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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어린이들은 "어린이"를 알고 있는지요?...
2017년 10월 17일 21시 29분  조회:3991  추천:0  작성자: 죽림
 

한국잡지백년

어린이 운동을 일으킨 어린이

1923. 3

 

《어린이》 창간호 (1923. 3. 20)

《어린이》 창간호 (1923. 3. 20)

《어린이》는 1923년 3월 20일자로 창간된 아동잡지인데, 아동문학가요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  1899~1931)이 주재()했다. 창간호는 별쇄()한 표지도 없고 목차도 없이 알맹이만 B5판(4·6배판) 12면으로 엮어 푸른 잉크로 찍어 냈다. 흔히 《어린이》의 발행인은 방정환으로 알려져 있으나, 창간호에는 간기()가 없다. 제2호의 판권장을 보면 발행인 김옥빈(), 인쇄인 정기현(), 인쇄소 대동()인쇄(주), 발행소 개벽사(서울·경운동 88) 정가 5전이다. 제8호부터는 표지에다 ‘소년소녀잡지’라고 박았다.

발행인 김옥빈은 천도교 청년운동의 핵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소파는 이때 24세, 창간호부터 발행인으로 나서지 않고 실무를 주재하였고 제31호(1925. 9)부터 발행인이 되었다. 잡지의 판형은 후에 B6(4·6판)이 되었으며, 1934년 7월호까지 통권 122호를 발행했다. 이어 1948년 5월호로 복간, 1949년 12월호까지 15호를 더하여 총 137호를 발행했다.

창간호를 보기로 하자. 소파가 쓴 〈처음에〉라는 창간사는 이러하다.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도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고대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뛰노는 모양 고대로가 자연의 자태이고 고대로가 하늘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에는 어른들과 같은 욕심도 있지 아니하고 욕심스런 계획도 있지 아니합니다.

죄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의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때까지든지 이 하늘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사람이 모두, 이 깨끗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위하는 생각에서 넘쳐 나오는 모든 깨끗한 것을 거두어 모아 내는 것이 이 《어린이》입니다.〈하략〉”

창간사 다음에는 동화작가이며 편집을 맡았던 이정호(, 1906~1938, 호 미소())가 〈《어린이》를 발행하는 오늘까지 우리는 이렇게 지냈습니다〉를 썼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성질을 띤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처음이었습니다.(이하 9행 삭제) 재작년 봄 5월 초순에 서울서 새 탄생의 첫소리를 지른 천도교소년회, 이것이 우리 어린이 동무 남녀 합 30여명이 모여 짠 것이 조선소년운동의 첫 고동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씩씩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고 도와갑시다’하고, 굳게 약속하였고 또 이것으로 우리 모임의 신조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견을 바꾸고 해나갈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매주 일요일 목요일 이틀씩을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우리를 지도하실 힘있는 후원자 김기전()씨와 방정환 씨를 얻었습니다. 두 분은 누구보다도 제일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또 끔찍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든지 좋게 잘되게 해 주시지 못하여 늘 안타까워 하십니다. 우리는 참말로 친형님같이 친부모같이 탐탁하게 믿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로 소년문제에 관하여 연구가 많으신 두 선생님을 얻게 된 것을 우리 운동에 큰힘이었습니다. 〈미완〉”

B5판 12면밖에 안 되는 창간호, 많은 기사를 담을 요량에서 전면 8포인트 활자를 썼으며, 자리에 따라서는 콘사이스 글자만한 7호활자를 쓰기도 했다. 이즈음의 잡지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종이가 귀하던 때라 이렇게라도 해서 보다 많은 것을 독자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비롯하여 〈눈 오는 북쪽나라 아라사의 어린이〉, 동화극 〈노래주머니〉(1막 3장) 등 흥미를 주는 읽을거리들, 이는 모두 소파가 기명·무기명으로 쓴 것이다. 또 하나 눈이 가는 곳은 버들쇠가 지은 동요 〈봄이 오면〉이다.

나는 나는 봄이오면/ 버들가지 꺾어다가/ 피리 내어 입에 물고/ 라×라× 재미스러

나는 나는 봄이 오면/ 진달래와 개나리로/ 금강산을 꾸며놓고/ 쏘꿉장난 재미스러

나는 나는 봄이 오면/ 오색 나비 춤을 추고/ 노랑새가 날아와서/ 꾀꼴꾀꼴 재미스러

버들쇠는 다름 아닌 《어린이》제13호(1924. 2)에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의 〈고드름〉과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구요”의 〈설날〉이 윤극영 작곡으로, 한꺼번에 실려 우리 어린이들에게 처음으로 아름다운 우리 동요를 부르게 해 준 바로 그 시인이다. 본명은 유지영( 1897~1947), 그는 일찍이 일본 와세다대학 중퇴, 동경음악전문학교 졸업, 1919년 5월 《매일신보》에 공채로 입사, 이후 《조선일보》·《시대일보》·《동아일보》등에서 크게 활약한 당대의 명기자이다. (버들쇠와 윤극영 이야기는 뒤에도 나온다)

맨 끝면의 〈사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린이》창간호가 3월 1일에 여러분 어른께 첫인사를 드릴 작정으로 미리 광고까지 하였습니다마는 세상일이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합니다. 소위 원고검열이라는 절차가 어떻게 까다로운지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어느덧 20여일이 획 지나가고 인쇄하는 동안에 또 며칠이 걸리고 하여 이제야 비로소 변변치 못한 면목을 내놓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내용 기사 중에 짭짤한 구절은 원고 검열할 적에 꼭꼭 삭제를 당하여 마치 꼬리 뺀 족제비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가 잘못한 탓으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하략〉”

아동잡지인데도 검열이 그처럼 까다로웠다는 이야기, 당시 편집자들의 고충이 그대로 들어나 있다.

소파는 육당()이 펴낸 여러 소년잡지를 읽으면서 자란 세대였다. 그는 육당이 씨를 뿌린 ‘소년문학’을 보다 확실한 ‘아동문학’으로 꽃피게 했다. 그는 동경유학 때 이미 세계명작동화를 추려 엮은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냈으며, 《어린이》를 내면서부터는 동요·동화·동극 등 본격적인 아동문학 작품을 많이 써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땅에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아동인권운동이자 아동문화운동인 ‘어린이운동’을 일으켜 주도했던 것이다.

이 《어린이》는 요즘같이 어린이에게 놀잇거리나 주고 지능개발이나 하는 그런 잡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라없는 소년소녀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면서, 일제()를 왜 미워해야 하고 왜 물리쳐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 때문에 소년잡지이면서도 삭제 압수 발매금지, 편집자 구금 등의 매서운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경영난에 빠져 폐간하고 말았다.

주요필진은 동화에 방정환 마해송() 고한승() 진장섭() 연성흠() 최병화() 이정호, 동요에 한정동() 방정환 유도순(), 동요 작곡에 홍난파() 윤극영() 정순철() 박태준(), 동극에 정인섭() 신고송(), 일반 교양물에 차상찬() 박달성() 손진태() 조재호() 이헌구() 등이었고, 또 ‘글뽑기’에서 나온 작가로는 윤석중() 이원수() 서덕출() 윤복진() 박목월() 등이 유명하다.

1931년 소파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이정호 신형철() 최영주() 등이 편집을 주간했고, 1933년부터는 윤석중이 그 자리를 맡았다. 《어린이》라는 말을 널리 쓰게 된 것은 이 잡지가 탄생한 후부터였다.

32세에 세상을 떠난 소파 방정환

우리 최초의 어린이운동가 방정환

우리 최초의 어린이운동가 방정환

방정환은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그가 한 일은 우리 어린이와 함께 길이 살아 있다. 그의 〈연보〉를 정리해 본다.

방정환의 호는 소파인데, 잔물·몽견초()·물망초·몽중인()·북극성·은파리·깔깔박사 등의 많은 필명을 쓰기도 했다. 그는 1899년 10월 7일(음력) 서울 야주개(야주현(), 지금의 당주동)에서 방경수()의 장남으로 출생, 1913년 미동()보통학교 졸업했다. 그는 자라면서 최남선이 발간하던 《소년》·《붉은 저고리》·《아이들 보이》·《새별》등을 탐독했고, 그 후에 나온 《청춘》의 현상작문에 당선되면서, 아동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으로 중퇴, 1915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사자생()으로 취직했다. 1917년 4월 천도교() 3세 교주요, 3·1운동 33인의 대표인 손병희()의 셋째딸 손용화()와 결혼했으며, 이때부터 천도교 관계 기관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그 해 유광렬()과 함께 《신청년》을 편집 발간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신문》을 비밀히 발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0년 4월 일본으로 가서 도요()대학 문화학과에 들어가 아동문학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그해 6월 《개벽》이 창간되자, 동경특파원으로 활약, 1921년 〈안데르센동화〉·〈그림동화〉·〈아라비안나이트〉등을 초역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편집, 1922년 6월 개벽사에서 발행했고, 여름방학에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 강연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사랑의 선물》머리글을 이렇게 썼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읽을거리에 굶주리던 어린이들에게, ‘사랑의 선물’로 펴낸 이 책은 마침내 조선 천하에서 제일 잘 팔리는 책이 되어 《어린이》가 폐간될 때까지 10여년 동안에 20여판이 나갔다고 하며, 그후에는 박문()서관에서 맡아 계속 찍어냈다고 한다.

1923년 3월 월간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이어서 5월에는 어린이 운동의 모체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색동회〉를 도꾜에서 조직, 발족시켰다. 그리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했다. 소파는 어린이에게도 존대말을 쓰자고 외쳤으며, 집안의 손아랫사람이며 자녀들에게도 존대말을 썼다. 1924년 ‘전국소년지도자대회’를 열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의회’를 조직했다.

1928년 3월 ‘조선소년총동맹’의 발족으로 어린이운동이 좌경화하고,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고, 소년운동의 방향이 달라지자 일선에서 은퇴, 강연회·동화 구연대회·라디오 방송 등으로 활약했으며, 1928년 10월에는 세계 20여개국에서 출품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했다.

1929년에 중학생잡지 《학생》을 발간했으나, 격무로 지병인 신장병이 악화되어 1931년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검정말이 끄는 검정마차를 가지고 검정옷 입은 마부가 데리러 왔으니 나는 가봐야겠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장례는 3일장으로 천도교당 앞마당에서 지냈는데 식장은 어린이들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의 묘소는 구리()시 아차()산 기슭에 있다. 그가 살던 당주동 길가에는 ‘소파 방정환 선생 나신 곳’ 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고, 서울 어린이대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또 윤석중이 세운 새싹회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1957년 〈소파상〉을 제정,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상하고 있다.

그가 아동문학 활동을 한 기간은 약 10년간으로서 〈가을 밤〉 〈귀뚜라미〉등 많은 동요를 발표했고, 동화로는 〈천사〉 〈마음의 꽃〉 〈농부와 굴뚝새〉 〈흘러간 삼남매〉등 작품이 많다. 〈어린이 예찬〉(《신여성》 1924. 6 게재)은 그의 대표적인 수필로 꼽힌다. 나온 책으로는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비롯하여 《소파전집》 《방정환아동문학독본》 《소파아동문학전집》등이 있다.

《어린이》초창기에는 소파의 동요만이 아니라, 유지영의 〈고드름〉(1924), 윤극영의 〈반달〉(1924)을 비롯하여 많은 동요가 실렸다. 또 ‘글뽑기’에 뽑힌 작품으로는 윤석중의 〈오뚜기〉(1925), 서덕출의 〈봄편지〉(1925), 이원수의 〈고향의 봄(1926)〉, 윤복진의 〈바닷가에서〉(1926) 등이 유명하다. 뽑힌 그해 윤석중은 열네살, 서덕출 윤복진은 열아홉살, 이원수는 열다섯살이었다.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 호 석동())은 《한국근대인물백인선()》(《신동아》부록, 1972. 1) ‘방정환()’ 항에서 소파의 숨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에서 1967년 5월에 발간한 《의암손병희선생전기()》에 실린 연표에서 소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새 사실이 발견되었다. ‘1921년 11월 10일 천도교청년회동경지회장() 방정환() 피검()’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찍어 돌리며 숨어서 활약한 것과 아울러 생각할 때, 소파는 단순한 어린이운동가 동화구연가()가 아니라 항일 독립투사였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어린이 운동을 벌였고, 남들은 백년 대계()를 꿈꾸었지만 그는 10년 대계를 세워 10년 뒤의 청년을 어릴 적부터 참되고 의()롭게 키우는 일에 목숨을 바쳐 일한 것이다.”

“소파가 동네 아이들을 ‘소년입지회()’를 만들어 스스로 회장이 되어 토론회와 연설회를 가진 것이 1908년이었으니 겨우 아홉 살 때였으며, 치렁치렁 땋아 늘인 머리를 강동 잘라버리고 아저씨를 따라 소학교에 든 것이 일곱 살 때였으니 어지간히 일찍 철이 든 소년이었다. 그 당시는 소파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라 할만한 《소년》(1908. 11. 1)을 발행한 최남선은 그때 나이 열여덟살이었고, 집필자 이광수는 열여섯살이었다. 우리나라 개화기의 선구자들은 10대 소년들이었다. 모두가 자립정신에 불타는 애국소년들이었다.”

“1923년 5월 1일은 서울에서 첫 어린이날이 마련된 날이다. 어른들에게는 어린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어린이에게는 앞날의 주인공임을 강조해 주는 뜻깊은 명절로, 천도교소년회를 비롯한 서울 안 소년단체들을 총망라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란 이름으로 행사를 했다. 그날 뿌린 색색의 종이에 적힌 글을 몇 줄 따오면 다음과 같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어린이)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버립니다’/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습니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

“매양 이런 것들이었는데 어린이를 업신 여기고 어른들의 노리개로 삼던 완고한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는데 이러십시오, 저러십시오하고, 깍듯이 존대를 해주며 위해 기르다가는 후레자식이 돼 버릴 것이라’고 하여 얼굴을 붉혀가며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소파는 항상 어린이 편이 되어 그들과 울고 웃고 하였다.

그러나 3년을 못 가서 우리나라 어린이날은 두 조각이 나섰다. 민족, 무산() 두 진영으로 갈려 따로따로 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1927년에 ‘소년연합회’가 생기고 그 이듬해에는 좌익 세력의 ‘조선소년총동맹’이 나서자, 소파는 눈물을 머금고 일선에서 물러나, 《어린이》잡지와 동화회, 강연회, 보육학교, 동화강의에만 전심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개벽사’ 발전에 온 전력을 쏟았다.〈하략〉”

소파가 중심이 된 색동회

3·1운동을 겪고 난 조선 땅에는 우리의 뜻과는 반대로 일본바람이 점점 드세지고 있었다. 이런 때에 《어린이》가 나오고, 동경서 공부하는 젊은이 몇 사람이 우리 어린이들을 걱정하여 모임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곧 〈색동회〉이다. 《어린이》는 색동회 동인들이 중심이 된 잡지였다. 그때의 이야기를 동인 몇 분에게서 들어보자.

색동회 회원(1923 ?)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뒷줄 왼쪽부터) 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

색동회 회원(1923 ?)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뒷줄 왼쪽부터) 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

〈색동회〉동인 정인섭(영문학자 1905~1963, 호 눈솔)은 그가 엮은 《색동회 어린이 운동사()》(학원사, 1975)에서 ‘색동회 창립준비회’ 때의 일들을 이렇게 썼다.

“1923년 3월 16일 일본 도꾜()에서 유학하던 한국인 몇 사람이 첫 모임을 갖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 단체를 만들자고 했는데, 이것이 〈색동회〉창립을 위한 최초의 모임이었다. 방정환이 중심이 되어, 그 당시 자기의 하숙집인 도꾜 시외 센다가야() 온덴() 101번지 오이누마() 집에서, 진주()의 소년운동가 강영호(), 와세다대학 역사과 손진태(), 니혼()대학 예술과 고한승(), 도요()대학 음악과 정순철( ⇨ 《룡쳔검》), 조준기(), 도꾜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진장섭(), 유학생 정병기() 등 8명이 모여 여러 가지 의논을 한 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를 했다.

1. 그 모임의 취지로는 동화와 동요를 중심으로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아동문학을 통해서 일반 아동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시절은 한국민족이 일본 정치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속에는 민족의 계몽운동을 목적하고 있었지마는, 그 뜻을 노골적으로 밖으로 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이 첫 회합에서는 명칭에 대해서 아직 정하지 못하고 다만 추상적 상징적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그 시대의 사정으로 보아 회의 이름을 짓는다 해도 그들의 생각을 암시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회원들이 각각 생각을 해서 그 다음 모임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3. 위에서 말한 8인 이외에도 자격있는 회원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미 모여진 회원 중에 3인이 추천하면 회원이 될 수 있다고 결의했다.

4. 그뿐만 아니라 국내와 해외에서도 그 모임의 취지를 찬성하고 그들이 목적하는 아동문학과 아동문제를 연구하는 동지가 있으면, 같은 회원으로 추천하자는 것이었다.〈하략〉”

두 번째의 모임은 3월 30일 정병기의 하숙방에서 있었는데, 이날 처음으로 나온 윤극영()이 모임의 이름을 〈색동회〉라고 제의했다. 우리의 전통미를 나타내는 아이들의 색동저고리의 ‘색동’을 따온 것으로 모두들 좋다고 하여 대체적으로 합의했다.

세 번째의 모임은 4월 14일 윤극영의 하숙집에서 가졌는데, 회의 이름을 정식으로 〈색동회〉로 결정하고, 발회()식은 5월 1일에 하기로 했다. 발회하던 날의 모습을 정병기는 회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서력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에 반세이바시()역에 집합하여 가지고 스루가다이(駿) 미와() 사진관에서 기념 촬영하니 출석하신 회원이 여좌하다.

손진태 윤극영 정순철 방정환 고한승 진장섭 조재호() 정병기.

동일 오후 4시 니시끼마찌() 나가세껭()에서 축연을 열고 우리 일동은 장래를 공고하게 맹세하고 폐회하니 오후 6시 반. 7시에 일동이 진장섭 씨 댁으로 가서 성대한 주찬으로 9시까지 재미가 진진하니 놀다가 각각 귀가하다.”

우리 최초의 동요작곡가 윤극영

우리 최초의 동요작곡가 윤극영

색동회에는 1924년에 마해송() 정인섭()이, 그후에 최진순() 이헌구() 최영주 윤석중 등이 가입했다. 또 사랑을 의미하는 하트 속에 태극이 있고 병아리가 있는 색동회의 마크는 조재호(교육자 1902~1990)가 그려냈다.

한편 서울에서는 동경서 색동회가 발족된 것과 때를 같이한 1923년 5월1일, 천도교소년회가 중심이 되어, 불교소년회·반도소년회 등이 참가하여 천도교 강당에서 〈어린이 날〉을 선포하고 기념식을 거행했다.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10만장이 넘는 삐라를 뿌리며 시가 행진을 했고, 동화회 강연회 등이 있었다.

동인 진장섭(영문학자 1903~1975, 호 학보())은 〈소파와 나〉라는 글에서 소파와의 인간관계며 당시의 친구들을 말하고 있다.

“소파와 나는 1918년 10월경부터 알고 지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보성() 고보는 지금 조계사()가 자리잡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9월 초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느닷없이 나를 찾아온 젊은 친구가 있었다. 방정환이라고 했다. 어떻게 이름을 알고 왔느냐니까 그 당시 보성 교장이던 고우()선생에게 들었다고 했다. ‘고우()’는 최린() 교장의 아호()이다. 나는 심중에 짐작되는 바 있어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후 둘이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둘이서 뜻이 맞았다. 한 달에 두서너번 서로 찾아다녔다. 그때 나는 열여섯살이고, 방정환은 스무살이었다.

그 이듬해가 바로 기미()년이다. 3월 1일에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소파도 나도 독립운동에 직접 참가했다. 그러나 둘이서 속해있는 단위가 달랐다. 그래서 둘이는 약 월여 동안 소식을 몰랐다. 나는 3월 5일 오전 10시에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 앞 광장에서 있은 결사대의 집합에 나갔다. 그러나 그날은 이미 발검령()이 내려져 무력의 제지로 집회는 개회 전에 해산되고 수다한 학생이 체포되고, 경찰의 첨검()에 의해 허다한 학생이 부상되었다. ······ 나는 우측 허리에 칼을 맞아 부상을 입고 2개월간 치료를 받은 흔적도 남아 있다.

그해(기미년) 10월에 발행된 소파 주간의 《신청년》제2호에 나는 〈평양 여행의 모양을 소파 형에게〉란 제목의 기행문을 발표하였으니 이것이 내 글이 활자화된 효시()인 것이다.〈중략〉

내가 일본으로 떠난 뒤에 내 고향 개성에서는 몇몇 문학동지의 손으로 동인잡지 《여광()》이 발간되었다. 동지 2호에 나는 〈야마구찌()서 송도()까지〉라는 기행문을 실었다. 그 글의 말미에 보면 ······ ‘남대문역에 내리니, 방정환 고한승 마해송 제군이 반갑게 맞아주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나와 그들 사이에는 빈번한 연락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야마구찌에서 1년을 지내고 나는 1920년 9월에 도꾜 아오야마()학원으로 가서 1922년에 졸업하고, 그 해 4월에 동경고등사범에 입학했다. 거기서 조재호를 처음 만났다.〈하략〉”

동인 윤극영(작곡가 1903~1988)은 〈나의 이력서〉라는 글에서 소파와 처음 만나서, 밤새도록 〈형제별〉을 노래불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 1923년 3월 따사한 봄날이었다. 나는 하숙집 마당에 나와 서산에 지는 해를 쳐다보며 시골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집은 약간 언덕배기에 있었다. 울창한 대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땅딸한 젊은이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는 마치 나의 하숙집을 행해 오는 듯 했다. 가까워질수록 얼굴 모습이 뚜렷해졌으나 누군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중절모의 그 젊은이는 서슴치 않고 나의 하숙집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러면서 다정한 말투로 ‘당신 윤극영 아냐?’하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 나는 방정환이야. 알겠어?’

그는 그때 《어린이》잡지의 주간이었다. 33인 중의 한분인 손병희 선생의 사위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날 첫 대면이었지만 이국서 동포를 만나니 퍽 반가웠다. 뭔가 말할 수 없는 훈훈한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소파는 하숙집의 ‘다다미’방에 들어서자 갑자기 ‘이 집에 피아노 어디 있지?’ 하고 물었다.

피아노는 구석진 골방에 있었다. 나는 그를 피아노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방에 들어서자 그는 대뜸 ‘나는 말야, 이 노래를 좋아해’ 하면서 혼자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형제별〉이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비치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집니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구슬픈 맛이 애틋하게 났다.

‘윤극영, 어때?’ ‘좋긴 좋은데 누가 번역했나?’ ‘내가 했지.’ 우린 한바탕 웃었다. 그 노래는 나까가와()라는 일본 사람이 작곡한 일본노래였다. 그러나 그 구슬픈 곡조가 나라를 잃은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피아노를 쳐가며 이 노래를 계속 불렀다.〈중략〉

우리는 밤이 이슥한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그러나 갑자기 소파는 ‘왜 우리가 일본 노래를 부르지?’ 하고 물어왔다. 나는 처음에 멍청했다. 드디어 소파가 나를 찾아온 이유의 본론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라도 빼앗기고 말도 뺏겼는데, 왜 노래마저 일본 노래를 부르지?’ ‘우리 고유한 노래가 없잖아.’ ‘그래, 노래가 없다. 그것이 문제야. 우리는 3·1운동으로 뭔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하고 실패만 했지. 실패만 했어. 우리는 그래도 괜찮다. ······ 문제는 어린아이들이야. 그들에게는 우리의 노래도 없다. 윤극영, 어린이에게 줄 노래를 지어라. 그들은 10년, 20년이 흐르면 바로 우리나라를 지고 갈 역군이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윤극영, 자네 혼자 음악공부해서 출세하면 뭣하나. 어린이에 대해 무심하면 안 된다.’ ‘알겠다. 나도 어린이를 위해 힘쓰겠다.’ 소파는 기뻐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했다. 그는 어린이 운동을 위한 동지를 모으고 있다고 했다. ······ 나는 무조건 찬동했다. 그리고 또 우리는 피아노를 치며 소파가 번역한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를 밤새도록 불렀다. ······ 〈하략〉”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있은 후부터 윤극영은 우리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윤석중 저 《어린이와 한평생》(범양사, 1985)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따위 창가밖에 없던 그 시절에 우리나라 어린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동요곡이 처음으로 우리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1924년 2월에 나온 《어린이》지 제13호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의 〈고드름〉(버들쇠 작요·윤극영 작곡)이 발표되었다. 같은 호에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제께구요’의 〈설날〉 곡도 났다. (〈설날〉 노래말이 1월호에 먼저 난 것을 보면 이 작품은 그 전해인 1923년에 된 것일까?) 그런데 윤극영의 〈반달〉 곡은 《어린이》지 그해 11월호에 났으니, 첫선을 보인 동요곡은 〈설날〉과 〈고드름〉이었다.”

동경에 있던 색동회 동인들은 참으로 열심이었다. 작품을 써서는 서울로 보내고, 매달 《어린이》를 읽은 합평회를 열어 의견이나 작품평을, 마해송이 모아 등사해서 돌리고 본사에도 보냈다. 그때 나온 의견 중에는 “어린이를 좀더 씩씩하게 기르자면 눈물나는 읽을거리를 많이 할 것이 아니라,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내용을 70%, 눈물나는 이야기는 30% 정도로 하자” 고 결의한 바도 있었다. 또 마해송은 소파의 ‘눈물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1931년 9월 《조선일보》에 실은 세상 떠난 소파를 추도하는 글 가운데서 이렇게 따지고 있다.

“방 군과 우리들(우리들이란 주로 색동회 동인)은 근년에 와서 오히려 상반하는 사이에 있었다. 우의는 여전히 두터우면서 방 군의 《어린이》편집 방침, 아동지도 방침에 대하여는 우리는 오히려 대립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군의 영웅주의와 눈물주의를 극력 배척한 것이다.”

마해송의 주장은 ‘현실을 과학적으로 똑똑히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지니도록 어린이들을 지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 잡지계에서 떨친 마해송

일본서 활약한 잡지인 마해송

일본서 활약한 잡지인 마해송

아동문학가로 수필가로 유명한 마해송(1905~1966, 본명 상규())은 ‘색동회’를 중심으로 한 어린이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그보다는 잡지인으로서 그 명성이 더 알려졌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의 문학적 업적은 접어두고 그가 잡지인으로 활약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오늘의 우리 잡지인들에게 들려 주고 싶다.

그는 1921년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 당시 일본 문단의 대가()인 기꾸찌 히로시( 1888~1948)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 제자가 된다. 1923년 기꾸찌가 주재하는 《문예춘추()》창간 편집에 참여, 후에 편집장이 되고, 또 《문예춘추》의 임시 증간호로 내는 읽을거리 잡지 《올 요미모노(オ-ル)》를 혼자서 기획 편집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다. 그러다가 1930년 문예춘추사에서 젊은이의 잡지로 내다가 그만둔 《모던 일본(モダン)》을 인수, 기꾸찌 사장의 후원을 받으면서 독립하여 크게 성공시킨다.

요즈음 같은 국제화시대도 아닌 그 시대, 더구나 식민지의 한 청년이 동경 한복판에다 내로라하는 잡지사를 경영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담하고 당당한 일인가. 그저 흥미 본위의 잡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기개가 넘치는 바른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때 나이 26세, 더구나 지금 일본이 자랑하고 있는 큰 잡지 《문예춘추》의 초창기 편집장이었다는 사실, 이런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우리 잡지인들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비록 우리 잡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 시대의 문화를 짚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겠기에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

우선 그가 지은 자전적 기록인 《아름다운 새벽》(성바오로출판사, 1974)에서 실감나는 그때의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생각난 것이 임시 증간호였다. 다달이 나오는 잡지 외에 한권을 더 내기로 하고, 그 일을 내가 맡아 그 몫으로 생긴 돈을 받아가지고 여름 한 달 새너토리엄에 휴양을 했으면 했다. 봄철 경마를 보러 교또()에 갔을 때에 경마장 잔디밭에서 넌지시 그런 말을 했다. 스승은 내 생각보다도 더 좋아했다.

‘잘해 봐, 잘 팔릴 거야, 한 번도 한 일이 없는 우리 사의 임시 증간이니 인기를 끌 수 있을 거야. 이익은 반타작하지.’

이익을 잡지사와 편집하는 나와 반반으로 해주겠다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 증간호 편집 일은 거의 아파트 방에서 혼자서 끙끙거렸다. 편집뿐이 아니라 종이 장수도, 인쇄소도 아파트 방으로 불러서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다. 당돌하고 대담한 일이었다. 본지가 10만을 훨씬 안 트는데 15만부를 발행하기로 했다. 누구에게 의논하는 일이 없이 모두 혼자 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이것이 팔리지 않는 날이면 잡지사는 형편없이 쓰러지고 큰 빚을 스승 혼자 짊어져야 할 판인데, 의논 한번 하는 일 없이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것이 대성공을 했다. 15만부가 불과 닷새 동안에 팔렸던 것이다.”

이것은 스승인 기꾸찌 사장과 함께 경마를 보러 갔다가 푸른 잔디밭에서, 편집장은 아이디어를 내고 사장은 응낙하고 그것을 크게 성공시키는, 손발이 척척 맞는 참으로 멋진 장면이다. 이것이 바로 《올 요미모노》의 창간호였다.(‘올 요미모노’란 ‘All 독물()’ 즉 ‘전부 읽을거리’란 뜻). 또 그가 《올 요미모노》 편집장을 할 때의 이야기 하나를 옮겨 본다.

“어느날 기꾸찌 사장이 편집장을 보고 《올 요미모노》 필진에 요시까와 에이지()도 끼워 주라고 당부했다. 아무리 사장의 부탁이라도 탐탁스럽지 않다는 듯 묵묵부답이었다. 2, 3개월이 지나서 사사끼 모사꾸() 총편집장을 통해서 요시까와의 소설을 싣도록 다시 사장의 독촉이 내려왔다. 그래도 편집장 마해송은 가부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편집장은 사장으로부터 추궁을 당한다. 그때서야 편집장은 《올 요미모노》의 필진 명단을 펼쳐 놓는다. 그것은 고정 필진으로 시라이 교지(), 무라마쓰 쇼후(), 오사라기 지로(), 나오끼 산주고() 등이었고, 자유필진으로는 노무라 고도(), 아꾸다가와 류노스께(), 오까모도 기도(), 그리고 말석에 가와바다 야스나리()로 짜여져 있었다. 당대 기라성 같은 필진이었다. 즉 이러한 일류 필진 속에 이제 초년병인 요시까와 에이지의 소설을 어떻게 싣고 또 어떻게 이 필진에 넣으라는 것이냐는 항변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편집장 마해송은 요시까와 에이지 스스로가 작품을 가져오면 게재 여부를 고려해 보겠지만, 편집장의 이름으로 그에게 원고청탁을 하여 원고를 받을 생각은 아직은 없다고 대답했다. 기꾸찌 사장도 마해송 편집장의 고집을 알고 있었던 터라 그럼 그런 방향으로 매듭짓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기꾸찌 사장은 마해송 몰래, 사사끼 총편집장으로 하여금 밀사를 보내 요시까와의 작품을 받아오게끔 지시한다. 이렇게 해서 마해송의 고집을 누구려뜨려 《올 요미모노》의 필진으로 요시까와 에이지가 첫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청년 마해송은 그만큼 고집이 있었고 줏대가 서 있던 잡지 저널리스트였다. 이러한 성품은 사내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문단에서도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말석에 있었다는 가와바다(1899~1972)는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또 요시까와(1892~1962)는 훗날 역사소설의 대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다음은 1930년 문예춘추사에서 새로 낸 젊은이의 잡지 《모던 닛뽕》(Modern )이 넉달만에 수지가 맞지 않아 자진 폐간하는데, 그것을 살리겠다고 고집을 부려, 마침내는 일본에서 5대 잡지, 3대 잡지로 꼽히게까지 이룩해 놓은 이야기가 된다.

“겨울이 왔다. 9월에 또 새로 창간한 젊은이의 잡지는 12월호로 폐간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넉달 동안에 결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아예 폐간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젊은이의 잡지 하나쯤은 조금 적자를 보더라도 끌어 나갔으면 싶었다. 또 어느 정도 수지를 맞출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폐간하는 것을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폐간을 결정한 것이다. 내가 혼자 해보겠다고 했다. 가망이 없으니 단념하라고 했다. 나는 고집을 부렸다. 잡지를 넷이나 발행하는 대잡지사에 젊은이를 위한 것도 하나쯤 있어야 좋지 않겠느냐, 편집하기에 따라서 또 기획을 새로이 하면 수지가 맞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고집을 부렸다. 나중에는 ‘사에서 안 하면 내가 혼자서라도 해보겠다’고 내친 말을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사장은 승낙하지 않았다. 사에 긴한 사람이니 내보낼 수 없다고 했다.〈중략〉 나는 이를테면 최후 담판을 하러 온 셈이요, 무엇 때문에 승낙을 안 하느냐고 잔뜩 토라져 있었기 때문에 긴장이 지나쳐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사장은,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 이건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이렇게 쉬운 일을 십여 일을 두고 초조해 했던 것이 억울했다. 직접 만날 것을 그랬다고 생각했다.

‘누구하고 하려는 거야? 같이 할 사람이 있어? 돈은? 돈도 있어?’ 사장은 낮은 소리로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는 토라진 채로 투덜거렸다. 아파트에서 혼자 하고 있다, 사람도 돈도 소용 없다고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호호, 돈 없이 어떻게 독립경영을 한담? 내 한 천원 주지. 이건 투자야. 사람도 마음에 드는 사원이 있으면 돌려주지.’ 내내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람도 주고, 본사 한구석에 자리를 주고, 테이블 등도 주었다. 송별회라는 것도 전에 없던 일었다.〈중략〉

사실 사람도 소용 없고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일은 천둥벌거숭이었다. 본사에서 임시 증간을 혼자 계획 세우고 인쇄소랑 제지회사랑 광고대리업 회사를 아파트로 불러서 일하던 때와는 형편이 달랐다. 종이나 인쇄소 대금, 광고비는 90일 기한의 수형( : 약속어음)으로 거래했었고, 잡지 판매 대금은 그달 월말에 일부가 벌써 들어오고 두달 후면 깨끗이 청산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례만을 믿고 나는 일을 시작했는데, 얼씨구 인쇄소도 제지 회사도 광고대리업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었다.〈중략〉

‘당신이 하시면 꼭 성공하시리라고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수인사는 들으나마나다. 종이를 왜 빨리 넣어주지 않느냐 말이다. 다음 말이 청천의 벽력이었다. ‘그런데 ······, 수형거래도 좋습니다만 기꾸찌 선생이 뒷도장을 찍어 주시겠죠?’

‘아뿔싸!’ 이건 참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이마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으나 안색을 변하지는 않았다. 나부랑이 회사원에게 투덜거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걱정으로 지체하고 있었소? 염려 말아요, 찍으나마나지만 꼭 필요하다면 얻어드리지.’ ‘참 무어라고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 2, 3개월 만이라도 뒷도장을 찍어주시면 ······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서 ······.’ 그런 말을 다섯 회사 사람이 판에 박은 듯이 했다. 기막히는 일이었다. 수형을 써 가지고 사장실을 찾아갔다. 뒷도장을 찍어달라고 안 나오는 말을 했다.

‘그것 봐! 돈 없이도 할 수 있다고 뻐기더니 ······’ 그러나 웃음 띤 눈을 곧 수형면으로 돌렸다. 내가 너무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더 핀잔을 주기가 안 되었다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긴장해 있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해 본 일조차 없었지만, 혹시나 ‘뒷도장을 찍어줄 수 없다’고 한 마디 나온다면 만사는 끝이기 때문이었다. 웃음 띤 얼굴만이 구원이었다. ‘굉장한 금액인데! 이렇게 많이 박았어? 자신 있어?’ 10만 부를 발행했기 때문이었다.

정가 10전짜리가 팔리지 않아서 폐간해버린 것을 맡아 속간하는데, 정가를 15전으로 올리고 10만부를 발행했으니 배짱에 놀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지나가는 말처럼 자신 있느냐고 한 마디 했을 뿐, 지배인에게 뒷도장을 찍어주라고 했다.〈중략〉 선생은 원고료를 두둑이 받았을 때면 가까이 있는 아무에게나 ‘돈 있어? 좀 줄까?’ 하며 호주머니 속에서 집히는 대로 주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살림을 겪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정이 많았다. 그때는 문단의 대가로 다른 문학가들에 비하면 엄청난 수입이 있었지만, 학생시절에는 남의 신세를 졌었고 졸업 후에도 가난살이를 겪은 사람이었다. 신혼 가정은 2층 한 칸 방 셋방살이였다는 것이었다. 출세해서 재벌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때에도 주위의 사람을 돌봐주기를 좋아했다. 잡지사에서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작가로서의 수입이었다.”

“1939년에는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10만원 전액 불입의 회사는 주금()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었다. 독립 경영한 결과 그만큼 돈이 남아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법인체를 만든 것이었다.

내가 신세를 진, 말하자면 좋은 원고를 써준 사람, 그림을 그려준 사람과 사원에게 주식을 나누어 준 것이다. 기꾸찌 선생에게 3만원어치 주()를 증정하기로 했다. ‘아이구, 이렇게 많이 주어? 그리고 과반수는 사장이 가져야 할 텐데?’ 내 이름으로 과반수를 차지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조금씩 주식을 고루 나누고 나니 내 앞으로 2만5천여원의 주가 남았다.

사업은 날로 발전했다. 5대 잡지 중의 하나라는 말도 들었고, 3대 잡지에 든다는 말도 들었다. 10주년에는 〈조선판〉이라는 임시 증간을 두 번 발행했다. 내 조국의 역사와 문화와 풍물과 문학과 인물을 자랑하는 기획이었다. 일본 안에서 발행한다고 해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구나 조선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의의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했고 말살하려 했고, 우리의 성명조차 일본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강요했고, 우리말을 못 쓰게 했던 때인 만큼 그 임시 중간의 내용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도 새로운 놀라움이었다. 〈조선〉의 옳은 모습을 전하려고 애써 편집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그러했다. 20대의 젊은이라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내내 말로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제 조국의 진정한 모습을 얻어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애써 편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수지에 있어서도 장사가 아니라 잔치로 생각했었다. 다 팔려도 크게 밑지는 계산은 10주년을 자축하는 한턱으로 생각했던 것이다.〈중략〉

총판은 네 군데였다. 인쇄소에서 네 군데 총판으로 배본이 끝나면 배본 전표와 용지 전표를 보내온다. 제지회사에서 들어온 수량과 사용한 수량과 남은 수량의 전표다. 배본 전표는 말하자면 총판의 영수증이다. 팔리지 않은 잡지는 두 달 후면 깨끗이 돌아오고, 그러니 두 달 후면 대금도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었다.

잡지사에는 40명이나 사원이 있었지만 업무 관계는 한두 사람이면 족했다. 머리를 써서 좋은 편집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1945년 1월까지 거의 15년 동안 사장 노릇을 했지만 주판을 가져보지 않았다. 잡지사에 주판이 있었는지 조차 모른다.〈하략〉” (여기까지의 마해송 이야기는 앞의 책 《아름다운 새벽》에서 옮겼음)

앞에서 말한 〈조선판〉은 주식회사로 새출발을 하고, 잡지도 10년째 되는 마당에서 ‘조선의 자랑을 담은 잡지를 만들어 고국에 선물하자’는 뜻이 담뿍 들어 있었다.

제1차 〈조선판〉은 1939년 11월에 나왔는데 A5판 300여 페이지의 두툼한 부피였다. 평판이 좋아 재판을 내려고 했으나 판을 헐었기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 제2차 〈조선판〉은 1940년 8월, 서울에 편집진을 파견, 현지 취재를 하면서 편집을 했다. 제1차와 같은 체제와 분량으로 냈는데 역시 곧 매진되었다고 한다. 이 두 차례의 〈조선판〉에 대하여 해방 후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도야마()대학 교수 가지이 노보루()는,

“아동문학가 마해송을 사장으로 하는 모던일본사가 두 차례에 걸쳐 〈임시 대증간 조선판〉을 편집하였다. 그 특집의 내용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역사 민속 등 인간 생활 주위의 모든 분야에 걸쳐 문자 그대로 ‘이것이 조선이다’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제까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두 차례의 〈조선판〉이 민족문학,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당시의 조선문학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조선문학 번역의 발자취 [8]〉, 1982)

김을한이 동경서 본 마해송과 《모던일본》

한국 신문계 원로 중의 한사람인 김을한( 1906~1992, 호 동명(), ⇨ 《신문춘추》(1929. 9?) 발행인)은 1939년 4월 동경()에서 조선문화사를 세우고 《조선화보》를 발행했는데, 그 무렵 일본 잡지계에서 크게 떨치던 마해송의 《모던일본》을 현지에서 본 그대로를 《신태양》(1957. 7)에다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그 이야기를 드문드문 옮겨 본다.

“당시 일본에는 수많은 잡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모던일본》은 가장 모던(현대적)한 잡지로서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표지는 미국잡지와 같이 아트지를 썼고, 거기다가 당대 일류 화가들의 유화를 원색판으로 인쇄해서 언뜻 표지만 보아도 그것이 《모던일본》임을 알 수 있을만큼 이채()가 있었다. 일본잡지계에서 표지에다 저명 화가의 그림을 원색으로 인쇄한 것은 《모던일본》이 효시였던 것이다.

내용도 참신하고 편집도 재치가 있었고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모던일본》은 제일 많이 팔리고 가장 인기있는 제1류에 속하는 잡지였다. 그 사장이 바로 마해송이었다. 일인이 아니고는 사람 노릇을 못하던 그 판국에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한국사람이 잡지를 발행한고, 일본의 대중들이 제일 많이 본다고 하니 얼마나 재미나는 일이냐? 그래서 나는 《모던일본》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통쾌한 생각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내가 동경에서 일하는 동안에 차차 마해송에 대한 지식이 늘게 되었다. 그의 스승 기꾸지()가 경영하는 문예춘추사에서 오락잡지로 시작한 《모던일본》이 몇 달 아니가서 폐간하게 되자, ‘기왕 버릴 바에는 나에게 달라’고 해서 그 잡지를 맡았다는 것과, 적수공권으로 노심초사()한 결과 그가 경영한 뒤부터는 거짓말같이 잘 팔려서 필경엔 《문예춘추》이상으로 《모던일본》이 더 유명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염파 정인익(  1902〜1950 납북, ⇨ 《문예시대》(1926. 11) 발행인) 형을 만났더니, 연상 마해송을 칭찬하면서 함께 가보자고 하였다. 그후 얼마 아니되어서 나는 마해송을 찾아갔더니, 그도 나의 이름은 들어서 아노라고 하면서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때 모던일본사는 동경에서도 일류라는 오오사까빌딩에 있었는데 4층인가 5층인가의 어지간히 넓은 방을 여러개 쓰고 있었으며, 남녀 사원이 50여명이나 되었었다. 마해송은 키가 작은 편이었으나 얼굴이 총명하고 영롱하게 생겨서 겉으로만 보아도 교양이 높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침착한 표정과 세련된 태도는 흡사히 어떤 귀공자를 대하는 듯하였다.”

“마해송은 개성() 양반의 집 출생인지라, 10여살 때에 벌써 초립동()으로 장가를 들었으며 신교육을 받고 지각이 나면서부터 어떤 여성과 열렬한 사랑을 했으나 끝내 성공을 하지 못하고 실련의 상처를 안은 채 홀아비로 지냈으며, 폐병까지 앓게 되어 사선()을 헤매이다가 겨우 재생하게 된 것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일본은 여자가 흔한 나라이고 당시의 마해송은 청년 사장으로서 일본 문화계의 중진이었음으로 그를 아는 사람들은 혼인 중매를 들려고 애를 썼다.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직접 프러포즈하는 일도 많았다. 그렇지만 무슨 결심인지 마해송은 여성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여성들의 그에 대한 모정()은 더욱더 높아질 뿐이었다.”

“그는 저녁마다 수많은 문사들을 데리고 빠에 가서 양주를 마시고 요정()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주 일과()처럼 되었었다. 술값은 얼마든지 잘 지불할 뿐더러 행하( : 팁)도 후하게 주었다. ······ 그는 마실 것을 마시고 먹을 것을 먹고는 절대로 그곳 여성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던 마해송이 갑자기 약혼을 발표하게 되니 모두가 놀랐었다. 오랫동안의 독신생활을 비로소 청산하는 것인데, 그의 신부될 사람은 당시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가장 유망하던 박외선() 양(후일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이었다. 마해송은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하고 잡지 관계자가 전부 일본사람들이니까 누구나 그는 꼭 일본여성과 결혼할 줄을 알았는데, 한국여성을 아내로 선택하였다는 데에 또 한번 놀랐었다. 이 한가지만 보아도 마해송의 민족적 자부심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그의 스승 기꾸지()는 일대의 문호()답게 제자의 심중을 헤아린듯, '남오() 택남지()' (남쪽나라 새는 남쪽 가지를 택하듯이,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을 짝한다는 뜻)라는 축하 휘호를 주었다.”

그는 일본 안에서 앞서가는 잡지 사업을 하면서도 ‘조선’을 잃지 않고 살았다. 많은 유명인사들이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뜯어고치고 일본사람 행세를 하며 우쭐대던 그 시절 그 바람 속에서도, 그는 끝끝내 ‘마해송()’으로 버티면서 8·15해방을 맞았다.

마해송은 어느 해 설날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썼다.

“유언(), 공부도 재주도 덕()도 부족()한 몸으로 외롭단 인생()을 외롭지 않게 제법 흐뭇하게 살고 가게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아껴 주신 여러분 댁내() 만복()을 빕니다. 일월() 일일() 마해송()”

그후 1966년 11월 6일 선종(), 향년 61세였다. 월탄( 박종화())의 조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제 당신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었더이다. ······ ‘진로’ 병을 내놓고 한잔 하자고 권하지도 아니하였소, 마지막 껄껄 웃고 갔다지요. 참으로 훌훌하게 가버렸구려. ······ 그 정의, 그 조촐, 그 매력있는 고집을 다시는 바라볼 수 없게 되었구려. 오늘은 삽을 들어 당신의 무덤을 이루는 날, 친구들이 한줌 흙을 던지고 발길을 돌이킬 때, 가을바람은 낙엽을 흩날리고, 당신은 웃는지 조는지 비웃는지 다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구려. 당신의 일생의 큰 공적은 모든 친구가 울면서 이야기했소.”

[네이버 지식백과] 어린이 운동을 일으킨 어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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