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윤동주, 생일 축하합니다."
12월 30일 오전 9시, 시드니 서부에 위치한 '시드니우리교회'에서 울려 퍼진 윤동주 시인 생일축하노래다. 교인들은 90년을 상징하는 촛불 9개를 밝혀놓고 생일축하 시루떡도 함께 나누었다.
(우리의 옛 땅이었지만) 남의 나라 땅 북간도에서 태어나서, 남의 나라 땅 후쿠오카에서 타계한 윤동주 시인. 그는 27년 8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을 뿐이다. 그런 윤동주 시인의 90세 생일잔치가 하필이면 또 하나의 이국땅인 시드니에서 열렸을까?
그 까닭은 윤동주 시인의 유일한 피붙이인 누이동생 윤혜원(84)이 20년 넘게 시드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윤혜원은 남편 오형범(84)과 함께 윤동주 문학을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해 헌신하면서 온 생애를 바쳤다.
윤동주 문학에 바친 80대 노부부의 생애
2007년은 한국 현대시 100주년에 해당되는 해다. 그를 기념하여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다. 한국인의 애송시 또한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1위로 뽑혔다. 이런 결과는 지난 20여 년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살아 생전 시인으로 등단한 적도 없고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윤동주 시인이 이렇듯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동생 윤혜원의 덕이 크다. 룽징(龍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이 1948년 12월,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의 작품만 게재됐을 뿐이다.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에 의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인데, 그 85편은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의 주요작품들이다.
이들 부부는 두 차례의 심장병 수술(윤혜원)과 뇌수술(오형범)을 받은 상태에서 지난 5월에 옌볜에서 열린 제8회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들 80대 노부부는 8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시상식에 참석했다.
특히 올해는 '윤동주 문학상' 대상을 받은 옌볜 소녀 한국화(19)양이 연세대학교 인문학부에 합격(수시 2학기 재외국민과 외국인 전형)해 더욱 뜻깊은 한 해였다. 4년 장학생으로 공부하게 된 한국화는 중국교포 4세로 '윤동주 문학상' 대상 수상자에게 연세대가 부여하는 특전의 첫번째 수혜자다.
마침 윤동주 90세 생일인 12월 30일에 발표된 한국화양의 소식을 접한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이제 우리 부부가 소망했던 일을 거의 다 이룬 것 같다"면서 "약속을 지켜준 연세대에 감사하며, 한국화양이 윤동주 시인의 모교에서 훌륭한 시인으로 태어나기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윤혜원·오형범 부부와의 일문일답이다.
"살아있다면? 가난한 대학교수였을 가능성이 99%"
- 오빠의 90세 생신을 맞은 소감은?
"(윤혜원) 음, 오빠는 여태도 20대 청년인데 동생인 나만 이렇게 '함뿍' 늙었어요.(웃음) 요즘 몸이 아파서 잊고 지냈는데 시드니 우리교회에서 이렇게 큰 생일잔치를 마련해주어 너무 행복합니다. 오빠도 참 좋아할 겁니다."
"(오형범) 윤동주 시인 90세 생신을 맞아 두 가지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되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첫째로 국가보훈처가 광복회·독립기념관과 함께 윤동주 시인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것이고, 둘째는 오늘 접한 한국화양의 연세대 4년 장학생 선발 소식입니다. 이보다 좋은 생일선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윤동주 시인은 참 애석하게도 27년 8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갔습니다. 그 분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윤) 우리 3남1녀 중에서 바로 밑에 동생인 나만 살아남았으니까 지금의 내 모습이겠지 뭐(웃음). 그건 농담이고, 곁에서 지켜보았던 오빠의 성격상 20대의 성품을 지금까지 그대로 간직했을 겁니다."
"(오) 나도 동감인데요, 그 이유는 윤동주 시인의 사진에서도 나타납니다. 더 없이 선한 인상과 굳게 다문 입술, 다시 말해서 아무 흠결이 없는 90세 노인이면서도 문학적 업적을 크게 이룬 시인 말입니다."
- 윤동주 시인이 살아 계시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을지도 궁금한데요.
"(윤) 오빠가 문학(연희전문)과 영문학(일본 릿교대·도시샤대)를 전공했기 때문에 교수가 됐을 겁니다. 그것도 가난뱅이 교수였을 가능성이 99%(웃음). 실제로 오빠는 돈 버는 일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의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강권을 뿌리치고 문학을 전공한 겁니다. 그것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는데…."
"(오) 가난할 것이라는 예상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시만 쓰면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은진중학교 선배들(오형범씨는 윤동주 시인의 은진중학교 후배이다)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 소년과 윤동주 청년은 오직 시를 쓰고 문학을 연구하는 일에만 골몰했기 때문입니다."
"여자친구도 없던 오빠... 박춘애씨는 마음 속으로만"
- 어떤 스타일의 여성과 결혼했을까요?
"(윤) 오빠는 여자친구조차 가져보지 못하고 타계했어요. 다만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춘애라는 이름의 여학생 사진을 가져와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 여성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학교 전공을 선택할 때 말고는 어른들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거든요."
"(오) 우리가 해방 이후에,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 사후에 박춘애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옌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에 청진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성가대에 서있는 박춘애를 보았고, 나중에 함께 식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윤동주 시인이 마음 속으로만 좋아했을 뿐 프로포즈도 못 했답니다."
- 지금 두 분의 건강이 아주 안 좋은데 내년에도 옌볜에 다녀올 계획이신가요?
"(윤) 마음이야 굴뚝같지요. 그런데 나는 심장병 수술을 두 번이나 한 상태이고 치매 치료까지 받고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오 장로(남편 오형범씨)님께서도 뇌수술을 받으셨고 암 치료까지 받고 계셔서 올해가 마지막 참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 그 말이 맞습니다. 윤혜원 권사는 지금 여덟 가지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에 열린 제8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장에서 2007년이 마지막 참석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어찌됐건 우리 부부가 간여하지 않아도 '윤동주문학상'은 잘 진행될 겁니다."
오빠에게 '한점 부끄럼이 없도록', 호주까지 남하한 누이
윤혜원은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살았다. 특히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윤혜원 부부가 서울-부산-필리핀-호주로 계속 남하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은둔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지난 2005년에 시드니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문학제' 이후로 윤혜원은 은둔 대신 오빠의 생애를 증언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특히 사진 속에 담겨있는 과묵한 이미지가 윤동주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많은 에피소드와 함께 증언하여 윤동주 연구가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공했다.
'윤동주문학상'은 어떤 상? |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은 최근에 작고한 재미동포 현봉학 박사가 설립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주축이 되어 1999년에 출범했다.
1947년부터 미국에 정착한 현봉학 박사는 1984년에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옌볜으로 달려가서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단장하는 등 그 이후의 생애를 거의 윤동주 추모사업에 바치다시피 했다.
한편 매년 8000여편의 응모작품이 답지하는 '윤동주문학상'은 그 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소재),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단체들은 '윤동주문학상' 비용을 부담하는가 하면 해마다 수상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방문의 기회를 부여한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올해부터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중국동포 청소년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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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윤혜원이 20여 년 동안 살고 있는 시드니는 윤동주 연구가들의 순례지가 되다시피 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윤동주 관련 행사들의 소식이 빠짐없이 호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윤동주 시인 63주기를 맞는 2008년에는 시드니에서 '윤동주문학 국제심포지엄'이 열릴 예정이다. 또한 한국·중국·일본·독일(미확인)에 이어서 호주 시드니에도 윤동주 시비가 건립될 예정이다. 윤혜원이 20여 년 동안 살았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윤동주 90세 생일을 맞아 각계에서 보내온 생일축하 메시지다.
홍길복(시드니 우리교회 목사) "우리가 기일이든, 생일이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윤동주 관련 행사를 갖는 이유는 그를 우리 곁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다. 윤동주의 육신이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생각, 맑은 영혼, 하늘을 향한 거룩함, 진리를 향한 열정, 인간을 향한 순수함, 그리고 민족이나 나라를 뛰어넘는 우주적, 보편적 양심이 지금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해마다 윤동주 생일잔치를 열고 추모행사를 갖는 것이다."
김오(시인, 호주한인문인협회 회장) "윤동주 시인 50주기와 60주기 시드니추모제를 호주한인문인협회에서 주관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특히 윤동주의 시편들을 낭송하면서, 그처럼 시와 삶이 일치하는 시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하기도 했다.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윤동주의 맑은 영혼이 더욱 그리워진다."
안나 비숍(Anna Bishop. 호주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 출신 시인) "1997년 '시드니 봄 작가축제(Sydney Spring Writers' Festival)'에서 윤동주 시편들을 접하고 나서 크게 감동받았다. 그 시들을 번역해서 크로아티아에 보냈더니 거기 시인들도 깜짝 놀랐다고 했다. 특히 '서시'와 '자화상'에 담긴 영혼은 너무 고와서 슬프기까지 했다. 2008년에 시드니에서 열릴 윤동주문학 국제심포지엄이 기다려진다는 말로 90세 생일 축하메시지를 가름한다."
윤동주의 묘를 찾게 한 사진 : 1945년에 장례를 지낸 이후 윤동주는 잊혀졌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시인이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다가 1984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의학자 현봉학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해 8월에 중국을 방문, 옌볜의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갖지 않아 그가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또한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중, 옌볜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12일 옌지에 도착했는데, 옌볜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오오무라 교수는 공안당국의 허가를 받아 5월14일 옌볜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와 역사에 밝은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와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간 덕분에 묘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 단장한 윤동주의 묘소 : 1945년 3월6일 윤동주의 묘가 처음 들어섰을 땐 봉분만 있었다. 같은 해 6월14일 묘비가 세워졌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현봉학 선생을 주축으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연증(捐贈)하고, 룽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했다. 2003년에 두 번째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윤혜원·오형범 부부의 주도로 두어 달간 공사가 진행됐다.
윤동주의 마지막 시 : 윤동주가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는 1942년 1월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의 마지막 시는 ‘쉽게 씌어진 시’이다. 이 시는 1942년 6월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또 다른 작품이 남아 있을 거라고 전해줬다.
1947년 이들 부부가 옌볜 생활을 정리하고 함경도 청진에서 살고 있을 때 교회에서 우연히 윤동주의 친구 박춘애와 김윤입을 만났다. 그때 김윤입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시 1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 고향에 가면 그것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들 부부는 기다릴 형편이 못 돼 서울로 월남하게 됐다.
1948년 발간된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러니까 윤동주가 감옥에서 김윤입이란 친구에게 보낸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다. 윤동주가 쓴 사실과 그 작품을 받은 사람까지는 확인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윤동주의 누이동생 부부가 보관자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의 실재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김윤입이 옥중에서 윤동주가 쓴 마지막 작품을 잘 보관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1942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해 오늘날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처럼.]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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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지금까지 오빠가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아요. 동주오빠는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늘 무슨 생각인가에 골똘히 빠져있고 밤새워 책을 읽고 뭔가를 대학노트에 쓰던 사람이었으니 삶의 모습이 바뀐들 얼마나 바뀌었겠어요. 다만 교사나 목사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시를 쓰는 조용한 모습의 교사나 목사말예요. 단짝이었던 문익환 목사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한국의 한 시인단체가 매년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20년 가까이 윤동주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서시(序詩)'가 가장 애송되는 시로 선정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싶지만, 한동안은 잘 믿기지 않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오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빠의 고결한 성품이나,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가 읽히는 <서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일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과대평가 됐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윤혜원) "나는 문학의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지만 그런 평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게 평가하면 그게 어디 문학작품인가요? 종교의 경전쯤 되겠지요. 또한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오형범) "그렇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이 세상에 머문 기간은 정확하게 27년 2개월입니다. 1943년 7월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 '쉽게 쓰여진 시'인데 그 시를 1942년 6월 3일에 썼습니다. 정확하게 25살 때였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시가 모두 25살 이전에 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대평가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동주오빠가 미워져요"
-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뚜렷한 항일활동의 흔적이 없는데.
(윤혜원)"당시의 북간도는 항일운동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난 어리고 여자라서(?) 잘 몰랐지만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40년 이후엔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됐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오빠라고 해서 뭐가 달랐겠습니까. 나는 지금도 오빠의 꼭 다문 입술과 고뇌에 찬 표정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다만 오빠가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소극적인 성격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오형범)"적극적인 항일활동은 아니었지만 삼엄한 분위기의 일본에서 계속해서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것은 윤동주 항일정신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아닐까요? 특히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고종사촌 송몽규와는 운명적인 삶을 공유했기 때문에(동갑내기로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같은 감옥에서 사망함) 항일에 대한 많은 교감이 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는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사람입니다."
-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가 모두 시인인데 왜 시를 쓰지 않는지요?
"그게 참 속상해요. 남자들은 다 똑똑하고 잘 생겼는데, 왜 나만 시도 못 쓰고 못난이로 태어났는지.(웃음) 그런데 동주오빠가 나에게 아동 문학지를 읽게 하고 동화를 들려준 것은 나의 글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 그동안 1942년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졌다가 1942년 6월 3일 쓴 '쉽게 쓰여진 시'가 마지막 작품으로 정정됐는데.
(윤혜원)"'쉽게 쓰여진 시'가 오빠의 마지막 작품이라기보다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오빠는 그 시를 쓴 후에 바로 체포되어서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비록 감옥이지만 오빠가 2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을 리 만무입니다."
(오형범)"우리 부부가 1947년에 남쪽으로 내려오던중 청진에 머물다가 윤동주의 일본유학생 친구들인 박춘애와 김윤립을 만났는데, 그들이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시 한 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해방공간의 혼란이라서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시를 전해 받았다면 그게 마지막 작품이 됐을 텐데."
- 오빠가 가끔 미워진다고 말씀하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해준 것도 없이 나를 평생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웃음)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미워요. 눈치껏 일본경찰을 피해서 좀 더 일찍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를 썼겠습니까."
- 오빠의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빠도 자신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린다면, 오빠의 시를 읽으면서 문학의 향기에 젖어보기도 하고, 너나없이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빠의 동시를 많이 사랑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윤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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