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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영화의 유래?...
2017년 05월 02일 01시 02분  조회:8906  추천:0  작성자: 죽림
1. 영화의 발명 
영화의 발명물체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재현코자 하는 인간의 꿈은 태곳적부터 있어 왔다. 지금부터 2∼3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에스파냐 알타미라의 라스코 동굴에는 다리가 8개인 황소의 벽화가 있는데, 이는 바로 인류의 그와 같은 꿈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1초에 24개의 정지된 화상(畵像:frame)을 연속적으로 돌려 인간의 잔상(殘像) 현상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영화가 발명되기까지는 기원 2세기부터 시작하여 무척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완구식(玩具式) 움직임을 보여주는 장치인 타우마트로프(thaumatrope)나 페나키스트로스코프(phenakistroskope), 그리고 주트로프(zootrope) 등 19세기에 들어와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기계가 나타났지만 영화의 발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사진술(寫眞術)의 발명이었다.
1823년 프랑스의 N.니에프스와 다게르 등에 의해 사진술이 발명되었고, 1878년 미국인 E.마이브리지가 24장의 달리는 말[馬]의 모습을 촬영한 데 이어, 프랑스인 J.E.마레이가 사진총(寫眞銃)을 고안해냈으며, G.이스트먼이 셀룰로이드에 의한 ‘롤 필름(roll film)’을 제조한 데 힘입어 에디슨이 혼자서 움직임을 볼 수 있는 키네토스코프를 1889년에 발명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완구식 원리와 사진술과 필름 및 위에 든 그 동안의 몇 가지 실험 등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L.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하여, 95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영화를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에디슨은 이보다 1년 늦게 여럿이 볼 수 있는 비타스코프를 발명했고, 이어 독일의 E.스클라다노브스키와 영국의 R.W.폴은 각각 독자적으로 비오스코프를 발명하였다. 이렇듯 영화는 19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 비슷한 시기에 여러 나라에서 과학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2. 영화의 발달 
카메라를 일정한 위치에 고정시켜 피사체를 촬영하는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영상의 사실성(寫實性)과 기록성(記錄性)이나 사건의 현장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영화를 속임수(트릭)와 몽환적(夢幻的)인 이야기로서 구경거리로 만든 것은 G.메리에스였다. 영화 초창기의 이 두 가지 길은 전자가 후에 기록영화나 뉴스 영화 등의 길을 열었고, 후자는 극영화의 길을 개척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연극적 방법이었고 영화상으로 전진시킨 것은 미국의 E.S.포터로부터 시작하여 미국 영화의 아버지요 영화문법(映畵文法)과 영화언어(映畵言語)의 완성자인 D.W.그리피스에 이르러 마침내 무르익었다. 《국가의 탄생》(1915) 《인톨러런스》(16) 등의 작품에 이르러 비로소 영화는 고유한 언어를 가진 예술적 표현의 매체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예술이나 오락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본이 필요했고, 이 자본은 급기야 영화기업을 탄생케 하였다.
프랑스의 파테나 고몽 등 초기의 영화 제작사들, 그리고 에디슨을 비롯한 미국의 독점업자들이 영화기업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그 후 대제작사들에 의해 영화는 산업으로 발전, 미국에서는 한때 4대 산업의 하나로까지 부상하였다. 또한 영화에는 배우들이 중요한 매력으로 등장하여 미국에서는 ‘스타 시스템’을 이루기도 했다.
새로운 예술매체를 얻은 미국은 M.세넷의 희극을 비롯하여 서부극(西部劇) 등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해나갔으며, 희극의 천재 C.채플린은 《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25) 등을 통해 영화의 독특한 희극성을 살리면서 인간본능의 추구를 묘사해나갔는가 하면, 사실주의의 극치인 E.슈트로하임의 《그리드》(23) 등이 미국 영화예술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포토제니(photog暴nie)’이론을 제창한 프랑스의 L.델뤽을 중심으로 모인 일단의 감독들은 이론과 작품제작을 겸하였으며, 그 중 A.강스는 《철로(鐵路)의 백장미》(23)와 3면화면(三面畵面)에 의한 《나폴레옹》(27)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였다. 독일에서는 R.비네의 《칼리가리박사》(19)를 비롯하여 F.무르나우의 《최후의 인간》(24), F.랑의 《니벨룽겐》(24) 등 표현파영화가 등장하여 독일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하였다. 이것은 W.파프스트의 심리적인 기법에 의한 영화들로 이어졌다. 스웨덴에서도 V.셰스트룀, M.스틸레르 등의 장려(壯麗)한 인간 드라마가 북유럽의 독특한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혁명 이후 소련에서는 몽타주 이론을 중심으로 V.푸도프킨의 《어머니》(26), S.M.에이젠슈테인의 《전함(戰艦) 포템킨》(25), 그리고 시적 상징주의(象徵主義)의 감독인 우크라이나 출생의 A.도브젠코 등이 독특한 세계를 펼쳐갔다.
한편,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상업주의 영화에 반발하는 순수한 영화예술운등의 하나인 아방가르드 영화[前衛映畵]들이 나타났다. R.클레르의 《막간(幕間)》(24), L.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28) 등이 프랑스에서, 독일에서는 추상화가들인 H.리히터, O.피슁거, V.에겔링 등에 의한 기하학적 도형이나, 선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한 아방가르드 영화가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무성영화시대(無聲映畵時代)에 꽃핀 각국의 영화예술을 마무리짓는 것은 프랑스의 문제작인 C.드레위에르의 《잔다르크의 수난》(28)이었다. 영화는 27년 소리를 갖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워너브러더즈사에서 창안해낸 발성영화(發聲映畵:토키) 《재즈 싱어》의 출현은 영화가 시각적인 면에다 청각적인 위력을 덧붙임으로써 이중의 칼날을 지니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초기의 발성영화는 R.클레르의 《파리의 지붕 밑》(30) 《파리제(祭)》(33) 등에서 화면과 음향의 예술적인 대위(對位)를 위해 합창 등을 도입하여 발성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발성영화기를 맞은 프랑스와 미국의 30년대는 시나리오가 중심이 된 시기였다.
극성(劇性)이 중요시되던 이 시기는 드라마적인 구성에 의해 약속된 틀 속에서 영화를 발전시킨 것이다. 프랑스의 시적 사실주의의 감독인 J.페데르의 《외인부대(外人部隊》(34) 《여자만의 도시》(35), J.르누아르의 《위대한 환영》(37) 《게임의 법칙》(39), J.뒤비비에의 《망향(望鄕)》(37) 《무도회의 수첩》(37), M.카르네의 《안개 낀 부두》(38) 등 사실적인 작품이 등장, 시대적인 우울과 염세적인 사상을 담은 C.스파크와 J.프레베르 등의 시나리오에 의해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하였다.
미국에서는 뉴딜정책 이후 미국 사회의 낙관주의가 주조(主潮)를 이루며 F.캐프라의 《어느날 밤에 생긴 일》(34), J.포드의 사실적인 작품 《밀고자(密告者)》(35)나 《분노의 포도》(40), W.와일러의 《공작부인(孔雀夫人)》(36) 등이 R.리스킨과 D.니콜스의 시나리오에 의해 제작되어 발성영화의 성숙기를 이루었다.
미국의 천재 오손 웰스가 감독·각본·주연한 《시민(市民) 케인》(41)은 디프 포커스(deep focus, 또는 pan focus)를 사용, 공간의 깊이를 추구하여 영화미학적(映畵美學的)인 혁신을 이룩한 문제작이었다. 이 영화는 그 독특한 소급법(遡及法)에 의한 스토리 진행방법과 함께 시간의 지속성을 유리시키는 기법으로 영화사에 영원히 기록될 금자탑을 쌓았다. 마침내 영화는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매체로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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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894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시작으로 영사기들이 등장했으며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현재와 같은 형식의 영화인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하자 에디슨은 무성영화의 표준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이후 뤼미에르 형제가 카메라·영사기·인화기를 일괄한 시네마토그래프를 개발함으로써 영화의 상영이 가능해졌다. 다양한 기술의 발달로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극장이 커짐에 따라 오디오 증폭기로 음향을 키워야 했고 필름식 음향장치를 개발함으로써 소리문제를 해결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층식 발색법을 활용한 대형영화 제작도 쉬워졌다. 현대 영화계는 텔레비전에 빼앗긴 관객을 유혹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영화계는 그 대안으로 대형영화 시네라마와 입체영화 3D를 개발 시험하고 있다.

개요

1894년 4월 14일 영화는 어느 발명가의 이론과학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그것이다. 이것은 1명씩 동전을 넣고 보는 '들여다보는 영화'였는데 약 15초 동안 실물과 똑같이 움직이는 사람과 물체의 필름을 구경할 수 있었다. 1895년말에 런던·파리·뉴욕에서 각종 영사기가 완성되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루이·오귀스트)는 파리에서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했다.

이것이 현재와 같은 형식의 최초의 영화였다.

곧이어 에디슨이 발명한 비타스코프가 1896년 4월 23일 뉴욕에서 공개되었다. 그해에는 미국 및 각국에서 여러 가지 영사기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흑백의 그림자로써 살아 있는 움직임을 재현시켜 보이는 신기한 구경거리에 대하여 갑자기 높아진 대중의 강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거의 75년에 걸친 국제적 규모의 연구·실험·발명의 성과가 축적된 것이었다. 운동중인 물체의 광학적 특징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영국의 피터 마크 로제로부터 시작되어 존 허셀, 마이클 패어리 등에게 영향을 주어 여러 가지 실험·연구를 촉진했다.

유럽에서는, 벨기에의 조제프 앙투안 플라토, 오스트리아의 지몬 리터 폰 슈탐퍼 등이 운동의 위상을 나타내는 일련의 그림을 보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 1853년 오스트리아의 폰 우하티우스는 원반과 환동의 그림을 결합해서 스크린 위에 애니메이션을 영사했다. 플라토와 슈탐퍼의 연구는 조이트로프의 발명에 공헌했다. 이것은 회전하는 원통 틈새로 들여다보면 속의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치이다. 에밀 레노가 발명한 같은 원리에 의한 프락시노스코프는 더욱 정교한 것이었다.

그는 계속 이 기계를 개량했고, 1892년에는 파리에서 테아트르 옵티크('시각 극장')라는 이름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다. 이것은 운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수백 개의 그림을 연결해 15~20분 길이로 편집한 이야기 필름이었다. 1900년까지 레노는 이러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는데, 진짜 영화와의 경쟁에는 이기지 못하고 흥행을 중지했다.

사진

영국에서 로제가 시각적 성질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에서는 실용적인 사진기술의 연구가 진전되고 있었다.

1822년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조잡하지만 연속성 있는 사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루이 다게르의 협력을 얻어, 1839년에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라고 불리는 실용적인 사진술을 개발했다.

또 그해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벗은 근대 사진술의 기초가 된 네거와 포지티브에 의한 인화법을 개발했다. 1860년 미국의 콜먼 셀러스는 처음으로 사진을 조이트로프의 원리와 결합시키는 데 성공, 이듬해 키네마토스코프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따냈다. 이 방법을 응용하여 1870년에 헨리 레노 헤일은 파즈마트로프의 영사를 1,600명의 관객에게 공개했다.

1872년 영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기사 존 D. 아이잭스와 공동으로 셔터가 장착된 12대(후에 24대)의 카메라로 이루어진 1벌의 장치를 고안하여 질주하는 말의 움직임을 분석한 사진을 찍었다. 그후 셔터 장치가 개량되어, 1877년에는 동작이 빠른 피사체도 촬영할 수 있게 되어 노광(露光) 속도 1/2,000초라는 단시간에까지 이르렀다.

영화 발전상의 다음 단계는 고속의 속사 사진이 가능한 단일 카메라의 개발이었다(모션 픽쳐 카메라). 프랑스의 에티엔 쥘마레가 1882년에 발명한 '사진총'이야말로 이 분야에서 성공한 최초의 것이었다.

사진총이란 라이플 총 모양으로 윤동(輪胴)에 인화지판을 끼우고 방아쇠를 당겨 연속적으로 노출시키는 장치였다. 그후 10년간 그는 조수 조르주 도메니노와 함께 일련의 실용 카메라의 개발을 계속하여, 1888년 크로노포토그래프를 발명, 이에 의해 매초 60매의 사진 촬영이 가능해졌다.

1885~95년 10년 동안에 전세계의 발명가들은 사진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일에 주의를 돌렸다.

영국의 윌리엄 프리스 그린을 비롯한 몇 사람은 1890년을 전후해 촬영기·영사기 등의 특허를 땄지만, 상업적 성공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에디슨은 조수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과 함께 띠 모양의 사진 필름 등의 실험 고안에 힘썼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딕슨은 조지 이스트먼이 1889년에 제조하기 시작했던 질화면(窒化綿)을 기초로 한 사진용 필름을 채용하여 1890년에 키네토그래프를 개발했다. 그후 에디슨이 그것을 다시 키네토스코프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대체로 높이 122cm, 너비 61cm 크기의 기계로 필름은 내부의 확대경과 광원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회전 셔터에 의해 화면이 순간적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

필름의 길이는 50피트가 한도이고, 화상은 매초 48컷의 속도로 들여다보이는 구멍의 앞을 지나가는데, 1회 상영 시간은 13초가량이었다(프레임). 화면수는 뒤에 매초 16컷으로 줄었지만 이것이 무성영화 시대의 표준이 되었다(토키의 경우는 매초 24컷).

필름의 너비(35㎜)나 화면의 형상, 필름을 보내는 스프로킷(필름 구멍과 맞물려 필름을 움직이게 하는 원형의 톱니바퀴) 등도 대형 화면이나 대형 필름이 출현하는 1952년까지는 표준이었다.

키네토스코프는 실험실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1894년 4월 14일 처음으로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그것을 공개하는 축음기관이 개관했다. 가을에는 몇 대가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이윽고 유럽에서도 영화는 최종 발전단계를 맞이 했다. 에디슨의 발명이 계기가 되어 영국에서는 로버트 W. 폴이 포터블 카메라를 고안했고, 독일에서는 스크라다노프스키 형제가 비오스코프를 개발했다. 프랑스에서는 뤼미에르 형제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레노의 테아트르 옵티크의 투영화상을 결합시켜서 그것을 영사하는 시네마토그래프를 고안하여 1895년 2월 13일 특허를 받았다(오귀스트 뤼미에르루이 뤼미에르). 이것은 카메라·영사기·인화기를 일괄한 것이었다.

시네마토그래프는 1895년 12월 28일 그랑 카페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화의 탄생이었다. 이것은 즉시 유럽으로 퍼졌고, 이듬해에는 미국에까지 침투하여 에디슨의 경쟁 상대가 되자 에디슨 자신도 다른 발명가에 대한 대항 때문에 키네토스코프 영사기의 개발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드빌 레섬, W.K.L. 딕슨, 잔 릴로이, 유진 로스트 등도 각기 독자적인 카메라와 영사기를 발표했고, 1895년 토머스 아멧이 현대 영사기의 원리를 고안했다.

이것은 연속되는 영상을 정지시키고, 그동안은 영상이 움직이고 있을 때보다도 많은 광선을 받을 수 있는 몰타 십자형의 화면전송장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다 필름에 구멍을 내어 필름이 영사기 속을 통과할 때의 부담을 경감시켰다는 점에서 에디슨이나 뤼미에르의 영사기와는 달랐다(아멧 루프). 이것이 후에 비타스코프로 알려지게 되었다. 1896년 에디슨의 영사기로 공개된 것은 이 아멧의 기계장치이다.

초기 영화는 미국·유럽 모두 50피트의 필름을 사용했고, 상영시간은 1분이 채 안 되었다.

모든 발명에 전기의 응용을 생각하고 있었던 에디슨은 거의 피아노만한 전지로 움직이는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를 제작했고, 이것을 수용하기 위해 '죄수 호송차'라고 일컬어졌던 세계 최초의 스튜디오를 세웠다. 이것은 타르 칠을 한 종이를 바른 조그마한 스튜디오로, 거기에서 연예·서커스 같은 구경거리와 뉴욕의 인기있는 연극 따위가 상연되었다. 한편 유럽인은 비교적 가볍고 기동성있는 수동식 카메라에 만족했으며 어디로든 가볍게 떠나 무엇이든지 촬영했다.

따라서 초기 영화는 행진이나 열차의 도착, 도시의 군중 등 현장감이 강조되었다(기록영화). 이 특징은 영화의 특성과도 잘 어울려서 에디슨도 그뒤를 따랐다.

연예장의 구경거리의 하나로 등장한 영화는 영사기의 능력에 맞추어 필름의 길이는 1,000피트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연예나 구경거리 1편의 상연시간과 같았으며, 이 길이가 현재 1권(305m)의 기준이 되었다(릴).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단순한 움직임의 신기함만으로는 싫증을 내게 되었기 때문에 제작자는 보다 야심적이고 이색적인 소재를 찾게 되었다.

최초로 이야기를 가진 영화(스토리 영화)가 상영된 것은 1897년 호라만이 전문 배우와 본격적인 세트를 사용하여 제작한 3권짜리 수난극일 것이다. 파리에서는 조르주 멜리에스가 카메라 트릭을 주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환상적인 상상력을 구사하여 도처에서 인기를 얻었다. 영국에서는 1900년 직후 이른바 '브라이튼파'의 활약이 활발해져 즉각 창조적인 영화 제작에 진출했다.

그러나 스토리 영화의 진정한 탄생은 1903년 에디슨 회사의 에드윈 S. 포터가 감독한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로 시작된다. 고작 8분 정도의 1권짜리였지만, 거기에는 현대의 편집기술의 싹이 보였고, 그 급속한 인기상승에 의해 여기에 니클오디언(5센트 극장)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대열차강도〉는 영화의 예술·산업의 2분야에 있어서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소리

영화 초기부터 발명가는 영사에 소리를 접합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에디슨은 처음부터 카메라는 축음기를 위해 제작한 부수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레온 고몽이 1900년 이전에 콩스탕 코크랑이나 사라 베르나르 등의 명배우가 출연하는 단편 토키 영화 연작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영상에 축음기의 음성을 일치시키려고 한 것이다. 또 이것은 많은 발명가들이 생각했던 바였는데, 에디슨도 1권짜리 토키를 몇 편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로스트가 필름에 직접 녹음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내고 전시했다.

1912년경 영화 흥행은 니클오디언의 단계를 끝냈다.

극장이 커짐에 따라 토키 영화는 소리의 증폭 문제에 직면했다. 그러나 로스트의 기계나 초기의 축음기로는 홀 구석구석까지 퍼질 만한 충분한 음량을 낼 수는 없었다. 이 결함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리 디 포리스트가 개발한 셀레늄 진공관을 사용한 오디오 증폭기에 의해 해결되었다(진공관 검파기). 제1차 세계대전 후 필름에 소리를 옮기는 방법이 개발된 데서부터 문제는 해결되었고, 거기에서 뒷날의 폭스 무비턴이 생겨났다(포노필름). 한편 바이타폰을 사용한 디스크식 부분 토키인 〈돈 주앙 Don Juan〉이 1926년에 워너브러더스사에 의해 발표되었고, 이듬해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에 의해 영화계는 일약 토키 시대로 돌입, 얼마 후 디스크식 음향장치는 필름식 음향장치로 대체되었다.

1930~52년은 기술혁신시대로 일컬어지지만 영화의 음성기술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1952년 시네라마의 등장은 스피커를 스크린 뒤로부터 해방시켰고, 해저드 리브스가 개발한 7채널 방식에 의해 보다 충실도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1953년에 등장한 시네마스코프에는 경제적 이유로 퍼스펙트 A. 사운드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색채

채색되어 움직이는 화상에 대한 탐구도 영화시대 이전부터 시도되고 있었다.

20세기초까지는 필름의 화면마다 손으로 채색을 했는데, 프랑스의 파테사는 1905~30년경 반자동으로 인쇄해넣는 방식(형치법[stencil system])을 채택하고 있었다(스텐실). 1906년 영국에서 찰스 어번, G. 앨버터 스미스가 2색법의 키네마컬러의 특허를 땄는데 촬영과 영사 때 렌즈 앞에 빨강과 녹색의 회전 필터를 붙여 그것을 통해 발색시키는(필름 속도는 1초에 32컷)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색채는 매우 불완전했다. 1915년 허버트 캘머스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연구 팀에 의해 개발된 테크니컬러(선명한 색채)는 3색분해법에 의한 컬러 사진 재판법의 첫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의 〈숲속의 아침〉(1932)은 그 방법에 의한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거기에 루벤 마물리언의 〈베키 샤프 Becky Sharp〉(1935)는 예술적인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로서 주목을 받았다.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9)의 흥행 성공으로 컬러 영화 시대의 도래가 확실해졌다.

테크니컬러에 이어 다층식 발색법에 의한 미국의 코닥컬러, 독일의 아그파컬러, 이탈리아의 퍼라니아컬러가 실용화되었다. 다층식 발색법은 촬영이 간단하기 때문에 이스트먼 코닥과 안스코 계통은 표준형일 뿐만 아니라 대형영화의 제작도 용이하게 했다.

와이드 스크린(대형화면)

1947년에 최전성기를 누렸던 미국의 영화 산업도 1948년말경부터 관객을 텔레비전에 빼앗기자 영화계는 그 타개책으로 1952년 대형영화 시네라마와 입체영화 3D(three dimensions picture)를 개발했다(영화관, 영사막). 3D 영화는 관객이 색안경을 껴야 했으므로 흥행에 실패했고, 오래지 않아 사라졌지만, 3벌의 필름을 이어 합친 만곡된 대화면과 6개의 사운드 트랙으로 완전한 입체음향을 재현시킨 시네라마는 그 입체적인 박진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1952년에는 20세기폭스사의 대형영화 시네마스코프도 발표되었다. 이것은 세로 대 가로의 비가 1 대 2.3의 스크린으로 3개의 입체음향장치를 가졌으며, 제1회 작품 〈성의(聖衣) The Robe〉(1953)의 대성공 이후, 순식간에 미국은 물론 유럽·아시아에까지 보급되었다. 얼마 후 시네라마와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효과를 노린 비스타비전에 기타의 여러 방식이 서양 여러 나라에 등장했다.

또한 〈오클라호마! Oklahoma!〉(1955)는 70㎜ 필름을 사용한 토드 AO(Todd-AO) 방식의 첫작품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이래 표준이었던 35㎜로부터 영화용 필름의 크기는 대폭적으로 바뀌었다. 이어 테크니컬러가 개발한 테크니라마를 비롯하여 갖가지 대형화면이 등장했으나, 모두가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비스타비전(1954), 토드 AO 등의 원리를 기초로 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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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영화는 촬영기로 움직이는 모습을 연속적으로 찍은 필름을 그것을 영사기로 스크린(화면)에 비춰 움직이는 영상을 보이게 하는 예술이다. 필름에 기록된 영상을 영사기에 걸어 매초 16도막 또는 24도막의 조금씩 다른 여러 사진을 계속하여 비춤으로써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필름의 각 도막을 빠른 속도로 차례로 비추어 나가면, 우리 눈에는 마치 상의 내용이 잇달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은 사람의 눈에 어떤 상이 비치면 그 상은 약 15분의 1초 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화 영화를 보고 있는 어린이들. 영화는 빠른 시간 안에 가장 널리 퍼진 예술이다.
만화 영화를 보고 있는 어린이들. 영화는 빠른 시간 안에 가장 널리 퍼진 예술이다.

영화의 발달

1889년에 미국의 에디슨이 35mm 영사기를 발명하고, 필름 가장자리에 구멍을 뚫어 영사기를 돌리면 필름이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기계는 위에서 돋보기를 통하여 사진을 들여다보게 되어 있어 불편하였다.

이 영사기가 세계 각국에 공개되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는 이것을 응용하여, 1894년에 혼자 보는 대신 스크린에 확대시켜 비추는 영사기를 발명하여 여러 사람에게 발표하였다. 그 뒤로 세계 각국에서 다투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는 천연색이 아닌 흑백 영화일 뿐 아니라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 영화였다. 그래서 영화를 상영하려면 자막을 이용하거나 옆에서 변사가 장면에 맞추어 설명을 해 주어야 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1926년과 1935년에 각각 소리가 나는 토키와 천연색 영화를 만들어 낸 뒤로 영화는 대중 예술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어서 입체 영화와 시네라마 · 시네마스코프 같은 큰 화면의 영화가 등장했다.

▶ 영화 기기의 발달

초기의 영화 카메라
초기의 영화 카메라
뤼미에르 형제가 1894년에 만든 영사기
뤼미에르 형제가 1894년에 만든 영사기
프라키시노스코프. 회전하는 둥근 통 안에 연속되는 그림을 말아 놓고 중심에는 10개의 거울을 붙여 돌려가며 보았다.
프라키시노스코프. 회전하는 둥근 통 안에 연속되는 그림을 말아 놓고 중심에는 10개의 거울을 붙여 돌려가며 보았다.

영화의 제작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제작사가 작품을 결정하거나 제작비를 모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작품을 결정하고 제작비가 모이면 제작자는 연출자를 결정한다. 영화의 총지휘자인 연출자는 작품을 보고 스태프와 배우를 정한다. 스태프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로 조감독 · 카메라맨 · 조명 기사 · 미술 담당자 · 음악 담당자 · 녹음 기사 · 기록계 · 분장사 · 스턴트 맨 · 편집 기사 등이다.

스태프와 배역이 정해지면 촬영 대본을 만들어 연습을 한다. 연습은 많이 할수록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으므로 꼭 필요한 과정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면 비로소 촬영을 한다. 촬영은 반드시 이야기 순서대로 하는 것은 아니며 편리한 것부터 찍는다. 촬영은 촬영소 안에 배경을 꾸며 놓고 하기도 하고, 밖에서 하기도 하는데 밖에서 촬영하는 것을 로케이션이라고 한다.

촬영이 끝나면 필름을 편집하여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 내고 순서를 바로잡는다. 영화는 보통 촬영과 함께 배우의 대사나 음향을 녹음하는 동시 녹음 촬영이 원칙이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그렇지 못할 때는 녹음실에서 영화를 보면서 따로 녹음한다. 이렇게 대사와 음악을 영화 필름에 함께 실으면 비로소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 촬영기의 구조

촬영기의 구조
촬영기의 구조

▶ 영사기의 구조

영사기의 구조
영사기의 구조

▶ 영화의 제작

① 각본을 쓴다.
① 각본을 쓴다.
② 제작자와 연출자는 스태프와 배우를 정한다.
② 제작자와 연출자는 스태프와 배우를 정한다.
③ 정해진 배역에 따라 연습을 한다.
③ 정해진 배역에 따라 연습을 한다.
④ 배경, 의상을 준비하고 분장을 한다.
④ 배경, 의상을 준비하고 분장을 한다.
⑤ 여러 가지 촬영 준비를 마치면 촬영을 한다.
⑤ 여러 가지 촬영 준비를 마치면 촬영을 한다.
⑥ 촬영한 필름을 편집한다.
⑥ 촬영한 필름을 편집한다.
⑦ 화면을 보며 말을 넣는다.
⑦ 화면을 보며 말을 넣는다.
⑧ 음악과 음향을 넣는다.
⑧ 음악과 음향을 넣는다.
⑨ 완성된 필름을 극장에서 상영한다.
⑨ 완성된 필름을 극장에서 상영한다.
영화 촬영 장면
영화 촬영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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