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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애에 오직 4점의 풍경화만 그린 "인물화가"
2017년 10월 19일 22시 02분  조회:2164  추천:0  작성자: 죽림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0) : 모딜리아니 Amedo Modigliani (1884~1920)

 

고독한 혼의 소리와 관능미(官能美)

 

 

 

 

자화상

 

다른 화가들의 관례와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던 이른바 '만남의 화가'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이 작품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붓놀림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이 유일한 그의 자화상이며, 1919년 작이다. 화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델의 인상으로 보아 1920년 1월 24일(그가 죽은 날)은 멀지 않은 것 같다. '카라 이탈리아 (그리운 이태리)'를 남기고 보잘 것 없는 자선 병원의 침대 위에서 한 많은 이승을 등진다.

 

 

 

 

유태인 여자

 

<젊은 여인의 얼굴>과 함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작품이지만, 전자와는 현저한 표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기 어렵다.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과도기를 말해 준다 하겠다. 처음 파리로 왔을 때 그는 조각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단테와 니체, 그리고 다눈치오를 암송하고 15세기(콰트로첸토) 르테상스의 고전을 규범으로 했던 교양인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교양 즉 그의 문학성은, 조각과 회화 사이인 입체와 평면 사이의 미련(未練)의 가교 같은 구실을 한다. 이 작품이 풍겨 주는 표현주의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이러한 그의 미련을 바로 반영해 주고 있다. 세기말 의식인 고뇌의 그림자가 역력하다. 고뇌는 젊은 예술가의 특권이었으며, 그 궁극에 멜랑콜리의 존중이 움트고 있다.

 

 

 

젊은 여인의 얼굴

 

1906년 21세 때 파리로 진출한 모딜리니아가 23세 때 그린 작품이며, 그로서는 파리 정착 이후 첫 번째의 공식 작품이 되는 셈이다.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굶주리고 외로운 유랑기를 2년 동안 보내면서 그는 자신 속에 잠재하는 영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피카소의 변모를 싫어했고 미래파의 권유를 뿌리치면서 그는 자신의 독자성만을 모색하고 있었다. 1907년 살롱 도똔느에서 개최된 세잔의 대회고전은 그에게 큰 감명을 준다. 이 첫 번째 공식 작품은 그 다음해인 1908년에 앙데팡당전에 출품하게 된다. 아직 모딜리니아의 유연한 데포르마숑인 생(生)의 곡선(曲線)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경직된 지적(知的)인 성찰(省察)로서의 주제 파악이 역력하다. 세잔과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頭像

 

<카리아티드>의 에스키스와 함께 이 조각 작품은 1912~14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가 되는게 꿈이었고, 오른쪽의 두상은 1912년 살롱 도똔느에 출품했던 일곱 점의 석상 가운데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브랑쿠지와 립시즈로부터 조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긴장은 극에 달했었다고 한다. 폐가 나쁜 그는 조각에 대한 열의를 저버리지 못했으며, 죽는 날까지 언제인가는 유명한 조각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수직으로 길쭉한 코의 선맥과 원통형의 목줄기가 신선한 조형미를 유발시켜 주고 있다. 어딘지 먼 시대로의 환상이 맥박처럼 들려오는 이 두상은, 당시의 파리 미술가들이 심취하기 시작했던 아프리카의 원생 미술인 그 충실감과 데포르마숑을 연상시킨다.

 

 

 

 

젊은 하녀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첼리스트

 

한눈에 보아서 세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세잔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왼쪽 인물을 그대로 모사한 듯한 착각마저 일게한다. 다만 그려진 첼로가 화면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것을 연주하는 인물의 내면의 깊이를 암유하는 듯도 싶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조를 듣는다는 것인가. 역시 전기한 멜랑콜리의 읊음이며, 짙은 인간애의 색조라고 해야겠다. 이 작품의 뒷면엔 브랑쿠지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브랑쿠지로부터 조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일깨웠으며,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첼리스트의 면모가 뒷면에 그린 브랑쿠지(정면으로 된 크로키)의 옆 모습과 불가사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미술은 문화적 유산이며, 세잔의 유산을 모딜리아니가 상속한다는 역사를 이 작품은 증명해 주고 있다.

 

 

 

 

카리아티드

 

그리스의 건축 용어로 여상(女像)으로 된 석주를 뜻한다. 그리스어로는 '카리아티데스'라고도 한다. 에렉티 옹의 여상주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데 통상적으로 착의의 여상으로 되어 있으나, 모딜리아니는 나상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캔버스 위에 유채로 된 에스키스를 보여 주고 있지만 석회암으로 된 조각품도 따로 있다. 카리아티데스는 '아틀란티데스(남상주,男像柱)'의 대응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여상석주는 전설적인 유래가 있다. '카류아이'라는 그리스 마을이 페르샤와 전쟁했을 때 이적 행위를 범했다고 해서 그 마을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어 이처럼 공공 건물의 엔태블러처를 떠받치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여체상을 각 분절의 특성을 살려서 이처럼 조형적으로 재구성해 보이고 있다.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

 

현재 상파울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본격적인 유화는 아니며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초벌 그림 형식의 작품이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지만 리베라의 인물이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르퉁퉁한 살갗과 몽유병 환자인 리베라는 어렸을 때 멕시코의 열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회의 도그머를 극도로 혐오했던 맥시코의 화가였다. 그는 '파리의 예술도 빈사 상태에 있다. 자바타의 농민(멕시코의 혁명조)들은 기계를 본 적이 없지만 포앙카레(당시 프랑스 수상)보다 백배로 현대적이다. 나는 믿고 있지만 우리들의 그림을 보여 주면 멕시코의 농민들은 반드시 이해해 줄 것이다. 고딕 교회나 아즈테카 신전은 누가 건설했는가. 만인이다. 백성들이다. 농민들이 건설한 거지 뭔가.'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

 

이 작품도 리베라의 초상처럼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습작풍의 작품이다. 이것은 리베라를 그린 다음해의 작품이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양식이 극도로 제약된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우수에 찬 조용한 서민들의 표정과는 달리 피카소의 눈은 짙은 눈동자가 끼워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앙드레 살몽과 피카소를 도움의 카페에서 자주 만났으며, '피카소는 우리들보다 언제나 2년을 앞서 있었다.'고 그 재기를 찬양하기도 했다. 모딜리아니의 피카소는 여기서처럼 그시스 신화의 목신처럼 그려져있으며, 그처럼 급진적인 변모를 싫어했던 그의 중용적이고 고전적인 입장이 이처럼 피카소를 어떤 어두운 환영처럼 느끼게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이 퐁파두르 부인은 본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비아트리스를 대용해서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비아트리스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하며 타일렀다는 것이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 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부부

 

모딜리아니의 전(全)작품은 언제나 한 인물의 초상화이고 한 화면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 건 <립시즈 부처>의 작품말고는 이것이 나머지 예이다. 또한 그의 모티브는 항상 서민적인 애환이 조용하게 표정짓는 삶의 모습들인데, 여기서처럼 정장한 한 쌍의 부르조아가 등장하는 경우도 이것이 마지막 예이다. 앞에 적은 조각상인 길쭉한 수직선과 견주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당시의 그는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를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두드러지던 징후는 입체파적인 조형 감각이었다. 화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한 다음 각기의 인물의 중앙선을 관통한 선상에서, 가령 남자의 오른쪽 뺨 위의 원형의 선과 여자의 그것이 대응한다는 게 여기서의 예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묘는 불필요한 색채의 텐션(tension)을 효과적으로 제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선맥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살리고 있다.

 

 

 

 

모이스 키슬링의 肖像

 

1910년대의 파리는 '에콜 드 파리'의 전성기였다.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어서 각자의 자율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화가들의 모임을 이름한다. 고향을 떠나 온 미술가들이 객지인 파리에서 오직 자신들의 예술적 잠재만을 밑천삼아 그 내용을 신장하던 그룹을 뜻한다. 따라서 에콜 드 파리는 하나의 유파로서의 미술 표지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다. 서로 미술에 대한 견해라든가 주장은 다른 것이었지만 고향을 등졌다는 이방인이라는 데서 이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노스텔지어의 이들은 숙명으로 했었다는 이야기이다. 키슬링은 폴란드에서 온 유태인이며,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온 유태인이었다. 이들은 그래서 모태의 혈연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막스 쟈콥의 초상

 

막스 쟈콥은 브르타뉴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시의 파리 화단을 형성했던 주요 인물의 하나이다. 그도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사랑했으며 폴 기욤이라는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즈보르스키처럼 관대한 이해자는 아니었으며, 얼마간 이재(理財)에 바른 시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비아트리스와 동거하고 있을 때 자주 찾아 왔던 쟈콥은 모딜리아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염려했고 그래서 제법한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여 건실한 작가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고한 것도 쟈콥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럴 때마다, '농담 말게' 하면서 이 연상의 이해자를 어렵게 만드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쟈콥은 비아트리스를 모딜리아니로부터 떼어 놓으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쟈콥은 40이 넘은 대머리지만 모델의 지성과 감수성이 부드러운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빌호르스키의 초상

 

이 작품의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앉을 때 보이는 그러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를 회화로 표현할 때 자칫 굳어진 포즈로 재현될 우려가 있다. 가령 표현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상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회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미술가의 마음의 굴절을 통해서 나타나며 그래서 성격적인 것이 된다. 미술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본뜨는 게 아니라 사람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미술이 그 사람을 본뜬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퍼스낼리티로서의 모딜리아니의 표지가 빌호르스키에 의해서 여과된 변형이라고 해야겠다.

 

 

 

모자를 쓴 여자

 

미남자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 이게 했었다는 것은 그의 전기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의 카페에서 그리고 망파르나스의 로톤드나 도움의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처녀들은 빠져들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기들은 용모를 띠고 있으며, 양가집의 처녀 같지는 않다. 필경 술집 같은 데서 활달하지만 내던지듯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여성상인 깊고 우수에 찬 여느 침정으로서의 표정은 이 모델의 경우 어디에도 없다. 다만 로롯트의 왼쪽에 그려진 꽃은 모딜리아니가 마음먹고 정물화를 그렸다면 훌륭한 작품을 그렸으리라는 아쉬움을 남겨 주게 한다.

 

 

 

 

블론드의 여자(르네)

 

르네라는 이름은 한국의 옥순이처럼 프랑스 여성의 이름이며, 파리의 여기저기에 르네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한 프랑스 여성의 초상화이면서 모든 르네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점차로 무르익어 가는 모딜리아니의 원숙한 기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델을 포근하게 포용하는 표현력이 넘쳐 흐르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모델인 르네는 키슬링의 처이며 모딜리아니의 미술을 순심으로 이해했던 모델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키슬링은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화가였으며 나중에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 무렵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자주 제작했었다. 필경 이 작품도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제작된 게 아닌지...

 

 

 

 

쟈크 립시즈 부처의 초상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그의 본령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들의 결혼 사진을 본 떠서 이러한 구성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더라고 한다.

 

 

 

 

한카 즈보로스카의 초상

 

폴란드의 옛 귀족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즈보로스카는 1914년 유럽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파리로 피신했으며, 그후 파리장들은 그녀를 프랑스 식으로 안나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의 최상의 이해자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동포에게 시집 가게 되며 앞으로 모딜리아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부가 된다. 이 작품은 이들 부부가 모딜리아니를 알게 된 일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병약한 몸매의 즈보로스카였지만 그녀의 마음씨 고운 자태가 모딜리아니의 심상을 통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품 있게 흐르는 목의 사선과 맑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이 검은 의상과 검은 머리의 대비를 통해 긴장된 구도로써 표현되어 있다.

 

 

 

 

샤임 스틴의 초상

 

러시아의 리토아니아 출신은 스틴도 역시 유태인 미술가였으며, 1911년 파리로 나와 동국인이자 유태인인 샤갈과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는다. 남 프랑스의 세레라는 지방에 일시 정착하여 강렬한 원색만으로 뭉개듯 그리는 그의 광열적인 감정의 독자적인 작풍은 당시의 파리의 화단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그의 화면과는 정반대로 그는 투박하리만큼 순정의 사람이었다고 하며,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그의 순심에 깊은 애정과 우정을 느꼈다고 한다. 쟌느 모딜리아니는 아버지의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포즈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높은 코와 두터운 입술은 두드러지지만, 고뇌로 차 있는 눈길이 모델을 비극적일 만큼 고독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 들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라 . 비 . 에 . 벨...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 년간 로톤드의 맞은 편 그랑 쇼미엘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반 뮈덴 부인의 초상

 

이 작품의 구도는 회화의 자율적인 운영만으로 잡혀진 것이라기보다 모델인 대상의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는 화면이다. 가령 크로드 로와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모델은 흔히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긴장을 푼 상태의 가을 날씨처럼 가라앉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여기서 100퍼센트의 이탈리아 적인 유화한 풍취를 찾아볼 수도 있겠고 또는 100퍼센트의 현세적이고 식물적인 무관심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며, 혹은 온화한 몽상적인 육감을 맛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모딜리아니의 모델들이 모두 틀에 박힌 듯한 하나의 유형으로 그려졌다는 이른바 매너리즘으로만 간주될 때 야기되며, 미술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태도 여하로 결정된다는 관념론자의 경우를 대표한다 하겠다.

 

 

 

 

앉아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가 나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6년경부터이며, 그가 죽기 전의 1919년 경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델이 된 나부들은 앞에 소개한 안나 즈보로스카, 비아트리스, 쟌느 에퓨테른느 등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말인 12월 3일부터 30일까지 모딜리아니로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벨트 에일 화랑에서 열게 된다. 그런데 초대날 그의 나부상들이 너무 관능적이어서 풍기 문란이란 죄목으로 경찰의 신세를 지게 되며 결국 다섯 점의 나부가 철거되는 스캔들이 일어난다. (모딜리아니와 화랑의 여주인은 일시 체포된다.) 검은 배경 에 모델의 곡선은 무겁게 흐르고 있으며, 다른 나부들과는 달리 삶의 애환을 짙게 풍겨 주고 있다.

 

 

 

젊은 농부의 초상

 

모딜리아니의 나부상은 대략 35점 가량 그려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특히 1917년에 그 대부분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상상해 보건대, 14살이나 손아래인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사랑이 그를 생명감 넘치는 화가로 다시 재생시켰고 이러한 활기가 그로 하여금 정력적으로 많은 나부들을 그리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점차 그의 관심은 온건한 모델에 대한 조용한 애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용한 애정의 대상이 되는 모델들은 여기서의 작품처럼 일상적으로 대하는 생활 주변의 표정들이다. 비록 그들의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닐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선량함의 강력한 증인들이라고 모딜리아니는 믿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모딜리아니의 마음씨를 나타내고 있으며, 선량함을 표지한다 하겠다.

 

 

 

 

 

서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여체가 갖는 생명의 비의를 들려 주는 짧고 낮은 소토보체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히려 예술의 신비라고 해야겠다. 금새 없어질 것만 같은 아쉬움의 청순함 이라고나 할까.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짔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어린애를 안고 있는 여자

 

섬세한 선묘와 얼마간 즉흥적인 터치의 관례적인 화면과는 달리 이 작품은 비교적 두꺼운 마티에르를 가지고 있다. 흰 바탕의 수병복의 자주색 칼라가 화면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 모델의 주인공은 집시이고 마약 중독으로 집을 뛰쳐나온 여자였다는 풍문도 있다. 모딜리아니는 때로 자신의 선묘 때문에 화면이 그 표면성에서 튕기듯 가벼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그의 일회성(一回性)으로서의 섬세한 선조(線條)가 마음처럼 되어 주지 못했던 것 같으며, 그 결과로 두꺼운 겹칠이 불가피했었는지도 모른다. 어린애를 안고 애처로울 정도로 고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여자가, 전기한 풍문처럼 집시였다면, 고향은 있지만 나라가 없는 세파르당의 후예로서 자신의 처지를 그녀의 모습에서 모딜리아니는 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裸婦

 

이 작품의 원명은 <큰 나부>로 불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선 다른 나부의 경우와는 달리 그렇게 자율적 구성으로서의 회화를 강하게 느낄 수 없다. 말하자면 현실의 벌거숭이 여인에 가까운 숨결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화가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린 작품이라기보다 젊은 남자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렸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의 독자적이고 유니크한 선맥의 흐름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으며 대신 나부의 얼굴 표정으로 구성이 집중된다. 여체의 아래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얼굴의 표정만 보아도 이 여성은 알몸이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숨결인 관능의 뜨거움이 와 닿는 듯 싶으며 서로 다른 구형(球形)의 모임으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노랑 스웨터의 쟌느

 

1918년은 쟌느가 임신한 해이다. 1918년 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따라서 모델이 임신 중임을 암시한다. S자 형의 구도는 조형상의 유연성을 겨냥한 것일 테지만 앞으로 닥쳐올 어떤 불행을 풍겨 주는 듯만 싶다. 엄격한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모딜리아니에게 시집 간 그녀는 붉은 기미의 밤색 머리와 대조적으로 흰 얼굴 빛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야자 열매'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조용한 성격의 여성이었다고도 전한다. 이해 11월말 니이스의 병원에서 쟌느는 딸을 출산하며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준다. 충실한 반려자였던 그녀는 앞으로 만 일년 2개월 후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자 6층 창밖으로 임신한 몸을 던져 사랑하는 이의 뒤를 쫓는다.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 달라' 던 남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파이프를 가진 니이스의 노인

 

이 작품 역시 니이스 체재 중에 그린 것이며 매우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파리의 즈보로우스키에게 보낸 이 무렵의 모딜리아니의 편지를 보면 당시의 그는 흑인처럼 제작에만 열중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만년의 그의 주옥 같은 걸작들이 제작된 것은 그의 말처럼 여기서의 일이며, 다음 면의 <작은 농부>의 경우처럼 그는 남프랑스인들의 소박한 모습들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의 화면의 구성은 마치 용암처럼 불쑥 솟아오른 듯한 붕기가 엷은 오렌지색을 배경으로 간결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처리되어 있다. 살짝 얹어 놓은 듯한 뱃사람 모자로 미루어 보아 이 노인은 니이스의 바닷 사람인 것 같으며, 길쭉한 담뱃대가 얼마간 과장된 손의 구도를 조절해주고 있다. 선량하고 소박한 인물이 무언가 이야기해 올 것만 같다.

 

 

 

 

앉은 나부

NU ACCROUPI

1916년 캔버스 유채 92X60Cm

런던 대학 부속 미술연구소 소장

 

 

 

 

푸른 옷의 소녀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쟌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그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으며 이것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소녀의 푸른 옷은 필경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때때옷인지도 모른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 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조용하게 가라앉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은 참다운 자애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낀다.

 

 

 

 

작은 농부

 

모딜리아니의 결핵이 악화되자 즈보로우스키 부처는 무리를 해서 그를 남 프랑스의 니이스로 보낸다. 1918년의 일이었다. 지중해의 해맑은 요양지에서 오래만에 안정을 얻은 모딜리아니는 제작에만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시골의 농부와 소년 소녀들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모딜리아니는 그려 나간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며, 소박하고 건강하며 사랑스러운 농부 아들의 모습이 밝게 그려져 있다. 이 밝음새는 당시의 모딜리아니의 삶의 건강성을 바로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겠다. 한편 이 화면에서 우리들은 세잔의 기법과 매우 유사한 터치를 발견하게 된다. 세잔을 존경했던 그는 남 프랑스의 적막한 전원 속에서 문득 엑상, 프로방스에서의 세잔의 농부의 그림을 회상했는지도 모른다.

 

 

 

 

에브테르느 부인의 초상

PORTRAIT DE MADAME HEBUTERNE

1919년 캔버스 유채 92X73Cm

뉴욕 개인 소장

 

 

 

레오폴드 즈보로우스키의 초상

 

즈보로우스키는 폴란드 귀족의 후예이며 문학 공부를 위해 파리의 솔본느 대학으로 온 시인이었다. 최종적으론 화상이 되지만 당시 화가들을 등쳐 먹는 화상들이 우글거리던 몽파르나스에서 즈보로우스키 부처만은 진실로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이해했고 그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걸다시피한 갸륵한 인품이었다. 1916년에서 1919년까지의 모딜리아니의 작품의 거의는 즈보로우스키의 원조 밑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 초상화에 대해 웨르나의 매우 적절한 해설을 인용해 보자.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가장 성공한 작품의 하나이다. 즈보로우스키가 실제로 가지고 있었던 정신과 영혼의 고귀함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이야말로 진실된 우정의 표시이다. 늘어진 콧수염이며 정돈된 턱수염 그리고 유연하게 기운 어깨의 키 큰 우아한 사람...'

 

 

 

 

남 프랑스의 풍경

 

인간만을 그려왔던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 이것은 매우 희귀한 예이다. 그는 풍경화를 미술의 장르가 아니라고까지 경원했으며, 자연은 미술가가 참여하는 곳이 못 된다고까지 극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핵을 치유해 주는 요양지인 남 프랑스의 해맑은 대기는 얼마간 오만했던 그의 인간본위를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전생애를 통해 오직 4점의 풍경화만 그렸다.) 한눈에 세잔의 기법을 연상시켜 주는 이 작품은 이를 데 없이 간소한 풍경화이다. 해안으로 통하는 오솔길과 한 채의 집과 한 그루의 나무가 모두이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이 여느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임은 그의 인물처럼 그의 마음이 거기에 투영되었기에 그럴 것이다.

 

 

 

 

부채를 가진 루니아 체호우스카

 

모델은 즈보로우스키 부처의 친구이며, 기품있는 몸매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 여인을 삼십 회 가량 그렸고 이 작품 외에 비교적 모델의 외형을 충실하게 뒤쫓은 초상이 또 있다. 그녀의 부친은 폴란드인 이었으며 혁명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남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가 그녀를 사려 깊고 조용한 신비의 여인으로 성장시켰다고도 전한다. 그녀는 모딜리아니 이상으로 그를 사모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은 신성한 일이었다.]고 자신의 애정을 돌려서 고백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최만 년의 걸작을 대표하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데포르마숑은 거의 완벽한 경지까지 도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모딜리아니의 신변에 있던 증인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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