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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헤세는 문명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 문학가이다. <데미안>등 많은 작품에서 인간의 내면과 자아에 대해 다루었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4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서, 그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본질적인 정신을 찾기 위해 문명의 기존 양식들을 벗어나 인간을 다루고 있다. 자기 인식을 호소하고 동양의 신비주의를 찬양했으며, 사후에 영어권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동양에 선교사로 있었던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으로 마울브론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모범생이었지만 적응할 수 없었던 그는 칼프 탑시계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있었고 후에는 튀빙겐 서점에서 일했다.
갑갑한 전통학교에 대한 그의 혐오는 지나치게 근면한 학생이 자기 파멸에 이르는 내용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 Unterm Rad〉(1906)에 잘 나타나 있다. 1904년까지 서점 점원으로 일했고 그해 자유 기고가가 되었으며, 실패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작가에 관한 〈페터 카멘친트 Peter Camenzind〉라는 첫 소설을 발표했다. 예술가의 내면과 외면의 탐구는 〈게르트루트 Gertrud〉(1910)·〈로스할데 Rosshalde〉(1914)에서 계속되었다. 이즈음 인도를 방문했고 후에 석가모니의 초기 생애를 그린 서정 소설 〈싯다르타 Siddhartha〉(1922)에 반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립국 스위스에 살면서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독일의 전쟁 포로들과 수용자들을 위한 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1919년 스위스의 영주권을 얻었고 1923년 그곳 시민이 되어 몬타뇰라에 정착했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심오한 감성을 지닌 작가로서, 카를 구스타프 융의 제자 J. B. 랑과 함께 정신분석을 연구했으며 융과도 알게 되었다. 분석의 영향이 〈데미안 Demian〉(1919)에 나타나는데, 이 소설은 고뇌하는 청년의 자기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곤경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유명해졌다.
그의 후기 작품은 그가 융의 개념인 내향성과 외향성, 집단 무의식, 이상주의 및 상징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후기 문학 활동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 몰두했다.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1927)에서는 중년 남자의 유산계급 수용과 정신적인 자기실현 사이의 갈등이 묘사되었다. 〈지와 사랑 Narziss und Goldmund〉(1930)에서는 기존 종교에 만족하는 지적인 금욕주의자와 자기자신의 구원 형태를 추구하는 예술적 관능주의자를 대비시켰다. 그의 최후의 최장편 소설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1943)에서는 극도의 재능있는 지식인을 통해 사변적인 삶과 적극적인 삶의 이중성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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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독일어: Hermann Hesse, 1877년 7월 2일 ~ 1962년 8월 9일)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시인, 소설가, 화가이다.
1877년 7월 2일 독일 남부 시인의 고장 슈바벤 주의 뷔르템베르크 소재 소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선교사이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와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1842-1902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 남편을 잃고 아버지의 제자로 있던 요하네스 헤세와 32세 때에 재혼하였는데, 그녀가 5살 연상이었다. 요하네스 헤세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는 선교사였고, 외삼촌 빌헬름 군데르트는 일본에서 활동한 교육가로 불교연구의 권위자였다. 이러한 환경은 헤세가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머니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고 헤세의 형제로는 누이 아델레(1875-1949),동생 파울 (1878년 출생 해에 사망), 게르트루트(1879-1880, 같은 이름의 작품이 있다.), 마리(1880-1953) 그리고 한스(1882-1935, 작품 인물 중에 가끔 등장하는 이름이다.)가 있다. [1] 1881년-1886년양친과 함께 바젤로 이사하여 거주했다. 1883년 아버지가 스위스 국적을 얻었으며, 1886년 (9세) 다시 칼프로 돌아갔다.
1889년까지 실업학교에 다녔으며,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 신학자를 위한 첫 관문 통과했다. 이를 위해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국적을 얻었다. 1891년 14세 때인 1891년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입학했다. 1892년 신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부적응과 신경쇠약증 발병,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 중퇴이유였다. 6월에 짝사랑으로 인한 자살 기도. 정신요양원 생활. 11월에 칸슈타트 김나지움 입학. 신학교 때의 경험은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다. 1893년 10월 학업중단.
서점원을 이틀만에 그만 두고, 1894년-1895년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으로 일했다. 2년간 방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
1899년 첫 시집 낭만의 노래, 산문집 한 밤중의 한시간 발간. 가을에 바젤의 서점으로 옮겼다. 1901년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1902년 어머니가 사망했다.
1904년 『페터 카멘친트(향수)』를 통해 헤세는 일약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작가가 되며, 이후 그는 성공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즈음에 『페터 카멘찐트』는 6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주의적 태도로 극우파들의 애국주의에 반대했다가 독일에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돌출된 행동은 당시 지식인들이 전쟁을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을 지지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미움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극우성을 보이는 것에 대해 실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를 보면서 환멸을 느꼈지만, 아시아 여행경험(1911년)으로 느낀 사해동포주의도 그의 애국주의 반대집필의 배경이 되었다. 이때 나온 작품이 『데미안』이다. 이 소설은 그가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 중 하나이다.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가 배당되지 않게 한 나치의 탄압을 받았다.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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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전기 중의 하나는 1927년 위고 발(Hugo Ball)이 써낸 전기인데, 그는 헤세를 "찬란한 낭만주의 대열의 마지막 기사(騎士)라고 표현했다. 그는 또 끝없이 낭만을 추구한 작가로 기억할 만하다. 항상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청춘을 그리워했으며 이성을 향한 동경이나 호기심, 그 시절의 감미로운 심리묘사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헤세의 작품이 갖는 자전적 경향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18년 동안에 나온 산문들에서 숨김없이 나타난다. 헤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작중 인물로 본인이나 자기 인생에서 인상 깊게 경험한 인물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헤세의 글에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원초적 인간본능이라 할 수 있는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향한 동경, 자유를 꿈꾸는 인간적 해방의 가치가 녹아있기에 현대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현대문명이 자연과 유리되면서 대중은 외톨이로 전락했으며 인간소외는 강화되었고 우울증은 깊어지고 있다. 섬세한 심리의 소유자로서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정신병적 고통을 경험한 그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시, 음악, 그림 등을 통해 자연과 사회에 화합하는 삶의 길을 모색해왔는데, 이러한 그의 경험과 심리과정은 오늘날 정신적 외로움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또 그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통일과 조화를 꿈꾼 것이다.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이성과 감성, 신성과 마성 등 자연과 인간내면 세계의 양면성을 관찰하고 이들의 조화를 꿈꾸었다. 이질적인 대립을 통해 양자가 맞서는 긴장을 아름다운 형태로 지향함으로써 보다 높은 통일을 추구한 것이다. 데미안은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통일하기 위한 싸움이고, 로스할데는 남성과 여성, 속박과 자유, 시민성과 예술성이 끝없는 대립상태로 이어지면서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이 그려졌고, 크놀프는 인간의 사회적 정주본능과 인간 원초적인 방랑본능의 대립을 통해 인간적 삶의 길이 무엇인가 묻고 있다.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에서도 신학교라는 지성적 세계에 속했던 골드문트가 항상 지성적 인물 나르치스를 그리워하면서도 자유와 감성의 세계를 탐구하고픈 열망으로 끝없이 방랑하였고 그런 감성의 힘을 미술과 조각을 통해 예술적 세계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처럼 그의 많은 작품에서는 안정된 기성의 세계에서 부자유와 억압을 느끼고 끝없이 인간해방을 탐구하는 원초적 인간감성을 향한 그리움과 인간성 복원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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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양면성을 다룬 작품을 선보였으며, 동양의 철학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은 《데미안》의 한 구절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구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성장에 대한 대담하고 관통하는 듯한 묘사, 휴머니즘적 이상과 고도의 스타일에 대한 전범이 되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쓰기'라는 한림원의 노벨 문학상 수여 사유처럼, 청춘의 고뇌와 휴머니즘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헤르만 헤세는 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뷔르템베르크 칼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는 개신교 목사였고,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는 슈투트가르트의 유서 깊은 신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마리 군데르트는 두 번째 결혼이었는데, 인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인 선교사와 결혼해 인도에서 생활하다 남편이 죽은 후 칼프로 돌아왔다. 그 후 의학 공부를 하고, 칼프의 실업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등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어머니 마리는 헤르만에게 평생의 여성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헤세가 4세 때 아버지가 바젤로 발령받으면서 가족과 함께 이주해 약 5년간 그곳에서 살았다. 기운이 넘치는 악동이었던 그는 7세 때 바젤의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숙사제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는 그의 기질을 억누르는 학교에 만족해했다고 한다. 9세 때 외할머니를 잃고 쓸쓸해하던 외할아버지의 요청으로 가족은 다시 칼프로 이주했다. 헤르만은 조용한 작은 시골 마을 칼프에서 뛰놀고, 신학자로서 거대한 서가를 가지고 있던 외할아버지의 집을 드나들며 자랐다. 외할아버지와 서가는 헤르만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후일의 작품에도 이따금 자전적 요소로 등장하곤 한다.
13세 때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역시 속박이 심한 기숙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이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시인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되고 싶지 않다."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헤세는 방황을 거듭했다. 탈출 소동을 벌이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자살 시도까지 한 것이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공장 견습공, 서점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서점에서 일하면서 그는 책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특히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했다. 여가 시간에 시와 글을 썼으며, 1899년 22세 때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를 자비 출판했다. 또한 같은 해에 헤세와 서신을 나누던 헬레네 보이크트의 남편 오이겐 디더리히스라는 출판업자에 의해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이 출판되었고, 릴케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은 거의 판매가 되지 않았다. 이후 헤세는 바젤로 옮겨가 고서점에서 일하면서 시를 발표했다. 1904년에는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가 출간되면서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문학적 재능을 갖춘 청년 페터가 도회지의 대학으로 진학했다가 도시 문명의 허위를 깨닫고 자연의 삶을 찾아 다시 돌아온다는 성장소설이다. 젊은 시절 헤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개성과 현실과의 균형 찾기, 자연에 대한 동경, 젊은 예술가의 고뇌 등이 그려져 있다.
1904년, 헤세는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고, 스위스 접경 지역의 가이엔호펜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헤세는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게르트루트》를 비롯해 단편소설, 시, 에세이 등을 쓰며 활발히 작품 활동을 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고독한 소년의, 《게르트루트》에서는 예술가의 내면을 탐구하는 등 초기 작품에서는 역시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가이엔호펜에서 헤세는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을 낳고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헤세는 그 안락한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만족하지 못해 방황을 거듭했다. 헤세는 책임감 있는 가장과 괴팍한 작가로서의 삶 양쪽을 오갔고, 남편의 계속 바뀌는 태도에 지친 마리아와의 사이도 점점 벌어졌다. 1911년, 헤세는 친구인 화가 슈투르체네거와 함께 인도와 스리랑카 등지를 여행했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셋째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났다. 결혼 생활은 완전히 파탄이 났고, 그는 이런 상황을 《로스할데》라는 작품에 그렸다. 그는 예술가에게 과연 결혼 생활을 할 자질이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이 글을 썼다고 밝혔다. 또한 인도 여행은 《싯다르타》에 반영되었다.
1914년 8월, 독일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전 세계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으며, 민족주의, 군국주의가 독일을 휩쓸었다. 인도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헤세로서는 이런 식의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동조할 수 없었고, 독일 국민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글을 스위스 〈신취리히 신문〉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 평화주의적 반전론(反戰論)을 받아들이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매국노,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전쟁 기간에는 독일에서 헤세의 글을 발표할 통로가 일체 막혔고, 그는 스위스로 건너가 전쟁포로 구호소에서 일을 도왔다. 이 시기에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투병, 아내의 정신병 등 고난이 이어졌고, 헤세는 신경쇠약에 걸려 카를 융의 제자 J. B. 랑 박사에게 정신분석을 받았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작풍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고, 그 변화는 1919년 대표작 《데미안》으로 나타난다. 소년의 고뇌와 자기 인식을 탐구하는 과정을 그린 이 성장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과 우울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일에서 글을 발표할 수 없었던 헤세는 당초 이 작품을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가 이 작품이 신인 작가에게 수여하는 폰타네상을 수상하게 되자 진짜 작가가 자신임을 밝히고 상을 반환했다.
헤세는 전쟁이 끝난 후 가족을 떠나 스위스 남부 루가노 호반의 작은 마을 몬타뇰라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클라인과 바그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싯다르타》 등을 썼다. 《싯다르타》는 한 청년이 자기실현을 하는 철학적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동서양의 철학이 결합되어 있다.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20년에 첫 개인 전시회를 연 이후 파리, 마드리드, 뉴욕, 도쿄, 몬트리올, 함부르크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생활에 위협을 받던 시기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1923년, 아내 마리아와 이혼하고 루트 벵어와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 결혼 생활도 4년 만에 끝이 났다. 1931년에 니논 돌빈과 세 번째 결혼을 한 후 헤세는 비로소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종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헤세는 물질 과잉의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담은 초현실주의 작품 《황야의 늑대》, 두 인물의 교류를 통해 지성과 감정, 종교와 예술 등의 대립을 다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와 사랑》)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히틀러의 광란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을 잠식하자 헤세는 인간의 정신적 산물을 적극적으로 보존하는 유토피아를 그린 장편소설 《유리알 유희》를 쓰면서 견뎠다. 이 작품은 1943년 스위스에서 출간되었고, 독일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출간되었다. 철학, 역사, 수학, 음악, 문학, 논리학 등 광범위한 지적 유희를 토대로 한 이 작품은 유럽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헤세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헤세는 전후 독일, 냉전 체제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협박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헤세는 어떤 정치적 입장도 표방하지 않았고, 몬타뇰라의 집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새로운 작품은 더 이상 쓰지 않았지만 지난 50년간 발표했던 시들을 모아 시 전집을 냈으며, 서평 등을 통해 새로운 젊은 작가들을 발굴했다.
1962년 8월 9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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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시 모음
<행복해 진다는 것>
- 헤르만 헷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깊은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안개> - 헤르만 헤세 안개 속을 거니는 이상함이여, 덩굴과 돌들 모두 외롭고, 이 나무는 저 나무를 보지 못하니 모두가 다 혼자로구나! 나의 삶이 밝았던 때에는 세상엔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 여기 자욱한 안개 내리니 아무도 더는 볼 수 없어라. 회피할 수도 없고 소리도 없는 모든 것에서 그를 갈라놓는 이 어두움을 모르는 이는 정녕 현명하다고는 볼 수 없으리. 안개 속을 거니는 이상함이여, 산다는 것은 외로운 것, 누구도 다른 사람 알지 못하고 모두는 다 혼자인 것을! <기도>
-헤르만헤세 하느님이시여, 저를 절망케 해 주소서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미혹의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온갖 모욕을 겪도록 하여 주시옵고 내가 스스로 지탱해 나감을 돕지 마시고 내가 발전하는 것도 돕지 마소서 그러나 나의 자아가 송두리째 부서지거든 그 때에는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아 주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으려고 하나 나는 오직 당신의 품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머님께>
-헤르만헤세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멀리 객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를 이해해 준 분은 어느 때나 당신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에게 드리려는 나의 최초의 선물을 수줍은 어린아이 손에 쥔, 지금 당산은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나의 슬픔을 잊는 듯합니다. 말할 수 없이 너그러운 당신이, 천가닥의 실로 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 <누이에게>
-헤르만헤세 어찌할 바를 몰라 슬픔에 젖어 이곳에 서 있다. 고향을 멀리 떠나 나는 헤매이며 왔다. 내가 알고 있던 꼿이여 푸른 높은 산이여 인간이여, 들판이여 이제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다만, 너의 입에서만 엿날의 소리를 듣고 다정한 동화의 말처럼 옛날의 소식을 듣는다. 멀지 않아 착한 원정인 죽음이 부모가 기다리는 저녁 노을 속으로 그의 정원으로 나를 데리고 갈 것이다. --------------------------------------- <꿈>
-헤르만헤세 언제나 같은 꿈이다. 빨간 꽃이 피어 있는 마로니에 여름 꽃이 만발한 뜰 그앞에 외로이 서 있는 옛집 저 고요한 뜰에서 어머니가 어린 나를 잠재워 주셨다. 아마도, 이제는 오랜 옛날에 집도 뜰도 나무도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 위로 초원의 길이 지나고 쟁기가 가래가 지나 갈 것이다. 고향의 뜰과 집과 나무를 이제는 꿈에서만 남을 것이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떠올리는 무수한 낯모르는 얼굴들.... 서서희 하나, 둘 불빛이 흐려간다. 그 여린 빛이 회색이 되고 -------------------------------------------------------- <어린 시절부터>
헤르만 헤세 지난날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행복을 약속한 하나의 음향이 나에게로 다가 온다. 만일 이것이 없으면 살기가 너무나 괴로울 것이다. 이 마력의 음향이 울리지 않는다면 나는 빛없이 서서 주위에 불안과 암흑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슬픔과 죄에 다치지 않는 소리가 행복에 찬 달콤한 음향이 울린다. 슬픔과 죄악에도 파멸되지 않는 그 음향이. 너 자랑스런 목소리여 내 집의 불빛이여 다시는 꺼지지 말고 그 푸른 눈을 감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부드러운 빛을 모두 잃고 크고 작은 별들이 차례로 떨어져 나만 홀로 남게 될 것이다. ------------------------------------------------------- <내 젊음의 초상>
헤르만 헤세 지금은 벌써 전설이 된 먼 과거로부터 내 청춘의 초상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지난날 태양의 밝음으로부터 무엇이 반짝이고 무엇이 타고 있는가를 ! 그때 내 앞에 비추어진 길은 나에게 많은 번민의 밤과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다. 그 길을 나는 이제 다시는 걷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성실하게 걸었고 추억은 보배로운 것이었다. 잘못도 실대도 많앗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 <혼 자>
헤르만 헤세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다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지혜나 능력은 없다. -------------------------------------------------- <마을의 저녁 무렵>
헤르만 헤세 양떼를 몰고 목동이 조용한 오솔길을 가고 있다. 집들은 잠이 오는 듯 벌써 깜박이고 있다. 나는 이 마을에서, 지금 단 하나의 이방인 슬픔으로 하여 나의 마음은 그리움의 잔을 남김없이 비운다. 길을 따라 어디로 가든 벽난로에는 따뜻한 불이 타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고향과 조국을 느껴보지 못했다. ------------------------------------------ <멀어져 가는 젊음>
헤르만 헤세 피곤한 여름이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호수에 비친 그의 마지막 모습을들여다본다. 일상에 지친 나는 먼지에 싸여 가로수 그늘을 방황하고 있다. 포플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면 내 뒤로 황혼이 금빛으로 타오르고 앞에는 밤의 불안이 죽음과 함께 온다. 먼지에 싸인 채 지친 걸음을 옮겨 놓는다. 그러나 젊음은 머뭇거리듯 뒤로 밀려나며 고운 모습을 감춘 채 나와 함께 앞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 <그는 어둠 속을 걸었다>
헤르만 헤세 검은 수목들의 그림자가 꿈을 식히는 어둠 속을 그는 즐겨 걸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빛에서 빛으로 타오르는 욕망에 갇혀 괴로움을 다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은빛으로 맑은 별이 가득 찬 하늘이 있음을, 그는 몰랐다. ----------------------------------------------------------- <젊음의 고개를 넘으며>
헤르만 헤세 전나무 아래서 쉬고 있노라면 지난날이 생각난다. 익은 숲의 냄새가 최초로 소년의 슬픔을 잉태했던 그날이. 바로 이곳이었다. 내가 이끼위에 누워 수줍은 소년의 열정이 가냘픈 금발 소녀의 모습을 꿈꾸었다. 환한 속에 처음 핀 장미를 꺾어 넣고. 세월은 흐르고 꿈은 늙어지고 멀어져서 다른 꿈이 왔다. 그것도 작별한 지 이미 오랜 일이다. 최초의 꿈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나는 늘 괴로워했다. 그래, 누구였을까. 잊혀지지 않는 것은 ? 다만, 그녀가 상냥하고 가냘픈 금발이라는 것 뿐이다. ------------------------------------------------------------- <노을 속의 백장미>
헤르만 헤세 슬픈 듯 너는 얼굴을 잎새에 묻는다. 때로는 죽음에 몸을 맡기고 유령과 같은 빛을 숨쉬며 창백한 꿈을 꽃피운다. 그러나 너의 맑은 향기는 아직도 밤이 지나도록 방에서 최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한 가닥 은은한 선율처럼 마음을 적신다. 너의 어린 영환은 불안하게 이름 없는 것에 손을 편다. 그리고 내 누이인 장미여, 너의 영혼은 미소를 머금고 내 가슴에 안겨 임종의 숨을 거둔다. ----------------------------------------------------------- <방랑의 길에서> (크눌프의 추억)
헤르만 헤세 슬퍼하지 말아라, 곧 밤이 오리라. 그러면 우리들은 파리해진 산 위에서 몰래 웃음짓는 것 같은 시원스러운 달을 보리라. 그러면 손을 잡고 쉬자. 슬퍼하지 말아라, 곧 때가 오리라. 그러면 우리는 쉬리라, 우리들의 십자가가 밝은 길가에 나란히 설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 것이다. --------------------------------------------------- <둘 다 같다>
헤르만 헤세 젊은 날에는 하루같이 쾌락을 쫓아 다녔다. 그 후에는 우수에 싸여 괴로움과 쓰라림에 잠겨 있었다. 지금 나에게는 기쁨과 쓰라림이 형제처럼 스며 있다. 기쁜 듯 슬픔 듯 둘은 하나로 되어 있다. 신이 나를 지옥으로 탱양의 하늘로 인도한다면 나에게는 둘 다 같은 곳이다. 신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 한. ---------------------------------------------- <편 지>
헤르만 헤세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 온다. 보리수가 깊은 신음소리를 내고 달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내 방을 엿본다. 나를 버린 그리운 사람에게 긴 편지를 썼다. 달빛이 종이 위로 흐른다. 글위를 흐르는 고요한 달빛에 나는 슬픔에 젖어 잠도, 달도, 밤 기도도 모두 잊는다. ---------------------------------------------------- <한 장의 그림>
헤르만 헤세 가을의 찬 바람이 시든 갈대밭을 스잔히 불어간다. 갈대잎은 밤 사이에 회색이 되었다. 까마귀는 버드나무를 떠나 육지로 날아간다. 호수에서는 한 노인이 외로이 서서 쉬고 있다. 머리에 바람과 밤과 다가오는눈을 느끼고 그늘진 호수에서 밝은 하늘을 바라본다. 거기 구름과 호수 사이에 한 줄기 물가의 육지가 햇빛 속에서 따뜻하게 빛나고 있다. 꿈과 시처럼 행복에 찬 금빛 호수가. 노인은 빛나는 이 풍경을 똑똑히 눈 속에 간직하고 고향을, 지난 행복한 세월을 생각한다. 그리고 황금빛 태양이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자 머리를 돌려 버드나무에서 떠나 천천히 육지로 걸어간다. --------------------------------------------------- <순례자>
헤르만 헤세 나는 항상 방랑의 길에 있었다. 순례자였다.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쁨도 슬픔도 흘러갔다. 나는 방랑의 의미도, 목적도 알지 못한다. 몇 천 번을 쓰러지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다. 아,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성스럽고 멀리 높은 하늘에 걸려 있었던 사랑의 별이었다. 그러나 그 별을 안 지금은 목적을 알지 못하던 동안에는 마음 편히 걸어 갔고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이미 늦었다. 별은 돌아서 버리고 아침에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화려한 세상과 작별을 해야 한다. 나는 목표를 잃어버렸으나 그래도 가야 할 나그네의 길이 있었다 ---------------------------------------------------------- <어둠과 나와>
헤르만 헤세 나는 촛불을 꺼버렸다. 열린 창문으로 밤이 밀려와 살며시 나를 안고, 나를 벗으로 형제로 삼는다. 우리들은 같은 향수에 젖어 있다. 불안한 꿈을 밖으로 내쫓고 소곤소곤 아버지 집에서 살던 지난 날을 이야기한다. ----------------------------------------------------------- <가을날>
헤르만 헤세 숲이 금빛으로 타고 있다. 상냥한 그이와, 여러 번 나란히 걷던 이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간다. 이런 화창한 날에 오랜 동안 품고 있던 행복과 고로움이, 향기 속으로 먼 풍경으로 녹아 들어간다. 풀을 태우는 연기 속에서 농부의 아이들이 껑충거린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노래를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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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독일 뷔르템베르크 출생
1890년 괴팅엔의 라틴어 학교 입학
1891년 마울브론 신학교 입학, 1892년 작가가 되기 위해 신학교 자퇴 1902년 시집 <시모음(Gedichte)> 출간 1905년 <수레바퀴 밑에서> 출간 1911년 화가 한스 쉬틀제네거와 함께 인도 여행, 1919년 에밀 싱크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 발표,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나치의 탄압으로 작품 들이 몰수되고 출판 금지됨. 1957년 <헤세 전집> 출간 1962년 뇌출혈로 사망
"견딜 수 없는 이 마음의 황폐로부터, 나는 지금껏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일로부터 탈출로를 발견했다."
"나는 단순한 풍경화를 그리고 있으며 내가 그 풍경들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보는 풍경들은 아름답다."
"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어떤 작업을 할때 긴장과 집중감을 느낀다. "
"나무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웃음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춤추기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릴때면 미소를 짓는다."
내면의 진지한 갈등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려는 끈질긴 시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하나의 길, 이러한 하나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 그리
고 하나의 작은 길의 암시"를 찾기 위해 전 생애를 걸고 문학적 운명을
걸었던 작가. 내면의 진지한 갈등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려는 끈질
긴 시도를 펼쳐 보인 작가. 괴테와 니체의 예술적 사상적 혈통을 창조적
으로 이어받아 영혼의 순결성을 지키고 삶에 대한 성실성을 잃지 않고자
했던 작가. 독일 출신 노벨문학상(1946년) 작가 헤르만 헤세를 우리는
그렇게 부르곤한다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 주의 소도시 칼브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스위스 바젤 등지에서 자라난 헤르만 헤세는 마울브론 수도원학교
에 입학했으나 7개월만에 도망친다. "시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자 했기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 때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고향의
시계 공장에서 직공 노릇을 하면서 정신적 안정을 되찾는다. 이후 9년 동
안 서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문필 수업에 진력했다.
헤세는 <낭만적인 노래들>등의 시집을 출간하여 릴케로부터 극찬을 받기
도 하였으나, 그가 문단에서 본격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장편 <페터
카멘친트>(1904)를 출간한 이후의 일이다.
학창 시절을 배경으로 한 독일적 교양소설인 <수레바퀴 밑에서>로 베스트
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데미안>을
발표하여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상의 지명되었다.
(헤세는 끝내 수상을 거부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라는 모토를 바탕으로 자아를 찾아 자신의 진
정한 삶을 추구하려는 한 젊은 영혼의 통과제의를 그린 소설이 바로
<데미안>이다. 또 하나의 유명한 소설 <싯다르타>에서그는 고난의 길을
걷는 싯다르타의 생애를 조명하면서 그 자신의 영혼의 발자취를 찾아보
려 했다. 그 밖에 <유리알 유희> <황야의 이리> <크눌프> <동방 순례>등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기독교적인 경건주의 전통에서 자라난 헤르만 헤세였지만, 그는 그것을
동양적인 분위기와 접목시키고자 애쓴 작가였다. 즉 동양 정신과 서양
정신의 융합,지성과 감성의 종합,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자기 문학과
삶의 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부단히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나와 새로운 창조적인 영혼
의 도정을 걷고자 했다. 마치 <데미안>에서 보이는 구절 그대로 말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바둥거린다. 알은 곧 세계이다. "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
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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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소설가·시인. 남독일 뷔르템베르크의 칼프 출생. 러시아령 에스틀란트 태생인 아버지 요하네스는 신교(新敎)의 목사였고, 모계(母系)도 역시 유서 있는 신학자 가문이었 다. 외조부 헤르만 군데르트는 우수한 신학자로, 인도에서 다년간 포교에 종사하였고, 그 인 격과 인도학(印度學)과 관련한 수천 권의 장서(藏書)는 헤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 마리는 인 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을 받았고, 인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영국인 선교사와 결혼하였으나, 그와 사별(死別)한 후 칼프에서 요하네스와 재혼하여 헤세를 낳았다.
[출처] 헤르만 헤세 - 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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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독일어: Hermann Hesse, 1877년 7월 2일 ~ 1962년 8월 9일)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시인, 소설가, 화가이다.
헤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전기 중의 하나는 1927년 위고 발(Hugo Ball)이 써낸 전기인데, 그는 헤세를 "찬란한 낭만주의 대열의 마지막 기사(騎士)라고 표현했다.
그는 또 끝없이 낭만을 추구한 작가로 기억할 만하다. 항상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청춘을 그리워했으며 이성을 향한 동경이나 호기심, 그 시절의 감미로운 심리묘사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헤세의 작품이 갖는 자전적 경향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18년 동안에 나온 산문들에서 숨김없이 나타난다. 헤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작중 인물로 본인이나 자기 인생에서 인상 깊게 경험한 인물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헤세의 글에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대표작 1904년 페터 카멘찐트 Peter Camenzind 1906년 《수레바퀴 밑에서 Unterm Rad》(1906년) 1910년 게르트루트 (봄의 폭풍우. 사랑의 3중주로도 번약) 부제는 <사랑과 죽음과 고독의 서> - 음악소설 1914년 로스할데 (Rosshalde) - 화가소설 1915년 크눌프 (향수) 1916년 단편 청춘은 아름다워라 1919년 《데미안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1922년 《싯다르타 Siddhartha》 1927년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 1930년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 1932년 《동방 여행 Journey to the East》 1943년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
데미안의 작품 해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로 1919년 간행된 책으로,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주인공인 소년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제 1 차세계대전 패전 후 혼미한 독일의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소년 싱클레어는 급우인 데미안을 통하여 점차 어두운 무의식 세계의 의미를 알게 되고, 자기 내면에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드디어 데미안의 어머니에게서 모든 통일의 상징을 본다.
제 1 차세계대전에 출전하여 전장에서 부상당하고 쓰러진 뒤 데미안과 재회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위기와 막내의 중병,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등 가정적인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정신분석학의 수법을 빌려 자기 내면에 몰두함으로써 기성 가치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작품이다. 원래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으나, 곧 비평가의 문체분석으로 작가가 헤세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작품은 헤세 자신에게도 재출발을 의미하는데, 소년기의 심리, 엄격한 구도성(求道性), 문명비판,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의 관념 등 헤세의 전·후기 작품 특징이 나타나 있다.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가 배당되지 않게 한 나치의 탄압을 받았다.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진
헷세의 수채화 그림
헷세의 sig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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