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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묘비에는 "詩人尹東柱之墓"라고 워낙 각인되여...
2017년 03월 16일 01시 22분  조회:3106  추천:0  작성자: 죽림

[문화]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2017.02.10

시인 윤동주 이야기 =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시인, 연호, 묘 찾기, 묘의 위치 

· 묘비에 ‘詩人’이라 붙인 이유 

윤동주는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용정의 윤동주의 묘비에는 “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윤동주의 최초 창작 시는 1934년 12월 24일 자 시 3편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이다. 최초 발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의 《崇實活泉》 제15호의 「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 「병아리」가 연길의 <카토릭소년> 11월 호에 발표되었다. 조선일보 학생란에 1939년 1월 23일 시 「遺言」에 이어, 시 「아우의 印象畵」와 산문 「달을 쏘다」가 실렸다. 동시 「산울림」이 1939년 <少年>지에,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의 <文友> 6월 호에 시 「새로운 길」이, 시 「자화상」이 1941년 <文友> 6월 호에 발표되었다. 사후(死後)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京鄕新聞) 4면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이다. 첫 시집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행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이런데도 4월 16일에 세운 묘비에 “시인윤동주지묘”라 하였다. 

2003년 6월 28일 용정의 집으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여동생 오형범(吳瀅範), 윤혜원(尹惠媛) 부부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었다. 1945년 3월 6일에 윤동주 장례 후 묘비 건립을 준비하던 조부와 부친이 “詩人”이라 붙이기로 하였다. 윤동주의 자선 육필 시집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

이 육필시집은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골라 자필로 써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제목을 단 것이었다. 1942년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다닐 때 여름방학에 용정에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3벌을 만들었는데 1벌을 당시 이양하(李敭河) 교수에게 드리고 출판을 하겠다고 하였더니 시기상조라고 하였다고 하고, 또 1벌은 후배인 정병욱(鄭炳昱)에게 주었다고 하였단다. 이 시집을 근거로 조부 윤하현(尹夏鉉)과 부친 윤영석(尹永錫)이 묘비에 “시인”이라고 붙인 것이다. 

· 묘비에 年號 대신 西紀를 쓴 까닭 

윤동주는 서기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1945년 2월 16일 금요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나이로는 29세이지만, 실제로는 만 27년 1개월 17일 동안을 살았다.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로 가서 화장하여, 1945년 3월 6일에 용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안장했다. 

그런데 윤동주 묘비에는 연도가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이것은 특이한 것이다. 당시에는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 “康德”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오형범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지 않았어요? 그러니 어떻게 일본 연호를 쓰겠습니까?” 한창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비문은 부친의 친구인 김석관(金錫觀) 선생이 짓고 썼는데, 윤동주의 스승이었고, 명동학교의 학감을 지냈다. 그도 연호를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건립일자가 서기인 시인 윤동주의 묘비
건립일자가 서기인 시인 윤동주의 묘비

· 尹東柱 墓를 찾게 한 사진 

1984년 봄에 미국의 현봉학(玄鳳學)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8월에 중국을 방문하여 연변의 유지들과 윤동주의 묘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안 주어서,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하고, 내년 방문 때에는 묘소를 꼭 찾아볼 수 있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친동생인 윤일주(尹一柱) 교수가 1984년 여름에 일본에 가 있던 중,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 묘지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 12일에 연길에 도착하였는데, 연변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오오무라 교수는 5월 14일 연변대학 권철(權哲)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李海山) 강사와 용정중학의 한생철(韓生哲) 선생과 함께 동산의 교회 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가지고 간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왼쪽에 오형범과 윤광주, 오른쪽에 윤혜원·윤영선·윤갑주 5명이 들어 있었는데, 묘비제 “詩人尹東柱之墓”가 중앙에 뚜렷하다. 

오오무라 마쓰오 교수가 윤동주 묘를 확인하게 한 사진
오오무라 마쓰오 교수가 윤동주 묘를 확인하게 한 사진


이 묘비 사진이 아니었던들 공동묘지의 수천의 묘비들을 하나하나 살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내고 확인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자료는 이 가족사진이었다. 1995년 문학사상사 간행 <윤동주 전집 1·2>는 윤영선(당숙)과 오형범(매부)이 서로 바뀌어 설명되어 있다.  

· 윤동주 墓의 정확한 위치 

윤동주의 묘는 용정시(龍井市) 동쪽 합성리(合成里) 동산(東山)의 교회 묘지 8부 능선쯤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의 위치가 글과 책에 따라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동산교회 묘지’, ‘중앙교회 묘지’, ‘동산 중앙교회 묘지’, ‘교회 공동묘지’ 등으로 나온다. 실제로 ‘동산교회’와 ‘중앙교회’가 있었고, 지명으로 ‘동산’도 있었으며, 묘도 공동묘지에 있어서 혼란스럽다. 

이에 대하여 1947년까지 용정에서 살았던 오형범·윤혜원 부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윤동주의 묘지 위치는 “동산에 있는 교회 묘지”가 맞다. 당시 용정에는 장로교회로 중앙(中央)교회와 동산(東山)교회와 토성포(土城浦)교회가 있었다. 서부의 감리교회와 북부의 성결교회까지 모두 5개가 있었다. 1942년에 교단이 합쳐져 만주기독교단이 되었다. 당시 동산의 공동묘지는 이들 5개 교회의 공동묘지였다. 그러므로, “동산에 있는 교회 공동묘지”가 맞다. 윤동주의 묘는 1945년 3월 6일에 설치된 이후 지금까지 용정시의 동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 공동묘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묘는 1945년 3월 6일에 설치했을 때는 봉분만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1945년 6월 14일에 화강암 묘비가 세워졌다. 전면의 폭이 39.5㎝, 높이 100㎝이고, 측면의 폭은 17㎝, 측면 높이는 93㎝이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에 거주하는 현봉학 선생이 주동한 미중한인우호협회(美中韓人友好協會)가 연증(捐贈)하고,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을 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20여㎝ 높이로 둥글게 시멘트로 둘러놓았다. 묘비 앞에다 오석(烏石)으로 상석을 새로 설치하였는데,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두 번째로 개수한 것은 2003년이다. 호주 시드니에서 살고 있는 오형범·윤혜원 여동생 부부가 개수하여 7월 15일에 완료하였다.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걷어내고,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4m가 되는 곳에 사각형으로 대리석 판을 둘러 세웠다. 그 안 16평방미터는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석상을 한 개의 오석으로 새로 만들어 놓았다.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 정도이다. 그 아래에 계절(階節)도 설치해놓았다. 왼쪽 구석 위에 오석으로 개수비(改修碑)를 세웠다. 가로 60㎝, 높이 40㎝ 정도인데, 앞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詩人의 祖父 尹夏鉉과 祖母 南信弼, 父 尹永錫과 母 金龍, 弟 光柱의 생졸 연월일을 6줄로 배열하고, 그 아래에 “이 동산 어딘가에 잠들어 계시지만 / 오늘날 묘소를 찾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 누이 惠媛, 조카 仁石, 仁河, 卿 새김 / 2003. 7. 15.”이라 하였다. 

사람은 가도 이름은 남는다. 그러나 그 이름도 잊힌다. 하지만, 이름이 사라져도 그의 작품은 남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윤동주는 이름도 작품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신길우 (본명 신경철) / 수필가, 국어학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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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은 일제말 저항시인인 윤동주 시인의 실질적 스승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서시' 전문이다. 이 서시를 시작으로 자신의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던 윤동주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죽는 날까지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걸어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인다.

또 한 편의 시를 보자.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 고나./ 아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실로 잇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살포시 개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였보노나./ 불현듯, 소사나 듯,/ 문득 령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일는 회한에 피여오른다./ 힌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우에 손을 념이다.'

정지용 시인의 '별'이다. 정지용은 이 시에서 유리창 밖의 별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방 안에서 창밖에 멀리서 빛나는 별을 바라보다가 문득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자리옷을 입은 채 일어난다.

◆ 정지용 시에서 보는 하늘, 바람, 별
'정지용의 시적 감각과 윤동주의 시적 개성'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에 나선 고려대학교 최동호 교수는 이 시에 등장하는 별과 바람과 하늘은 모두 원초적 소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을 피어오르게 함으로써 윤동주의 '서시'의 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보게 만든다'라고 밝힌다.

최 교수가 이처럼 추정하는 것은 정지용 시 '별'에서 나오는 하늘과 바람과 별이 단순히 서시 만이 아니라 윤동주의 시 전체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최 교수가 윤동주의 시가 정지용 시를 닮았다고 조명한 것은 비단 이 시 한 편만이 아니다.

정지용의 '비로봉', '슬픈 인상화', '바다2', '별똥', '향수'는 윤동주의 '비로봉', '아우의 인상화', '바다', '별똥 떨어진 데', '또 다른 고향' 등으로 전이된다. 정지용이 쓴 시적 어구에서 촉발된 시적 상상이 윤동주의 시를 낳게 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들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언뜻 보아 크게 연관성이 없어보여도 중요한 어절이 서로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는 것이 최 교수의 설명.

다만 정지용이 대상을 관찰하는 시인이라면, 윤동주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인이다. 윤동주가 정지용 시를 시적 상상력의 출발점으로 삼았어도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최 교수는 보고 있다.

정지용이 일본 동지사대학을 졸업했듯, 윤동주 또한 동지사대학의 동문이자 후배. 같은 영문과였고, 기독교라는 종교도 같았다.

◆윤동주 존재를 알린 정지용
정지용은 일제에 검거돼 1945년 2월 세상을 떠난 윤동주의 유고시 '쉽게 쓰여진 시'를 그가 주간으로 재직하고 있던 경향신문에 자신의 소개문과 함께 게재해 윤동주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또 윤동주 첫 추도회에도 참석했으며, 1947년 12월18일에는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쓰고 1948년 시집 발간을 도왔다. 정지용이 쓴 서문은 윤동주를 일제 암흑기를 빛낸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1930년대말 문장지를 통해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청록파 시인을 추천한 정지용이 비록 사후였지만 윤동주 시를 신문에 소개하며 추천해 시인의 반열에 오르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최 교수의 결론이 정지용과 윤동주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습작기의 윤동주는 정지용이라는 선배 시인이 없었다면 시적 언어를 자각하고 시인으로 자기의 개성을 인식하는데 또 다른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윤동주는 정지용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보고 배우되 그 나름대로 새로운 개성적 목소리를 찾아낸 것이다. 정지용의 시적 감각을 바탕으로 윤동주의 시적 개성이 발휘되었다는 것은 한국문학사에서 드물게 보는 선후배의 행복한 만남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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