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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이 태여나는것은 늘 울고 웃는 과정을 그려가는것...
2017년 03월 13일 19시 20분  조회:2339  추천:0  작성자: 죽림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까지 / 고재종



시에 대하여 얘기하다보면 흔히 받는 질문이 있다. 그건 "영감(靈感․인스피레이션)이 뭐예요"라든가 "시를 쓰기 전에 시인은 영감을 받아야 하나요"라든가 아니면 "선생님은 영감을 받으셨나요"라는 것이다. 이건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며 특히 세 번째 질문은 매우 신랄하기까지 하다. 영감을 받았다 하면 시인이 무슨 무당 같은 생각이 들고 안 받았다 하면 재능 없는 시인으로 몰릴 것 같아서다. 그래서 난 그런 질문에 대개 농담으로 대신한다. "왜 처녀를 받지 영감을 받습니까?"라고. 

얼마 전 TV사극『명성황후』중 황후시해 장면에서 일본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아 현장을 총지휘한 하수인이 황후를 시해, 소각한 후에 왕궁 뒷길을 홀로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하버드대학을 나온 인텔리겐차이며 시를 지망하는 사람이었던가. 마침내 중얼거리는 것을 넘어 머리칼을 쥐어뜯는 그가 왜장쳐대는 말은 놀랍게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영감이! 이 역사적 대사건을 단박에 표현할 그 시 한 줄이 떠오르지 않아. 아이구 이 돌대가리야."라는 게 아닌가. 

영감을 무슨 신적 계시 같은 걸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런 악마에게 무슨 영감이 주어지겠는가. 영감이 풍부한 천부적 시인이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분명히 말해둘 것은 시인이 자기 펜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종이 위에 쓰기까지 시를 만드는 작업의 대부분은 이미 거기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그 시의 대부분을 시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다는 말도 아니다. 역시 시인에 따라서 지적조작의 방법으로 시를 만드는 시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한 편의 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순서를 거쳐 만들어진다. 



< 한 편의 시의 씨, 또는 싹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시인의 상상력을 강하게 때린다. 그것은 뭔가 몹시 강하지만 막연한 감정이나 어떤 특정의 경험, 또는 하나의 관념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때로 그것은 맨 처음에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또 한층 더 나아가서 아마도 이미 말이라는 옷을 입은 시구의 형태로, 아니면 또 완전히 한 줄의 운문 형태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어느 새벽 흉몽에 시달리다 깨어나 홀로 느끼는 고독이나 불안감, 나아가서 얼마 후엔 이 삶도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소멸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감, 그러다 보니 지금이라도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강렬한 그리움의 감정을 겪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뭔가 몹시 강하지만 막연한 형태로 느껴진 감정이지만 어쨌든 나는 이때 존재의 본질에까지 의문을 품게 된다. 

또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느 햇빛 좋은 날 옥상 위에서 펄럭이는 하얀 빨래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환히 열리는 경이로운 순간, 사랑하면서도 피치 못해 떠나보내야 하는 애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뒷모습을 하고 빗속을 터덜터덜 돌아서 가는 걸 볼 때처럼 명치끝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슬픈 순간, 요즘 탄핵정국에서 보듯 국민을 안하무인으로 여기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국민의 이름을 빌리는 우리나라 모든 정치인의 몹쓸 행태를 볼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는 그 격렬한 분노의 순간, 그리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경쾌한 발걸음 혹은 그런 손자를 대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하는 할머니의 그윽하고 흐뭇해하는 눈길을 보는 때 느끼는 즐거움의 순간들을 늘 경험하게 된다. 그런 경험은 우리의 희로애락의 사생활에서부터 사회적 삶에서까지 곧잘 겪게 된다. 

그런가 하면 책을 읽다가 이런 말들을 발견한다. 빈자의 등불 하나, 자유의 종, 신비의 꽃, 야생, 슬픈 열대, 욕망의 불꽃, 주체상실, 매우 가벼운 담론, 슬픔의 온도, 나무의 신화, 풍류, 빵과 수선화,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슬픔만한 생의 거름이 어디 있으랴,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별의 바탕은 어둠이다,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등 관념․이미지․말․시구․한 줄의 운문들이 가슴을 흔들고 영혼을 흔들고 삶을 흔든다. 본질에 대립하는 실존만이 아니라 본질과 실존의식이 동시에 인생 속으로 삼투해버리는 이런 흔들리는 순간은 책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남과 대화할 때도 오고 강의를 들을 때도 오고 나날의 삶 속에서도 곧잘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여러 감정이나 관념이나 이미지 등을 그의 습작노트에 적어 놓거나 머릿속에다 잠깐 저장해둔다. 그리고 시인은 그런 것을 아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다. 

다음 정호승「들녘」은 어린 날 겪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기억이 어느 순간 분출한 시다. 


날이 밝자 아버지가 
모내기를 하고 있다 
아침부터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다 
비온 뒤 들녘 끝에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 


지금 시인은 삼십여 년을 서울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농촌 경험이 느닷없이 분출한 것이다. 왜 어린 시절인가. 볏잎에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농약 때문에 메뚜기나 미꾸라지도 없는 실정인데 거미가 거미줄을 칠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오늘 여기에서 이 시가 튀어나오는가. 

요사이 생태학적 상상력의 시들이 많이 나온다. 서구 중심의 근대문명이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만물은 생명의 그물 속에서 동동한 목숨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을 가진 시인들이 시대정신에 부응한 시들이다. 이 시에서도 오월 푸르른 날 아버지는 모를 내고 먹왕거미는 거미줄을 치는 농촌풍경을 선연하고 깨끗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의 핵심은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라는 구절이다. 비 온 뒤 모를 내는 아버지나 거미줄을 치는 먹왕거미나 ‘두 분 다’ 부지런하시다 라고 말함으로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일 따름이고 차별이 없다”는 장자의 말처럼 공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 중심, 이성중심, 욕망중심의 현대인의 심성에 맑고 깨끗한 구원의 힘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요새 근대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면 이 시의 씨앗은 시인의 무의식이나 기억의 창고 속에서 영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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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이상(1910∼1937)

 

 

캄캄한 공기(空氣)를 마시면 폐(肺)에 해(害)롭다. 폐벽(肺壁)에 끌음이 앉는다. 밤새도록 나는 몸살을 앓는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내가기도 하고 실어들여오기도 하고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폐(肺)에도 아침이 켜진다.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習慣)이 도로 와 있다. 다만 치사(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초췌(憔悴)한 결론(結論) 위에 아침햇살이 자세(仔細)히 적힌다. 영원(永遠)히 그 코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책(冊)’과 ‘장(張)’을 뺀 한자어들을 전부 한자로 쓴 시 ‘아침’의 원본에는 한자가 괄호에 들어 있지 않다. 한글 뒤에 한자를 병기하는 것보다 모양새가 자연스럽고 맵시 있다. 그러나 이상이 살았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한자에 익숙했다. 그래서 소설과 성경을 제외한 그 시대 글에는 한글과 한자가 섞여 있다. 한글과 한자가 섞이면 의미가 즉각적으로 들여다보인다. 하지만 ‘한자맹(漢字盲)’에게 그것은 언감생심의 치사(侈奢)이리라. 한자라면 도무지 무섭기만 한 나로서는 한글전용인 이 시대를 사는 게 천만다행이다.

폐가 약한 사람의 ‘밤으로의 긴 여로’ 기행(紀行)이다. 오독일지 모르지만(오독은 해석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창조적 읽기라고 우겨 본다!), ‘밤새도록 나는 몸살을 앓는다’에서 몸살은 진짜 몸살이기도 하고 정신적 몸살이기도 하다. 그가 ‘폐벽에 끌음이’ 앉도록 담배를 피우면서 몸살을 앓은 결과로 치사한, 즉 사치스러운 책이 여러 장 찢긴 것이다. 설마 각혈이라도 해서 책을 찢어 거기 뱉어냈다는 말은 아닐 테고, 정신의 사치를 다한 글을 쓰려 했으나 성에 차지 않아 찢었다는 말일 테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랄지 ‘초췌한 결론’이랄지 ‘아침햇살이 자세히 적힌다’랄지…. 서로 어울릴 법하지 않은 말들을 충돌시키며 이어 신선하고 효과적으로 읽히게 하는, 시적 허용을 최대한 누리는 시어들의 병렬이 과연 이상답다. 그런데 ‘코 없는 밤’이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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