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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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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놀라게 시를 써라...
2017년 08월 17일 02시 33분  조회:1856  추천:0  작성자: 죽림

Ⅲ. 

감기는 일종의 경고이다. 그래서 지친 심신을 안정하고 휴식하는 일 이외에는 특효약이 없다. 마음으로부터 온화한 정서를 생성시켜 주는 한편 세속의 잡다한 욕망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는 점에서 시를 읽는 일 또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읽고 난 다음에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 주는 작품일수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성찰과 다짐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이다. 보여주는 시이거나 말하는 시이거나 작품을 감기가 주는 경고로 인식한다면 갈등과 분쟁도 사라지지 않을까. 겨울이 쓰러지는 끝자락을 보았다. 겨울과 봄의 접점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경계 허물기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주경림 
(시인) 



*유자효, 「새」(『시와사상』 04년 겨울호) 
*박승미, 「마음 心 둘」(『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황상순, 「흔적 1」(『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성우, 「접시」(『현대시학』 05년 1월호) 
*이영식, 「이별연습」(『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 3차원이란 지구상에서 전후, 좌우, 위 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이동이 가능한 세계를 말한다. 시의 세계에서 시인은 3차원의 세계에 몸을 두지만 상상력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4차원의 세계로 넘나들 수 있다. 4차원의 세계에서는 3차원의 현실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첨가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세상 만물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세상은 시간 따로 공간 따로 편을 갈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4차원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독자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권해서든 시인의 타임머신을 타고 ‘시’라는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 편의 시는 그 공간에서 하나의 우주와 맞먹게 되어 시인이 먼지 한 톨을 들어도 우주가 몽땅 따라 들리며 티끌 한 개를 놓아도 우주가 모조리 함께 놓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그 공간에서는 시를 따라 자연과 독자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일체 경계가 없어 죽음과 삶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다. 경계를 허물고 희노애락의 감정의 소통이 자유로운 시의 세계를 엿보기는 즐겁지만 이 땅에 시인으로 살아 남아야 하는 현실과 꿈의 부조리가 만만치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가 암울할수록 상상력의 변주를 더욱 화려하게 펼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시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언어라는 날개를 달고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상을 엿보기로 한다. 



산불이 났다 
불의 바다 속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는 나무 위를 맴돌며 
애타게 울부짖었다 
그 곳에는 새의 둥지가 있었다 
화염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새의 안타까운 날개짓은 속도를 더해갔다 
마치 그 불을 끄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둥지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새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갓 부화한 둥지 속의 새끼들은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덩이가 되었다 
폼페이에는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감싸안은 닭의 화석이 있다 
―유자효, 「새」 

유자효 시인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비극상을 현재의 시간으로 재생시키고 있다. 그러나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본 닭의 화석에서 그는 죽음이나 절망, 슬픔처럼 어두운 모습이 아닌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보고 있다. 뜨겁게 잿빛이 된 돌멩이 하나에서 그 사랑의 유효함을 전달하고자 한다. 
「새」에서 어미의 사랑은 목숨을 초월해 화석이라는 형태로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갓 부화한 새끼들은 날갯짓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안타까운 운명이었지만 어미와 새끼들은 한 몸으로 오롯이 작은 불덩이가 되어 행복한(?) 산화를 했다. 그들 또한 화산재를 뒤집어쓴 인간 화석과 함께 ‘최후의 폼페이인’인 셈이다. 유자효 시인은 섣불리 연민을 표시하거나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동영상의 화면을 보여주듯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언어를 조종하는 감독으로서의 시인의 연출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을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 소심 한 촉이 꽃을 피웠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 
그 모습이 여름내 더위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달래 주더니 
지는 모습이 어찌 그리 다소곳한지 
한 잎 또 한 잎 꽃이 질 때마다 
차마 그 꽃잎 주워 
버리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다 지고 난 다음 
조용히 다가가 보니 떨어진 그대로 
마음 심 자가 분명했다 
그 마음을 이 마음속에 깊이 깊이 뿌리 내리기로 했다. 
―박승미, 「마음 心 둘」 

「마음 心 둘」에서 시인은 조용히 꽃을 피워낸 소심 한 촉이 피었다 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한 소심 한 촉의 고고하고 청아한 모습을 보고 있다. 수란치마는 궁중 나인들이 예식때 입던 수놓은 치마로 그 화려함 때문에 소심 한 촉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긴 수란치마를 가지런히 펴 놓고 앉았을 때의 모습은 입고 서 있을 때의 화려함과는 사뭇 다르다. 입체적인 모습이 평면으로 깔리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함보다는 주위의 분위기까지 우아하게 고양시킨다. 소심 한 촉이 주위를 은은하게 물들이면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하여 가야금 가락의 맑고 청아한 음색의 청각적인 효과가 그대로 ‘조용히’라는 시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또한 다 지고 난 꽃잎에게 ‘조용히’ 다가가 마음 심(心)자를 얻는다. 악보가 없었던 과거에 가야금을 배울 때는 ‘구전심수’(口傳心受: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 했듯이 떨어진 꽃잎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속에 받기로 한다. ‘그 마음’인 소심 한 촉은 이제 ‘이 마음속’인 시인에게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다. 심장의 모양을 본땄다는 표의문자인 한자어 마음 心자가 펼쳐 보여주는 시적 변용은 따스함이나 부드러움 같은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뿌듯하게 차오르게 해준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새들이 모여 파드득 파드득 잎을 피우는 집 
먼 데 있는 새도 몇 번의 날개짓이면 금새 날아드는 집 
집 없는 새도 지나가다 얼핏 깃드는 집 

그 집 앞에서 누군가 발을 멈추고 쭈빗쭈빗 귓문을 연다 
그의 꼬불랑한 귓속 길이 물 오른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온다 
어떤 새소리 한가락 파릇하니 새잎을 틔운다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 
째구르르 깃털을 편다 
입술이 벙긋 열리고 실핏줄이 팔딱 뛰고 

아랫가지에서 윗가지로 올라앉는 높은 음의 가지 
윗가지에서 아랫가지로 내려앉는 낮은 음의 가지 
이 가지 저 가지 마음대로 옮겨앉는 마음의 가지 
아아아 파릇하니 파릇한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 
그리움이라는 새들이 한참 지저귀다 뚝! 그치기도 하는 집 
파릇하니 파란 나무집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 

이나명 시인은 사소한 주변의 풍경이나 일상의 사물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는 시적 대상에게 시끄럽거나 과장되지 않게 조용히 다가가 미세한 것들에서부터 고유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낸다. 그 의미를 새롭게 엮어 보여줌으로써 잠시 분잡한 현실을 잊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해준다. 
「파릇하니 파란 집」 역시 나무와 새, 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출발을 한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그 집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자신이 먼저 귓문을 열어 깊숙하고 은밀한 마음 속 길을 꺼내는 것이다. 새소리같은 아름다운 새잎을 그 집의 나뭇가지에 내밀하게 틔우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인 것이다. 이 가지 저 가지에 마구 피워내고 싶은 잎사귀, 즉 ‘그리움’으로 마구 지저귀고 싶은 언어의 잎사귀인 것이다.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이라는 심정적인 표현처럼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 한 켠마다 남아 있는 그 모든 ‘그리움의 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나명 시인은 감각적인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청각과 시각을 골고루 자극함으로써 높은 시적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황상순, 「흔적 1」 

황상순 시인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주검이 거두어진 자리에 남은 흰 페인트의 윤곽을 지켜본다.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었을 그 자리에 이제 “그의 윤곽”만이 남아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사내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면서 ‘탈피’라는 화두를 넌지시 끄집어낸다. 시인의 응시는 목숨을 빼앗아간 비극적인 장소에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는 대신 역설적으로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라는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있다. 실재와 부재 사이에 ‘탈피’를 끼워넣은,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고층빌딩에서 반사된 ‘날을 세운 빛들이” 사내의 비상을 재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거리 횡단보도나 유리창 가득한 빌딩들은 전형적인 현대도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판에 박힌듯 숨막히는 공간일 수 있다. 이미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내(혹은 여자)는 숨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사내의 죽음이 자의적인 것이든 타의적인 것이든, 죽음은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현실에 남겨진 흔적은 고통스러웠던 육체의 핏자국뿐이다. 그의 영혼은 ‘비에 젖은 옷’처럼 남루했던 삶에서 탈피하여 어디에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탈피’란 허물을 벗는 일, 또한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워짐을 이르는 말이다. 시인은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을까 라며, 자유롭고 일탈된 사유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극한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들이” 죽음으로 상징되는 ‘차량’ 위에 일렁거리는 환상을 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접시가 깨진다 하나 둘 쏟아지기 시작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치며 깨지고 무릎을 치며 깨진다 밥알 퉁기며 깨지고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며 깨진다 속 깊이 쌓여 있던 접시들이 와그르르,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깨진다 어휴 놀래라, 귀를 막건 인상을 찡그리건 말건 신나게 깨진다 엉덩이 들었다놓으며 경쾌하게 깨진다 키득키득 입속에서 나와 쉴 새 없이 깨지는 접시! 침 튀기며 나온 접시들이 손뼉을 치며 깨지고 어쩜 좋아, 발을 구르며 깨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야 후련한 접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 
―박성우, 「접시」 

한 편의 시를 잘 읽어서 시가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알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어떤 관념이나 의미없이 ‘접시가 깨진다’의 문장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가 될 때까지 말과 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이미지의 변주에 집중하게 된다. 언뜻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도 하지만 ‘접시’를 통해 박성우 시인이 말하고 싶은 간절한 그 무엇이 궁금해진다. 접시가 깨진다는 것은 일종의 파괴 행위로 기존의 틀이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탈의 욕망에서 오는 야릇한 즐거움과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입속에서 나와 쉴새없이 깨지는 접시!”에 이르면 접시가 시적 화자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눈치채게 된다. 접시는 시인의 말도 되고 마음도 되는지라 결국 자신의 내면의 그 어떤 것을 털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깨뜨리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지금 있는 기존의 형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일종의 구도 행위(?)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접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온전히 비웠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테이블을 치며/ 무릎을 치며/ 밥알을 퉁기며/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엉덩이를 들었다 놓으며/ 발을 구르”는 접시들. 아무튼 독자들은 지면을 뚫고 나오는 접시 깨지는 소리의 소란함을 통해 억압된 것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발산 작용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 것이다. 

중랑천 둔치 
노부부 한 쌍 자전거와 한판 벌이고 계시다 
할미는 페달 위에 안다리걸기를 시도하고 
삼천리호 외궁둥이 샅바를 잡은 할배는 
엉중겅중 두꺼비씨름 중이시다 
뒤에서 밀면 몇 바퀴 구르다가, 기우뚱 
곧추세워 놓으면 또다시 넘어질 듯, 비틀 
그렇게 밀고 넘어지고 에돌아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 
돌아보면 풋꿈인 듯 눈에 밟혀오는데 
아이들 MTB자전거는 꼬리 물고 내달린다 
목 길게 빼고 구경하던 해바라기 
할배 등뒤에서 고개 꺾고 하품할 때쯤 
웅크렸던 할미의 어깨가 펴지고 
은빛 바큇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할배가 슬며시 꽁지를 놓은 줄도 모른 채 
차르르― 자전거도로 위로 날아가는 할미새 
이제 되었네그려, 혼자라도 
넘어지지 말고 싱싱 나가시게 
서툰 씨름판 곁에 맘 졸이던 호박덩굴 
이파리 세워 갈채를 보내는데 
샅바 놓으시고 뒷짐진 할배의 빈손 
그늘, 너무 깊다. 
―이영식, 「이별연습」 

평생 해로한 부부가 죽음을 동시에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영식 시인은 죽음을 앞둔 노부부의 심리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고 있다.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이지만 이제 둘 중 누군가는 혼자 남아 자전거 타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평생 할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할머니는 아직도 자전거 타기가 서툴다. 뒤에서 밀어줘도 기우뚱거리고 곧추세워 놓아도 비틀거린다. 그러한 할머니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할아버지는 자전거와 의 싸움에서 쉽게 삽바를 놓지 못한다. 자전거 타기는 바로 삶을 살아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두꺼비 씨름처럼 굼뜨고 하품이 날 지경이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홀로 탈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다. 
마침내 웅크렸던 할머니의 어깨가 펴지고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이제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고 싱싱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 홀로 설 수 있게 된 할머니를 보며 할아버지는 ‘이별연습’이 끝났음을 알고 샅바를 놓는다. 지루한 씨름이 끝나고 홀가분하게 빈손이 되었지만, 삶과 죽음에 드리워진 그늘은 할아버지에게 “너무 깊다.” 
이영식 시인은 이미 「낮달」에서 영정사진을 찍는 노인들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잘 그려낸 바 있듯이 「이별연습」에서도 노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아마 허장성세(虛張聲勢) 없이 사소한 일상에서도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천착해내는 시인의 성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유자효 시인은 최후의 폼페이인이 된 「새」의 화석에서 2천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어미의 사랑이라는 보석을 찾아냈고, 박승미 시인의 「마음 心 둘」에서는 표의문자인 ‘心’자의 이미지 변주를 통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서정시의 정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나명 시인은 독특한 감성으로 새소리와 새잎이 피어나는 「파릇하니 파란 집」 한 채를 선사했다. 「흔적 1」에서 황상순 시인이 주검이라는 탈피를 통해 비상하는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깨뜨리기라는 파괴 행위를 통해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영식 시인은 노부부의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 「이별연습」으로 죽음과 삶의 깊은 그늘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평생을 견지한 시작(詩作) 태도로 ‘내 글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않겠다는 ‘어불영인 수사불휴’(語不營人 雖死不休)의 뜻을 되새겨보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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