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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과 시인] - 알을 깨고 새세계를 연 시인
2017년 10월 25일 04시 28분  조회:7233  추천:0  작성자: 죽림
스위스 시인 - 헤르만 헤세

 
출생 1877. 7. 2, 독일 칼프
사망 1962. 8. 9, 스위스 몬타뇰라
국적 독일, 스위스

요약 헤세는 문명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 문학가이다. <데미안>등 많은 작품에서 인간의 내면과 자아에 대해 다루었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헤세
헤세

194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서, 그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본질적인 정신을 찾기 위해 문명의 기존 양식들을 벗어나 인간을 다루고 있다. 자기 인식을 호소하고 동양의 신비주의를 찬양했으며, 사후에 영어권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동양에 선교사로 있었던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으로 마울브론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모범생이었지만 적응할 수 없었던 그는 칼프 탑시계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있었고 후에는 튀빙겐 서점에서 일했다.

갑갑한 전통학교에 대한 그의 혐오는 지나치게 근면한 학생이 자기 파멸에 이르는 내용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 Unterm Rad〉(1906)에 잘 나타나 있다. 1904년까지 서점 점원으로 일했고 그해 자유 기고가가 되었으며, 실패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작가에 관한 〈페터 카멘친트 Peter Camenzind〉라는 첫 소설을 발표했다. 예술가의 내면과 외면의 탐구는 〈게르트루트 Gertrud〉(1910)·〈로스할데 Rosshalde〉(1914)에서 계속되었다. 이즈음 인도를 방문했고 후에 석가모니의 초기 생애를 그린 서정 소설 〈싯다르타 Siddhartha〉(1922)에 반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립국 스위스에 살면서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독일의 전쟁 포로들과 수용자들을 위한 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1919년 스위스의 영주권을 얻었고 1923년 그곳 시민이 되어 몬타뇰라에 정착했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심오한 감성을 지닌 작가로서, 카를 구스타프 융의 제자 J. B. 랑과 함께 정신분석을 연구했으며 융과도 알게 되었다. 분석의 영향이 〈데미안 Demian〉(1919)에 나타나는데, 이 소설은 고뇌하는 청년의 자기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곤경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유명해졌다.

그의 후기 작품은 그가 융의 개념인 내향성과 외향성, 집단 무의식, 이상주의 및 상징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후기 문학 활동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 몰두했다.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1927)에서는 중년 남자의 유산계급 수용과 정신적인 자기실현 사이의 갈등이 묘사되었다. 〈지와 사랑 Narziss und Goldmund〉(1930)에서는 기존 종교에 만족하는 지적인 금욕주의자와 자기자신의 구원 형태를 추구하는 예술적 관능주의자를 대비시켰다. 그의 최후의 최장편 소설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1943)에서는 극도의 재능있는 지식인을 통해 사변적인 삶과 적극적인 삶의 이중성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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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1925년)Nobel Prize.png
 
헤르만 헤세 서명

헤르만 헤세(독일어: Hermann Hesse1877년 7월 2일 ~ 1962년 8월 9일)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시인, 소설가, 화가이다.

 

 

생애[편집]

성장[편집]

1877년 7월 2일 독일 남부 시인의 고장 슈바벤 주의 뷔르템베르크 소재 소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선교사이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와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1842-1902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 남편을 잃고 아버지의 제자로 있던 요하네스 헤세와 32세 때에 재혼하였는데, 그녀가 5살 연상이었다. 요하네스 헤세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는 선교사였고, 외삼촌 빌헬름 군데르트는 일본에서 활동한 교육가로 불교연구의 권위자였다. 이러한 환경은 헤세가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머니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고 헤세의 형제로는 누이 아델레(1875-1949),동생 파울 (1878년 출생 해에 사망), 게르트루트(1879-1880, 같은 이름의 작품이 있다.), 마리(1880-1953) 그리고 한스(1882-1935, 작품 인물 중에 가끔 등장하는 이름이다.)가 있다. [1] 1881년-1886년양친과 함께 바젤로 이사하여 거주했다. 1883년 아버지가 스위스 국적을 얻었으며, 1886년 (9세) 다시 칼프로 돌아갔다.

교육[편집]

1889년까지 실업학교에 다녔으며,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 신학자를 위한 첫 관문 통과했다. 이를 위해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국적을 얻었다. 1891년 14세 때인 1891년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입학했다. 1892년 신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부적응과 신경쇠약증 발병,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 중퇴이유였다. 6월에 짝사랑으로 인한 자살 기도. 정신요양원 생활. 11월에 칸슈타트 김나지움 입학. 신학교 때의 경험은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다. 1893년 10월 학업중단.

방황[편집]

서점원을 이틀만에 그만 두고, 1894년-1895년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으로 일했다. 2년간 방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

글쓰기[편집]

1899년 첫 시집 낭만의 노래, 산문집 한 밤중의 한시간 발간. 가을에 바젤의 서점으로 옮겼다. 1901년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1902년 어머니가 사망했다.

1904년 『페터 카멘친트(향수)』를 통해 헤세는 일약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작가가 되며, 이후 그는 성공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즈음에 『페터 카멘찐트』는 6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다.

휴머니스트[편집]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주의적 태도로 극우파들의 애국주의에 반대했다가 독일에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돌출된 행동은 당시 지식인들이 전쟁을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을 지지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미움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극우성을 보이는 것에 대해 실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를 보면서 환멸을 느꼈지만, 아시아 여행경험(1911년)으로 느낀 사해동포주의도 그의 애국주의 반대집필의 배경이 되었다. 이때 나온 작품이 『데미안』이다. 이 소설은 그가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 중 하나이다.

노벨문학상[편집]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가 배당되지 않게 한 나치의 탄압을 받았다.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헤세의 문학적 특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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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전기 중의 하나는 1927년 위고 발(Hugo Ball)이 써낸 전기인데, 그는 헤세를 "찬란한 낭만주의 대열의 마지막 기사(騎士)라고 표현했다. 그는 또 끝없이 낭만을 추구한 작가로 기억할 만하다. 항상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청춘을 그리워했으며 이성을 향한 동경이나 호기심, 그 시절의 감미로운 심리묘사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헤세의 작품이 갖는 자전적 경향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18년 동안에 나온 산문들에서 숨김없이 나타난다. 헤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작중 인물로 본인이나 자기 인생에서 인상 깊게 경험한 인물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헤세의 글에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원초적 인간본능이라 할 수 있는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향한 동경, 자유를 꿈꾸는 인간적 해방의 가치가 녹아있기에 현대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현대문명이 자연과 유리되면서 대중은 외톨이로 전락했으며 인간소외는 강화되었고 우울증은 깊어지고 있다. 섬세한 심리의 소유자로서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정신병적 고통을 경험한 그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시, 음악, 그림 등을 통해 자연과 사회에 화합하는 삶의 길을 모색해왔는데, 이러한 그의 경험과 심리과정은 오늘날 정신적 외로움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또 그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통일과 조화를 꿈꾼 것이다.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이성과 감성, 신성과 마성 등 자연과 인간내면 세계의 양면성을 관찰하고 이들의 조화를 꿈꾸었다. 이질적인 대립을 통해 양자가 맞서는 긴장을 아름다운 형태로 지향함으로써 보다 높은 통일을 추구한 것이다. 데미안은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통일하기 위한 싸움이고, 로스할데는 남성과 여성, 속박과 자유, 시민성과 예술성이 끝없는 대립상태로 이어지면서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이 그려졌고, 크놀프는 인간의 사회적 정주본능과 인간 원초적인 방랑본능의 대립을 통해 인간적 삶의 길이 무엇인가 묻고 있다.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에서도 신학교라는 지성적 세계에 속했던 골드문트가 항상 지성적 인물 나르치스를 그리워하면서도 자유와 감성의 세계를 탐구하고픈 열망으로 끝없이 방랑하였고 그런 감성의 힘을 미술과 조각을 통해 예술적 세계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처럼 그의 많은 작품에서는 안정된 기성의 세계에서 부자유와 억압을 느끼고 끝없이 인간해방을 탐구하는 원초적 인간감성을 향한 그리움과 인간성 복원을 추구했다.

대표 작품[편집]1904년 페터 카멘찐트 Peter Camenzind

연보[편집]1877년 7월 2일 독일 남부 시인의 고장 슈바벤 주의 뷔르템베르크 소재 소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선교사이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와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1842-1902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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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7년 07월 02일
사망 1962년 08월 09일
국적 독일, 스위스
대표작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

성장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양면성을 다룬 작품을 선보였으며, 동양의 철학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데미안》의 한 구절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구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성장에 대한 대담하고 관통하는 듯한 묘사, 휴머니즘적 이상과 고도의 스타일에 대한 전범이 되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쓰기'라는 한림원의 노벨 문학상 수여 사유처럼, 청춘의 고뇌와 휴머니즘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는 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뷔르템베르크 칼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는 개신교 목사였고,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는 슈투트가르트의 유서 깊은 신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마리 군데르트는 두 번째 결혼이었는데, 인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인 선교사와 결혼해 인도에서 생활하다 남편이 죽은 후 칼프로 돌아왔다. 그 후 의학 공부를 하고, 칼프의 실업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등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어머니 마리는 헤르만에게 평생의 여성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헤세가 4세 때 아버지가 바젤로 발령받으면서 가족과 함께 이주해 약 5년간 그곳에서 살았다. 기운이 넘치는 악동이었던 그는 7세 때 바젤의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숙사제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는 그의 기질을 억누르는 학교에 만족해했다고 한다. 9세 때 외할머니를 잃고 쓸쓸해하던 외할아버지의 요청으로 가족은 다시 칼프로 이주했다. 헤르만은 조용한 작은 시골 마을 칼프에서 뛰놀고, 신학자로서 거대한 서가를 가지고 있던 외할아버지의 집을 드나들며 자랐다. 외할아버지와 서가는 헤르만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후일의 작품에도 이따금 자전적 요소로 등장하곤 한다.

13세 때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역시 속박이 심한 기숙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이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시인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되고 싶지 않다."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헤세는 방황을 거듭했다. 탈출 소동을 벌이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자살 시도까지 한 것이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공장 견습공, 서점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서점에서 일하면서 그는 책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특히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했다. 여가 시간에 시와 글을 썼으며, 1899년 22세 때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를 자비 출판했다. 또한 같은 해에 헤세와 서신을 나누던 헬레네 보이크트의 남편 오이겐 디더리히스라는 출판업자에 의해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이 출판되었고, 릴케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은 거의 판매가 되지 않았다. 이후 헤세는 바젤로 옮겨가 고서점에서 일하면서 시를 발표했다. 1904년에는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가 출간되면서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문학적 재능을 갖춘 청년 페터가 도회지의 대학으로 진학했다가 도시 문명의 허위를 깨닫고 자연의 삶을 찾아 다시 돌아온다는 성장소설이다. 젊은 시절 헤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개성과 현실과의 균형 찾기, 자연에 대한 동경, 젊은 예술가의 고뇌 등이 그려져 있다.

1904년, 헤세는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고, 스위스 접경 지역의 가이엔호펜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헤세는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게르트루트》를 비롯해 단편소설, 시, 에세이 등을 쓰며 활발히 작품 활동을 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고독한 소년의, 《게르트루트》에서는 예술가의 내면을 탐구하는 등 초기 작품에서는 역시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헤르만 헤세가 사용하던 타자기
헤르만 헤세가 사용하던 타자기

가이엔호펜에서 헤세는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을 낳고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헤세는 그 안락한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만족하지 못해 방황을 거듭했다. 헤세는 책임감 있는 가장과 괴팍한 작가로서의 삶 양쪽을 오갔고, 남편의 계속 바뀌는 태도에 지친 마리아와의 사이도 점점 벌어졌다. 1911년, 헤세는 친구인 화가 슈투르체네거와 함께 인도와 스리랑카 등지를 여행했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셋째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났다. 결혼 생활은 완전히 파탄이 났고, 그는 이런 상황을 《로스할데》라는 작품에 그렸다. 그는 예술가에게 과연 결혼 생활을 할 자질이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이 글을 썼다고 밝혔다. 또한 인도 여행은 《싯다르타》에 반영되었다.

1914년 8월, 독일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전 세계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으며, 민족주의, 군국주의가 독일을 휩쓸었다. 인도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헤세로서는 이런 식의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동조할 수 없었고, 독일 국민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글을 스위스 〈신취리히 신문〉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 평화주의적 반전론(反戰論)을 받아들이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매국노,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전쟁 기간에는 독일에서 헤세의 글을 발표할 통로가 일체 막혔고, 그는 스위스로 건너가 전쟁포로 구호소에서 일을 도왔다. 이 시기에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투병, 아내의 정신병 등 고난이 이어졌고, 헤세는 신경쇠약에 걸려 카를 융의 제자 J. B. 랑 박사에게 정신분석을 받았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작풍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고, 그 변화는 1919년 대표작 《데미안》으로 나타난다. 소년의 고뇌와 자기 인식을 탐구하는 과정을 그린 이 성장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과 우울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일에서 글을 발표할 수 없었던 헤세는 당초 이 작품을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가 이 작품이 신인 작가에게 수여하는 폰타네상을 수상하게 되자 진짜 작가가 자신임을 밝히고 상을 반환했다.

1919년 독일에서 발행된 《데미안》 초판 표지
1919년 독일에서 발행된 《데미안》 초판 표지

헤세는 전쟁이 끝난 후 가족을 떠나 스위스 남부 루가노 호반의 작은 마을 몬타뇰라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클라인과 바그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싯다르타》 등을 썼다. 《싯다르타》는 한 청년이 자기실현을 하는 철학적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동서양의 철학이 결합되어 있다.

몬타뇰라에 있는 헤르만 헤세 박물관
몬타뇰라에 있는 헤르만 헤세 박물관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20년에 첫 개인 전시회를 연 이후 파리, 마드리드, 뉴욕, 도쿄, 몬트리올, 함부르크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생활에 위협을 받던 시기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1923년, 아내 마리아와 이혼하고 루트 벵어와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 결혼 생활도 4년 만에 끝이 났다. 1931년에 니논 돌빈과 세 번째 결혼을 한 후 헤세는 비로소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종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헤세는 물질 과잉의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담은 초현실주의 작품 《황야의 늑대》, 두 인물의 교류를 통해 지성과 감정, 종교와 예술 등의 대립을 다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와 사랑》)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히틀러의 광란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을 잠식하자 헤세는 인간의 정신적 산물을 적극적으로 보존하는 유토피아를 그린 장편소설 《유리알 유희》를 쓰면서 견뎠다. 이 작품은 1943년 스위스에서 출간되었고, 독일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출간되었다. 철학, 역사, 수학, 음악, 문학, 논리학 등 광범위한 지적 유희를 토대로 한 이 작품은 유럽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헤세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헤세는 전후 독일, 냉전 체제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협박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헤세는 어떤 정치적 입장도 표방하지 않았고, 몬타뇰라의 집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새로운 작품은 더 이상 쓰지 않았지만 지난 50년간 발표했던 시들을 모아 시 전집을 냈으며, 서평 등을 통해 새로운 젊은 작가들을 발굴했다.

1962년 8월 9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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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시 모음
 
<행복해 진다는 것>

 

 


- 헤르만 헷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깊은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안개>

- 헤르만 헤세

안개 속을 거니는 이상함이여, 
덩굴과 돌들 모두 외롭고, 
이 나무는 저 나무를 보지 못하니 
모두가 다 혼자로구나! 

나의 삶이 밝았던 때에는 
세상엔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 여기 자욱한 안개 내리니 
아무도 더는 볼 수 없어라. 

회피할 수도 없고 소리도 없는 
모든 것에서 그를 갈라놓는 
이 어두움을 모르는 이는 
정녕 현명하다고는 볼 수 없으리. 

안개 속을 거니는 이상함이여, 
산다는 것은 외로운 것, 
누구도 다른 사람 알지 못하고 
모두는 다 혼자인 것을! 




<기도>

 


-헤르만헤세

하느님이시여, 저를 절망케 해 주소서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미혹의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온갖 모욕을 겪도록 하여 주시옵고 
내가 스스로 지탱해 나감을 돕지 마시고 
내가 발전하는 것도 돕지 마소서 
그러나 나의 자아가 송두리째 부서지거든 
그 때에는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아 주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으려고 하나 
나는 오직 당신의 품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머님께>

 


-헤르만헤세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멀리 객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를 이해해 준 분은
어느 때나 당신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에게 드리려는
나의 최초의 선물을
수줍은 어린아이 손에 쥔, 지금
당산은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나의 슬픔을 잊는 듯합니다.
말할 수 없이 너그러운 당신이, 천가닥의 실로
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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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에게>

 


-헤르만헤세

어찌할 바를 몰라
슬픔에 젖어 이곳에 서 있다.
고향을 멀리 떠나 
나는 헤매이며 왔다.

내가 알고 있던 꼿이여
푸른 높은 산이여
인간이여, 들판이여
이제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다만, 너의 입에서만
엿날의 소리를 듣고
다정한 동화의 말처럼
옛날의 소식을 듣는다.

멀지 않아 착한 원정인 죽음이
부모가 기다리는 저녁 노을 속으로
그의 정원으로

나를 데리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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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헤르만헤세

언제나 같은 꿈이다.
빨간 꽃이 피어 있는 마로니에
여름 꽃이 만발한 뜰
그앞에 외로이 서 있는 옛집

저 고요한 뜰에서
어머니가 어린 나를 잠재워 주셨다.
아마도, 이제는 오랜 옛날에
집도 뜰도 나무도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 위로 초원의 길이 지나고
쟁기가 가래가 지나 갈 것이다.
고향의 뜰과 집과 나무를
이제는 꿈에서만 남을 것이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떠올리는
무수한 낯모르는 얼굴들....
서서희 하나, 둘
불빛이 흐려간다.
그 여린 빛이 회색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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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헤르만 헤세



지난날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행복을 약속한
하나의 음향이 나에게로 다가 온다.
만일 이것이 없으면 살기가 너무나 괴로울 것이다.
이 마력의 음향이 울리지 않는다면
나는 빛없이 서서
주위에 불안과 암흑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슬픔과 죄에 다치지 않는 소리가
행복에 찬 달콤한 음향이 울린다.
슬픔과 죄악에도 파멸되지 않는 그 음향이.
너 자랑스런 목소리여
내 집의 불빛이여
다시는 꺼지지 말고
그 푸른 눈을 감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부드러운 빛을 모두 잃고
크고 작은 별들이 차례로 떨어져
나만 홀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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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음의 초상>

 

헤르만 헤세



지금은 벌써 전설이 된 먼 과거로부터
내 청춘의 초상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지난날 태양의 밝음으로부터
무엇이 반짝이고 무엇이 타고 있는가를 !

그때 내 앞에 비추어진 길은
나에게 많은 번민의 밤과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다.
그 길을 나는 이제 다시는 걷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성실하게 걸었고
추억은 보배로운 것이었다.
잘못도 실대도 많앗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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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자>

 

헤르만 헤세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다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지혜나
능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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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저녁 무렵>

 

헤르만 헤세



양떼를 몰고 목동이
조용한 오솔길을 가고 있다.
집들은 잠이 오는 듯
벌써 깜박이고 있다.

나는 이 마을에서, 지금
단 하나의 이방인
슬픔으로 하여 나의 마음은
그리움의 잔을 남김없이 비운다.

길을 따라 어디로 가든
벽난로에는 따뜻한 불이 타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고향과 조국을 느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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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져 가는 젊음>

 

헤르만 헤세



피곤한 여름이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호수에 비친 그의 마지막 모습을들여다본다.
일상에 지친 나는 먼지에 싸여
가로수 그늘을 방황하고 있다.

포플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면 내 뒤로 황혼이 금빛으로 타오르고
앞에는 밤의 불안이 죽음과 함께 온다.

먼지에 싸인 채 지친 걸음을 옮겨 놓는다.
그러나 젊음은 머뭇거리듯 뒤로 밀려나며
고운 모습을 감춘 채
나와 함께 앞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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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둠 속을 걸었다>

 

헤르만 헤세



검은 수목들의 그림자가 꿈을 식히는
어둠 속을 그는 즐겨 걸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빛에서 빛으로
타오르는 욕망에 갇혀 괴로움을 다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은빛으로 맑은 별이 가득 찬
하늘이 있음을, 그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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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고개를 넘으며>

 

헤르만 헤세



전나무 아래서 쉬고 있노라면
지난날이 생각난다.
익은 숲의 냄새가
최초로 소년의 슬픔을 잉태했던 그날이.

바로 이곳이었다. 내가 이끼위에 누워
수줍은 소년의 열정이
가냘픈 금발 소녀의 모습을 꿈꾸었다.
환한 속에 처음 핀 장미를 꺾어 넣고.

세월은 흐르고 꿈은 늙어지고
멀어져서 다른 꿈이 왔다.
그것도 작별한 지 이미 오랜 일이다.

최초의 꿈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나는 늘 괴로워했다.
그래, 누구였을까. 잊혀지지 않는 것은 ?
다만, 그녀가 상냥하고 가냘픈 금발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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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속의 백장미>

 

헤르만 헤세


슬픈 듯 너는 얼굴을 잎새에 묻는다.
때로는 죽음에 몸을 맡기고
유령과 같은 빛을 숨쉬며
창백한 꿈을 꽃피운다.

그러나 너의 맑은 향기는
아직도 밤이 지나도록 방에서
최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한 가닥 은은한 선율처럼 마음을 적신다.

너의 어린 영환은
불안하게 이름 없는 것에 손을 편다.
그리고 내 누이인 장미여, 너의 영혼은 미소를 머금고
내 가슴에 안겨 임종의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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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길에서>
(크눌프의 추억)

 

헤르만 헤세



슬퍼하지 말아라, 곧 밤이 오리라.
그러면 우리들은 파리해진 산 위에서
몰래 웃음짓는 것 같은 시원스러운 달을 보리라.
그러면 손을 잡고 쉬자.

슬퍼하지 말아라, 곧 때가 오리라.
그러면 우리는 쉬리라, 우리들의 십자가가
밝은 길가에 나란히 설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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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같다>

 

헤르만 헤세



젊은 날에는 하루같이
쾌락을 쫓아 다녔다.
그 후에는 우수에 싸여
괴로움과 쓰라림에 잠겨 있었다.

지금 나에게는 기쁨과 쓰라림이
형제처럼 스며 있다.
기쁜 듯 슬픔 듯
둘은 하나로 되어 있다.

신이 나를 지옥으로
탱양의 하늘로 인도한다면
나에게는 둘 다 같은 곳이다.
신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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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지>

 

헤르만 헤세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 온다.
보리수가 깊은 신음소리를 내고
달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내 방을 엿본다.

나를 버린
그리운 사람에게 
긴 편지를 썼다.
달빛이 종이 위로 흐른다.

글위를 흐르는
고요한 달빛에 
나는 슬픔에 젖어
잠도, 달도, 밤 기도도 모두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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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그림>

 

헤르만 헤세



가을의 찬 바람이 시든 갈대밭을 스잔히 불어간다.
갈대잎은 밤 사이에 회색이 되었다.
까마귀는 버드나무를 떠나 육지로 날아간다.

호수에서는 한 노인이 외로이 서서 쉬고 있다.
머리에 바람과 밤과 다가오는눈을 느끼고
그늘진 호수에서 밝은 하늘을 바라본다.
거기 구름과 호수 사이에
한 줄기 물가의 육지가 햇빛 속에서 따뜻하게 빛나고 있다.
꿈과 시처럼 행복에 찬 금빛 호수가.

노인은 빛나는 이 풍경을 똑똑히 눈 속에 간직하고
고향을, 지난 행복한 세월을 생각한다.
그리고 황금빛 태양이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자
머리를 돌려 버드나무에서 떠나
천천히 육지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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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헤르만 헤세



나는 항상 방랑의 길에 있었다.
순례자였다.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쁨도 슬픔도 흘러갔다.

나는 방랑의
의미도, 목적도 알지 못한다.
몇 천 번을 쓰러지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다.

아,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성스럽고 멀리 높은
하늘에 걸려 있었던
사랑의 별이었다.

그러나 그 별을 안 지금은
목적을 알지 못하던 동안에는
마음 편히 걸어 갔고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이미 늦었다.
별은 돌아서 버리고
아침에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화려한 세상과 작별을 해야 한다.
나는 목표를 잃어버렸으나
그래도 가야 할 나그네의 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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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나와>

 

헤르만 헤세



나는 촛불을 꺼버렸다.
열린 창문으로 밤이 밀려와
살며시 나를 안고, 나를 벗으로
형제로 삼는다.
우리들은 같은 향수에 젖어 있다.
불안한 꿈을 밖으로 내쫓고
소곤소곤 아버지 집에서 살던
지난 날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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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헤르만 헤세



숲이 금빛으로 타고 있다.
상냥한 그이와, 여러 번
나란히 걷던 이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간다.
이런 화창한 날에 오랜 동안 품고 있던
행복과 고로움이, 향기 속으로
먼 풍경으로 녹아 들어간다.

풀을 태우는 연기 속에서
농부의 아이들이 껑충거린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노래를 시작한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독일의 작가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탔고 그의 작품 대부분이 이미 우리말로 번역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헤세는 지금까지 작가로만 알려져 있어 화가로서의 헤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헤세는 40살 되던 해부터 "갑자기"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였고 말년에 이르기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Carona 카로나
 


 

Blick durch Baume 나무 사이로 본

 


 

Dacher in Montagnola 몬타뇰라의 지붕

 

 



Tessiner Landschaft 테신 풍경


 
Hauser in Montagnola 몬타뇰라의 집들

 


 
Casa Camuzzi 카사 카무치
 



 
Hutte im Wald 숲속의 집
 


 
Rotes Haus 빨간 집


 



 Rotes Gartenhaus 정원의 빨간 집



Hutte mit Palmen 야자수가 있는 오두막

 

 

 

 

 

 

한번 더, 여름이 시들어 가기 전에

우리는 정원을 보살펴야겠다.

 

꽃에 물을 주어야겠다.

꽃은 벌써 지쳐, 곧 시들어 버릴 것이다.

어쩌면 내일이라도.

 

한번 더, 또 다시 이 세계가

미치광이가 되어

대포소리 요란하게 울리기 전에

 

우리는 몇 가지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며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줘야겠다.

 

 

 

 

1877년 7월 2일-1962년 8월 9일

독일의 소설가·시인. 단편집·시집·우화집·여행기·평론·수상(隨想)· 서한 집 등 다수의 간행물을 썼다. 주요 작품으로 [수레바퀴 밑에서](1906),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등이 있다.

[유리알 유희]로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누군가 말했지요 사랑은
부드러운 갈대밭을 삼켜 버리는
강물과 같은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지요 사랑은
당신의 영혼에 상처를 남기는
면도날과 같은 것이라고.


눈가 말했지요 사랑은
끝없이 고통을 낳는 것이라고.

(그러나) 내 사랑은 한 송이 꽃과 같고
당신은 그 유일한 씨앗입니다.


춤을 배우지 않는 것은
이별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도 따라갈 수 없고
줄 수 없습니다.


사는 방법을 넓히지 않는 것은
죽기를 두려워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밤이 너무 외로울 때
인생길이 너무 험하고 길게 느껴질 때
사랑만이 당신에게 행운을 안겨주고
힘을 북돋아 주리란 것을.


다만 기억하세요.
태양의 사랑으로 봄이 오면
장미로 피어날 씨앗을 품고
지독한 눈에 덮여 있는 겨울임을.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Some say love it is a hunger
an endless aching need
I say love it is a flower
and you its only seed

It's a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that never takes the chance
It's the one who won't be taken
who cannot seem to give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

When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
 

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s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 
 

 

 
 

 

 

 
 
 
 
 

    
헤르만 헤세의 수채화

1877년 독일 뷔르템베르크 출생 

1890년 괴팅엔의 라틴어 학교 입학

1891년 마울브론 신학교 입학, 1892년 작가가 되기 위해 신학교 자퇴 1902년 시집 <시모음(Gedichte)> 출간 1905년 <수레바퀴 밑에서> 출간 1911년 화가 한스 쉬틀제네거와 함께 인도 여행, 1919년 에밀 싱크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 발표,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나치의 탄압으로 작품 들이 몰수되고 출판 금지됨. 1957년 <헤세 전집> 출간 1962년 뇌출혈로 사망

 
 
 
 

"견딜 수 없는 이 마음의 황폐로부터, 나는 지금껏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일로부터 탈출로를 발견했다." 


    물감과 페인트를 붓으로 칠하는 작업, 이 작업에 어떤 목적이 있는 것 은 아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이 예술 작업을 통해 나는 커다란 위안을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 후 40세가 되었던 작가이자 시인 이었던 헤르만 헤세는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들었다. 이 무렵 헤세는 우울 증에 빠져 있었다. 헤세에게 이 우울로부터 탈출하게 해줄 그 무언가가 필 요했고 그림 그리기 작업은 그가 위기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헤세는 무려 3,000여점의 수채화를 남겼다. 그는 여러 화가와 교류를 하며 그림을 그렸고 자연의 풍경을 그림속에 남겼 다. 그는 풍경화뿐만 아니라 자화상도 시도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글과 그림이 함께 담겨있는 삽화집도 출판했다. "만일 내가 외적으로 나의 삶을 먼 발치에서 본다면 그것은 뭐 특별히 행복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삶이 온갖 오류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여튼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삶의 가장 불행했던 날들을 유쾌한 날들보다 더 진지하게 몰두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숙명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선과 악을 정말 끝까지 맛보고, 외적인것과 더불어 내적이고 원래적이고 필연적인 운명을 정복하게 되면, 삶은 빈곤하지 않았으며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헤세 / <게르트루트> 중에서
 
 

     
    "나와 나의 작은 수채화 물감들은 시와 먼 기억들, 내가 그렸던 꿈들을 그린다. "
나는 여전히 내가 그림에 있어서 단순한 아마추어임을 잊지않고 있다. 나 는 글을 쓸때 펜으로, 그림을 그릴때 붓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따뜻해진다. 그 순간 나는 즐거움으로 견딜 수 없게 된다. 헤세의 첫번째 전시회는 1920년에 열렸다. 헤세는 1921년과 1922년에  연이어 전시회를 열었다. 이어 그의 시와 그림이 담긴 삽화집과 동화같은  책을 연이어 출판한다. 1955년에는 헤세의 수채화가 그려진 예술 우편엽 서가 시중에서 사용된다. 헤세의 사후 그의 수채화 그림들은 도쿄를 비롯 한 뉴욕과 몬트리올, 파리,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스페인 마드리드, 함부 르크, 삿포로등에서 전시된다.  우리가 인생을 한곳에 묶어 두고 거기에 친숙해지는 순간, 무력감이 우릴 덮쳐 온다. 언제나 떠나고 방랑할 자세가 된 사람만이 습관이라는 마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죽음의 순간마저도 우리에게 새로운 젊은 공간을 보내리라. 우릴 향한 생의 부름은 결코 그침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마음아, 이별을 하고 건강하게 살자! 헤세 / <삶의 단계> 중에서
 

"나는 단순한 풍경화를 그리고 있으며 내가 그 풍경들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보는 풍경들은 아름답다."

하늘과 동물들, 사람과 그들의 인생들, 내가 본 풍경들은 아름답고 나는 그 
풍경의 위엄에 압도된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내가 쓰는 문학도 
한단계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깊이도 깊어짐을 내가 예술을 보는 안목도 깊어짐을 
알 수 있다. 나의 글과 나의 그림이 바라보는 저 목표 지점에 강렬한 잠재
성이 이를 그 지점에 절대적이며 숭고한 가치가 있다. 

그림 그리기 없이, 나는 지금의 작가가 될 수 없었다." 풍부한 색채를 밝고 
따뜻하게 자유롭게 표현한 헤세의 그림들은 마치 폴 세잔의 풍경화들을 보는 
듯한 감성을 전해준다. 그의 그림속에서 헤세가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
하기 까지 발전한 헤세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작가이자 화가였던 헤세는 그
림그리기를 통해 자신의 문학 세계도 발전했으며 자신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몇 손가락안에 드는 근,현대 작가인 헤세의 소설 작품들은 전 세계에 6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의 작품은 1960년대 이후의 미국과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헤세의 작품은 특히 어느 시대에나 어느 국
가에서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헤세 / <삶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중에서

 





 




"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어떤 작업을 할때 긴장과 집중감을 느낀다. "

쓸때도 느끼는 그 긴장감과 집중감은 그림 그리기를 하면서도 발견된다. 
적당히 그리고 주의깊게 색채와 그 색채와 연결된 다른 색채를 발견하고 
그 다음 그 색채를 칠하는 작업은 즐거운 일이다." 

꿈을 그렸던 헤세는 어릴때부터 시인이 되기를 항상 원했다. 40세가 되
어서 그는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고 스위스의 한 전원마을에서 그림을 그
리기 시작했다. 그는 몇가지 꿈을 꾸었고 그 꿈들을 그림으로서 표현했다. 
평생 내면의 언어와 내면의 영원한 세계를 문학으로서 표현했던 헤세는
그의 철학과도 닮은 그림 그리기 작업을 통해 그 자신의 삶을 이겨냈다.




 

 

 




"나무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웃음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춤추기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들이 때때로 운명처럼 전설처럼 내 앞에 
정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이 
세계 바깥의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느낀다. 
그리고 내가 나의 내면의 세계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때면 그 사실들
은 한결 더 다가온다." 

헤세의 그림들은 대체로 따뜻한 동화책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색채는 대
개 따뜻하면서도 온화하다. 그의 그림들은 대부분 풍경화이며 그가 그
림을 그린 장소는 마을의 절벽 근처에서 그리고 꽤 고딕스런 분위기가 있
는 분위기 있는 좁고 오래된 탑이었다. 헤세는 85세의 나이가 되기 까지 
3,000여점의 수채화를 그렸고 35,000여편이 넘는 글들을 남겼다.





"사람이란 어느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다른 어떤 사람에게 내준 데에 연유하고 있는 거야.
예를 들자면, 네가 어떤 나쁜 짓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알고 있어.
그러면 그는 너를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되지."

헤세 / <데미안> 중에서 





 




"나는 그림을 그릴때면 미소를 짓는다."

나는 매일 똑바로 서서 몇 시간동안이나 테라스에 앉아서 정원에 앉아서 
작은 탑 안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나도 놀랄만큼 근
면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연필과 펜을 가지고 저녁 산
의 먼 투명한 색채를 그리며 그것에 깃든 그림자를 스케치한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피곤하다. 매우 피곤하다. 

그리고 내가 낮에 그렸던 그림들을 저녁에 살펴 볼때면 내가 보았던 그 
많던 아름다운 풍경을 내가 얼마나 그림속에 그려냈는지 살펴 보고 나면 
나는 조금 슬픈 기분에 젖는다. 나는 그림을 통해 자연의 무결함, 자연의 
순수함, 자연의 청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려운 삶속에서도 우리들의 믿음과 자유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
여주고 싶었다." 헤세가 그림을 그릴 때 그는 마치 빈센트 반 고흐처럼 
물감과 캔버스를 들고 노란 밀짚모자를 쓰고 낭만스런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그림을 그렸다. 헤세의 그림들은 독일 표현주의 그림들을 닮아 있
으며 그의 굵직한 선들은 야수파의 그림들을 닮아 있다. 

그리고 그가 그린 색채들은 입체주의 그림들을 닮아있다. 그의 그림들은 
그가 문학작품에서 표현했던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조화를 나타낸 철학
세계를 닮아있다. 가을 날 오후의 침묵과 고독의 세계, 그 나무들 헤세가 
겪었을 마음의 감정들과 자연에서 받았던 자연에 대한 존중심이 그림속에
서 나타난다. 헤세는 그림 그리기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받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그의 글쓰기 작업을 발전 시킬 수 있는 마음의 감
수성을 발견했다. 헤세는 그림 그리기 작업을 통해 마음의 깊이와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마음의 인식을 높혔다. 헤세는 글 쓰기와 그림 그리기가 
하나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내면의 진지한 갈등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려는 끈질긴 시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하나의 길, 이러한 하나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 그리

고 하나의 작은 길의 암시"를 찾기 위해 전 생애를 걸고 문학적 운명을 

걸었던 작가. 내면의 진지한 갈등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려는 끈질

긴 시도를 펼쳐 보인 작가. 괴테와 니체의 예술적 사상적 혈통을 창조적

으로 이어받아 영혼의 순결성을 지키고 삶에 대한 성실성을 잃지 않고자 

했던 작가. 독일 출신 노벨문학상(1946년) 작가 헤르만 헤세를 우리는 

그렇게 부르곤한다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 주의 소도시 칼브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스위스 바젤 등지에서 자라난 헤르만 헤세는 마울브론 수도원학교

에 입학했으나 7개월만에 도망친다.  "시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자 했기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 때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고향의 

시계 공장에서 직공 노릇을 하면서 정신적 안정을 되찾는다. 이후 9년 동

안 서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문필 수업에 진력했다. 



헤세는  <낭만적인 노래들>등의 시집을 출간하여 릴케로부터 극찬을 받기

도 하였으나, 그가 문단에서 본격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장편 <페터 

카멘친트>(1904)를 출간한 이후의 일이다. 



학창 시절을 배경으로 한 독일적 교양소설인 <수레바퀴 밑에서>로 베스트

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데미안>을 

발표하여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상의 지명되었다. 

(헤세는 끝내 수상을 거부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라는 모토를 바탕으로 자아를 찾아 자신의 진

정한 삶을 추구하려는 한 젊은 영혼의 통과제의를 그린 소설이 바로 

<데미안>이다. 또 하나의 유명한 소설 <싯다르타>에서그는 고난의 길을 

걷는 싯다르타의 생애를 조명하면서 그 자신의 영혼의 발자취를 찾아보

려 했다. 그 밖에 <유리알 유희> <황야의 이리> <크눌프> <동방 순례>등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기독교적인 경건주의 전통에서 자라난 헤르만 헤세였지만, 그는 그것을 

동양적인 분위기와 접목시키고자 애쓴 작가였다. 즉 동양 정신과 서양 

정신의 융합,지성과 감성의 종합,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자기 문학과 

삶의 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부단히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나와 새로운 창조적인 영혼

의 도정을 걷고자 했다. 마치 <데미안>에서 보이는 구절 그대로 말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바둥거린다. 알은 곧 세계이다. "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

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 ^^* 

================================
 

 

 
















데미안, 유리알 유희, 크쿨프 그리고 ... 수채화


 세계 문학의 거장,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외국작가 중 가장 많은 국내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세계적인 예술가 헤르만 헤세는  그의 생의 반 이상을 이태리에 가까운 스위스의 테신(Tessin)에서 20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는 뜨거운 여름 태양 밑에서 그의 삶의 역경과 고뇌를 그림을 그리면서 극복하였고 그림을 통하여 그의 이상세계를 그리려고 하였다

 

 

 

       

 

 

고통에서 도피하지 말라. 고통의 밑바닥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라. - 헤르만 헤세

 

 

       

 

 

 그대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 그대는 언제까지나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대가 소망을 버리고 이미 목표도 욕망도 없고 행복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에야 세상의 거친 파도는 그대 마음에 미치지 않고

그대의 마음은 비로소 휴식을 안다 - 헤르만 헤세

 

 

       

 

 

기도는 음악처럼 신성하고 구원이 된다. 기도는 신뢰이며 확인이다. 진정 기도하는

 자는 원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의 경우와 고뇌를 말할 뿐이다. -헤르만 헤세

 

 

        

 

 

 행복만을 바라보고 쫓아가는 한 너는 행복을 누릴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사랑스러운 것이 네 것이 된다 하더라도, 잃어버린 것이 아까워 한탄을 하고 
목적을 가지고 초조하게 애쓰는 한, 아직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목적도 욕망도 다 버리게 되었을 때, 행복, 행복하며 이름을 붙여 
바라지 않을 때, 그 때에 비로소 세상만사의 흐름이 너의 마음에 부딪히지
 않게 될 것이며,  너의 영혼이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명성이나 좋은 술,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것은 우정이었다. -헤르만 헤세

 

 

         
 

 행복하다는 것은 소망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 헤르만 헤세

         
 

말로 갈 수도, 차로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 헤르만 헤세

          

큰 일에는 진지하게 대하지만 작은 일에는 손을 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몰락은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된다. -헤르만 헤세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바라는 생활은 위험하다. 
그 사람이 스스로 충만 되어서 나에게서 
떠난다고 해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드릴 각오 없이 사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헤르만 헤세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바라는 생활은 위험하다. 
그 사람이 스스로 충만 되어서 나에게서 
떠난다고 해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드릴 각오 없이 사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헤르만 헤세

         

 

 

 

 

 

 

 

독일의 소설가·시인. 남독일 뷔르템베르크의 칼프 출생. 러시아령 에스틀란트 태생인 아버지 요하네스는 신교(新敎)의 목사였고, 모계(母系)도 역시 유서 있는 신학자 가문이었 다. 외조부 헤르만 군데르트는 우수한 신학자로, 인도에서 다년간 포교에 종사하였고, 그 인 격과 인도학(印度學)과 관련한 수천 권의 장서(藏書)는 헤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 마리는 인 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을 받았고, 인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영국인 선교사와 결혼하였으나, 그와 사별(死別)한 후 칼프에서 요하네스와 재혼하여 헤세를 낳았다. 
헤세는 4세부터 9세까지, 한때 스위스의 바젤에서 지낸 것 외에는 대부분 칼프에서 지냈으 며, 후년에 이 거리를 ‘겔바스아우’란 이름으로 묘사하였다. 1890년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 고, 이듬해에 어려운 주(州) 시험을 돌파하여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천성적 인 자연아(自然兒)로서, 개성에 눈뜨면서 미래의 시인을 꿈꾼 헤세는, 신학교의 속박된 기숙 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탈주,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노이로제가 회 복된 후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1년도 못 되어 퇴학하고, 서점의 견습점원이 되었다. 그 후 한동안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병든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칼프의 시계공장에서 3년간 시계 톱니바퀴를 닦으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다. 
95년 가을 튀빙겐의 서점에서 다시 견습점원이 되는 한편, 여가시간에는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 처녀시집 《낭만적인 노래:Romantische Lieder》(1899)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 간:Eine Stunde hinter Mitternacht》(99)을 출판하여 R.M.릴케에게 인정을 받았다. 헤세는 이로써 시인으로 입신할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고 그에게 확고한 문학적 지위를 얻게 해준 것은 최초의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 (1904)였다. 그는 이 해에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였고, 이어 스 위스의 보덴 호반(湖畔)의 마을 가이엔호펜으로 이주(移住)한 후 시작(詩作)에 전념하였으 며,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 후 그가 걸어온 긴 생애에는, 인도 여행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일, 제1차 세 계대전 중 독일의 문단과 출판계로부터 지식계급의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비난과 공격을 당한 일,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그 자신의 신병(身病) 등 가정적 위 기를 당하자 정신분석 연구로 이 위기를 타개하고 작풍(作風)이 뚜렷하게 달라진 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한 나치스의 광신적인 폭정에 저항한 일 등 많은 파란 을 겪었지만, 196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오로지 자기 실현의 길만을 걸었다.

주요작품으로 제2의 장편소설 《수레바퀴 밑에서:Unterm Rad)(1906), 음악가소설 《게 르트루트:Gertrud》(10), 화가소설 《로스할데:Rosshalde》(14), 3개의 단편으로 이루어 진 서정적인 《크눌프:Knulp》(15), 정신분석 연구로 자기탐구의 길을 개척한 대표작 《데미안:Demian》(19), 주인공이 불교적인 절대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싯다르 타:Siddhartha》(22),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혼돈시대를 살아온 탐구의 서 《황야의 늑대: Der Steppenwolf》(27), 신학자로서 지성(知性)의 세계에 사는 나르치스와, 여성을 알고 애 욕에 눈이 어두워진 골트문트와의 우정의 역사를 다룬 《나르치스와 골트문트:Narziss und Goldmund)(30), 20세기의 문명비판서라 할 수 있는 미래소설 《유리알유희:Das Glasperlenspiel》(43, 46년 노벨문학상 수상), 《헤세와 로맹 롤랑의 왕복서한》(54) 등이 있다. 또 이 밖에 단편집·시집·우화집·여행기·평론·수상(隨想)·서한집 등 다수의 간행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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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독일어: Hermann Hesse, 1877년 7월 2일 ~ 1962년 8월 9)

독일계 스위스인이며시인소설가화가이다.

 

헤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전기 중의 하나는 1927년 위고 발(Hugo Ball)이 써낸

전기인데그는 헤세를 "찬란한 낭만주의 대열의 마지막 기사(騎士)라고 표현했다.

 

그는 또 끝없이 낭만을 추구한 작가로 기억할 만하다항상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청춘을 그리워했으며 이성을 향한 동경이나 호기심,

그 시절의 감미로운 심리묘사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헤세의 작품이 갖는 자전적 경향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18년 동안에 나온 산문들에서

숨김없이 나타난다.

헤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작중 인물로 본인이나 자기 인생에서

인상 깊게 경험한 인물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헤세의 글에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대표작

1904년 페터 카멘찐트 Peter Camenzind

1906년 수레바퀴 밑에서 Unterm Rad(1906)

1910년 게르트루트 (봄의 폭풍우사랑의 3중주로도 번약)

              부제는 <사랑과 죽음과 고독의 서> - 음악소설

1914년 로스할데 (Rosshalde) - 화가소설

1915년 크눌프 (향수)

1916년 단편 청춘은 아름다워라

1919년 데미안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1922년 싯다르타 Siddhartha

1927년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

1930년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

1932년 동방 여행 Journey to the East

1943년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

 

데미안의 작품 해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로 1919년 간행된 책으로,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주인공인 소년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제 차세계대전 패전 후 혼미한 독일의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소년 싱클레어는 급우인 데미안을 통하여 점차 어두운 무의식 세계의 의미를 알게 되고,

자기 내면에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드디어 데미안의 어머니에게서 모든 통일의 상징을 본다.

 

제 차세계대전에 출전하여 전장에서 부상당하고 쓰러진 뒤 데미안과 재회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위기와 막내의 중병아버지의 죽음아내의 정신병 등

가정적인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정신분석학의 수법을 빌려 자기 내면에 몰두함으로써

기성 가치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작품이다.

원래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으나곧 비평가의 문체분석으로

작가가 헤세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작품은 헤세 자신에게도 재출발을 의미하는데,

소년기의 심리엄격한 구도성(求道性), 문명비판,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의 관념 등 헤세의 전·후기 작품 특징이 나타나 있다.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고2차 세계 대전 때에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가 배당되지 않게 한 나치의 탄압을 받았다.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진

 

 

 

헷세의 수채화 그림

 

 

 

 

 

 

 

                                                                       헷세의 signature

 

 

 

헤르만 헤세 명언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통에서 도피하지 말라. 고통의 밑바닥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라. 
-헤르만 헤세 


그대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 그대는 언제까지나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대가 소망을 버리고 이미 목표도 욕망도 없고 행복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에야 세상의 거친 파도는 그대 마음에 미치지 않고 그대의 마음은 비로소 휴식을 안다
. -헤르만 헤세 


기도는 음악처럼 신성하고 구원이 된다. 기도는 신뢰이며 확인이다. 진정 기도하는 자는 원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의 경우와 고뇌를 말할 뿐이다. -헤르만 헤세 


큰 일에는 진지하게 대하지만 작은 일에는 손을 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몰락은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된다. -헤르만 헤세 


행복만을 바라보고 쫓아가는 한 너는 행복을 누릴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사랑스러운 것이 네 것이 된다 하더라도, 잃어버린 것이 아까워 한탄을 하고 목적을 가지고
초조하게 애쓰는 한, 아직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목적도 욕망도 다 버리게 되었을 때, 행복, 행복하며 이름을 붙여 바라지 않을 때,
그 때에 비로소 세상만사의 흐름이 너의 마음에 부딪히지 않게 될 것이며, 너의 영혼이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행복하다는 것은 소망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헤르만 헤세 


나의 천성적인 우울한 습성을 고쳐서 나의 청춘시절을 다치지 않고 신선하게,
새벽처럼 유지시켜준 것은 결국 우정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이 세상에서 남자들 사이의 성실하고 훌륭한 우정만큼 멋진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고독할 때에, 청춘에의 향수가 나를 엄습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학창시절의 우정 때문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 


누구 한 사람 아는 이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헤르만 헤세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바라는 생활은 위험하다.
그 사람이 스스로 충만 되어서 나에게서 떠난다고 해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드릴 각오 없이
사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헤르만 헤세 


말로 갈 수도, 차로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 


명성이나 좋은 술,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것은 우정이었다. -헤르만 헤세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예술가에게 더 없는 위안이 된다. -헤르만 헤세 


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기자신에의 길이며, 하나의 시도이다. -헤르만 헤세 


사람은 고통을 통하여 자기를 잊어버리는 길을 걷는다. 사색을 함으로써 자기를 던지는 길을 걷는다. -헤르만 헤세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헤르만 헤세 


사랑은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고뇌와 인내에서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가를 보기 위해서 존재한다. -헤르만 헤세 


사랑은 증오보다 고귀하고, 이해는 분노보다 높으며, 평화는 전쟁보다 고귀하다. 
-헤르만 헤세 


사랑이란 슬픔 속에서도 의연하게 이해하고 미소지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헤르만 헤세 


사랑이란 애걸해서도 안되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자신 속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끄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사랑이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우리들이 고뇌와 인종속에서 얼마만큼 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자기에게 보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 


새는 알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헤르만 헤세 


세상에는 단 하나의 마술, 단 하나의 힘, 단 하나의 행복이 있을 뿐이고, 그것은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어떤 사람이나 전혀 거룩하거나 전혀 죄인인 법은 없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어린 아이에게서 배워라. 그들에게는 꿈이 있다. -헤르만 헤세 


용기와 인격, 둘을 다 겸비한 사람은 타인들에게 따분한 존재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 그리고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곧 우리의 성급함, 이기주의, 쉽게 등을 돌리는 것, 사랑과 관용의 결여 등이다. 
-헤르만 헤세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 그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서
자신의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것이다. 자신의 속에 없는 것은 절대로 자기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 


우리들에겐 사랑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마치 목적을 두지 않고 방랑 그 자체의 즐거움을 바라는 것처럼. -헤르만 헤세 


우리의 삶이 밝을 때도 어두울 때도, 나는 결코 인생을 욕하지 않겠다. 
-헤르만 헤세 


운명은 친절하지가 않고, 인생은 변덕스럽고 냉혹하였다. -헤르만 헤세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랑, 이것이 우리 영혼의 가장 높고, 가장 바람직한 경지이다. 
-헤르만 헤세 


인간은 각자 모두 자신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
완전히 자신의 작품이며 자신의 것인 생활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 


인간이 육체를 가진 이상 애정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성장케 하는데는 우정이 필요하다. -헤르만 헤세 


인생은 고독, 그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남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 


인생은 모든 의미와 의의가 상실되었을 때 비로소 가장 의미 깊은 것이 된다. 
-헤르만 헤세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는 것, 그것이 모든 예술의 궁극적 내용이고 위안이다. 
-헤르만 헤세 


자기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영웅이다. -헤르만 헤세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검토하라. 그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양심과 성실이라는 점에서 기뻐할 만한 일이었는지를. 불안과 회한처럼 무기력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라. 증오와 부정을 고요히 고백하라.
모든 악한 것의 중심에서 부끄러워하라.
어떤 그림자도 침상까지 가져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모든 근심을 마음에서 제거해버려라. 영혼이 오래 편안하도록 하라. -헤르만 헤세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행복하며,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아름답고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헤르만 헤세 


중요한 일은 다만 자기에게 지금 부여된 길을 한결같이 똑바로 나아가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길과 비교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진리를 사랑하기를 배우고, 진리를 생명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느끼기 위해서는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뭐니뭐니 해도 피조물이고, 진리와는 철저하게 적으로서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란 것은 사람이 원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언제나 무정하고 냉혹한 것이다. -헤르만 헤세 


진실이란 무엇이냐, 또는 인생은 본래 어떤 식으로 짜여져 있느냐 하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 생각해내야 하는 일이지, 책 따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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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도피이며 해방이다... 2017-04-03 0 2605
379 시를 짓기전 들여마셔야 할 공기와 내뱉어야 할 공기가 어떤지 생각해보기... 2017-04-03 0 2237
378 "쉬운 시"는 눈으로 쉽게 읽히고 가슴속에 깊은 향기를 풍긴다... 2017-04-03 0 2381
377 시는 정보의 전달 수단이 절대 아니다... 2017-04-03 0 2691
376 시인은 한편의 좋은 시를 위하여 수백편의 시를 쓰고 버릴줄 알아야... 2017-04-03 0 2555
375 혼을 불사르지 못하는 시인은 그 생명력이 짧을수밖에 없다... 2017-04-03 0 2344
374 시인은 구도자로서 억지를 부려 결과물을 얻어서는 안된다... 2017-04-03 0 2307
373 시적 령감은 기다리는 자의것이 아니라 땀흘려 찾는 자의 몫... 2017-04-03 0 2405
372 시를 쓰는 행위는 신과의 씨름이다... 2017-04-03 0 2323
371 시는 시인의 삶을 반추하는 그 시대의 사회적 산물이다... 2017-04-03 0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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