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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를 알려면 현대시의 구조를 알아야...
2017년 04월 05일 23시 21분  조회:3306  추천:0  작성자: 죽림
현대시의 구조

저자 후고 프리드리히

출판 지식을만드는지식

발매 2013.05.13.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짧지만 무겁다. 책 한 권이 될 정도로 답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운율을 담은 언어 예술'이라고 누군가 정의를 내렸다 하더라도 시의 전체가 온전히 규명되지는 못한다. 지극히 일부만을 살짝 들춰낼 수 있을 뿐이다. 한 권 분량으로 질문에 답하더라도 그것이 시의 실체를 온전히 보여주지도 못한다. 이론적 설명만으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품은 아름다움을 설명해낼 수는 없다. 개별 작품과 직접 대면하고 소통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현대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어떠한가. 범위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난감하다. '현대시'라는 용어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를 현대라고 부를 것인가? 특정 시기 이후의 시는 모두 현대시인가? 아니라면 현대시의 범주에 포함되는 작품은 무엇인가? 어떤 특성을 가져야 하는가? 왜 그러한 특성이어야 하는가? 하나의 질문에 딸려나오는 논점들이 하나 같이 명쾌히 해결하기 어렵다. 

  그런데 책 『현대시의 구조』는 이처럼 난처한 질문에 답하려 한다. '구조'라는 개념으로 현대시의 전체상을 그려내려 한 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가 이야기하는 구조란 무엇인가? "문학 현상에 있어서 '구조'는 유기적인 구성체, 상이한 것들 속에 내재하는 유형적인 공통점을 가리킨다. (중략) 서로 간에 영향을 주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개별적인 특성들이 서로 일치하고 상호 해명될 수 있으며, 동일한 성층(成層)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기 때문에 우연으로 간주될 수 없는 일련의 시 작품들의 전체상이 여기에서 의도하는바 '구조'의 의미다."(8~9쪽, 「제9판 서문」) 간추리자면 구조는 개별 작품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의 특성, 상동성이다. 예술작품은 특수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고유하다. 그러므로 공통성을 찾아서 묶는 이론적 행위에 저항한다. 저자도 이 점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시의 범주에 포함되는 여러 시들에게서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구조를 발견했으며 그 구조가 현대시를 현대시답게 해주는 요인임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문학과 미술, 음악은 알면 알수록 미궁 속을 헤매는 느낌이 든다. 정전으로 등극한 작품들을 접하면서 예술사의 흐름을 짚어가는 입문 단계를 지나면 문학사와 미술사, 음악사에서 언급하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어째서 기념비인지 궁금해진다. 지금도 한 해에 수천 편의 시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 훌륭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어떻게 선별할 수 있을까? 누가 선정하였고, 누가 동의하였는가? 이 작품이 현재에 비평의 대상으로 검토할 만큼 중요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와 토대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의 평가와 후세의 평가가 다른 경우에는 그 작품의 가치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가령, 1920년대에 김소월보다 김억이 훨씬 유명했지만 오늘날 대다수는 김소월을 기억하며, 모네의 <인상-해돋이>는 출품 당시 조롱거리였지만 오늘날에는 미술사에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그것이 중요해진 것은 탁월하기 때문인가, 새롭기 때문인가? 작품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오늘날 유통되는 예술은 '작품성'을 운운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다음과 같은 작품은 예술적으로 훌륭한가?

 

마티스, <달팽이>, 종이에 구아슈, 콜라주, 286X287, 1953.


  마티스 말년의 대표 작품이다. 달팽이 껍질의 소용돌이 무늬를 색종이를 오려붙여서 형상화했다. 나는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마티스의 작품이라고 해서 놀랐고, 말년의 대표작이라서 또 한 번 놀랐다. 이것은 어린이의 작품 아닌가? 내 딸도 이런 식으로 색종이를 자르고 붙여서 알록달록하게 종이를 꾸민다. 이 작품이 훌륭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미술비평가, 미술사학자들은 훌륭하다고 평가한다. 훌륭함의 기준을 나 같은 아마추어 감상자는 묘사의 디테일과 사실성에서 찾을 테지만 전문가들은 미술가의 정신이나 새로움의 시도에서 찾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평가의 기준이 다름을 이해하더라도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상대주의로 도피하면 도무지 미술사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을 터이다. 미술사나 문학사에 기록되는 작품은 그만한 가치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임의적인 선택의 산물이라고 치부하는 건 편하지만 참된 길은 아니다. 

  현대 예술의 작품성을 운운하는 것은 까다로워졌다. 말로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보면 아연실색하게 된다. 말로비치가 그림을 못 그려서 캔버스를 검정색으로 가득 채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그린 어린이의 그림과 대가의 작품을 일반인이 구별할 수 없고 심지어 전문가들도 구별하기 쉽지 않은 시대에 도대체 예술은 무엇인가?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관의 영역인가 객관의 영역인가? 현대시의 경우에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시는 일반 대중과 불화한다. 상식적인 이해를 거부하는 정체불명의 언어들이 독자를 내쫓는다.

전깃줄 위에 도열한 새들에게
로시인이 말한다

    결국 동물은 발의 세계
    저마다 발 닿는 곳에 집이 있다
    새들도 마찬가지

로시인에게 저희 집은 뒤집어진 고슴도치 털 속 같은 까만 기억 속에 있어요
말해봤자 소용없다
그 까만 집으로 들어가면 실컷 찔리고 처음으로 쫓겨나요
말해봤자 소용없다

날개를 반으로 접어 어깨 속에 감추고 더러운 돼지 우리에서
밴드를 꾸려 돼지들과 함께 꿀꿀거리다 가야 한다

    네 음악은 안 돼지
    뒷걸음치며 입을 틀어막게 하는 음악은 안 돼지
    배설물 위를 뒤뚱뒤뚱 돌아다니는 음악을 음악이라 할 수 있어? 안 돼지
    더러워서 나를 화나게 하는 음악은 안 돼지

- 김혜순, <엘피 공장에서 만나요> 일부, 『피어라 돼지』, 2016

  이 시에서 '로시인'이 누구인가? 2연의 의미는 무엇일까? '날개를 반으로 접'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2연과 5연은 들여쓰기가 되어 있는 것일까? 5연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산문을 읽어나가듯 읽어도, 리듬감을 느끼려고 노력하며 낭독해도 우리는 이 시에서 수월하게 얻어낼 수 있는 내용이 없다. 이 작품은 훌륭한가, 훌륭하지 않은가? 목소리의 파편들과 리듬의 불균형성, 이미지의 비실재성으로 가득한 김혜순의 시집에 대해서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이렇게 평가한다. "이 다면체-돼지의 죽음과 부활, 희생과 구원의 서사는 「황무지」와 넓이를 겨루며 「실낙원」과 높이를 다툰다. 놀라운 일이다. 한국의 현대시가 여기에 이르렀다."(권혁웅, 「단 한편의 시 - 김혜순의 돼지복음서」) 현대시의 정점에 이르렀다는 상찬이다. 아마추어 독자는 시에 대한 접근조차 녹록치 않은데, 전문가는 작품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현대시가 무엇이길래 아름답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은 작품이 인정받는 것일까?

   『현대시의 구조』는 시의 '현대성'에 주목하고 있다. 시를 현대적으로 만들어 주는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책의 논의를 단순하게 압축하자면, 현대시의 구조적 본질은 불협화음이다. 현대시는 현실의 사물을 변형시키고, 언어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문법틀을 파괴함으로써 충격을 주고, 불가해성을 지향한다. 따라서 현대시는 이성적 사유에 따른 논리적 이해를 거부함으로써 난해해지며, 비실재성에 가까워진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실의 사물이 연결되는 관계를 해체하여 폭력적으로 연결시키는 전제적 상상력, 그러한 상상력의 수단인 데포르마시옹(변형), 추상과 아라베스크, 시 창작의 이론화와 지성의 강조, 엄격한 수학적 통제에 따른 언어 마술의 추구, 추(醜)의 상대적인 격상, 감정이나 자아를 배제하는 탈인간화, 현대 문물에 대한 거부와 매혹의 이중성, 공허한 이상성 등이 현대시의 구조임을 보들레르로부터 랭보, 말라르메를 지나 20세기에 만개한 유럽 각국의 현대시를 들어 증명해보인다.  이러한 제반 특성을 포괄하는 용어가 불협화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인들은 불협화음에 의해서 진술한다. 한정적인 말들로써 불확실성을, 간단한 문장들로써 복잡한 것을, 하나의 근거로써 근거 없는 것을(혹은 역으로), 하나의 연관으로써 연관이 없는 것을, 시간의 표시로써 공간과 무시간성을, 마술적 언어의 힘으로써 추상적인 것을, 엄격한 형식들에 의해 내용적으로 자의적인 것을, 감각적인 형상의 부분들로써 불가시적인 형상을 기술한다. 이것들은 시어의 현대적 불협화음들이다. 이것들은 이해시키기 위한 언어와는 극단적으로 상이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어임은 분며하다. 왜냐하면 언어란 마치 어떤 음향과 의미를 생성할지 예견할 수 없는 피아노의 건반과 같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언어와 함께 홀로 있을 뿐이며, 또한 언어만이 그들을 구제한다."(411쪽)


  어째서 현대시는 불협화음을 내재하게 되었는가? 후고는 연원을 루소로부터 찾는다. 루소는 기계론적 시간이 지배하는 현실을 거부하고 내면성의 시간을 되찾으라고 주문한다. 과학주의에 의해 탈신비화되는 세계에 저항하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현대성은 세계의 탈마법화와 궤를 같이하는데, 보들레르 이래로 현대성에 진입한 시인들이 되찾고자 하는 것은 진부하고 합리화된 세계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을 파괴하는 상상력이 요구된다. 현대시의 일그러진 형상은 기계론적 합리성과 과학주의에 저항하는 표식이다. 아도르노가 "예술작품은 미메시스의 도피처다."라고 언명한 바와 동일하다. 예술작품은 이미 도구적 이성이 잠식한 현실세계에서 도피하여 미메시스라는 비합리성, 마술성을 보존하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현대시는 존재 그 자체로 현실을 탄핵하고 징벌한다.

  문학을 이론적 논의로 그치면 공허해진다. 뼈대만 있고 말랑말랑한 살이 없는 건조함만 남는다. 구체적인 작품을 감상하면서 현대시의 구조를 재확인하는 작업은 필요하면서 재미도 있다. 잠시 후고 프리드리히를 흉내내보자. 

그녀에게서 훔쳐온 것은
모두에게 어울린다
사물들은 하얀 곰가죽을 덮어쓴다
부푼 보리씨가 자라고
청소용 트럭, 빨간 우체통 그리고 떠다니는 집들

자동차는 멈춰 있고
폐타이어들이 굴러다닌다, 내 애인의
유두처럼 까맣다

그런 아침 사람들은
칼날처럼 일찍 일어나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의 살해자를
찾으러 다닌다

바람에 묶인 흰 털들이 공중으로 도망친다.

- 진은영, <눈의 여왕> 전문,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는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의 살해를 목도한다. 엄정하고 객관적인 목소리의 '탈인간화'된 자아가 눈이 내리는 풍경을 중성적인 목소리로 묘사한다. 도무지 정감의 노출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훔쳐온", "폐타이어",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와 같은 시구들은 시의 아름다움을 훼손할 수 있는 '추(醜)'한 이미지이다. 시인은 눈오는 풍경을 전체로서 묘사하기보다는 부분적 사물을 돌출시켜서 포착한다. 문명적 이미지인 "청소용 트럭", "빨간 우체통", "자동차", "폐타이어"들이 호명되는데 이러한 도시 풍경은 하얀 눈에 덮이는 형국이다. 풍경은 색채로 '추상화'된다. 이 '아라베스크'는 흰 색 바탕에 붉은 색과 검정색 점들이 찍혀있다. 검정색은 애인의 유두로 연상되는데, "내 애인의"와 "유두처럼 까맣다"가 행으로 분절되면서 리듬 상의 단절과 '부조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관능적 이미지임에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붉은 색은 우체통에서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로 이동하는데, 동물의 시체로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붉은 색은 핏빛으로 살해됨을 연상시켜 잔혹하다. "칼날처럼 일찍 일어나"라는 시구는 '전제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시체와 아침 기상을 폭력적으로 연결시켰다. 흰 빛도 불행을 환기시킨다. 눈들은 "바람에 묶인 흰 털"로 은유되면서 '부자유'를 내포하는데, "공중으로 도망친다"는 서술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율배반을 낳는다. 4연의 한 행은 풍경을 '비현실', '비실재성'으로 몰고간다. 눈이 흩어져 내리는 풍경은 실재 너머의 영역으로 해체된다. "떠다니는 집들"은 풍경의 '비실재성'을 강화하는 이미지다.  제목인 "눈의 여왕"에서 "여왕"은 풍경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재'한다. 다만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암시'로서만 인식할 수 있다. 시의 풍경은 흰 빛으로 가득차 있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공포'와 '불안'이다. 현대 문명의 총화인 도시 생활이 몰고 오는 '현대성'의 징후다. 우리는 시에서 아름다우면서도 부자유하고 잔혹한 '불협화음'을 감지한다.  

  이상의 해석에서 <눈의 여왕>은 현대시의 구조를 내장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현대시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에 대한 이론을 이해했다고 해서 즉각 현대시의 감상이나 창작이 탁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이해는 감상이나 창작의 안목을 높여줄 수는 있다. 『현대시의 구조』는 현대시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것은 후고가 예를 들고 있는 작품이 모두 불어,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로 창작된 시라는 것이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의 시가 가진 언어의 마력은 번역을 거치면 상실되고 만다. 불어에 대한 기본적 소양만 있었어도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20세기 시인들의 이름들, 생존 페르스나 고트프리트 벤 같은 이들도 생소하고 대학 도서관 같은 곳이 아니면 작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 이론과 실제를 접붙여서 이해하기 더욱 어려웠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세 사람에 대한 서술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니, 시를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들을 조만간 진하게 거쳐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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