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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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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시는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 몸을 찢고 태여나는 결과물이다
2017년 02월 15일 17시 52분  조회:2492  추천:0  작성자: 죽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제60회 세계보도사진전(WPP)의 수상작품 中 한컷...




무덤이고, 거울이고, 상자인, 그리고 / 박 남 희(시인)

1. 없는 시론의 시 

나는 이글을 쓰면서 이경림 시인과 관련된 주요 이미지로 무덤과 거울과 상자를 떠올려본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이미지는 이경림 시인의 주요 이미지 이면서도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수많은 이미지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렇듯 이경림의 시는 어떤 하나의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시인 자신과 세상을 향하여 무수히 미끄러지는 수많은 이미지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그의 시들을 통해서 즐겨 사용하는 비유는 주로 직유와 열거법인데, 이러한 비유법들은 그의 시가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무수한 이미지와 만나고 교섭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경림의 시를 읽으면서 이 세 가지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그것은 그의 첫 시집『토씨찾기』(1992)가 주로 무덤처럼 갇힌 세계에서 몸부림치던 시인 자신의 의식의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1995)『시절하나 온다, 잡아먹자』(1997)는 반성적이며 허위적 대상을 향하여 열려 있는 거울의 이미지를, 최근에 상재한 『상자들』(2005)은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이고 또 다른 무수한 타자이면 자아인 상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해준다는 점에서 필자가 그렇게 상정해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들도 네 권의 시집에 각각 필연적으로 귀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의 모든 시집에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산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시는 어떤 한 가지 이미지에 귀속되기를 싫어한다. 그의 시가 무수한 이미지들을 밟고 미끄러지면서도 완결된 형식이나 결말을 보여주기보다는 미완의 열린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이경림의 시를 거칠고 성급하게 개괄해 본 것은 그의 시의 우수성에 비해 아직도 그의 시에 대한 평가가 미진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경림 시인의 존재를 마음 속 깊이 각인 시키게 된 것은 그의 두 번째 시집『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를 책방에서 발견하고 부터이다.(나는 그 때 그의 첫 시집『토씨찾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나는 이 글을 쓰기로 한 다음, 이경림 시인으로부터 첫 시집의 복사본을 받고 처음으로 그것을 읽어보았다.) 내가 책방에서 만난 이경림 시인은 나에게 놀라움 자체로 다가왔었다. 이경림이라는 낯선 이름이 거느리고 있던 그 빛나는 이미지들과 활달한 상상력, 날카로운 직관의 언어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나는 그 때부터 이경림 시의 말 없는 신도가 되어 주기도문과도 같이 그의 시를 중얼거렸다. 그의 시는 자유로운 형식 속에 녹아있으면서도 내 시의 가장 모범적인 전범이 되어 주었고, 그러면서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이경림의 시를 그처럼 좋아했으면서도 쉽게 닮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시가 어떤 관습적인 틀에 매여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이경림 시인으로부터 건네받은 그의 첫 시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우선 그의 시 「토씨찾기」나, 서시 격으로 맨 앞에 실려있는「詩」라는 제목의 시를 읽으면서 그 때까지 어디에서도 체계적인 시 수업을 받은 바 없는시인이 어떻게 그렇듯 시를 폭 넓고 다양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지우기. 드러내기, 꺾기, 구부리기/건너뛰기, 감추기, 꼬집기, 두들겨 패기 /숨기, 뒤집어 씌우기,빼기, 넣기/꼬리 붙이기 ,꼬리 감추기, 벌벌 기기, 껄껄 웃기/ 부들부들 떨기,/숨 멈추고 생각하기, 찔끔찔끔 짜기”(「詩」)로 표현되고 있는 그의 시에 대한 생각들은 어떤 시론의 틀에 갇혀있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의 시법을 훌륭히 제시해주고 있었다. 그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본 바에 의하면, 사실 그는 그 무렵 오규원 시인을 만나서 일년 반 동안 문학 수업을 받기 전까지 문학에 대한 어떠한 교육도 체계적으로 받아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문학에 있어서 가장 큰 스승은 그의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대구 경북고보를 나온 文靑이셨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남달랐던 그의 아버지는 6.25를 전후한 정치적 혼란기에 좌익운동에 가담하면서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고, 시인의 가족사에는 그 때부터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시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부재’와 ‘무능’이라는 이미지로 각인 되고,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끝끝내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문학을 알게 하고 문학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분의 책상 위에는 늘 낡은 시집이나 일본어로 된 소설들, 어려운 사상서들이 널려 있었고 원고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우리들에게 하신 말놀이같은 것들이 의도적으로 하신 교육의 한 방법이었는지 다만 당신의 무료함을 달래시려고 하신 놀이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대여섯살 때부터 그분은 나와 동생을 무릎에 앉히시고 말잇기 놀이를 시키셨다. 처음에는 끝말을 이어가는 놀이로 시작해서 어휘 놀이까지 또 낱말 크게 늘이기 줄이기등 다양한 형태의 말놀이를 하며 우리는 즐거웠다. 가령 ‘겨울!’ 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내가 ‘눈이 내린다’ 하고 동생이 ‘눈이 억수로 내려서 마을이 눈에 묻혔다.’ ‘길이 없어져서 장에 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또, ‘눈꼽만한 새가 날아간다’ 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콩알만한 새가 날아간다, 주먹만한 새가, 보자기만한 새가,...로 발전해서 하늘만한, 우주만한 새,까지 가는 늘 더 큰 것이 있다, 없다로 동생과 티격태격 했던 말 늘이기 줄이기 놀이, 아버지는 늘 ‘있다’ 로 결론 내려 주셨다. 우리가 그런게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그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 속에 있다’고 하셨고. ‘에이’ 하는 우리에게 ‘눈을 감고 우주보다 더 큰 것이 내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 꽉 차는 새가 있다고 생각해 보아라’ 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그 끝에 장자에 나오는 鵬이라는 새와 곤이라는 물고기의 이야기를 해 주시며 그 것은 모두 마음의 우주 속에서 날아다니거나 헤엄쳐 다니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낱말 줄이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우주만한 .....에서 먼지보다 작은 .....까지가서는 그 것도 역시 마음 속에 있다고 하셨다. 같은 새라도 우주보다 클 수도 먼지보다 작을 수도 있게 만드는 것이 언어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신비롭고 재미있었다. 내가 최초로 알게 된 현대시 역시 아버님이 읽어주신 시였는데 아마도 초등학교 4, 5학년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때 우리들의 놀이는 말놀이에서 즉석 백일장 같은 것으로 바뀌어 있을 때였다. 자신이 내 주신 제목으로 짧은 시를 지어서 잘 쓴 사람에게 상을 주시곤 하셨는데 나는 그 때 눈길이란 주제를 받고 /눈 온 아침, 길을 걸으면/ 뽀드득 뽀드득 /눈들이 우는 소리......뭐 그런 비슷한 시를 썼던 것으로 기억되고 아버지는 ‘눈.들.이. 운.다’는 대목에 주목하시며 “‘뽀드득’ 소리와 ‘운다’는 비유가 그리 적절하지는 않지만 남다른 생각이다....”하시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을 가진 시인으로 시인 이장희의 시를 읽어 주셨다.

-「내가 영향받은 시론」(『시와 반시』2002년 여름호)에서

내가 시인을 만나서 들은 말과 이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야 말로 시인에게 어렸을 때부터 시의 영재교육을 시킨 위대한 스승이셨다는 것이다. 이 글은 그동안 내가 이경림 시인에게 가지고 있던 놀라움과 의문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교육시킨 말놀이 게임이야말로 시인의 빛나는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가 무수한 이미지와 상상력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그의 아버지의 이러한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 글의 결미에서 “지금까지 나를 끌고 온 가장 확실한 시론은 ‘없는 시론’이다. 나는 ‘문학이야 말로 살아내는 문학이어야 하며 그 삶이 자신 속에서 실핏줄 구석구석까지 고이고 부풀어 아우성처럼 터져 나오는 것이 언어로 씌어지는 것’이라야 진짜 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감정이 시인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분출한다는 워즈워드의 낭만주의 시론을 연상시켜주는 이러한 시인의 진술은, 단순히 낭만주의 시관을 넘어서 그의 삶과 마음과 언어가 하나를 이루어서 한 몸으로 빚어내는 필연적인 결과물이 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의 첫 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것도 그의 시가 단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몸(자궁)을 찢고 태어난 생래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 역시 이경림 시의 우수성의 일단을 말해주는 것이다. 

2.직유와 반복으로 짜여진 환유

이경림의 시를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거의 거론된 바 없는 그의 첫 시집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첫 시집이야말로 가장 이경림 시인다운 면모를 고스란히 내장하고 있고, 그의 시가 어떠한 토양에서 발원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시집이기 때문이다. 
그의 첫 시집은 시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근대사와 가족사와 개인사가 머물다 간 곳에 떨어져 있던 토씨(詩 )들로 이루어져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쉽게 만나게 되는 것은 ‘~같은’이나 ‘~처럼’이라는 낱말로 이루어진 직유가 무수하게 등장한다는 점과 이미지가 이미지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쇄와 반복의 문법이 그의 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시가 직유와 반복법이라는 단순한 비유법의 외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통속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의 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비유인 직유와 반복법이 단선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고 이미지나 개념의 병치를 이루면서 환유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헛간이었던지 무너질 듯 서 있던 그 집에서 나는 기다렸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문 밖에는 두런두런 낯 모르는 장정들의 목소리 같은 세월이 지나갔다 금속성의 여자 목소리 같은 아이 울음같은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지친 황소울음같은 바람소리같은……애가 끓었다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삼부로 빌려줘 아냐 딸라야 컹컹컹 개같은 세월이 짖어댔다 밤이 오는지 귀퉁이에 거미줄이 넓어지고 박쥐가 숨죽이고 붙어있는 천장이 무서웠다
아 끝내 그는 오지 않는 걸까
문틈으로 캄캄한 것들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신인가
-「유배일지․2」전문

무수한 직유의 연쇄를 환유적 풍경으로 나열해서 보여주고 있는 이 시는 어린 시절 시인이 막장과 판자촌을 전전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위악적이고 어두운 세상에 대한 느낌을 파노라마처럼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시인은 어렸을 때 경북 문경 완장리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사상 때문에 신문기자직을 그만두고 광산 간부가 된 아버지를 따라 경북 문경의 ‘加恩’이라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이러한 막장 같은 세월은 그가 중학교를 진학학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온 후로도 계속된다. 시인 자신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加恩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검고 깊은 원통형의 어떤 세계다. 길들은 검었고 산도 물도 사람들도 모두 검”은 곳이다. (「加恩이라는 문」,『시와 반시』2002년 여름호) 어쩌면 시인에게 있어서 그 곳은 살아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 힘든 거대한 무덤 모양의 어떤 곳이었을 것이다. 인용 시에 보이는 ‘낯모르는 장정들의 목소리’,‘금속성의 여자 목소리’,‘아이 울음’,‘지친 황소울음’,‘바람소리’,‘개 짖는 소리’와 같은 직유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는 이미지들은 시인이 살아온 신산한 세월의 환유적 표정들인 것이다. 
이 시의 결말에 나오는, 기다려도 끝끝내 오지 않는 ‘그(당신)’는 오랫동안 잠적했다가 자정이 다 될 무렵에야 어슬렁거리며 어둠에 묻어 들어오시던 아버지와, 그가 30대 후반에야 마음을 열고 터질 듯한 사랑을 나누었던, 그가 그동안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기피했던 시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좌경으로 몰려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객지로 떠돌던 삶과 시인이 시를 외면하고 병자로서 살아온 삶이 매우 닮아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의 폭력적인 역사로부터 유배를 당했고, 시인은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시로부터 유배를 당했던 셈이다. 사실 시인이 시를 의도적으로 멀리한 것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 때문이다. 그가 다니던 모 의대를 1학기도 마치기 전에 그만두고 돌연 결혼을 해버린 것도 경제적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알 수 없는 복수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는 있으면서 없는 아버지였다. ‘없는 아버지’는 당시 그에게 지독한 가난과 반항심만 가져다주었다. 

밥 숟가락 넘기는 일이 이렇게 아득한데 영영 
못다 한 날들이 벌떼처럼 몰려오는구나
햇빛은 차고 달빛은 섬짓한데
그 사이 어느 틈새로 너는 날아갔을까

너를 묻을 때 삽 끝에는 자꾸 길이 끌려든다
네 길도 잘 접어 관 귀퉁이에 묻어준다
나무들이 굴욕처럼 우뚝우뚝 서 있는 숲에는
아픈 새의 울음이 구른다 미처 자리잡지 못한
흙들이 바람에 날린다
네가 가져간 날들이 오지 않는다

-「굴욕의 땅에서․ 1」부분

시인은 그의 홈페이지에 남긴「나의 시와 시어」라는 제목의 산문을 통해서 그의 시와 시어에 내포되어 있는 특성을 “없는.....지우다.....문득”으로 정의한바 있다. 그는 말한다. “나의 시는 없는 시다. 나의 시론은 없는 시론이며 나의 시어는 없는 시어이다. 태생부터 나는 없는 집에서 태어났고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없는 남편에게 시집갔다. 한 생 없는 희망을 붙잡고 낑낑거렸으며 없는 행복 속에서 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없는’이라는 말 속에는 ‘부재’와 ‘가난’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이러한 가난과 부재의식이야말로 이경림 시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 시는 39세에 죽은 그의 바로 밑의 동생의 이름인 ‘珍에게’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시인데, 이 시는 묘하게도 어릴 때 죽은 그의 막내동생의 이미지와 겹쳐서 읽힌다. 그는 막내동생이 이질을 앓다가 죽은 후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몸으로 기절한 엄마 대신 동생의 시신을 뒷산에 묻던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때도 아버지는 부재했고 엄마마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상태에서 어린 몸으로 그런 엄청난 일을 감당해야 했던 기억을, 시인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의 후기에서 뼈아프게 상기시키고 있다.

나는 그 아이를 흰 보자기에 쌌다. 그리고 한 밤중 아무도 몰래 뒷산에 묻었다. 달빛이 교교하고 나뭇잎들이 무섭게 번들거렸다.
“꼭꼭 밟아야 해”
거들어주러 온 옆집 아저씨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아이를 밟았다. 없는 약값이 보이지 않도록, 없는 매장비가 보이지 않도록, 그 아이의 지겨운 울음이 다시는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이튿날 하루 종일 비가 퍼부었다. 그 때 나는 처음 알았다. 비가 비수인 것을……
무덤 사이로 스며드는 빗방울들이 보였다. 그 아이의, 아니 내 살갗을 쑤셔대는 빗방울 소리!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우리 집안을 틀어쥐고 있는 그의 폭력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아나도 그는 늘 내 등 뒤에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급기야는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그런 처참한 꼴을 그는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서른아홉의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어디로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다시 찾는 것이 내가 살 길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 그는 나를 몰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잃어버렸던 세월만큼 일방적으로 사랑을 퍼부었다. 모른 척하던 그는 어느 날 내게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우리는 폭풍우 같은 사랑에 빠졌다.

-시집『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후기에서

그는 그동안 어린시절에 사랑했던 시를 의도적으로 회피해왔었는데, 병약한 막내동생을 잃고 뼈아픈 가난과 불운에 직면하게 되면서 다시 시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서른 아홉이 되어서야 시와 폭풍우 같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는 시와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부터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병과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얻게 된다. 이런 시인의 경험들을 반추해 보면 이경림 시인은 시인이 될 운명을 타고 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시의 무당이고 사제이다. 그의 시가 반복을 통한 리듬과 무수한 이미지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주술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내가 만난 이경림 시인은 가난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시와 삶에서 가난이 거론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의 가난에 대한 의도적 회피는 물론 과거의 참담했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그의 시가 가난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 한 때문이겠지만, 시인이 그토록 지우고 싶어했던 가난이야 말로 그의 시의 자산인 것을 어찌하랴. 가난은 그의 시가 평평한 시간의 지평으로부터 ‘문득’ 수직으로 솟아오르게 한 숨은 힘인 것을. 시인의 말처럼 “‘없는’ 삶들에게 ‘문득’이 없다면 아니 더 자세히 말해서 ‘문득’이 일으키는 이후의 바람이 없다면 ‘없는’ 존재들은 그 곰팡내 나는 沈潛을 어찌 견디랴.”(「나의 시와 시어」) 

3.고통이라는 거울이 있는 상자 

그의 가난과 부재의식이 무덤이라는 이미지로 수렴된다면, 무덤에서 발원한 그의 삶과 시는 다양한 거울을 만나면서 고통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그는 그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짤막한 글에서 “나는 일생 고통이라는 거울 속에 살았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 밑바닥에는 언제나 거울이 있었다. 뼈 속까지 다 비추던 그 거울! 너무 깊어 오히려 잘 보이던 저 편 숲들......그곳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차디 찬 유리로 덮여있었다.”(「고통」)고 말한다. 이 글을 분석해보면 그의 고통은 거울로 상징되는 그의 존재의식에서 나온다고 생각된다. 흔히 체면이나 부끄러움, 자존심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시인의 존재의식은 ‘거울’을 만나면서 비로소 시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모든 시는 거울의 산물이다. 시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비유의 거울이며, 시 역시 세상의 무수한 사물들을 향한 존재의 거울이다. 시인이 바라보던 “너무 깊어 오히려 잘 보이던” 유리로 덮여있는 ‘저 숲’은 어쩌면 그의 시를 탄생하게 한 근원으로서의 거울인지도 모른다. 

강 기슭에는 한 노파가 오줌을 누고 있었다
자기 속을 흘러나오는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건너편을 보고 있다
손에는 여전히 쑥 캐던 칼을 들고
바닥에 쑥 같은 것이 조금 깔려 있는 바구니 옆에 앉아

맞은편에는 저녁해가 횃불처럼 타오른다
수면 위로 잉걸들이 툭툭 떨어져 내린다

‘새소리 몇이 아직 나뭇가지에 걸려있는데 벌써 산이 어두워지다니’

그녀는 천천히 고쟁이를 추키고 바구니를 든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불똥이 튀고 있는 강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수세기, 자기 속을 돌아 나온 강을 치맛자락처럼 끌고

노파는 간다

-「강」전문(『상자들』)

어쩌면 시의 여신 같기도 하고 이 땅의 수많은 여성의 상징 같기도 하고 시인 자신 같기도 한 ‘노파’와, 저녁 해가 지고 있는 강이 하나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는 이 시는 이경림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시이다. 이 시에서 강은 이글거리는 저녁 해를 비춰준다는 점에서 거울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강은 단순히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거울이 아니다. 그 거울은 노파가 쑥을 캐는 이쪽과 저녁 해가 이글거리는 저쪽 세상 사이에 가로 놓여있는 시간의 거울이다. 시의 여신으로 상징되는 노파는 시로 상징되는 쑥을 캐다가 오줌을 누고 있다. 그 오줌은 흘러가 강과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여성의 생산, 즉 생명성을 상징하는 오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의 노파는 인간의 생명과 시의 생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여성 시인을 암시해주는 존재로서 시인 자신으로도 볼 수 있다. 강 저쪽 맞은편에서 타오르는 저녁 해는 노파의 몸에서 흘러나온 강물 위에 잉걸들을 툭툭 떨구는 존재라는 점에서 남성이나 아버지, 또는 근대사와 같은 사랑과 고통과 폭력의 대상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강은 “수세기, 자기 속을 돌아 나온” 시간의 거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은 수세기 여성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로 이루어진 女性史이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어느 정도 페미니즘적인 특성을 지닌 시로 읽힌다. 
이경림 시인은 자신의 내부에 ‘거울이 든 상자’를 무수히 지니고 있는 시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행복하고 불행한 시인이다. 그런 이경림 시인의 삶과 시는 내 삶과 시의 거울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삶과 시의 접면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볼 때마다 자꾸 미끄러진다.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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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과 끝 
―김왕노 (1957∼ )

나에게도 내 몸의 첫인 손가락과 끝인 발가락이 있다.

나는 그러니 첫과 끝의 합작품이다.

나의 첫인 손을 내밀었다가 그 끝인 발로 이별하기도 했다.
이 수족으로 나는 한 여자에게 첫 남자와 끝 남자이기를 꿈꿨다.
나의 첫과 끝으로 사랑을 찾아가 내 사랑의 첫과 끝을 어루만졌다.

너도 너의 첫과 끝으로 나의 첫과 끝이 되곤 했다.

 

 

그첫과끝이있기에우리는부둥켜안고전율하고눈물이났다.

너는 너의 첫을 내게 주므로 나의 끝이기를 바랐다.

너의 첫 키스, 첫날밤, 첫 요리, 첫 꽃을 주어 나의 끝이기를 바랐다.

 

 

다가갈수록 자초지종인 듯 내게 주는 너의 첫
그 첫이 너의 끝으로 나의 첫으로 이어가는 징검다리인줄 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뜬금없이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후배한테 들은 논술시험 채점 항목이 생각났다. 이해력, 분석력, 논리력, 창의력, 표현력. ‘나에게도 내 몸의 첫인 손가락과 끝인 발가락이 있다’라, 몸의 첫이 발가락이고 끝이 손가락일 수도 있지 않나? 첫 행에서 논리적 결함을 발견한 듯 갸웃거려지던 고개가 ‘나의 첫인 손을 내밀었다가 그 끝인 발로 이별하기도 했다’에서 이내 끄덕여진 때문인지 모른다. 시를 이런 식으로 분석해서 읽으면 안 되는데, 나쁜 버릇이다. 핑계를 대자면, 감정이입은커녕 독해가 안 되는 뉴에이지 시집이 드물지 않아 생긴 버릇이다. 시를 이해하는 코드가 내게 없는 게 아닌가, 겸허하게 한 수 배워보려고 시집 해설을 읽다가 ‘시도 이상한데 해설은 더 이상하네!’ 삐친 적도 여러 차례다. 그러다 보니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게만 쓰여도 반가울 지경이다. 표현이 혼돈이든 수렁이든 그 세계의 창의를 즐길 독자도 있을 테다만.

세상만사에는 처음이 있다. 우정도 사랑도 처음엔 얼마나 온전한가. 그렇지만 처음이 있으면 끝도 있다. 그 때문에 어떤 관계도 아예 시작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화자는 그 첫과 끝이 있기에 우리는 부둥켜안고 전율하고 눈물이 난단다. 이것이 마지막인 듯 사랑하라! 화자의 상대는 ‘다가갈수록 자초지종인 듯 너의 첫’을 준단다. ‘너의 첫 키스, 첫날밤, 첫 요리, 첫 꽃’, 그 ‘첫’의 신선함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면 얼마만큼 긴장해야 하는 걸까. 씹을수록 감칠맛 나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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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사랑의 서정시에서 사랑을 풀다... 2017-02-18 0 2671
247 "아리랑꽃" 우리의 것과, 타민족 타지역의 것과, 가슴 넓히기... 2017-02-18 0 2449
246 "매돌"과 "한복"을 넘어서 우주를 보여주다... 2017-02-18 0 2698
245 서정시, 낯설게 하기와 보기 2017-02-18 0 4289
244 시인은 언어라는 무기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수 있다... 2017-02-18 0 2797
243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기괴하다" = "괴기하다" 2017-02-18 0 5093
242 [시문학소사전] - "르네상스"란?... 2017-02-18 0 2514
24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함께하다"의 띄여쓰기는?...(우리 중국 조선어문 문법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2017-02-18 0 2687
240 백명의 시민, 백년의 시인을 노래하다... 2017-02-17 0 2753
239 시조 한수는 마흔 다섯자안팎의 언어로 구성돼 있다... 2017-02-17 0 2866
238 시조문학의 지평선을 더 넓히자... 2017-02-16 0 3115
237 저기 폐지수레 끄는 할배할매들이 저희들의 친지입니다... 2017-02-15 0 2796
236 현대시 100년 "애송 동시" 한 달구지 2017-02-15 0 4014
235 "부끄럼"은 완숙된 시에서 우러나온 맛이다... 2017-02-15 0 2801
234 시는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 몸을 찢고 태여나는 결과물이다 2017-02-15 0 2492
233 아일랜드 시인 - 사뮈엘 베케트 2017-02-14 0 3890
232 국어 공부 다시 하자, 시인들을 위하여!... 2017-02-14 0 2654
231 미국 신문 편집인, 발행인 - 퓨리처 2017-02-14 0 4083
230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방방곳곳"이냐? "방방곡곡"이냐!... 2017-02-13 0 4269
229 시작에서 좋지 못한 버릇에 길들면 고치기가 힘들다... 2017-02-13 0 2898
228 방방곡곡으로 못가지만 시로써 아무 곳이나 다 갈수 있다... 2017-02-13 0 3136
227 당신의 도시는 시속에 있어요... 친구의 시인이여!... 2017-02-13 0 2808
226 추천합니다, 노벨문학상 관련된 책 50 2017-02-13 0 2716
225 저항시인 윤동주에게 "명예졸업장"을... 2017-02-13 0 2659
224 동요동시 대문을 열려면 "열려라 참깨야"라는 키를 가져야... 2017-02-11 0 3421
223 동시를 낳고싶을 때에는 동시산실에 가 지도를 받으라... 2017-02-11 0 2555
222 동시인이 되고싶을 때에는 그 누구인가의 도움을 받고싶다... 2017-02-11 0 2883
221 상(賞)에 대한 단상 2017-02-11 0 2583
220 젊은 조선족 문학도 여러분들에게... 2017-02-11 1 3359
219 시란 "자기자신이 만든 세계를 깨부시는" 힘든 작업이다... 2017-02-11 0 2657
218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 우리 애들도 발음 좀 정확히... 2017-02-10 0 2876
217 시와 삶과 리듬과 "8복" 등은 모두모두 반복의 련속이다... 2017-02-10 0 2548
216 혁명이 사라진 시대, 혁명을 말하는것이 어색한 시대... 2017-02-09 0 3167
215 세계 47개 언어로 엮어서 만든 "인터내셔널가" 2017-02-09 0 2920
214 시인 백석 한반도근대번역문학사에 한획을 긋다... 2017-02-09 1 3756
213 불후의 명곡 "카츄샤"는 세계만방에 울러 퍼지다... 2017-02-09 0 3787
212 "카츄샤"는 떠나갔어도 "카츄샤"의 노래는 오늘도 불린다... 2017-02-09 0 4231
211 시의 형태는 시가 담겨지는 그릇과 같다... 2017-02-09 0 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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