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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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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형이상학파 시인 - 존.던
2017년 03월 30일 00시 14분  조회:5642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572. 1. 24/6. 19, 런던
사망 1631. 3. 31, 런던
국적 영국

요약 대표적인 형이상학파 시인이며 런던 세인트폴 성당의 참사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주로 쓴 세속적인 시뿐 아니라 종교적 운문과 논문 및 17세기의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히는 설교들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법을 전공했고, 후에는 성직자가 되었다. 그의 많은 시와 설교들은 이 무렵에 창작되었다. 19세기초부터 예리한 독자들은 던의 시적 천재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시뿐 아니라 설교문도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시인이자 산문작가로서 17세기와 20세기의 작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들은 던의 기지 섞인 논리와 열정의 겸비, 복잡한 마음상태의 극적 표출, 참신하고 과감한 이미지, 셰익스피어와 비교해도 거의 손색이 없을 만큼 평범한 말로 영어의 진수를 살리면서 풍부한 시적 의미를 창출해내는 능력 등에서 자극을 받았다.

개요

대표적인 형이상학파 시인이며 런던 세인트폴 성당의 참사원장(1612~31)을 지내기도 했다.

사제 서품을 받기(1615) 전에 주로 쓴 세속적인 시뿐 아니라 종교적 운문과 논문 및 17세기의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히는 설교들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로마 가톨릭교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풍자시인이자 극작가인 존 헤이우드의 딸로, 헨리 8세의 서기였던 토머스 모어 경의 후손이었다. 던은 그녀의 가문만큼 종교 때문에 고통을 받은 가문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성공한 런던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유서깊은 웨일스 가문의 후손이어서 던도 그 가문의 문장(紋章)을 지녔다. 1576년 아버지가 죽은 뒤 6개월 만에 어머니는 존 시밍스 박사와 재혼했는데, 그는 여러 차례 왕립의과대학 학장을 지낸 인물로 던의 형제들을 교육시켰다.

1640년 던의 〈생애 Life〉를 출판한 아이작 월턴에 따르면, 던은 집에서 가톨릭교도인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다가, 1584년 10월 형 헨리와 함께 옥스퍼드의 하트홀(하트퍼드 칼리지의 전신)에 입학했다. 월턴에 따르면 던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낸 뒤 케임브리지대학교로 전학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증명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수장령(Act of Supremacy)과 영국국교회의 39개 조항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는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아 어느 대학의 학위도 받지 못했다.

그뒤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 1591년 5월경 새비스 인(Thavies Inn)에 법학생으로 등록했고 1592년 3월 6일 링컨스 인(Lincoln's Inn) 법학원으로 옮겼다. 1593년 형 헨리는 가톨릭 사제를 숨겨주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 같은 해 6월 던은 성년이 되어 아버지의 재산 중 자신의 몫을 받았다. 1594년말까지 링컨스 인 법학원에 남아 법률직에 필요한 최종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도 법학원을 정계로 나가는 통로나 실무가들과 접할 수 있는 방편으로 여겼다.

초기 관직생활과 작품활동

1596년에 카디스를 공격하는 해상과 육상 원정에 지원, 그처럼 공직을 갈망하는 많은 젠틀맨 출신 군인과 합류했다.

다음 해에는 아일랜즈 원정(Islands expedition)에 참여하여 아조레스 제도에서 스페인 보물선을 찾아다녔다. 이때 사귄 토머스 에저턴은 국새상서(國璽尙書)인 아버지 토머스 에저턴 경에게 그를 소개했다. 1598년초 토머스 경의 비서가 되어 높은 공직 진출이 보장된 직위를 맡았다. 토머스 경은 1601년 던을 의회로 보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의회의 논쟁이나 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했고, 의원의 동향을 알아서 토머스 경에게 보고하는 역할만 했던 것이 확실하다.

이무렵 가톨릭 신앙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던은 야심을 성취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다. 이무렵에 많은 시를 썼는데, 대부분은 고대 라틴 시인들의 시를 모방한 것이다. 그 작품들로는 1592년경부터 쓴 남자 동료들에게 보내는 운문편지들이 있고,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풍(風)으로 쓴 형식을 갖춘 5편의 풍자시(1593~98경)와 풍자적 서사시 〈윤회 Metempsychosis〉(1601), 오비디우스의 시를 부분적으로 모방한 연애시와 비가집(悲歌集) 1권, 마르티알리스의 시를 다소 모방한 경구시(警句詩)가 있다.

그러나 고전적인 양식을 위트와 대담한 상상력으로 변형시킨 그의 시는 매우 독창적이다. 1601년경에 쓴 다양한 경향의 많은 연애시들은 유명한 시에 속한다. 이무렵의 시는 활력과 사실성, 열정이 넘쳐흘러 젊은시절 던의 활달한 생각과 행동을 반영한다. 동시대인 리처드 베이커 경은 던에 대해 "무절제(부주의)하지 않고 깔끔하여 귀부인과 숙녀들을 자주 방문하고 연극을 즐기는 기발한 착상의 운문의 대가"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던이 일생 동안 보여준 도덕적 엄격성과 진지성은 젊어서의 바람기를 믿기 어렵게 한다. 영국 극의 전성기에 극장 출입이 잦았다는 것은 그가 관심을 기울인 문학과 학문의 다양한 양상 중 하나를 반영하는 데 불과하다. 월턴은 던이 일생 동안 유별나게 학문에 전념한 점을 강조하는데, 그는 일찍이 1593년부터 영국 교회와 로마 교회 사이의 쟁점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방문한 '부인들'이란 후에 후원자가 된 귀족부인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던은 위트와 매력이 있어서 국새상서 집안의 부인들에게 총애를 받았다.

특히 로슬리파크의 조지 모어 경의 딸이며 에저턴의 둘째 부인의 조카이자 피보호자인 앤 모어가 그를 좋아했다. 앤의 아버지는 1601년 의회가 소집되자 런던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둘은 비밀리에 만났는데 야심 많고 저명한 조지 경의 결혼동의를 얻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1601년 12월초 비밀리에 결혼했다. 이것은 예법과 교회법에 모두 위배되는 일이었으며, 사랑을 위해 그토록 큰 모험을 한 것은 월턴이 지적했듯이 "그의 인생 최대의 오류"였다. 1602년 2월 던이 조지 경에게 결혼사실을 알리자, 화가 난 장인은 그를 몇 달 동안 투옥시켰고 에저턴에게 그를 해고하게 했으며, 이 문제를 고등판무단 재판소에까지 올렸다.

판무관들은 이 결혼이 유효하다고 판정했으나, 던에게는 힘들고 긴 실업 상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사랑은 꺾이지 않았다.

성직자 시절

처음에는 서리 주 피어퍼드에 있는 에저턴 부인의 아들 프랜시스 울리 경의 집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여기에서 약 1년 동안 가족을 떠나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하기도 했다. 1606~11년에는 런던 남부의 미첨에 집을 마련하고 런던에도 아파트를 얻었다. 뒷날 더럼의 주교가 된 토머스 모튼을 도와 가톨릭교를 비방하는 논쟁적인 팜플렛에서 특히 제임스 1세가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충성서약을 강요하는 것을 옹호하는 일을 한 듯하다. 여기서 던은 〈사이비 순교자 Pseudo-martyr〉(1610)라는, 왕을 지지하는 인상적인 선전문을 썼는데, 이 글로 인정을 받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쟁의 여파로 쓴 것이 예수회 수사를 공격하는 환상적 풍자문 〈이그나티우스의 비밀회의 Ignatius his Conclave〉(1611, 라틴어와 영어로 출판)이다.

던은 삶의 방향을 잃고 낙심하기도 했다.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사람은 목숨을 올바로 지켜야 한다는 내용의 추론식 저작 〈자살론 Biathanatos〉(1608경, 출판 1646)을 쓰면서 생각을 고쳤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계속 겪었다.

머튼은 그에게 영국국교회 목사가 되라고 여러 차례 설득했고, 1607년에는 자신이 사임한 성직을 제의했다. 그러나 던은 자신이 자격도 없고 뚜렷한 소명도 없다는 이유로 수락하지 않았으며 계속하여 세속적 직업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더구나 〈사이비 순교자〉를 썼을 무렵 제임스 왕은 던이 성직에 몸담기를 바라며 세속 직업을 갖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던도 물론 한동안은 영국성공회교도였다. 1596~97년에 반대파 가톨릭교도와 맞선 신교도인 여왕을 섬겼고, 에저턴 밑에 있기 전에 공식적으로는 가톨릭교를 포기했다.

그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주요교리를 받아들이는 교회는 모두 정당하며, 행정·의식 등 '종교와 무관한' 문제는 각 나라의 관행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확신을 얻기 위한 그의 노력은 1607~13년에 쓴 종교시들에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영시(英詩) 가운데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던은 뒤늦게 지불된 아내의 지참금과 베드퍼드 백작부인 루시 러셀의 후원(1607 이후)으로 늘어나는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루시 러셀과 다른 귀부인들에게 매우 독창적인 운문 편지를 보냈으며 베드퍼드 부인의 친척이 죽으면 비가(悲歌)를 지어주었다.

1611년에는 로버트 드루어리 경이 새 후원자가 되었다. 1611~12년에 던은 그와 함께 프랑스와 북해, 연안 저지대를 여행했으며, 드루어리는 1612년까지 런던 저택의 부속채에 던 가족이 살도록 해주었다. 드루어리의 어린 딸 엘리자베스가 죽었을 때 비가를 썼고, 1611년과 1612년에도 역시 그녀의 죽음을 기리어 〈기일 Anniversaries〉을 썼다.

이 시들에서는 주로 부패한 세계를 깊이 있게 풍자적으로 '해부'하는 한편, 천상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인간의 영혼이 승천하는 것을 관조했다. 여전히 공직을 찾으면서, 1612년 헨리 왕자가 죽었을 때와, 1613년 엘리자베스 공주가 팔츠 선거후(侯) 프레더릭 5세와 결혼했을 때에도 시를 바쳤다. 1614년에 열린 '썩은' 의회에 참석하여 특별위원회 4곳에서 일했다. 던은 공직을 얻는 데 도움을 받으려고 사귀었던 궁정 총신 서머싯 백작 로버트 카르와 악명높던 에식스 백작부인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혼시를 지었다.

1614년 후반에 드디어 궁정에서 자리를 얻을 것 같았으나, 이번에도 왕이 교회 밖의 자리를 주는 데 반대했다. 마침내 신의 대리자인 왕에 의해 성직에의 소명을 받은 것이라는 점을 확신한 그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한 뒤에 〈신성론 Essayes in Divinity〉을 완성했고, 교회에서 진로를 시작했다.

1615년 1월 23일에 존 킹 주교로부터 부제(副祭)와 사제직을 임명받았다.

곧 승급이 되어 왕실목사가 되었고, 왕의 명령으로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616~21년에는 왕의 하사로 헌팅턴셔에 있는 케이스턴의 교구를 얻게 되었고, 전에 그가 섬겼던 에저턴이 자청해서 1616년 켄트에 있는 세븐오크스의 교구를 주었으며, 1622년에는 베드퍼드셔에 있는 블러넘의 교구를 받게 되었다. 1624년부터 죽을 때까지 런던에 있는 서쪽 세인트던스턴의 교구신부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을 치유할' 유급 성직자의 특정직을 법이 왕실목사에게 허용한 대로 2곳에만 한정했다.

1616년 10월부터 링컨스 인 법학원에서 리더(reader:목사이자 정신적 지도자)의 중요 직책을 얻었다. 그의 설교는 곧 힘과 웅변력을 지니게 되었다. 1617년 8월 던의 아내는 12번째의 아이를 사산하다 죽었다. 그는 몹시 슬퍼했으며 더욱 종교생활에 헌신하게 되었다. 아내가 죽은 후 오랫동안 건강이 나빠 친구들을 염려하게 했으며, 1619년에 링컨스 인 법학원을 그만두고, 30년전쟁 초기에 돈캐스터 자작인 제임스 헤이의 사절단과 함께 목사의 자격으로 독일과 보헤미아의 군주들을 방문했다. 1620년초 영국으로 돌아와 1621년 11월 22일 세인트폴 성당의 수석사제로 임명되었다.

여기에서 부딪친 많은 일을 던은 아주 양심적으로 처리해나갔다. 세인트폴 성당의 관리기록부는 그의 유능함과 성실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1625년 제임스 왕이 죽었지만 그의 지위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왕위에 오른 찰스 1세는 그를 성직자며 시인으로서 존경했다. 그러나 찰스 1세의 즉위 후 던이 쓴 시는 '성가' 3편, 종교 소네트 2~3편, 제임스 해밀턴 경의 죽음을 추모하여 쓴 비가가 전부이다. 그는 모든 창의력을 설교와, 심한 재귀열(1624)에서 회복되면서 쓴 산문 〈비상시의 기도문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에 쏟았다.

중요한 설교문 몇 편을 더 발표하기도 했으나, 런던을 휩쓴 심한 흑사병을 피해 모들린 허버트(댄버스 부인)의 집에 피신해 있던 1625년과 사위의 집에서 병을 치료하던 1630년에 자신이 메모해놓았던 설교문 100편을 옮겨 정리했고 이것을 그가 죽은 뒤 아들이 출판했다. 말년에는 친구와 후원자, 자식들(그가 죽을 때 6명만 생존)의 죽음을 겪어야만 했고 1631년 1월에 노모마저 죽자 슬픈 나날을 보냈다.

병으로 쇠약해졌지만 1631년 2월 25일에 궁정에서 마지막 설교(〈죽음의 결투 Death's duell〉로 사후 출판)를 했으며, 그 다음날 차터하우스(Charterhouse)의 간사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했고, 3월 21일 마지막으로 성당 일을 했다. 던은 1631년 3월 31일에 죽었고, 4월 3일 성당에 묻혔다. 월턴의 말에 따르면, 던은 마지막으로 병이 들었을 때 수의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바탕으로 하여 니콜라스 스톤은 흰 대리석으로 된 조상(彫像)을 만들었는데,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세인트폴 옛 성당이 소실되었을 때 기념물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되어 지금 성당의 남쪽 복도에 세워져 있다.

사후의 명성

던은 〈기일〉을 출판할 때 친구들에게 "운문으로 된 아무 글이나 인쇄한" 데 대해 사과했다.

왜냐하면 그당시에는 시를 인쇄한다는 것이 다분히 상업적인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쓴 시 가운데 1편만이 자필로 남아 있고, 대부분은 비교적 규모는 작지만 그의 시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돌려 읽은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이미 출판된 소수의 시들을 제외하고 그의 첫 시집 〈시집 Poems〉(1633, 1635)은 실제로 이런 복사본을 모은 것이었다. 〈시집〉은 던이 죽은 뒤 90년 사이에 8번이나 출판될 만큼 인기가 있었으나 18세기에 그의 작품은 일반적 취향에 맞지 않았고, 그는 위대하지만 별난 '기지'(wit)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9세기초부터 예리한 독자들은 던의 시적 천재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시뿐 아니라 설교문도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시인이자 산문작가로서 17세기와 20세기의 작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들은 던의 기지 섞인 논리와 열정의 겸비, 복잡한 마음상태의 극적 표출, 참신하고 과감한 이미지, 셰익스피어와 비교해도 거의 손색이 없을 만큼 평범한 말로 영어의 진수를 살리면서 풍부한 시적 의미를 창출해내는 능력 등에서 자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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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려 아쉬운 것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골목길을 채우던 두부장수의 종소리, 교정에서 울리던 종소리, 색채처럼 동네를 물들였던 교회 종소리, 사람이 손수 채를 흔들어 울렸던 따뜻하고 신비로운 종소리가 그립습니다. 정각마다 마룻바닥에 부서져 내리던 벽시계의 종소리도요. 사찰의 종소리와 달리 그 종소리들은 생활과 잇닿아 있어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종을 처음 만든 것은 고대 중국에서였습니다. 제사를 비롯한 종교의식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요. 음악을 연주하는 용도로 쓰였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지만, 사찰에서 풍경을 다는 이유가 부처님께 소리공양을 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종소리 자체가 종교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B.C.2세기 진나라 황궁에 6개의 커다란 종이 설치되면서 종교 외에도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가 되었다고 하지요.

서양에서 종을 만들기 시작한 것 역시 종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종소리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에 높은 종탑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종을 달아 먼 곳까지 소리가 전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종소리가 시각을 알리는 등의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소리, 종소리. 옛날 사람들이 시각적인 것뿐 아니라 청각적인 것에도 마음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건축물을 포함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사라졌을 때 표시가 납니다. 반면에 귀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은 사라진 후에도 잘 인지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한 번 사라진 소리는 영영 돌아오기 힘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주변에 사라진 소리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풍경을 저장하듯, 소리도 저장해놓고 싶습니다. 그렇게 막연히 종소리를 그리워하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몇 년 전, 파리 여행 중에 생제르맹데프레에 있는 카페 마고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9월 중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날씨가 꽤 쌀쌀해 실내에 앉았는데, 창밖으로 교회가 보였습니다. 그 교회가 558년에 건립됐으며 프랑스 대혁명 때 대부분 파괴됐다가 19세기 초에 지어진, 꽤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교회라는 사실은 알지도 못했습니다. 일요일도 아닌데 갑자기 종이 울렸습니다. 힘차고 명징했습니다. 종소리가 음표가 돼서 온 도시에 날리는 것 같았습니다. 파리에서 보았던 그 무엇보다 그날 들었던 종소리가 가장 반갑고 기뻤습니다. 진짜 종이 울리는 소리였으니까요.

세상의 모든 종은 짧게 울리고, 소리는 꼬리를 드리우다 이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종소리가 끝났을 때 더 이상 욕심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던 모양입니다. 옆자리에 앉은 프랑스 할머니가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교회를 가리키며 프랑스어로 뭐라고 말하는데, 프랑스어를 몰라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기 봐요. 결혼식이야.” 정말 신랑신부가 교회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젊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종소리가 축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부부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동시에 가장 장대한 서사를 향해 출발한 그들을 위하여 종은 울리고 있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입 맞추는 예쁜 모습을 보며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첫 키스가 막 이루어지려는 순간 여자가 수줍게 반짝이며 물었지요. “코는 어디에 두어야 하나요?” 그 말 덕분에 남자의 심장 박동수는 더 올라갔을 겁니다.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했던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속 명장면이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의 종이 사람이 죽었을 때 부음을 알리는 용도였다고 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종을 때려서 울리는 것은 사람이고, 종을 울리는 이유는 누군가의 죽음을 널리 알려 애도하도록 하기 위해서니까요.

이 구절은 영국의 시인이자 성직자였던 존 던이 1624년에 쓴 기도문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명상〉에 처음 나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 기도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에스파냐 내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937년 5월 말, 토요일 오후부터 다음 주 화요일 낮까지를 배경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헤밍웨이는 전장에서 숱한 죽음을 목격했으며 스스로도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존 던은 기도문을 심한 고열 속에서 썼습니다. 같은 고열로 아내와 두 아이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서양에서는 누군가 죽으면 교회의 종을 울리는데 존 던이 그 소리를 듣고 누가 죽었는지 알아보려고 심부름하는 아이를 보내려다 관둡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종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때 존 던이 썼던 기도문 중 일부를 옮기면 이렇습니다.

누구든 그 스스로 완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부분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흙덩이가 바다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어떤 높은 곳이 바다에 잠겨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 혹은 그대 자신 소유의 땅이 물에 잠겨도 마찬가지니라.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느니.
- 존 던, 기도문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명상〉 중에서

종이 울립니다. 죽은 자를 위해 울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위해 울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잃은 후에 작아져버린 우리를 위해 울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헤밍웨이가 에스파냐 내전에서 깨우친 것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죽음이 나의 생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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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

 

   묵상 17번 중에서  

 

 

............前略........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에 흙덩어리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된다면,

유럽 땅은 또 그 만큼 작아질 것 이며,

만일에 모랫벌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어라.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되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지는 말지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기에.

.............後略.......

 

 

 

 

이별의 말 -  哀悼를 금함

 

          

점잖은 사람들은 점잖게 숨지며

그들의 영혼에게 가자고 속삭인다.

 

임종을 지켜보는 슬픔어린 벗들이

숨이 졌다, 아니다, 말하고 있을 때,

 

 

그처럼 우리도 조용히 사라지세나.

눈물의 홍수나 한숨의 폭풍이 없이

 

속물들에게 사랑을 알린다는 것은

우리 기쁨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지구가 움직이면 재난과 공포가 따르고

사람들은 그 피해와 의미를 계산한다.

 

전체의 움직임은 그보다 더하지만

사람에게 끼치는 해로움은 덜하다.

 

 

우둔한 속세 사람들의 사랑이란 것은

그들이 오로지 관능만을 아는지라

 

이별을 이겨내지 못한다. 이별은

사랑의 요소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별을 모를 만큼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믿고 있고

 

사랑으로 세련되어 있음으로 해서

눈, 입, 손이 없음을 탓하지 않는다.

 

 

우리 둘의 영혼은 결국 하나이니

내가 떠난다 해도 헤어짐이 아니요

 

가공해서 엷어진 금박 모양으로

오로지 넓게 확장되는 것뿐이다.

 

 

우리 영혼이 만일 둘이라 하더라도

콤파스의 다리처럼 한데 붙은 둘이다.

 

고정된 다리인 당신의 영혼은

다른 다리를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다.

 

 

당신의 다리가 중심에 서 있어도

상대방이 멀리 움직여 떠날 때면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쪽이 돌아와야 곧게 일어선다.

 

 

당신도 나에게 정녕 그러리라.

비스듬한 다리처럼 움직이겠지만

 

당신의 확고함이 내 원을 바르게 하고

내 출발한 곳에서 끝나게 한다.

 

 

 

@@ 이 시의 상대자는 던의 아내 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잠시 동안의 이별이매 눈물에 젖어 이별하지 말자는 호소이다.

 

지리상의 발견이라든가 썰물과 밀물에 관한 천문학이라든가

지구의라든가 하는 따위의 르네상스의 새로운 과학도구를 도입하여

사상의 애호가다운 면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때로 사랑은 사람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정열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그런 변화가 생겨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결국 이별을 탄식한다고 하는 애정의 표현이 실은 사랑을 죽이는

일이 된다는 패러독스를 완성시키고 있다.

 

 

내 마음을 치소서

 

                  

내 마음을 치소서, 삼위일체 하느님

노크하고 숨쉬고 빛내고 고치려 마시고

 

내가 살 수 있도록 나를 밀고, 깨뜨리고,

불고, 태우고, 내가 새로워지게 당신 힘을 기울이소서.

 

 

나란 것은 적에게 점령된 포위된 도시,

당신을 맞으려 하나, 오, 소용이 없나이다.

 

내게 있는 당신의 섭리와 이성이 나를 막아야 하나

오히려 포로 되어, 약하옵고 참되지 못하나이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싶은데

당신의 원수에게 팔려가게 되었나이다.

 

 

나를 떼어놓아 그 매듭을 풀고 찢어주소서.

당신한테 나를 끌고 가 옥에다 가두소서.

 

투옥될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고

겁탈될 때 나는 비로소 정숙할 수 있사오매-.

 

 

 

@@ 이 시는 형이상학파 시인 던의 논리적인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던만큼 패러독스에 찬 사람은 많지 않다.

 

가톨릭과 영국국교회, 삶과 죽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소녀에 대한 사랑 등의 대립 속에 살았는데

이 시도 그런 패러독스에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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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널리 알려진 영미 시 중에서 가장 ‘야’한 시일 것입니다. 제목부터 선정적입니다. 그리고 내용은 더 가관입니다. 한 남자가 달콤한 말로 여인을 유혹하는 시입니다.

 

 

허리 아래쪽을 다루는 이 선정적인 시는 영미 시 중에서 ‘명작’에 들어갑니다. 가끔 보면 예술가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 이성에게 이렇게 추근거렸다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사회적으로 칭송 받습니다.

 

물론 성공회 사제로 종교인이었던 존 던 본인도 이 시를 생전에 공개할 용기(?)는 없었나 봅니다. 이 시와 대부분의 그의 ‘야’한 시들은 사후에 편찬 되었습니다.

 

 

 

뭐, 읽어 보시면 아실내용이라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가능하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의역한 부분이 있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자, 한 번 봅시다.

시인이 꿀 바른 혀로 한 여인을 어떻게 유혹하는 지.

 

 

 

1. 오세요, 여인이여 오세요. 더 이상 참을 수 없구료.

내가 일을 치르기까지는, 나는 고통속에서 누워 있어야 하오.

어떤 적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다오, 싸우지도 않았지만 말이오.

 

그 허리띠를 푸시오,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는.

하지만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을 감싸고 있는.

 

그 번쩍거리는 가슴받이를 벗으시오, 당신이 입고 있는.

분주한 바보들의 눈길이 머물 수 있도록.

풀어 버리시오, 그 아름답게 어울리는 장신구를,

 

 

 

 

2. 나에게 말해주오, 이제 침대에 들 시간이라고.

저 운좋은 코르셋 자식은 벗어 버리시오, 참으로 부럽소.

아주 조용히, 지금도 당신에게 그렇게 붙어 있을 수 있다니...

 

당신이 옷을 벗으면 똑같은 아름다움이 드러난다오,

물러나는 그림자가 꽃으로 가득찬 초원을 드러내듯이.

 

그 이상한 머리 장식을 벗어 버리시오,

당신의 왕관같은 머리가 보이도록.

 

 

 

 

3. 스타킹과 구두를 벗어 버리고, 부드럽게 걸으세요,

성한 사랑의 신전인, 이 침대에서,

하늘의 천사도 남자들에게 나타났다오,

당신처럼 하얀 잠옷을 입고; 당신, 당신은 천사라오.

 

마호메트가 말한 천국이 여기구료.

악령이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나면, 쉽게 알 수 있다오.

악령들은 나의 머리카락을 곤두세우지만,

당신같은 천사들은 육신을 곤두세우기 때문이라오.

 

 

 

 

4. 헤매는 내 손길이 지나게 해주오,

앞으로, 뒤로, 사이로, 위로, 아래로...

 

오, 나의 아메리카여, 나의 신대륙이여!

나의 왕국,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위한,

보석같은 나의 왕국이여!

 

당신을 이렇게 볼 수 있다니 축복이라오!

우리가 결합하는 것은, 자유롭기 위해서라오;

내 손길이 닫는 곳에 내 영혼이 있을 것이오.

 

 

 

5. 다 벗어 버리시오! 이 모든 기쁨은 당신덕분이오.

벌거벗은 육체는 자유로운 영혼이라오.

 

완전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

당신을, 여자들이 걸치는 보석들은 아틀란타의 공같은 것이라오,

남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래서, 멍청한 사내가 보석을 보면, 그 속물적인 영혼은 보석을 쫓는다오,

여자가 아니라.

그림처럼, 혹은 책의 화려한 표지처럼, 멍청한 녀석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모든 여인들은 이렇게 보석을 걸친다오.

여인들은 신비로운 책이라오,

우아하고 고귀하며,

반드시 속살을 봐야만 하는.

 

 

 

 

6. 그렇소.

나는 당신을 알아야만 하오.

당신을 보여주시오, 아주 거리낌없이, 산파에게 그랬던 것처럼.

던져 버리시오, 그 하얀 천을;

가책은 필요 없다오, 순수함을 위해서라면.

당신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내가 먼저 벗겠소.

당신을 덮기위해 그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오?

남자로 충분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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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던
Rev. John Donne
John Donne by Isaac Oliver.jpg
출생 1572년 1월 24일과 6월 19일 사이[1]
영국 영국 런던
사망 1631년 3월 31일 (59세)
직업 시인, 비평가, 성직자
국적 영국 영국
장르 풍자연시비가, 설교
주제 사랑, 성, 종교, 죽음
부모 존 던 / 엘리자베스 헤이우드
배우자 앤 모어
종교 영국 성공회

존 던(영어: John Donne1572년 1월 24일에서 6월 19일 사이[1]~1631년 3월 31일)신부는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다.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 성공회로 전향할 때까지 종교적 박해를 경험했다. 뛰어난 교양과 운문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빈곤 속에 살아 부유한 친구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15년에 성공회 성직자가 되었고, 1621년에 세인트 폴 대성당의 수석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런 배경이 존던의 문학 작품(초기의 연애시 풍자 운문에서 말년의 종교적 설법에 이르기까지)에 반영되고 있다. 대담한 위트와 복잡한 언어를 구사하고, 연애시, 종교시, 설법을 쓴다. 형이상학파 시인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대표작에 《벼룩》, 《일출》과 같은 노래와 소네트, 《성스러운 소네트 10번》이나 《관》이라는 종교시가 있다. T. S. 엘리엇 등에 영향을 주었고,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의 제목은 존던의 설교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생애[편집]

 
젊은 날의 존 던의 초상, 1595년

존 던은 1572년 런던에서 여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로마 가톨릭 교도였던 부친은 런던에서 철물점의 관리인을 했으며 웨일즈계로 이름은 아들과 똑같은 존 던이다. 부친이 1576년에 죽자 모친 엘리자베스 헤이 우드가 아이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극작가 존 헤이우드(John Heywood)의 딸로 형제로는 번역가이자 예수회 장로인 재스퍼 헤이우드(Jasper Heywood)가 있고, 역시 로마 가톨릭 교도였다. 유명한 로마 가톨릭 순교자 토마스 모어의 여동생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이 순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종교적 이유로 추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은 예수회의 교육을 받는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죽은 지 2, 3개월 후에 유복한 홀아비로 13명의 아이가 있는 존 시밍스 박사와 재혼했다. 다음 해 1577년, 어머니와 이름이 같았던 던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죽었고, 두 명의 자매 메어리와 캐서린도 1581년에 죽었다. 던이 10세가 되기 전에 네 명의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1584년 존던은 11세의 나이로 옥스퍼드 대학교의 하트 홀(현 하트포드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3년 간 공부를 한 후 1587년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졸업에 필요한 "충성의 맹세 (Oath of Supremacy)"을 거부했기 때문에 학위를 얻지 못했다.

1590년 성공회 신자가 되었으며, 1591년, 던은 런던의 로스쿨 중 하나인 《세이뷔스 인 로스쿨》에 들어갔다. 1592년에는 다른 로스쿨인 《린컨즈 인 로스쿨》(Lincoln's Inn)로 옮겼다. 1593년, 동생 헨리가 로마 가톨릭 성직자를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헨리는 페스트 때문에 옥중에서 죽고 존 던은 로마 가톨릭 신앙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존던은 재학 중 그리고 졸업 후에 여성, 문학, 레크리에이션, 여행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던이 어디에 여행했는가는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알려진 바로는 로버트 데베로(Robert Devereux, 2nd Earl of Essex)와 월터 롤리(Sir Walter Raleigh)와 함께 카디스(1596년) 및 아조레스 제도(1597년)에서 스페인군과 싸운 것이다. 이 때 던은 스페인의 기함, ‘산 펠리페호’가 승무원과 함께 침몰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1640년에 던의 전기를 쓴 아이작 월튼에 의하면 “그는 몇 년 동안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에 머물렀으며 거기서 그는 그 나라의 정부의 법과 관습을 유익하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 나라의 말을 완전하게 습득하고 나서 귀국했다”고 적고 있다.

앤 모어와의 결혼[편집]

이렇게 해서 던은 25세가 될 때까지 외교관 예비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국새 담담관 토마스 에저톤(Thomas Egerton, 1st Viscount Brackley)의 제1비서로 임명되어 잉글랜드 사교계의 중심 화이트홀 궁전에 가까운 에저톤의 런던의 저택 요크 하우스(York House, Strand)에 살았다. 거기서 4년 간 일하고 있는 동안에, 던은 에저톤의 17세 질녀(14세, 16세라고 하는 설도 있다) 앤 모어와 사랑에 빠졌다. 둘은 1601년, 에저톤과 앤의 아버지로 런던탑 장관 대리 조지 모어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결혼했다. 이것으로 던의 지금까지의 경력은 엉망이 되었을 뿐 아니라, 둘을 결혼시킨 성공회 사제와 결혼식 입회인을 연기한 남자도 플리트 감옥(Fleet Prison)으로 잠시 투옥되었다. 결혼이 합법적이라고 인정받아 석방되었지만, 월튼에 의하면던은 아내 앞으로 보낸 편지에, "John Donne, Anne Donne, Un-done(존 던, 앤 던, 안 끝났어요!)"라고 썼다고 한다. 던이 장인과 화해하고 지참금을 받은 것은 1609년이 되고 나서였다.

 
존 던의 파포드 집 일부

석방 후, 던은 세레이의 파포드 (Pyrford)라는 시골에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 3년동안 던은 변호사로서 가난 생활을 하며, 아내의 사촌형제인 서 프랜시스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앤 던은 거의 매년 아이를 출산했으므로, 사촌의 호의는 매우 후한 것이었다.

사별[편집]

던은 변호사 외에도 토마스 모튼(Thomas Morton)의 소논문 집필자 조수도 겸했지만, 가족이 늘어나서 생활은 항상 불안정했다. 앤과의 사이에 16년동안 12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중 두 명은 사산했다. 그의 딸 프랜시스와 메어리는 10세가 되기 전에 죽었지만, 던은 장례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던은 대담한 자살의 변명 「비아사나도스(Biathanatos)」를 썼지만 출판은 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앤은 1617년 8월 15일 12번째 아이를 출산한 지 5일만에 사망했다. 그는 깊이 슬퍼했으며, 이 때 17th Holy Sonnet을 썼다. 그는 이후 재혼을 하지 못했으며, 이것은 부양 가족이 많은 그에게 당시로서는 꽤나 특이한 것이었다.

초기시의 특징[편집]

 
'Divine Poems'의 표지의 일부

던의 초기시는 영국 사교계를 날카로운 비판을 향한 것이었다. 법체계의 타락, 이류 시인, 오만한 대신들 같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일반적인 사건을 주제로 한 던의 풍자시는 지적 세련미와 부정적인 이미지 (병, 구토, 거름, 전염병)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풍자시 III'는 던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 즉 진정한 종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던은 기본 전통에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인간의 신앙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왜냐하면 "A Harry, or a Martin taught this (해리나 마르탱이 이렇게 가르쳤다)"라고 했으며, 심판의 날에는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던의 초기시에서는 에로틱한 표현으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그의 엘레지에서 그는 비관습적인 은유를 사용했는데, ‘벼룩(The Flea)’이라는 구절에서 두 연인을 무는 벼룩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성교에 비유된다. 엘레지 19번 〈자고있는 애인에게〉('To His Mistress Going to Bed)에서는 그는 시적으로 연인의 옷을 벗기는데 이것은 아메리카 대륙의 탐사를 애무 행위로 비유하고 있다.

경력과 후반기 삶[편집]

후원자[편집]

1602년, 결혼 후 1년만에 던은 헌법 기관인 브랙클리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유급직이 아니어서 가족을 부양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결국 그는 부유한 친구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2] 당시 유행하는 동인 시는 그에게 후원자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이 시기에 그의 부유한 친구나 후원자를 위해 많은 시가 만들어졌다. 그 중 1610년에 주요 후원자였던 ‘로버트 드루리 경’도 있었다. 존던이 그를 위해 쓴 두 개의 축사가 1611년에 쓴 《세상의 해부》(An Anatomy of the World) 와 1612년에 쓴 《진보하는 영혼의》(Of the Progress of the Soul)라는 시가 있다.

제임스 1세와의 만남[편집]

던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떠난 진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영국 왕 제임스 1세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1610년과 1611년에 두 개의 반 로마 가톨릭 논설을 썼는데, 《사이비 순교자》(Pseudo - Martyr)와 《이그나티우스의 비밀회의》(Ignatius his Conclave)가 그것이다.[2] 제임스 1세가 이 작품을 기뻐하여 입조를 권유했지만, 존 던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성직자가 되는 길을 택한다.

 
죽기 2~3개월 전 묵시 기도 때 그린 초상화로 부할의 때를 위해 이 초상화를 의뢰했다. 그는 덧없는 인생의 유품으로 이 초상화를 벽에 걸었다.

성공회 사제[편집]

존 던은 처음에는 성직자가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제임스 1세의 요청을 받아, 1615년 영국 성공회의 신부가 된다. 1615년 말, 던은 왕실예배당의 사제(Ecclesiastical Household)가 되었고, 1616년에는 링컨즈 인(Lincoln 's Inn) 로스쿨 신학 교수 (Reader of Divinity)가 되었고, 1618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 1618년 말 제임스 헤이 자작 (James Hay, 1st Earl of Carlisle)을 따라 독일로 가서 1620년에 귀국을 하였다.[3] 1621년, 던은 영국 성공회 교회인 세인트 폴 대성당의 수석사제가 되었고,1631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던이 수석 사제로 목회하고 있던 시기에 딸 루시가 18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1623년 11월말에서12월 초에는 장티푸스나 감기 합병증으로 생각되는 중병에 걸려서 7일동안 지속되는 고열로 죽을 뻔하기도 했다. 회복 때까지 던은 건강, 고통, 질병에 대한 일련의 명상과 기도를 썼고, 그것은 1624년에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명상》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헤밍웨이의 같은 이름의 소설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구절은 "아무도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라는 글에서 나온 말이다.

1624년 던은 세인트 던스탄 인 더 웨스트(St Dunstan-in-the-West) 교회의 교구 사제가 되었고, 1625년에는 찰스 1세를 위한 왕실 예배당의 사제가 된다. 던은 깊은 감동을 주는 웅변적인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설교 160편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중에는 1631년 2월에 화이트홀 궁전의 찰스 1세의 앞에서 설교한 《죽음의 결투》(Death's Duel)가 있다. 1631년 3월 31일, 던 위암으로 사망했다. 생전 출판되지 않았던 엄청난 시가 남겨졌다. 던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던이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라틴어 에피그라프와 함께, 성 카타비라에 둘러싸인 기념상이 만들어졌다. 이 상은 1666년의 런던 대화재 때에도, 타지 않고 무사히 남았다

후기 시[편집]

...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e;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 (1624)

누구의 죽음도 나를 위축시킨다. 나는 인류에 포함되기 때문에 ... 그러니 누구 때문에 종이 울리느냐고(누가 죽었냐고)알려 하지 마라. 종은 바로 당신을 위해 울린다.

어떤 이는 질병, 경제적 빈곤, 친구들의 죽음이 모두 존 던의 후기 시에서 나타나는 음산하고, 경건한 톤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변화는 던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로버트 드루리 경의 딸 엘리자베스 드루리의 추억에 바친 시 《세상의 해부》(An Anatomy of the World, 1611년)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집에서 엘리자베스의 죽음을 인간의 타락과 우주 붕괴의 상징으로 사용하면서,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다.

《가장 짧은 날을 산 성 루시의 날들에 대한 야상곡》(A Nocturnal upon S. Lucy’s Day, being the shortest day)라는 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던의 절망을 노래한다. 그 시에서 던은 “나는 죽거나 없는, 또는 암흑, 죽음에서 소생한 모든 무생물이다.”라는 말로 철저한 타협과 절망을 표현했다. 이 유명한 구절은 1627년, 던의 친구인 루시(베드포드 백작 부인)와 딸 루시 두 사람이 죽었을 때 쓰여진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3년 후 1630년, 성 루시의 날 (12월 13일)에 자신의 유언을 쓴 것이다.

종교시인[편집]

던의 우울한 톤이 높아진 것은 유사한 시기에 쓰기 시작한 종교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회의론적이었던 던의 초기의 믿음은 이 시기에 성서가 가르쳐 온 전통적이면서, 확고한 신앙으로 변해 있었다. 로마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전향했던 던은 종교적인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던은 순식간에 마음 깊이 파고드는 설교와 종교시로 높은 명성을 떨쳤다. 특히,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토머스 머턴(Thomas Merton)의 《누구도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의 제목은 그런 설교 구절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최후를 향해가고 있음을 느낀 던은 죽음에 도전하는 시를 썼다. 그것은 죽은 사람은 영생을 위해 천국에 간다는 던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 예로, 《죽음아, 오만해 하지마라》(Death, be not proud)의 한 구절로 알려진 '홀리 소네트 10번'이다. 1631년 사순절 기간 동안 죽음에 가까이 있었던 때도, 던은 병상에서 일어나 《죽음의 결투》를 설교하였고, 그것은 후에 자신의 장례식 설교에 사용되었다. 《죽음의 결투》는 인생을 고통과 죽음으로 향하도록 결정하는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구원과 불사 속에 희망을 찾는 것이다.

그는 설교시 아타나시우스 대주교 등 초대교회 교부들의 성서연구성과들을 소개하되, 성서말씀들을 많이 인용하였다. 저서로는 《긴급한 상황에서의 신앙》(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1623년),《노래와 소네트집》(Song and Sonnets)(1633년) 등이 있다.

시풍[편집]

존 던은 17세기에 들어 와 전혀 닮은 곳이 없는 두 개의 개념을 하나로 결합하여 확장을 하는 은유,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비유(Metaphysical conceit)"의 달인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은 삶과 그 기쁨에 대한 건강한 욕구를 암시하며, 반면에 깊은 감정들을 표출하기도 한다. 그는 이것을 기발한 비유(conceits), 재치, 그리고 지성을 통해 이루었으며, 그의 시 《떠오르는 태양》(The Sun Rising)과 《내 심장을 두드려라》(Batter My Heart)에서 보여주고 있다.

엘리자베스의 다른 시, 예를 들어 "장미"와 "애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진부한 표현으로 대비되는 페트라르카 풍의 비유와 달리 형이상학적인 비유는 대비되는 것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급진적 역설 또는 내부 반분열법도 때때로 그러한 것이다). 던의 비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슬픔을 금하고》 (A Valediction : Forbidding Mourning)라는 글에서 헤어진 ‘두 연인’과 나침반의 ‘두 바늘’을 대비시킨 것이다.

던의 작품은 풍부한 기지와 역설과 미묘한 너스레, 그러나 주목할 만한 비유를 포함한다. 던의 작품은 때로 사랑과 인간의 모티브에 대해 냉소적이다. 그의 시의 일반적인 테마는 사랑(특히 그 인생 초기), 죽음 (특히 아내의 죽음), 그리고 종교이다.

존 던의 시는 고전적인 형식에서, 보다 개인적인 시의 형식으로 방향 전환하고 있다. 시의 운율도 특징이며, 일상 회화와 매우 유사하고, 신경질적인 리듬으로 구축되어있다 (그 점을 꼬집어 고전적인 자질을 가진 벤 존슨은 “악센트를 지키지 않은 던은 교수형감이다”고 비난을 했다.). 던의 후계자들은 던의 작품을 양면적인 가치로 간주하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고전주의 시인들은 던의 형이상학적인 비유를 은유의 오용으로 주시했다. 코울릿지나 브라우닝 같은 낭만주의자에게 던은 재평가되어 20세기 초반에는 반낭만주의자인 T. S. 엘리엇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1999년에 퓰리처상 연극 부문을 수상했던 마가렛 에도슨의 《위트》는 존 던의 시가 이야기의 핵심이다.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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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ems (1634)
  • Poems on Several Occasions (2001)
  • Love Poems (1905)
  • John Donne: Divine Poems (Holy Sonnets 포함), Sermons, Devotions and Prayers (1990)
  • The Complete English Poems (1991)
  • John Donne's Poetry (1991)
  • John Donne: The Major Works (2000)
  • The Complete Poetry and Selected Prose of John Donne (2001)

산문[편집]

    ); color: rgb(34, 34, 34);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399999618530273px;">
  • 《여섯 설교》 Six Sermons (1633)
  • 《50 설교》 Fifty Sermons (1649)
  • Paradoxes, Problemes, Essayes, Characters (1652)
  • Essayes in Divinity (1651)
  • Sermons Never Before Published (1661)
  • John Donne's 1622 Gunpowder Plot Sermon (1996)
  •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 and Death's Duel (1999; first published in 1624)

비평[편집]

    ); color: rgb(34, 34, 34);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399999618530273px;">
  • John Carey, John Donne: Life, Mind and Art, (London 1981)
  • A. L. Clements (ed.) John Donne's Poetry (New York and London, 1966)
  • Stevie Davies, John Donne (Northcote House, Plymouth, 1994)
  • T. S. Eliot, "The Metaphysical Poets", Selected Essays, (London 1969)
  • G. Hammond (ed.) The Metaphysical Poets: A Casebook, (London 1986)
  • Sir Geoffrey Keynes, Bibliography of Donne, (Cambridge, 1958)
  • George Klawitter, The Enigmatic Narrator: The Voicing of Same-Sex Love in the Poetry of John Donne (Peter Lang, 1994)
  • Arthur F. Marotti, John Donne, Coterie Poet,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6)
  • H. L. Meakin, John Donne's Articulations of the Feminine, (Oxford, 1999)
  • Joe Nutt, John Donne: The Poems, (New York and London 1999)
  • E.M. Simpson, A Study of the Prose Works of John Donne, (Oxford, 1962)
  • C. L. Summers and T. L. Pebworth (eds.) The Eagle and the Dove: Reassessing John Donne (Columbia: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1986)
  • John Stachniewski, The Persecutory Imagination, (Oxford, 1991)
  • Ceri Sullivan, The Rhetoric of the Conscience in Donne, Herbert, and Vaughan (Oxford 2008)
  • James Winny, A Preface to Donne (New York, 1981)
  • Francis William Teodoro, A New Tomorrow Needs Us
  • James Lyle Canda, Someone is Needing My Love
  • Pauline T.C Algas, Two Against My One Heart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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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회
  • 영국 문학

각주[편집]

  1. ↑ 이동:  Colclough, "Donne, John (1572–1631)",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2004년 9월; online edn, 2007년 10월. ) 100% 50%;">oxforddnb.com.
  2. ↑ 이동:   Jokinen, Anniina. "The Life of John Donne." Luminarium. 22 June 2006. Accessed 22 January 2007.
  3. 이동 Jokinen, Anniina "The Life of John Donne."Luminarium. 22 June 2006. Accessed 2007-01-22.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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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돈 신부와 영국 성공회 설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오덕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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