 비판자였던 사르트르가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을 통하여 말한 바와 같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부조리의 처형에 순응하고 마는 게 아니라 '의식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내면의 힘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적어도 까뮈는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고귀한 성실을 가르쳐준다. 그도 또한 모든 것은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 주인이 없게 되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지나 하찮은 것이 아닌 듯하다. 이 바위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광물의 빛 하나하나가 유독 그에게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만 한다." 

2차 대전의 공포와 폐허, 그 이후의 황량한 문화 불모 상태에서 활동을 시작한 알베르 까뮈는 이 20세기 중엽의 '불모지'에서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을 했던 '행복한 시지프'였다. 까뮈는 1913년 11월 7일,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몽드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북부 알사스 출신인 아버지는 1차 대전 때 전사하였고 어머니는 청각장애를 앓았다. 카뮈는 가난하고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다. 그런 처지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까뮈는 언제나 축구공을 차면서 성장했다. 그는 장 그르니에의 지도로 철학에 눈을 떴으며 문학, 연극, 저널리즘 등에 걸쳐 다양한 수련기를 거쳤다. 

 

 

 

1946년의 알베르 까뮈

1928년에 알제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대학 축구부에서 골키퍼를 맡았다. 그는 <알제대학주보>에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내가 나의 축구팀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이유는 결국 열심히 뛰고 난 후에 뒤따르는 나른한 피곤함과 더불어 느껴지는 저 기막힌 승리의 기쁨 때문이었고, 또한 패배한 날 저녁이면 맛보게 되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그 어리석은 충동 때문이었다." 

까뮈는 1934년에는 알제리 공산당(KP)에 가입하였다가 1년 후에 탈퇴했으며 언론인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노동극장'을 설립하여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히틀러 파시즘과 2차 대전의 대혼돈을 겪으면서 서양의 오랜 관념적 형이상학이 빚어낸 순도 높은 '가상 유토피아' 대신 이 세상의 이종무규칙의 대혼란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이 부조리한 상황을 철저히 인식하고 당면한 현실을 최선을 다하여 견뎌내는 것을 참된 윤리적 목표로 삼았다. 1942년의 <시지프의 신화>가 그 증거이다. 이 해에 발표한 <이방인> 역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함, 그것에 직면한 인간의 고독하면서도 왜소한 반항을 그린 작품이다. 

 

 

 

까뮈는 레지스탕스 언론 활동을 벌였다

까뮈의 이러한 생각은 2차 대전이 끝난 뒤에 좀 더 실천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 프랑스로 이주한 까뮈는 반나치 레지스탕스 단체인 <콩바>(Combat, 즉 전투)에 가담하였고 이 단체가 발행하는 저항 신문 '콩바'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드골 대통령은 대대적인 나치 협력자 청산 작업을 실시하였다.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한 자들은 사형, 무기, 장기강제 노동형 등에 처해졌으며 특히 언론인을 포함한 지식인에 대해서는 무려 200만 명 가량을 조사하여 99만여 명을 구속시켰을 정도였다. 알베르 까뮈는 비록 드골이 우파 민족주의자이지만 적어도 나치협력자 청산 정책만큼은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는 반나치 저항신문 <콩바>의 주필을 맡아 나치 협력자 청산 운동에 나서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라고 역설하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이 드골에게 관용의 정치를 권유했으나 드골은 까뮈를 지지했다. 

까뮈의 이러한 현실적 면모는 1947년 작 <페스트>에 잘 드러나 있다. 1940년대의 어느 해, 알제리 오랑시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이 시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된다. 한계 상황 속에서 역병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이 대혼돈 속에서도 권력과 돈과 욕망의 쟁투가 빚어진다. 의사 리외와 지식인 타루가 몹쓸 질병과 거대한 혼란에 맞서 묵묵히 그들의 의무를 다한다. 또 한 사람이 있다. 신문사 특파원 랑베르. 그는 처음에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다가 포기를 하고 의사 리외를 도우면서 페스트에 맞서 싸운다. 

 

 

 

까뮈의 동료이자 비판자인 사르트르

맨 앞의 말을 다시 인용하건대,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배웠다.”는 알베르 까뮈의 말은 이처럼 상당한 질량을 갖고 있는 말인 것이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면, 그라운드에 내던져진 존재가 되는 선수들은 그 운명의 휘슬이 90분 후에 다시 울릴 때까지 커다란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게 된다. 태클에 걸리고 골포스트를 때리고 관중석 멀리로 어이없이 빗나가는 슛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시작한다. 서로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며(패스) 언제나 원치 않는 방향으로 튀어버리는 불가해한 공의 리듬과 문전 앞의 부조리한 대혼돈에서도 침착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 까뮈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까뮈는 1952년에 UN이 독재자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승인하자 유네스코 임원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며 1953년에 벌어진 동베를린의 노동자 파업을 진압한 동독을 강렬하게 비난했다. 1956년 폴란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고 그해 10월에는 헝가리에서 봉기를 일어났으나 소비에트의 진압해 버렸다. 이에 대해 까뮈는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까뮈의 '철저하지 못한' 태도를 비판하였다. 어쩌면 까뮈는 철저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정치적인 지향성 이전에 한계 상황에 봉착한 인간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 때문에 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시 형이상학의 문제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루르말랭에 있는 까뮈의 무덤.

까뮈는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0년 1월 4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이 무렵에 그가 태어난 알제리는 프랑스에 대하여 거센 독립 저항 운동을 벌였고 끝내 그것을 성공하게 되는데, 까뮈는 이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삼갔다. 알제리에서 살고 있는 가족과 친지들의 신변 안전 때문이었다는 추측이 있었다. 만약 팔순이 넘어 장수를 했다면 진실로 지네딘 지단을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다. 지단은 마르세유 출신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알제리 사람이고 이 독립저항 운동 시절에 알제리를 '탈출'하여 마르세유에 정착했다. 아직도 지단의 친척들 중 일부가 여전히 알제리 산촌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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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까뮈 문학기념비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들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서 굵은 거품을 부글거리며 빛 속에서 신들은 말을 한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1961년에 건립된 까뮈의 문학비

이 구절이 알제리의 티파사를 방문하면 피부에 와 닿는다. 알베르 까뮈의 산문집 '결혼·여름' 중 ‘티파사에서의 결혼’의 첫 구절에서 티파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알제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번 정도는 읽고 오는 책이기도 하다.

 

1961년 까뮈의 사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까뮈의 문학비가 이곳에 세워져있다. 지중해의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대 로마의 유적들 속에서 까뮈가 묘사한 바로 그 장면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기념비에는 그가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Je comprends ici ce qu'on appelle gloire : le droit d'aimer sans mesure.

(I understand what we call glory is the right to love without any measure.)

-Albert Camus-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침없이 사랑할 권리이다.

 

////////////////////////
 

 

"내가 축구를 그렇게도 사랑했던 이유는

결국 열심히 뛰고 난 후에

뒤따르는 나른한 피곤함과

더불어 느껴지는

저 기막힌 승리의 기쁨 때문이었고,

또한 패배한 날 저녁이면

맛보게 되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그 어리석은 충동 때문이었다."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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