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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시인, 민족시인, "제2의 윤동주" - 심련수
2018년 05월 28일 22시 53분  조회:5431  추천:0  작성자: 죽림

심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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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련수

심련수(沈連洙, 1918년 5월 20일 ~ 1945년 8월 8일)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 교육자이며 조선인 반일(反日) 저항 시인의 한 사람이다. 니혼 대학졸업 후 교육활동에 종사하였고, 1945년 룡정으로 귀향하던 길에 불심검문을 받던 중 살해되었다. 본관은 삼척으로, 아호는 청송(靑松)이다. 강원도 강릉 출신이다.

생애[편집]

청송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조선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 삼척 심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심운택(沈雲澤)과 어머니 최정배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심대규(沈大奎)는 명주군의 유학자였고, 그의 숙부 심우택(沈友澤)은 홍범도 등과 함께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소작농으로 생계를 영위했고, 자투라기 땅은 척박하여 소작료를 내고 나면 생계를 영위하기에는 부족하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조모와 모친은 밤낮으로 길쌈을 하였다. 조부는 1925년 가족을 이끌고 로씨야 울라지보스토크로 이주했고, 숙부 심우택은 이때 홍범도 등과 함께 항일 의병에 가담하였다.

1931년 로씨야 원수 이오시프 스탈린은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집행하면서 조선인들을 먼 내지로 집단 이주하게 되면서 그의 가족은 9.18사건을 전후하여 다시 만주로 내려와 중국 흑룡강성 녕안현 신안진 공제촌(共濟村)으로 이주하였다.[1] 신안진에 2년 반 남짓 있을 때 심련수는 사회주의 이념을 접하고 당시 북만지구 조선인협회 회장이며 항일투사로 그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김수산(金洙山)의 문하생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받았다. 그 후 심씨 일가는 다시 길림성 룡정시(당시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경화촌 길안툰)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룡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7년에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 12월 6일에 졸업하였다. 동흥중학교 재학 중 그는 문학에서 그 재능을 보여 문예반장으로 활동하면서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여창의 밤”등 5편의 시-소설을 게재했다. 동흥중학 재학시 학교 교무주임인 장하일(張河一)의 부인이며 "인간문제"를 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가 강경애(姜敬愛)와 교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련수는“나는 문인이 부럽다. 문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써 나타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랴.”라고 일기문에 적으면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소설과 시, 그리고 잡지와 영화를 무척 즐기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졸업후 심련수의 집안은 무척 가난하여 생업이 곤란하였으나, 그의 가족은 심련수를 도일시켜 유학하게 했다. 부친 심운택은 굶어죽는한이 있더라도 공부는 끝까지 시키겠으니 걱정 말고 일본으로 가서 청운의 뜻을 펴라고 아들을 격려하였다. 동생들도 자기네가 뒤를 섬길테니 꼭 일본으로 유학을 가라고 형님의 등을 떠밀었다. 가족의 후원으로 심련수는 1941년에 일본 유학의 길에 올라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원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1943년 심련수는 서둘러 룡정으로 귀향했다. 원래는 3년제였던 예술대를 태평양 전쟁 시국과 동원령 때문에 학제를 2년 6개월로 줄여서 조기 졸업하게 되었다. 1943년 학도병 징집령이 떨어지자 그는 징집을 피해 은신하며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동 기간 중 그는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소학교 교사를 지냈다.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을 지내던 시기 학생들에게 반일 사상을 깨우쳐 준 것이 죄가 되어 두 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석방 후 1945년 2월 고향에 돌아왔다가 집안의 주선으로 백보배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돌아갔다. 7월 경 그는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패전 직전의 혼란기를 틈타 다섯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도보로 국경을 넘어 룡정으로 되돌아가다 8월 8일 왕청현(汪淸縣) 춘양역(春陽鎭) 근처에서 일본군의 불신 검문을 받던 중 피살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의 피살 소식을 접한 심련수의 아버지가 달구지를 몰고 현장에 가자 그는 트렁크 가방 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한다. 트렁크가방과 시체를 같이 싣고 와 트렁크 가방을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고 한다. 현재 전해지는 원고는 대부분 그때 그가 들고있던 트렁크 가방 안에서 발견된 것들이라고 한다.

사후[편집]

1946년 3월 시인의 시신이 수습되어 룡정 외곽의 토기동 선영에 매장되었다. 심련수가 요절한뒤 얼마 안 되어 유복자 심상룡(相龍)이 태어났다. 심상룡은 1966년 문화대혁명때 조선으로 이주, 현재 교포총국에서 중국 교포를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남동생 심학수(學洙)는 흑룡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김일성의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해져 후에 동서지간이 되었으며 큰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고 막내동생 해수(海洙)는 해방 후 연변에서 문인으로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을 지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무렵 그의 가족은 일본특무에 부역한 가정으로 치부되어 큰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이 무렵 동생 심호수는 반란파들에게 물매를 당하면서도 비닐에 꽁꽁싸서 항아리속에 넣은후 땅속 깊이 파묻은 형의 귀중한 옥고를 내놓지 않았다. 그가 영면한 후 55년이 지난 뒤, 2000년 그의 동생 심호수가 항아리 속에 간직해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던 심련수의 시와 작품 편지 등의 유작을 공개했다.

평가[편집]

이렇게 어렵사리 보존해온 그의 작품이 비로소 연변 사회과학원의 “문학과 예술” 잡지에 실리자 학계는 흥분했다. 일제 강점기 “엄청난 력사적 격변과 부담감이 주는 충격을 미학적인 위안으로 치유해”낸 그의 글들은 가히 “저항문학”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연변과 한국의 학계는 그를 동시대를 호흡한 윤동주, 송몽규 등과 함께 저항시인의 한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연변에서는 “심련수 문학작품연구소”가 세워져 그의 작품 전반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작품[편집]

시적으로는 시인 이은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심련수의 유작은 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평론 등 312편에 이른다. 이밖에 그가 창작 공부를 위해 베껴 쓴 창가노트 1권, 미술 습작을 한 노트가 더 있다. 편지 200여통과 일기, 기행문도 남아 일제 당시 생활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작품성[편집]

“룡정이 낳은 또 한명의 시인 심련수, 그의 이름과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주옥같은 시편들은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을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중앙대학교 교수 이명재는 그의 작품들은 “미학적 특성과 문학사적 의미에서 분석할때 실로 식민지시대 항일문학의 전형”으로서 “그 시대 민족이 품고 있던 본원적인 기대와 갈망, 고향에 대한 자연회귀의식 등 다양한 정서가 표출”이라 평가하였다. 관동대학교 교수 엄창섭은 “일제 강점기 그만의 빛나는 서정은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하였다.

세계관[편집]

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에서 그는 조선총독부 치하의 좌절과 어둠 속에서도 봄(해방)을 기다리는 의지를 은유했으며 “고집”에서는 친일파들의 아부에 풍자를 가하기도 했다.

가족 관계[편집]


  • 할아버지 : 심대규(沈大奎)

    • 숙부 : 심우택(沈友澤)
  • 아버지 : 심운택(沈雲澤)
  • 어머니 : 최정배

    • 남동생 : 심학수(沈學洙)
    • 제수 : 항일투사 박관순[2]의 처제,
    • 남동생 : 심해수(沈海洙, 문인·작가, 연변작가협회 회원)
  • 부인 : 백보배

    • 아들 : 심상룡(沈相龍, 1945년 - , 북한 교포총국 근무)

 

각주[편집]

  1. 이동 당시 신안진에는 2만여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농업전문학교까지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집단부락을 시행하면서 공제촌을 6부락으로 개칭하였다.
  2. 이동 김일성의 이종사촌이며 강돈욱의 외손

관련 서적[편집]


  • 엄창섭, 《심련수의 시문학 탐색》 (제이콤씨, 2009)[쪽 번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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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암흑기 혜성처럼 살다간 시인
 
2의 윤동주”- 심련수 
 

 
 
뒤미처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레지스탕스 시인, 민족시인, 제2의 윤동주… 하지만 사후 55년만에야 유족에 의해 다량의 유고(遺稿)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심련수는 알려지기 시작했다.
 심련수 시인이 유가족과 연변의 지성인들에 의해 발굴된지 10여년 그 조명작업은 그냥 이어지고 있다. 8월 7일 한국 강릉생가터에 심련수 흉상이 경립되고 8일 “2009 심련수 문학제”가 강릉에서 열리고 12일, 제9차 심련수 학술세미나가 중국 연길시에서 열리는 등 다채로운 학술, 문화행사가 이어지고있다.
 필자는 몇해전 당시 룡정시 길흥촌 8대에 거취하고있던 심련수시인의 동생 심호수씨를 여러번 만나 가족의 증언으로 심련수시인에 대한 취재를 한적 있다. 오늘 유관자료와 가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심련수의 생애를 정리하여 다시 게재함으로써 새롭게 불붙고있는 심련수 조명작업에 보탬이 고자 한다.
 
편집자  
 
 
청송(靑松)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조선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 삼척 심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심운택(沈雲澤)과 어머니 최정배씨 사이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여났다.
 심련수의 할아버지 심대규(沈大奎)는 강릉일대에서 인끔높은 유학자였다. 삼촌 심우택은 홍범도 등과 어울려 반일활동에 나섰던 인물이였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심씨 가족은 어려운 소작인의 삶을 살고있었다. 자투라기 땅은 척박하여 소작료를 물고 나면 일곱 식구가 먹을 식량이 부족한 형편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조모와 모친은 밤낮으로 길쌈을 하였다.
이 같은 현실 상황에서 조부는1925년 가족을 이끌고 로씨야 울라지보스토크로 이했다. 당시 동행한 심련수 시인의 삼촌 沈友澤은 그 곳에서 반일 단체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1년 로씨야 정부는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집행하면서 조선인들을 먼 내지로 집단 이주시켰다. 이 강경책에 의해 심씨 일가는 9,18사건을 전후하여  중국 흑룡강성 녕안현 신안진 공제촌(共濟村)으로 이주하였다.당시 신안진에는 2만여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농업전문학교까지 있었다. 그후 일제는 집단부락을 시행하면서 공제촌을 6부락으로 개칭하였다. 심련수는 2년 반 남짓 신안진에 체류하는 기간 당시 북만지구 조선인협회 회장이며 항일투사로 그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김수산(金洙山)의 문하생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일면을 교육받았다.
 
그후 심씨 일가는 다시 길림성 룡정시(당시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경화촌 길안툰)으로 옮겨 정착했다.
 
 
 
동흥중학 시절의 심련수 (뒤줄 첫번째)
 
 
룡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소학교를 다닌 심련수는 1937년에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12월 6일에 졸업하였다. 이 시기 문학에서 그 재능을 보여 문예반장으로 활동하면서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여창의 밤”등 5편의 시-소설을 게재했다. 동흥중학 재학시 학교 교무주임인 장하일(張河一)의 부인이며 "인간문제"를 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가 강경애(姜敬愛)와 교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련수는“나는 문인이 부럽다. 문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써 나타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랴.”라고 일기문에 적으면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소설과 시, 그리고 잡지와 영화를 무척 즐기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고 열정을 다져 갔다.
 
졸업후 심련수의 집안은 무척 가난하였으나 그의 가족은 심련수를 도일시켜 류학하게 했다. 부친 심운택은 굶어죽는한이 있더라도 공부는 끝까지 시키겠으니 걱정 말고 일본으로 가서 청운의 뜻을 펴라고 아들을 격려하였다. 동생들도 자기네가 뒤를 섬길테니 꼭 일본으로 류학을 가라고 형님의 등을 떠밀었다.
 
가족의 사랑을 안고 심련수는 1941년에 일본 류학의 길에 올라 일본대학 예술학원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게 되였다.
 
1943년 심련수는 서둘러 룡정으로 귀향했다. 원래는 3년제였던 예술대를 전쟁시국때문에 2년 6개월만에 졸업한것이였다.
 
 
 

일본류학시절 하숙생들과 함께 한 심련수 (앞줄)
 
그때 일본학도병징병이 터지자 몸을 피해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을 지내던 시기 학생들에게 반일사상을 깨우쳐준것이 죄가 되여 두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심련수와 부인 박보배 (약혼사진)
 
1945년2월, 고향에 돌아와 백보배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돌아갔다.
 
몇달후 일본 패망직전의 혼란기를 틈타 다섯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도보로 룡정으로 돌아가다8월 8일 왕청현汪淸縣) 춘양역(春陽鎭)역에서 일본군의 불신 검문으로 피살되여 비극적 생을 마감했다. 그때 나이가 겨우 스물일곱이였다.
 
비보를 접한 심련수의 아버지가 달구지를 몰고 현장에 이르니 아들은 트렁크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그 트렁크를 시체와 같이 싣고 와 트렁크를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고한다. 현재 전해지는 원고는 대부분 그때 그가 들고있던 트렁크에서 발견된것들이라고 한다.
 
1946년 3월, 시인의 시신이 수습되여 룡정 선영에 매장되였다.
 
 
한복을 입은 심련수
 
그가 시인 윤동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 걸출한 민족작가인 사실이 알려지기 까지 력사는 반세기를 넘게 기다려야 했다.
고인이 영면한지 55년이 지난 2000년에야 그의 동생 심호수씨가 항아리 속에 간직해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던 고인의 유작을 공개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심씨 가족은 일본특무 가정으로 치부되여 큰 곤혹을 치르기도했지만 심호수는 반란파들에게 물매를 당하면서도 비닐에 꽁꽁싸서 항아리속에 넣은후 땅속 깊이 파묻은 형님의 귀중한 옥고를 내놓지 않았다.
 
 
 
동생 심호수가 필사적으로 감추었다가 반세기만에 공개한
심련수의 시고와 일기
 
이렇게 어렵사리 보존해온 그의 작품이 비로소 연변 사회과학원의 “문학과 예술” 잡지에 실리자 학계는 흥분했다. 일제 강점기 “엄청난 력사적 격변과 부담감이 주는 충격을 미학적인 위안으로 치유해”낸 그의 글들은 가히 “저항문학”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사건이였던것이다.
오늘날 연변과 한국의 학계는 그를 동시대를 호흡한 윤동주와 같은 반렬에 올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연변에서는 “심련수 문학작품연구소”가 세워져 그의 작품 전반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불붙기 시작했다.
 
심련수의 유작은 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평론 등 312편에 이른다. 이밖에 그가 창작 공부를 위해 베껴 쓴 창가노트 1권, 미술 습작을 한 노트가 더 있다.
편지 200여통과 일기, 기행문도 남아 일제 당시 생활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그의 시편들에는 일제치하의 설음, 민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력력하게 드러나고있다
남다르다고 할만큼 강렬한 민족정신을 가진 심련수였기에 당시 민족적인 경향이 드러나는 조선말 작품을 발행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그의 저항성은 시와 일기 곳곳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에서 좌절과 어둠 속에서도 봄(해방)을 기다리는 의지를 은유했으며 “고집”에서는 친일파들의 아부에 메스를 가하기도 했다.
 
“룡정이 낳은 또 한명의 시인 심련수, 그의 이름과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주옥같은 시편들은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을것”(연변 학계)인바 그의 작품들은 “미학적 특성과 문학사적 의미에서 분석할때 실로 식민지시대 항일문학의 전형”한국 (중앙대 리명재교수)으로서 “그 시대 민족이 품고 있던 본원적인 기대와 갈망, 고향에 대한 자연회귀의식 등 다양한 정서가 표출”되고있으며, “일제 강점기 그만의 빛나는 서정은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관동대 엄창섭교수)는평을 받고있다.
 
우리 말 글사용을 금지당하고 친일문학가가 득세하는 등 일제암흑기 우리민족의 문학상황은 그동안 “문학의 공백기”로 남아있기에 한국 학계에서는 심련수의 뒤늦은 등장은 1941~1945년 한국문학사의 암흑기를 규명하는 키가 될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고있다. 또 당시 룡정을 중심으로 지금의 연변지역에서 조선족문학연구의 밑그림을 그리는 기초 작업으로도 될것이며 중국조선족의 위용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대적 소임을 수행하는 계기가 될것이다.
 
조선족문학 내지 한국문학사에 있어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확인되기에 충분한 물적 사료가 확보되여뒤늦게 실체를 드러낸 심련수, 27년의 짧은 생애를 초 쟏르적으로 활동하며 민족혼을 불사른 심련수는 민족문단의 하나의 큰 별로 빛날것이다.
 

2009년 8월 7일 한국 강릉 난곡동 율곡병원 뒤 생가터에
심련수 시인의 흉상이 경립되였다.
 
 
부록:
 
심련수 시인의 가족관계를 보면-
심련수가 요절한뒤 얼마안되여 유복자 심상룡(相龍)이 태여났다. 심상룡은1966년 문화대혁명때 조선으로 이주, 현재 교포총국에서 중국 교포를 담당하고 있는것으로 전한다. 
 
시인의 첫째 남동생 심학수(學洙)는 흑룡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김일성의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해져 후에 동서지간이 되였으며 큰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고 막내동생 해수(海洙)는 해방후 연변에서 문인으로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을 지내기도 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주간 "종합신문 2009/8/17
 
 
 
 
[출처] “제2의 윤동주”- 심련수 |작성자 김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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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철학연구] 발굴자료 민족시인 심련수 시해설

* 이 내용은 중국조선족문화예술인후원회 도움을 받아 중국연변 조선족자치구 조선문학가협회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된 조선족문학전집 제1권 심련수시인 편을 참조한 것입니다. 일제 암흑기 윤동주시인과 동시대인이면서 윤동주시인보다 먼저 시인이 된 심련수시인의 비극적 짧은 일생을 우리 후손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실린 내용들은 민족시인 심련수선생 아들이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으며 지금은 화교담당관이기에 북한 로동신문을 통해 발표된바 있음을 밝힙니다. 
................................................................... 

민족시인 심연수의 대표시 해설 
- 일제 암흑기와 심연수 문학의 개요 - 
이 재 호(한국언어철학연구회장) 


l. 심연수 시인을 중심으로 

1936년 일본은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앞세워 <내선융화, 선만일여, 일시동인>이라는 통치방침을 표방한다. 보다 철저한 우리 민족말살과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는데 면 단위마다 신사 설치를 하게 하고 l937년부터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강요할 뿐 아니라 이듬해에는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의 강령에 따라 한국 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조선과 만주의 교육령을 개정, 학교의 명칭, 교육 내용을 일본 학교와 동일하게 했다. 
일제는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l939년, 창씨개명 제도를 실시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하면서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용 전쟁터와 탄광 등지로 끌고 갔다. 

l940년부터 일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말 신문을 폐간시키고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을 강제 해산시켜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했다. 
심연수 시인은 이러한 시기에 우리말 우리의 정신인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동흥중학을 2l살의 나이에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발굴된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의 작품들은 l939년부터 l943년까지 5년 동안의 미발표작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일제는 l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만들었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했으며 l94l년 3월, 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 언제라도 감금이 가능한 체체를 갖추였으며, l942년 학도동원체제, 국민근무체체 등 징용의 강제력을 비상수단화했다. l943년과 l944년에는 징병제와 학병제를 실시, 대학생들도 강제 소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심연수 선생이 l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용정에 돌아오면서부터 일제의 학도병 강제소집을 피해 신안진으로 가 초등학교에서의 교원생활을 통해 반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고취한 사실과 이로 인해 두 번이나 유치장에 갇힌 것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사실을 먼저 알고 해방의 기쁨을 맞기 위해 신안진에서 용정까지 걸어서 오던 중 l945년 8월8일 일본군에 의해 마침내 확인 사살된 근거가 일본의 학병제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고 당시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일본정부에 요청했으나 묵살된 바 있음을 밝힌다. 

따라서 필자는 l944년 일제가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 하여금 전쟁 지속을 위해 비협조적인 한국 지식인들에 대한 대규모의 가혹과 탄압과 검거에 이어 1945년부터 징집을 피해 다니는 한국인들을 발견 즉시 확인사살을 명령한 바 있음을 문제로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 제기는 l944년 8월 여자정신대 근로령과 l945년 애국반, 경방단 등의 조직적인 한국인 통제가 주 원인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는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계속된 만행임을 심연수 시인의 발굴 과정에서 밝혀냄으로 민족 시인의 자리매김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다. 
한편 일제의 만행에 의한 심련수선생의 죽음에 대해서 일부 도적들에 의한 것일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견을 하고 있지만 이는 심련수선생을 모독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치하는 사실이며 일본 경찰은 이들 도적의 무리들 까지도 일제의 압잡이로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심연수 시문학의 특징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어휘력은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 시적 주제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자적 언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시기에 흔히 나타나기 쉬운 무슨 애련이나 자연을 감상하는 감각적 시풍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서 문학혼을 불태우고 삶의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 또한 강인하고 비타협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정의와 신념, 그리고 남성적 삶의 지조를 견지하는 서정적 자아의 지사의식과 주의시적(主意詩的) 기법이 모던하고 비장하다. 

심연수 시인의 시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현상은 약소 민족에 의한 현실적 고민을 문학을 통해 초월하는 진실과 자유와 생명력의 서정적 자아의지 극복이라 할 것이다. 이는 적극적 정서의 측면이 강렬한 만큼 선생의 시가 르포르타주한 기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리적 리얼리즘을 시의 한 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문학을 통한 투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적 언어의 리얼한 비유와 은유의 씀씀이가 모던하게 내면의 주제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한계의식에 의한 초월조건을 차용하는 것인데 아러한 정신적인 힘이나 시적 경향은 내적 관조보다는 능동적인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는 데 중심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거창성과 모호성을 유발하기도 한다. 

심연수 시인의 시적 자아가 비교적 직설적이며 작품이 생경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그 예술성에 있어서는 감칠맛이 덜 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시어의 선택과 배열, 배합을 보면 단순미와 함께 절대생활용 어미의 변용을 보편적인 일상용어로 다스려나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내적 의지를 본질로 하는 순수함이나 긴요한 정직성과 그 독창적인 시작법은 시적 공감에 따른 윤리적 교훈뿐 아니라 고귀한 의지의 언어 경험을 감득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통한 근대정신이라 할 휴머니즘의 시적 주제의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연수 시인의 문학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나 그 의식구조가 인간 중심적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립해야 한다는 민족의 중심성을 실현코자 하는 시적 휴머니티가 돋보인다. 
시대적 피지배 현상에 따른 합리적 휴머니스트로 민족 구성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음을 선생의 문학은 웅변한다. 그러므로 20세기 중국 조선족 문학사료전집에 수록된 선생의 시와 시조가 보고 읽는 이에 따라 다소 편차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밝혀두고 싶다, 
그 이유를 큰 관점에서 볼 때 심연수 문학의 초기시와 후기시의 영향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또한 일본 유학 시기와 유학 후에 창작된 시편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문학 공부를 하던 것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서 공부한 문학의 정보 역량에 따른 차이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문학에의 변화는 일본에서 친구 이기형(생존) 선생과 함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고 나서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심연수 시인의 지사적 열정이 때로는 강인한 신념에 의한 시적 체험으로 다소 엇갈리게 우리와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을 위한 문학적 정의가 아름다운 것은 심연수 시인이 사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발굴되어 우리들에게 그 책임을 되묻고 있다는 것이다. 

3. 심연수 시인의 시적 언어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은 시의 종결어미에 있어 남다른 언어 씀씀이를 보이고 있다. 
들으라, 부르라, 보라 할꼬. 배였구나, 설레인다, 가누나, 가버린다, 주려무나, 스며든다, 찾더라오, 어찌한담, 왠일인고, 나이다, 주었소, 으리니, 오리다, 얻노라, 쉬다니, 소이다, 오지요, 자란다, 큰다, 굶어라, 네것이다, 로다, 납소, 소서, 는고, 세라, 으리라, 더이다, 졌구나, 일이냐, 맞노라, 스럽다, 것이다, 봐라, 하여라, 들이다, 었다, 알리라, 다녔다, 하구나, 였구나, 싶구나, 좋겠소, 하나니, 이냐, 하라, 한다, 간다, 썼다, 란다 

이러한 언어의 씀씀이는 주의시적 의지의 시풍을 형성하는 데 있어 사용되는 시적 용어임을 알 수가 있다. 선구자적 언어의 배열을 몸에 익힌 듯한 이 종결어미의 사용은 심연수 시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왜 이러한 주의시적 시관을 통해 역사적 격변과 충격을 시적 위안으로 삼았는지 그 심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관조일 것이다. 

시인은 그의 시적 대상으로 민족의 생활양식을 가장 먼저 꼽고 있다. 우리 민족이 늘 꿈꾸는 지평선이며, 대지며, 나무며, 들이며, 바다와 강, 그리고 아침과 낮과 밤이며, 새벽을 주제로 노래했다. ‘나와 너’와 ‘우리들’과 ‘나그네’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일깨우고자 하는 한편 ‘소년’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민족해방 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심연수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특징은 시의 직설적 표현 기법을 쓰고 있음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시풍이 주의시적 경향과 맞물리면서 나타나는 시어의 선택이란 목적시의 유형을 벗어나기 어려운데도 블구하고 서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그 문학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선생의 시 <불탄 자리>, <빨래>, <만주>, <등불·l>, <들꽃>, <한야기>, <잃어버리는 글>, <우주의 노래>, <거울 없는 화장실>, <소지>, <육화>, <귀한 그들>, <인류의 노래>, <들불>, <벙어리>, <폭상>, <기적>, <새>, <파향>, <추락한 명상>, <돌아가신 할아버지>, <세기의 노래>, <소녀>, <폭풍>, <밭머리에 선 남자>, <지구의 노래>, <님의 넋>, <환마>, <너는 나와 같더라>, <밤>, <벽>, <편지>, <밤이 새도록>, <지설>, <가난한 거리>, <심문>, <좁은 문>, <전차>, <나그네·1>, <고독·1>, <샘물>, <봄의 뜻>, <고독·2>, <맨발·l>, <새벽>, <기다림>, <밤은 깊었으련만>, <대지의 겨울>, <소년아 봄은 오려니>, <고집>, <턴넬> 등을 내용으로 한 시적 언어 구성은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데 있어 바로미터가 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l943년 당시 일제의 탄압과 우리 언어말살정책에 의한 검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심연수 선생의 시 대부분이 직설적이며 주의시적(主意詩的)임으로 목숨을 건 시작 행위를 서슴치 않았던 이 위대한 민족시인을 일본이 몰랐다는 것은 이해 밖의 일이었다. 일제의 확인된 학살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민족시인들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필자의 심연수 시인에 대한 애착은 시인이 자신의 민족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문학이라는 정신적인 무장으로 일본에 저항한 그 숭고함 때문이다. 

4. 대표시의 감상과 이해 

소년아 봄은 오려니 

봄은 가까이에 왔다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으리니 
너의 조상은 농부였다 
너의 아버지도 농부였다 
전지는 남의 것이 되었으나 
씨앗은 너의 집에 있을 게다 
가산은 팔렸으나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갔지만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 보아라 
너의 집이 가난해도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 
서투른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너는 농부의 아들 
대장의 아들은 아니래도… 
겨울은 가고야 만다 
계절은 순차를 명심하자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시가 별로 없었던 시기에 <소년아 봄은 오려니>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윤동주시인과 동시대인이면서도 윤동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학을 보여준 것으로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불태운 청년 심연수 시인의 짧고 위대한 영혼이 문학을 통해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저항 시인이었음도 그의 시 도처에서 밝혀지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에 아부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을 선택받아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을 일제로부터 저항의 탈출구로 삼았던 심연수 선생은 오히려 일본을 알기 위해 유학길에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는 한편, 선생의 수많은 유작 가운데 <소년아 봄은 오려니>와 <고집>, <턴넬>, <전차> 등 이미 앞에서 열거한 시작들이 가장 극명하게 선생의 저항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듯이 소년과 봄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시구 풀이는 민족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리얼하게 암묵적 은유기법을 이용하여 명시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봄은 가까이에 왔다(=일제로부터 민족 해방)”는 전제를 통해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는다고 예견하는 자연의 이치를 시적 바탕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그 이미지의 대상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너의 조상은 농부”였고, “너의 아버지도 농부”라 말하는 시적 언어 속성에서 보듯이, 일제에 강점당한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비유할 뿐 아니라 농부가 뜻하는 경작의 형상화를 교훈조로 통찰케 한다. 
제5행에 이르러 시인은 봄과 소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은유하면서 직관을 차용한 극복의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농사를 지을 “전지(땅)는 남의 것(=일제에 빼앗김)이 되었으나 / 씨앗(=민족해방을 위한 국권 회복)은 / 너의 집에 있을” 것이라며 예언자적 저항성을 표현하고 있음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이 시에서 백미를 장식하는 6행에서 16행까지의 시적 긴장감은 투사적 언어 씀씀이가 그 위대성을 발휘하고 있다. 
“가산은 팔렸으나 /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에서 가산과 나무의 역할 분담을 이중화시킨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목숨을 내건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 갔”다는 시적 진술은 선생 자신의 고백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끌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민족의 구성원은 빼앗긴 땅에서 그대로 살고 있구나) /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보아라(=여기에서 화덕과 숯의 역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뿐 아니라 3·l 독립 징신을 시적 내용의 화두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너의 집이 가난해도 /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이 지사적 통찰력은 민족 해방의 깨달음을 염두에 둔 선생 특유의 시적 기법으로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서툰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선생의 시적 정서와 의지적 언어관은 보편적 민족성을 획득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딘 연장이란 우리 문화적 역사성과 민족성을 은유하고 있다.모국어에 담겨 있는 문학의 전통성을 선생께서 후세에까지 교감케 한 그 민족적 체취는 경건한 것이기도 하다) / 너는 농부의 아들 / … / 겨울은 가고야 만다(= 일제 시대는 겨울과 같아서 패망할 것이다) / 계절의 순차를 명심하자 /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자연의 이치를 이 시 속에 도입한 선생의 내적 고백성은 역동성을 갖기에 더욱 선명하다. 선생의 내적 의지의 발현 또한 민족의 자아를 찾는 데 목숨 건 비장함을 동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비타협적이며 시적 생명의 의지를 민족애 하나로 견지하다 일본 헌병의 조준된 흉탄에 젊은 청춘을 버린 민족시인의 숭고한 시정신을 우리는 다시 찾아 기려야 할 일이다.(설혹 일제의 조준 확인 사살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일제는 우리 지식인 즉 심련수시인과 같은 민족의 지도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민족시인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전망한다. 심연수 시인이 이육사 선생과 이상화 시인과 같은 분들에 비해 한치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이 작품 이외에도 선생께서 남기신 수많은 유작들이 증명하고 있다. 

고집 

고집을 써라 끝까지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고 
타고난 엇장을 굽히지 말라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우기고 뻗치다 꺾어지건 통쾌해도 
뉘게다 굽석거리는 꼴은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선쟁의 의도는 지조와 절개와 같은 것이다. 
일제의 수탈이 극심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시 <고집>이 뜻하는 민족정신의 뚜렷한 목적이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하고 있다. 
선생은 이 시를 통해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 것을 강변하면서, 우리의 “타고난 엇장(비분, 기개, 고집불통, 비타협)”과 같은 절개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절망을 희망이라 하고) /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일제의 거짓말을 비유하고 있음)”에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선생은 <고집>이라는 이 시에서 그 저항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즉 사랑이 썩어 냄새난다고 뻗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뻗치다의 말뜻이 갖는 시적 의미는 위에서 말한 지조와 절개의 정신과 맥을 잇고 있다. 그러면서 차라리 꺾어질지라도 타협하거나 일제에 순종하지 말 것을 고집이라는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뉘게다(누구에게) 굽석(굽신)거리는 꼴은 /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하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죽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턴넬 

길다란 턴넬 
감캄한 굴 속 
자연이 가진 신비를 
뚫어놓은 미약한 힘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찾아도 
밟히우는 송장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아, 빛이 없어 죽었나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레루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또 어찌하리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 
우를 우러러도 
아래를 굽어보아도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시의 본성, 곧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떤 예술인가? 시는 어떤 언어인가? 시는 어떤 역사와 사회적 문화 현상인가? 시는 어떤 심혼의 소산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선생으로 하여금 일제의 흉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된 과제였을 터이다. 
시가 당시의 현실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던 선생으로서는 민족문학을 위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1943년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오던 해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진 시 <턴넬>은 선생의 문학적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이 시를 읽지 않으면 심연수 선생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겠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터넬과 선생의 시 터넬이 뜻하는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길다란 턴넬(=일제의 오랜 억압) / 캄캄한 굴 속(=일제 식민 치하에서의 생활) / 자연이 가진 신비를 / 뚫어 놓은 미약한 힘(=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 / 눈을 감고 걸어도 / 눈을 뜨고 걸어도 / 밟히우는 송장(=일제 식민 치하에서 죽어간 백성들의 시체) /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 아, 빛이 없어 죽었나 / 빛이 싫어 죽었나(=자포자기한 상태의 암울한 현실을 비유) /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 레루(레일)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 또 어찌하리” 

일제는 그들의 야욕을 위해 철도를 건설했으나 철로에 놓인 침목의 수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것은 이 시는 확실한 증언처럼 증명하고 있음이다.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 울부짖는 소리” 
선생께서 턴넬을 바라볼 때마다 일제가 학살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목숨들과 그 영혼의 처절한 울음 소리를 귀에 쟁쟁 듣지 않았으랴. 

“우를 우러러도 / 아래를 굽어보아도 /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이 시의 자아의지가 턴넬이라는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턴넬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적극적인 의지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데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문학은세계를 지성적으로 갈파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의 뜻 

읽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보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더이다 

─ 원문(당시 사용되는 언어) 

읽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보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고 있습니다 

─ 수정(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봄을 뜻으로 풀이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전체 6행의 시적 언어 의미가 ‘알았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을 읽고 알았다는 것은 님이라고 하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님은 봄이 뜻하는 개화와 해방의 님인 것이다. 보다 더 의미심장한 싯구는 “글자마다 살”아 있다는 것과 그 “구절마다 마음이 뛰고 있”더라고 하는 내적 의미의 완결성이다. 

봄의 뜻이 담고 있는 독창성은 개성이다. 이러한 개성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의 주제의식이 참신해야 한다. 따라서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이원성은 봄이라고 하는 의미를 뜻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서 이 작품의 독창성과 함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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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심련수의 대표시 해설 
- 일제 암흑기와 심련수 문학의 개요 - 이 재 호(시인 . 한국언어철학연구회장)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 제1권으로 심련수문학전집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일제 시대를 조명할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라 할수 있을 것이다. 
비록 뒤늦긴 했지만 국내에서도 주요 일간지와 방송 등에 소개된 암흑기의 시인 심련수는 
한국문학사를 다시 정리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가혹하기만 했던 일제의 폭압은 친일문학을 양산케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 친일 문학은 문학이라 할수 없을만큼 질량적으로 함량미달이었다.


우리 국내와는 다르게 비교적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던 당시 간도지역에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순수한 한글 문학 세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리 언어연구에 있어 새로운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심련수는 재학중 문예반장이었다는 것이고 그 당시 중학생 신분으로 만선일보에 이러한 작품을 발표한다.

 

시 : 대지의 봄


봄을 잊은듯하던 이 땅에도/소생의 봄이 찾아오고/ 
녹음을 버린듯이 얼었던 강에도/얼음장 내리는 봄이 왔대요. 
눈 위의 마른풀 뜯던/불쌍한 양의 무리/새 풀 먹을 즐거운 날/ 
멀지 않았네/넓은 황무지에단/신기루 궁을 짓고/ 
새로 오신 봄님 맞이/잔치놀이 한다옵네 
옛 봄이 가신 곳/내 일 바빠 못 왔길레/ 
올해 오신 이 봄님은/ 누구더러 보라 할꼬 
 
시 : 여창의 밤


길손이 잠못 이루는/이 한밤/ 
호창의 희미한 등불/더욱이나 서글퍼요 
갈자리 튼 눈에는/뭇손의 여진이 절어 있고/ 
칼자리 난 목침에는/여수가 몇천번 베어졌댔나 
지난 손 홧김에/ 애꿎이 태운 담배 꽁다리/ 
구석에 타고 있어/마음 더욱 설레인다 
어두운 이 밤길에 달리는 여차/왈그럭 덜그럭/ 
호마의 발굽과 무거운 바퀴/이 마음 밟고 넘어 가누나

 

여기 이 시를 발표한 만선일보란 우리 민족의 서러운 역사가 스며있던 치욕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신문은 원래 용정에서 나왔고 간도일보와 신경에서 나왔던 만몽일보를 합쳐 중국어와 한국어로 낸 신문이었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1907년 만주철도 주식회사를 설립, 1931년 만주사변을 유발 시키고 괴뢰 만주국을 세워 
꼭두각시 부의를 황제로 삼아 길림성 장춘을 수도로 정해 신경이라 개칭한 것이다. 
이때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해 각 지역에 살고 있는 민족어로 된 신문을 일제 기관지로 내게 되는데 이것이 한글판 만선일보였다. 
모든 실권을 일본놈이 잡았으며 신문사 고문에는 최남선, 편집국장은 소설가 염상섭, 
사회 학예부장에 시인 박팔양 등이 몸담기도 했다.


후일 해방이 되고 작가 안수길,홍양명,이갑기,손소희 등 여러 문인들이 인연을 맺은 신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국내보다 이곳 문학이 더 왕성하고 자유로웠다 할수도 있다. 
이것은 심련수문학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확인되지 못하였을 것이다.(자료:연세대학 도서관) 
심련수의 조부 심대규는 강릉 일대 호남으로 술을 즐긴 의리파였다고 한다. 
삼촌 심우택은 독립운동가로 이동휘 등과 함께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련수 아버지는 심운택이며 심련수시인의 남동생 심학수는 당시 흑롱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북한 김일성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하면서 동서지간이 되었으며 큰 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으며 심련수시인 막내 동생 심해수는 해방 후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문학활동을 한 것도 밝혀졌다. 
심련수가 동흥중학 재학시 여류작가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 동흥중학 교무주임이었다는 것도, 
또 심련수시인과 가까웠다는 것도 확인이 되었다. 심련수의 일기는 1년분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소중한 자료는 수학여행 일정과 당시 풍물을 담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기행시 뿐 아니라 
용정에서 도문-원산-금강산-서울-개성-평양-신의주-봉천-대련-신경-하얼빈-목단강 등을 돌아본 
수학여행 일정 등 조국순례 대행진을 할 수 있는 민족애를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 가운데 윤동주는 무엇을 했느냐이다. 
윤동주 동생 윤광주와 심련수 동생 심해수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자료에 따르면 윤동주 동생은 심해수에게 윤동주가 보고 읽었던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이라 
여겨지는 자료들을 전해 주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자료들 속에는 윤동주가 스스로 스크랩해서 만든 일제 당시 우리 국내주요 일간지에 실린 
각종 문학기사와 저명한 문인들의 글이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윤동주 스스로가 부농의 아들이었기에 문학을 하는 가난한 심련수를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멀리했다는 것이 자료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이다.


윤동주는 당시 용정 광명학원을 졸업하고 1938년 연희전문(현 연세대학)을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면서 1942년 일본으로 가서 릿교대와 동지사대를 다녔다. 
일본에서도 윤동주와 심련수는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들은 단 한번도 만났다고 하는 기록이 없는지 
필자로서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던 것이다.

 

l. 심련수 시인을 중심으로

 

1936년 일본은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앞세워 <내선융화, 선만일여, 일시동인>이라는 통치방침을 표방한다.

보다 철저한 우리 민족말살과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는데 면 단위마다 신사 설치를 하게 하고 l937년부터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강요할 뿐 아니라 이듬해에는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의 강령에 따라 
한국 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조선과 만주의 교육령을 개정, 학교의 명칭, 교육 내용을 일본 학교와 동일하게 했다.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l939년, 창씨개명 제도를 실시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하면서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용 전쟁터와 탄광 등지로 끌고 갔다. 
l940년부터 일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말 신문을 폐간시키고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을 강제 해산시켜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했다.


심련수 시인은 이러한 시기에 우리말 우리의 정신인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동흥중학을 2l살의 나이에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발굴된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의 작품들은 l939년부터 l943년까지 5년 동안의 미발표작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일제는 l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만들었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했으며 l94l년 3월, 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 
언제라도 감금이 가능한 체체를 갖추였으며, l942년 학도동원체제, 국민근무체체 등 징용의 강제력을 비상수단화했다. 
l943년과 l944년에는 징병제와 학병제를 실시, 대학생들도 강제 소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심련수 선생이 l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용정에 돌아오면서부터 일제의 학도병 강제소집을 피해 신안진으로 가 
초등학교에서의 교원생활을 통해 반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고취한 사실과 이로 인해 두 번이나 유치장에 갇힌 것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사실을 알고 신안지에서 용정까지 걸어서 오던 중 l945년 8월8일 일본군에 의해 마침내 확인 사살된 근거가 학병제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고 당시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일본정부에 요청했으나 묵살된 바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따라서 필자는 l944년 일제가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 하여금 전쟁 지속을 위해 비협조적인 한국 지식인들에 
대한 대규모의 가혹과 탄압과 검거에 이어 1945년부터 발견 즉시 확인사살을 명령한 바 있음을 문제로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 제기는 l944년 8월 여자정신대 근로령과 l945년 애국반, 경방단 등의 조직적인 한국인 통제가 주 원인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계속된 만행임을 심연수 시인의 발굴 과정에서 밝혀냄으로 민족 시인의 자리매김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다.


2. 심련수 시문학의 특징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어휘력은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 시적 주제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자적 언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시기에 흔히 나타나기 쉬운 무슨 애련이나 자연을 감상하는 감각적 시풍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서 문학혼을 불태울 삶의 결연한 사실주의적 경향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


또한 강인하고 비타협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정의와 신념, 그리고 남성적 삶의 지조를 견지하는 서정적 자아의 지사의식과 주의시적(主意詩的) 기법이 모던하고 비장하다. 
심련수 시인의 시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현상은 약소 민족에 의한 현실적 고민을 문학을 통해 초월하는 진실과 자유와 생명력의 서정적 자아의지 극복이라 할 것이다.


이는 적극적 정서의 측면이 강렬한 만큼 선생의 시가 르포르타주한 기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리적 리얼리즘을 시의 한 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문학을 통한 투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적 언어의 리얼한 비유와 은유의 씀씀이가 모던하게 내면의 주제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한계의식에 의한 초월조건을 차용하는 것인데 아러한 정신적인 힘이나 시적 경향은 내적 관조보다는 능동적인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는 데 중심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거창성과 모호성을 유발하기도 한다.

 

심련수 시인의 시적 자아가 비교적 직설적이며 작품이 생경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그 예술성에 있어서는 감칠맛이 덜 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시어의 선택과 배열, 배합을 보면 단순미와 함께 절대생활용 어미의 변용을 보편적인 일상용어로 다스려나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내적 의지를 본질로 하는 순수함이나 긴요한 정직성과 그 독창적인 시작법은 시적 공감에 따른 윤리적 교훈뿐 아니라 고귀한 의지의 언어 경험을 감득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통한 근대정신이라 할 휴머니즘의 시적 주제의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련수 시인의 문학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나  그 의식구조가 인간 중심적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립해야 한다는 민족의 중심성을 실현코자 하는 시적 휴머니티가 돋보인다.


시대적 피지배 현상에 따른 합리적 휴머니스트로 민족 구성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음을 선생의 문학은 웅변한다. 
그러므로 20세기 중국 조선족 문학사료전집에 수록된 선생의 시와 시조가 보고 읽는 이에 따라 다소 편차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이유를 큰 관점에서 볼 때 심련수 문학의 초기시와 후기시의 영향 때문이리라.

 

또한 일본 유학 시기와 유학 후에 창작된 시편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문학 공부를 하던 것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서 공부한 문학의 정보 역량에 따른 차이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문학에의 변화는 일본에서 친구 이기형(생존) 선생과 함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고 나서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심연수 시인의 지사적 열정이 때로는 강인한 신념에 의한 시적 체험으로 다소 엇갈리게 우리와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을 위한 문학적 정의가 아름다운 것은 심연수 시인이 사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발굴되어 우리들에게 그 책임을 되묻고 있다는 것이다.


3. 심련수 시인의 시적 언어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은 시의 종결어미에 있어 남다른 언어 씀씀이를 보이고 있다.

들으라, 부르라, 보라 할꼬. 배였구나, 설레인다, 가누나, 가버린다, 주려무나, 스며든다, 찾더라오,
 어찌한담, 왠일인고, 나이다, 주었소, 으리니, 오리다, 얻노라, 쉬다니, 소이다, 오지요, 자란다, 큰다, 굶어라, 네것이다, 로다, 납소, 소서, 는고, 세라, 으리라, 더이다, 졌구나, 일이냐, 맞노라, 스럽다, 것이다, 봐라, 하여라, 들이다, 었다, 알리라, 다녔다, 하구나, 였구나, 싶구나, 좋겠소, 하나니, 이냐, 하라, 한다, 간다, 썼다, 란다

 

이러한 언어의 씀씀이는 주의시적 의지의 시풍을 형성하는 데 있어 사용되는 시적 용어임을 알 수가 있다. 
선구자적 언어의 배열을 몸에 익힌 듯한 이 종결어미의 사용은 심연수 시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왜 이러한 주의시적 시관을 통해 역사적 격변과 충격을 시적 위안으로 삼았는지 그 심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관조일 것이다.


시인은 그의 시적 대상으로 민족의 생활양식을 가장 먼저 꼽고 있다. 우리 민족이 늘 꿈꾸는 지평선이며, 대지며, 
나무며, 들이며, 바다와 강, 그리고 아침과 낮과 밤이며, 새벽을 주제로 노래했다. 
‘나와 너’와 ‘우리들’과 ‘나그네’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일깨우고자 하는 한편 
‘소년’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민족해방 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심련수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특징은 시의 직설적 표현 기법을 쓰고 있음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시풍이 
주의시적 경향과 맞물리면서 나타나는 시어의 선택이란 목적시의 유형을 벗어나기 어려운데도 블구하고 서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그 문학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선생의 시 <불탄 자리>, <빨래>, <만주>, <등불·l>, <들꽃>, <한야기>, <잃어버리는 글>, <우주의 노래>, <거울 없는 화장실>, 
<소지>, <육화>, <귀한 그들>, <인류의 노래>, <들불>, <벙어리>, <폭상>, <기적>, <새>, <파향>, <추락한 명상>, <돌아가신 할아버지>, <세기의 노래>, <소녀>, <폭풍>, <밭머리에 선 남자>, <지구의 노래>, <님의 넋>, <환마>, <너는 나와 같더라>, <밤>, <벽>, <편지>, <밤이 새도록>, <지설>, <가난한 거리>, <심문>, <좁은 문>, <전차>, <나그네·1>, <고독·1>, <샘물>, <봄의 뜻>, <고독·2>, <맨발·l>, <새벽>, <기다림>, <밤은 깊었으련만>, <대지의 겨울>, <소년아 봄은 오려니>, <고집>, <턴넬> 등을 내용으로 한 시적 언어 구성은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데 있어 바로미터가 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l943년 당시 일제의 탄압과 우리 언어말살정책에 의한 검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심연수 선생의 시 대부분이 직설적이며 주의시적(主意詩的)임으로 목숨을 건 시작 행위를 서슴치 않았던 이 위대한 
민족시인을 일본이 몰랐다는 것은 이해 밖의 일이었다. 일제의 확인된 학살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민족시인들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필자의 심연수 시인에 대한 애착은 시인이 
자신의 민족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문학이라는 정신적인 무장으로 일본에 저항한 그 숭고함 때문이다.


4. 대표시의 감상과 이해

주의시적 표상과 끈질긴 서장적 자아

 

..........이 재 호시인 선정 심련수 대표작............

 

소년아 봄은 오려니

 

 

봄은 가까이에 왔다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으리니 
너의 조상은 농부였다 
너의 아버지도 농부였다 
전지는 남의 것이 되었으나 
씨앗은 너의 집에 있을 게다 
가산은 팔렸으나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갔지만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 보아라 
너의 집이 가난해도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 
서투른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너는 농부의 아들 
대장의 아들은 아니래도… 
겨울은 가고야 만다 
계절은 순차를 명심하자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시가 별로 없었던 시기에 <소년아 봄은 오려니>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불태운 청년 심련수 시인의 짧고 위대한 영혼이 문학을 통해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저항 시인이었음도 그의 시 도처에서 밝혀지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에 아부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을 선택받아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학을 일제로부터 저항의 탈출구로 삼았던 심련수 선생은 오히려 일본을 알기 위해 유학길에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는 한편, 선생의 수많은 유작 가운데 <소년아 봄은 오려니>와 <고집>, <턴넬>, <전차> 등 이미 앞에서 열거한 시작들이 가장 극명하게 선생의 저항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듯이 소년과 봄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시구 풀이는 민족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리얼하게 암묵적 
은유기법을 이용하여 명시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봄은 가까이에 왔다(=일제로부터 민족 해방)”는 전제를 통해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는다고 예견하는 자연의 
이치를 시적 바탕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그 이미지의 대상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너의 조상은 농부”였고, 
“너의 아버지도 농부”라 말하는 시적 언어 속성에서 보듯이, 일제에 강점당한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비유할 뿐 아니라 
농부가 뜻하는 경작의 형상화를 교훈조로 통찰케 한다.


제5행에 이르러 시인은 봄과 소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은유하면서 직관을 차용한 극복의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농사를 지을 “전지(땅)는 남의 것(=일제에 빼앗김)이 되었으나 / 씨앗(=민족해방을 위한 국권 회복)은 / 너의 집에 있을”
것이라며 예언자적 저항성을 표현하고 있음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이 시에서 백미를 장식하는 6행에서 16행까지의 시적 긴장감은 투사적 언어 씀씀이가 그 위대성을 발휘하고 있다. 
“가산은 팔렸으나 /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에서 가산과 나무의 역할 분담을 이중화시킨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목숨을 내건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 갔다"는 시적 진술은 선생 자신의 고백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민족의 구성원은 빼앗긴 땅에서 그대로 살고 있구나) /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보아라(=여기에서 화덕과 숯의 역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뿐 아니라 
3·l 독립 징신을 시적 내용의 화두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너의 집이 가난해도 /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이 지사적 통찰력은 민족 해방의 깨달음을 염두에 둔 선생 
특유의 시적 기법으로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서툰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선생의 시적 정서와 의지적 언어관은 보편적 민족성을 획득하고 있다. 모국어에 담겨 있는 문학의 전통성을 
선생께서 후세에까지 교감케 한 그 민족적 체취는 경건한 것이기도 하다) / 너는 농부의 아들 / … / 겨울은 가고야 만다
(= 일제 시대는 겨울과 같아서 패망할 것이다) / 계절의 순차를 명심하자 /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자연의 이치를 이 시 속에 도입한 선생의 내적 고백성은 역동성을 갖기에 더욱 선명하다. 선생의 내적 의지의 발현 또한 민족의 자아를 찾는 데 목숨 건 비장함을 동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비타협적이며 시적 생명의 의지를 민족애 하나로 견지하다 일본 헌병의 조준된 흉탄에 
젊은 청춘을 버린 민족시인의 숭고한 시정신을 우리는 다시 찾아 기려야 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민족시인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전망한다. 
심련수 시인이 이육사 선생과 이상화 시인과 같은 분들에 비해 한치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이 작품 이외에도 선생께서 남기신 수많은 유작들이 증명하고 있다.

 

고집

 

고집을 써라 끝까지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고 
타고난 엇장을 굽히지 말라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우기고 뻗치다 꺾어지건 통쾌해도 
뉘게다 굽석거리는 꼴은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선쟁의 의도는 절개와 같은 것이다. 
일제의 수탈이 극심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시 <고집>이 뜻하는 민족정신의 뚜렷한 목적이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하고 있다. 
선생은 이 시를 통해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 것을 강변하면서, 우리의 “타고난 엇장(비분, 기개, 고집불통, 비타협)”과 같은 절개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절망을 희망이라 하고) /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일제의 거짓말을 비유하고 있음)”에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선생은 <고집>이라는 이 시에서 그 저항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즉 사랑이 썩어 냄새난다고 뻗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뻗치다의 말뜻이 갖는 시적 의미는 위에서 말한 절개의 정신과 맥을 잇고 있다.

그러면서 차라리 꺾어질지라도 타협하거나 일제에 순종하지 말 것을 고집이라는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뉘게다(누구에게) 굽석(굽신)거리는 꼴은 /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하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죽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턴넬

 

길다란 턴넬 
감캄한 굴 속 
자연이 가진 신비를 
뚫어놓은 미약한 힘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찾아도 
밟히우는 송장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아, 빛이 없어 죽었나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레루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또 어찌하리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 
우를 우러러도 
아래를 굽어보아도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시의 본성, 곧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떤 예술인가? 시는 어떤 언어인가?

시는 어떤 역사와 사회적 문화 현상인가? 시는 어떤 심혼의 소산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선생으로 하여금 일제의 흉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된 과제였을 터이다. 
시가 당시의 현실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던 선생으로서는 민족문학을 위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1943년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오던 해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진 시 <턴넬>은 선생의 문학적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이 시를 읽지 않으면 심연수 선생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겠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터넬과 선생의 시 터넬이 뜻하는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길다란 턴넬(=일제의 오랜 억압) / 캄캄한 굴 속(=일제 식민 치하에서의 생활) / 자연이 가진 신비를 / 뚫어 놓은 미약한 힘(=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


 / 눈을 감고 걸어도 / 눈을 뜨고 걸어도 / 밟히우는 송장(=일제 식민 치하에서 죽어간 백성들의 시체) /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 아, 빛이 없어 죽었나 / 빛이 싫어 죽었나(=자포자기한 상태의 암울한 현실을 비유) /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 레루(레일)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 또 어찌하리”

 

일제는 그들의 야욕을 위해 철도를 건설했으나 철로에 놓인 침목의 수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것은 
이 시는 확실한 증언처럼 증명하고 있음이다.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 울부짖는 소리” 
선생께서 턴넬을 바라볼 때마다 일제가 학살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목숨들과 그 영혼의 처절한 울음 소리를 귀에 쟁쟁 듣지 않았으랴. “우를 우러러도 / 아래를 굽어보아도 /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이 시의 자아의지가 턴넬이라는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턴넬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적극적인 의지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데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문학은세계를 지성적으로 갈파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의 뜻

 

읽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보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더이다

─ 원문(당시 사용되는 언어)


읽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보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고 있습니다

─ 수정(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봄을 뜻으로 풀이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전체 6행의 시적 언어 의미가 ‘알았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을 읽고 알았다는 것은 님이라고 하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님은 봄이 뜻하는 개화와 해방의 님인 것이다. 보다 더 의미심장한 싯구는 “글자마다 살”아 있다는 것과 그 “구절마다 마음이 뛰고 있”더라고 하는 내적 의미의 완결성이다. 
봄의 뜻이 담고 있는 독창성은 개성이다. 이러한 개성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의 주제의식이 참신해야 한다. 따라서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이원성은 봄이라고 하는 의미를 뜻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서 이 작품의 독창성과 함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짧은 시이긴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 또한 충족하고 있다. 봄의 뜻이 말하고자 하는 심미성, 대중성, 상징성이 시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서 살아 있는 정서를 경험케 한다. 
따라서 원문과 수정된 시를 함께 싣는 것은 1940년대 당시에 사용된 우리말의 씀씀이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참고되어야 한다는 뜻에서이다.


새벽

 

미명의 광야를 
달리는 자 누구냐 
동 터올 새벽을 기뻐 맞을 젊은이냐 
짧아진 희대에 활활 붙는 불 
새빨간 불길이 춤을 춘다 
푹푹 우그러든 자국마다 
땀이 고였고 
대기를 몰입한 듯한 호흡의 율동 
지심을 놀랠 만한 그 무보(武步)는 
피 묻은 싸움의 여세(餘勞)의 연장 
암흑을 익힌 개선장병아 
분투의 앞에 굴복한 과거는 
캄캄한 어둠 속에 쓰러졌다 
승리자여, 
만난을 극복한 투사여 
오래지 않아 서광이 
그의 얼굴을 
그의 몸을 비치리니 
속으로 웃어 마음에 간직하라 
잡고 있는 횃불 아래 
따라오는 무리의 갈 길을 
가르쳐주라 
해 돋는 동쪽 하늘가 
넓고 넓은 그곳으로


심련수 시인의 일반적인 시들의 주제가 주의시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어두운 시대에 대한 고뇌와 자아 성찰이 비교적 
쉽고 상징적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회의와 번민, 처절한 고독 속에서의 희망을 잃지 않는 새벽을 꿈꾸는 자세는 예언자적 미명을 기다리고 있다. 
지성의 면모를 보는 듯하지 않는가? 시대의 현실을 통찰하는 이 역사적 자아의 승화는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벽이라는 이 시의 주제의식은 우리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간절함을 비유와 은유기법을 이용해서 작품화했다. 
시인의 시적 소재는 실제의 사건과 그 일어날 것에 대한 개연성과 필연성을 동시에 갖는다.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보편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성이란 우리 민족의 미명인 해방이라는

현실적인 명제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이 가능성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암흑을 익힌 개선장병아 / 분투의 앞에 굴복한 과거는 / 캄캄한 어둠 속에 쓰러졌다 / 승리자여, / 만난을 극복한 투사여”

오래지 않아 서광이 비칠 것이니, 이때 마음 속으로 웃고 그 섭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는 심연수 시인의 시적 의지가 불가능을 가능한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의 가능성은 믿을 수 없지만 일어날 것에 대한 가능성이 있음을 필자는 믿고 있다. 
심연수 시인의 시 <새벽>은 민족의 숙원인 해방을 일어날 것에 대한 가능성의 새벽으로 본 것이라는 
점에서 예지적인 시인의 통찰력을 놓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다.


등불

 

존엄의 거룩한 등불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다가 
한줄기 폭풍에 꺼져버렸습니다 
그 옛날 조상께서 
처음 켠 그 불이 
그동안 한 번도 꺼짐이 없이 
이 안을 밝혀 왔습니다. 
그들은 그 빛을 보면서 
옛일을 생각하였고 
하고 싶은 말을 하였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는 이 있으니 
또 다시 밝아질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그 등잔에는 기름도 많이 있고 
심지도 퍽으나 기오니 
다시 불만 켜진다면 
이 집은 오래 오래 밝아질 것입니다.

 

이 시의 시적 언어의 특성은 함축적인 의미의 서정을 예언자적 목소리로 표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정적 
자아는 민족의 역사적 숨결을 느끼게 한다.


등불을 일컬어 ‘존엄’이라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민족애의 이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줄기 폭풍’에 
비유되는 일제치하를 시인은 집 안의 촛불이 꺼진 것으로 바라볼 만큼 비범하기까지 하다. 
내면의 토로가 이러할 만큼 내적 의지의 시적 구현이 분노보다 저항보다 더 이상적이다. 
배경지식 없이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 같지는 않다.


들불

 

임자 모를 불 
거침없이 타는 천리 저쪽 녘 
누가 놓은 블씨이기에 
저토록 꺼짐 없이 
밤하늘을 붉히느뇨 
사정없이 타오르는 
불길! 불길! 불길! 
끌래야 끌 수 없는 위대한 작탄!

언제까지 이 들판에 살아 있을지 
어두운 저녁 혼자 보는 들불 
그 불똥이 이 가슴에 튀어오기를 
삼가 경건히 머리 숙이고 
말없이 숭엄히 바라보노라.

 

l945년 2월 16일, 이 날은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날이다. 
1945년 8월 8일, 이 날은 심연수 시인이 학살된 날이다. 
여기에서 윤동주와 심연수라는 두 시인 가운데 왜 윤동주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졌으며 심연수 시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이토록 뒤늦게 발굴되어야 했는지 그것이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윤동주 시인은 비록 고향이 중국 용정이라 하더라도 당시 
서울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심연수 시인은 고향이 강릉일지라도 
중국 용정 동흥중학을 마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일제가 패망한 후 심연수 시인을 알고 있는 
문학인이나 연고자가 안타깝게도 서울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윤동주의 동생과 심연수의 동생은 서로 친구 사이였고 그렇다면 윤동주의 집안에서라도 
심연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윤동주의 집안으로 하여금 심연수라는 시인의 이야기가 50년이란 세월 동안 묻혀 있도록 했을까? 
시 <들불>을 감상하면서 이러한 의문들을 생각해보자.

지사적 시인의 면모가 잘 드러나 보이는 이 <들불>이라는 시에서 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은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사상과 시적 호흡의 긴장감이다. 
민족의 들불, 조국 해방을 위한 들불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위대한 작탄(炸彈)을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 
그 불길을 가슴에 안고 삼가 경건히 머리 숙이고 숭엄하게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은 이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분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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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혈기가 왕성했던 심련수는 
닥치는대로 배우고자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먼저 시와 시조, 소설, 평론, 수필(서간문,기행문,일기) 
그리고 희곡 등 무려 300여편에 이르는 초장르적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는 40여편의 시작이 남아 있을 뿐이다. 
윤동주는 프랑시스 잠, 장 꼭도를 좋아했지만 
심련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투르게네프,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등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심련수에게 영향을 준 국내 시인들은 
김기림,정지용,이육사,한용운,백석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문학에 대한 선행 작업으로 시인이었지만 
소설과 잡지 영화를 통해 문학에 대한 꿈을 다양하게 키웠다. 
이러한 폭넓은 예술적 취향은 심련수의 시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젊은 넋이 안고 있는 회의와 처절한 고독과 번민속에서 
조국광복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새벽을 꿈 꾸는 그의 시정신으로 나타나는 
시적 의지야말로 올곧은 그의 성품이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시대를 통찰했다. 
일컬어 심련수는 그의 역사적 자아를 
정신적 지향점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심련수가 일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게 된 배경도 
우리는 다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가 동서양 문학공간을 뛰어 넘으면서 알고자 했고 
영향받았던 수많은 작품 설렵에서도 나타난다. 
밤을 밝혀가면서 탐독했던문학과 사상과 철학의 폭넓은 세계는 
심층적이었다. 이것은 비교적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인간 심련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것에 대한 자아인식의 추구가 얼마나 깊고 애절했다면 
도 우리 민족에 대한 조국광복 의지가 얼마나 투철했다면 
일제 저항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하기를 갈망했단 말인가? 
윤동주와 틀린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윤동주는 부농의 아들로 일제 징병을 피해 일본 유학을 선택하지만 
가난하기만 했던 심련수는 일제 징병을 피한 유학이 아니라 
조국광복을 앞당기기 위해 치열한 저항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일제의 탄압은 구체화 되기에 이르고 
이 저항정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심련수의 준엄하고 비장한 저항성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각오해야 하는 
인간미 넘치는 우리 민족의 서정성과 같았다. 
여기에서 윤동주의 시 빨래와 심련수의 시 빨래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빨래줄에 두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 하는 오후/
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말린다/ 
.................윤동주 빨래 전문..........

빨래를 생명으로 아는 
조선의 엄마 누나야 
아들 오빠 땀젖은 옷 
깨끗하게 빨아 주소 
그들의 마음 가운데 
불의의 때가 묻거든 
사정없는 빨래방망이로 
두드려 씻어 주소서 
.....................심련수 빨래 전문............ 

다음에는 윤동주의 편지라고 하는 시 전문과 
심련수의 편지라는 시 전문을 감상해 보자. 

누나/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숙하게 그대로/ 
편지를 붙일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편지 전문............ 


새로 뜯은 봉투에서 떨어지는 
글자 없는 편지 
아아 그것은 간절한 사연 
설움에 반죽된 눈물의 지문 
떨리던 그 쪽 마을 
여기에 씌어졌구나 
..............심련수 편지 전문............... 
두 시인의 예시를 의도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시의 현대성과 우수성, 
그리고 비중을 가름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두 시에서 보이고 있는 이미지의 형상화, 시적 관념성, 
시적 처리에 따른 기법, 일제 치하에서 느끼는 시인의 
시적인식의 세계에 대한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삼가 심련수시인의 민족애 앞에 우리는 옷깃을 여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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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고있는 심련수의 시선집 《비명(碑铭)에 찾는 이름》출간기념회가 일전 연길에서 펼쳐졌다. 

시선집은 심련수시인의 최종본으로 확정된 250여편가운데 《대지의 봄》, 《소년아 봄은 오려니》, 《비명에 찾는 이름》, 《환마》 등 그의 시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면서도 작품성이 뛰여난 작품 70편을 선정해 묶었다. 또한 작품에는 그의 생애와 시세계에 대한 평문을 첨부해 심련수시인과 그의 시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국 인하대학 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이며 이 책의 편저자인 황규수는 심련수의 생애 및 작품에 대한 정보가 미흡한 상태에서 연구가 진행되다보니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적고찰은 어려웠다고 밝히면서 책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심련수의 생애 및 시작품 원전에 대해 좀 더 실증적으로 고찰한 내용을 토대로, 그의 전기적사실과 관련하여 시세계를 구체적으로 살폈다고 결어에서 쓰고있다.

또한 1943년부터 피살될때까지, 창작시가 없는 점으로부터 미루어보아 심련수 작품에 대한 발굴사업도 지속되여야 한다고 적으며 이 책의 간행이 올해(2010년 8월) 65주기를 맞이하는 시인의 유가족들에게 작으나마 기쁨과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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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심련수 시조집” 출간

 

일제감정기 혜성처럼 살다간 시인 심련수의 작품집-”청송(青松) 심련수시조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원 연변사회과학연구원 문학예술연구소 연구원이며 평론가인 김룡운과 룡정출신의 문인 박용일의 편저로 된 시조집은 144쪽에 도합 15만자, 시조, 시조평, 새로 정리된 심련수 략력, 후기  등 5개 내용으로 구성되였다. 시조집에는 특별히 새로 발굴된 심련수의 시조 6수를 보충하여 실었다.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한국 강릉에서 출생, 1930년 중국(당시 만주국) 흑룡강성 밀산을 거쳐 1936년 룡정으로 이주하였다. 1940년경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려창의 밤” 등 시편들을 발표하였다. 1943년 7월 일본류학을 마치고 일제의 학병 강제징집을 피하여 룡정으로 귀환하였다. 영안현 신안진 등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45년 8월 8일 귀향 도중 왕청현 춘양진에서 일제에 의해 피살되였다.

 

2000년 7월 룡정시 길흥촌에 거주하는 동생 심호수에 의해 55년간 항아리에 담겨 비밀리에 보관되어 오던 육필 유고가 공개되면서 마침내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였다. 현재 심련수의 문학과 삶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시인은 윤동주에 버금가는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시조집에  “청송 심련수와 그의 시조문학”이란 평론문장를 곁들어 실은 편저자 김룡운은 “심련수의 시조를 읽으면 해방의 기운을 기다리는 신념과 함께 시대의 어둠을 뚫는 융융한 남성적의지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강하게 나타남을 느낄수 있다”고 말했다.

 

심련수에 대한 연구론문 등 저서들이 해내외에서 적지않게 발간되기는 하였지만 단독 시조쟝르로 묶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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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심련수 시작연구” 출간
2010-09-10 

일제강점의 암흑기 민족문학의 불씨가 사그라져 가던때 연변땅에서 민족문학을 지켜 “제2의 윤동주”로 지칭되고있는 심련수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어지고있는 가운데 전국권 평론가의 저서 “민족시인 심련수 시작연구”가 한국학술정보에 의해 출간되였다.

평론집 “민족시인 심련수 시작연구”는 “심련수 시작의 의미와 그 문학사적 위상 “,“심련수시인의 특징적 시어 의미 풀이”, “심련수 시: 민족의 정과 대륙정의 융합체” 등 10개의 장절로 세분하여 심련수의 삶과 문학을 다각적인 시야로 다루고있다. 

전국권 평론가는1940년 2월 화룡현에서 출생, 1963년 연변대학 어문학부 조선언어문학과 졸업 후 선후로 북경 중공중앙 외사기관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에서 정책연구사업에 종사하다가 1973년 연변대학 조문학부로 전근, 대학가에서 문예리론강좌 강좌장, 연변대학학보 주필등직을 맡아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연변 작가협회 부주석, 중국작가협회 회원 등 직을 력임했다. 

저서로는 “시창작과 감상”, “민족문학연구”, “민족문학의 지평”,   “글쓰기학”, “시창작 예술연구” 등 다부가 있다.  

퇴임후에도 문필활동과 연구생활을 계속하면서 문인된 보람을 찾고 있는 전국권 평론가는 현재 연변로교수협회 회장 및 음악문학연구 총편집을 맡고있다.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은 서문에서 “민족문학사의 새 지평으로 떠오른 심련수는 항일민족시인으로 제대로 자리매김을 해줘야 한다. 그의 민족문학사적 위치설정은 삼천리반도 남북문학은 물로 또한 중국조선족문학사 연구가들의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이 저서의 출간은 자못 의미가 깊은 일로서 민족문학사연구에 큰 보탬이되리라 믿는다”고 저서의 학술적 가치를 평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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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jpg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조선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 399번지에서 삼척심씨 심은택의 셋째자식(맏아들)으로 태여났다.
심련수의 할아버지 심대규는 강릉일대에서 유명짜한 유학자였고 성격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였으며 삼촌 심우택은 반일단체에 가담했으며 남일, 홍범도, 리동위 등과 어울렸다. 

  1924년, 심씨일가는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로 이사했으며 1931년에 중국 밀산에 건너온후 신안진을 거쳐 1935년에 룡정 길안툰으로 이주했다. 
룡정소학교에 다닌 심련수는 1937년에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후 한시기 고민하다가 《큰일 하려면 공부 좀 해야잖겠는가》고 부모님께 속마음을 터놓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 공부시켜주마!》 하고 씨원하게 대답했다. 하여 련수는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를 다니게 되였다. 

  1943년 류학을 마치고 귀향하였다. 그때 일본학도병징병이 터지자 몸을 피해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 가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으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반일사상과 조선독립의 도리를 깨우쳐준 것이 죄가 되여 두차례나 옥살이를 하였다. 
1945년, 고향에 돌아와 백보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갔다가 몇 달후 광복을 며칠 앞두고 귀향길에서 그만 27세 꽃나이로 왕청현 춘양역에서 일본병사들에 의해 피살되여 망향의 혼으로 요절했다.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달구를 몰고 현장에 이르니 아들은 트렁크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그 트렁크를 시체와 같이 싣고 와 트렁크를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 

  심련수의 300여수의 시, 3편의 소설, 200여통의 편지, 300여편의 일기, 1편의 평론, 1편의 기행문을 그의 동생 심호수씨가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었다. 
일찍 《만선일보》에 다섯수의 시를 발표했던 심련수는 어릴적부터 책벌레여서 아버지한테 엉뎅이를 채우기도 했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그때 쓴 시들이 빼앗긴 조국과 망국의 설음, 민중에 대한 사랑의 간정을 담담한 빛갈로 잔잔히 여울치게 쓰면서 언덕이나 시내물, 실향민의 설음과 자연을 감상적이고 애상적으로 썼다면 일본류학시절부터 사망직전까지에 씌여진 시들은 완전히 탈바꿈했다.  시적구조가 보다 복잡해지고 사유공간이 넓어지고 시적포섭량이 많아졌으며 시적시각이 상승시각으로 이전 되였다. 특히 인간적성숙과 예술적성숙을 보여주면서 호방성, 거창성, 모호성 등이 획득된다. 후반기에 보여준 시는 우주의 질서가 잘못되였으니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는 그런 세계적인 눈높이의 시적차원으로 오른다.  

  룡정이 낳은 또 한분의 시인-심련수는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시로 하여 영원히 우리 민족의 문단에 하나의 큰 별로 빛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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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심련수선생은 윤동주시인 보다 나이는 한살 더 어렸지만 
학년이 한학년 높았다. 
그리고 윤동주시인은 1945년 2월16일 지병으로 일제 감옥에서 죽었지만 
심련수시인은 1945년 8월 8일 일제에 의해 총격을 받아 죽었다. 

윤동주 시인과 심련수시인에 대한 같은 점과 다른 점;

같은 점.................................. 

심련수와 윤동주는 소년기를 만주에서 보냄. 습작품이 많았음. 
유작을 남기고 죽었음. 
8.15전에 죽었음. 
두분 다 현재 민족의식을 형상화 했다고 하고 있음. 

틀린 점................................ 

윤동주는 부농의 아들이었음. 
심련수는 소작농의 가난한 아들이었음. 
윤동주는 용정 출생이지만 
심련수는 강릉 출생임. 
윤동주는 서정시, 
심련수는 주의시적 의지의 모더니즘,르뽀르타쥬한 
리얼리티가 강한 서정시 
윤동주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심련수는 무종교 
윤동주는 여성적 섬세, 
심련수는 대륙적 대담성 등 

===============================///


민족시인 심련수 탄생 100주년을 기리여
(ZOGLO) 2018년6월19일 
민족시인 심련수 탄생 100주년을 기리여
 
 
6월 16일,룡정.윤동주연구회에서는 룡정이 낳은 또 한 분의 민족시인 심련수 탄생 100주년을 기리여 추모답사활동을 가졌다.
 
연구회 20여명의 임원들은 10여리 길을 강행군하여 룡정시 태평촌 토기동의 심씨릉원을 찾았다. 



시인의 묘비앞에서 제주를 올리고 심련수의 대표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 "추억의 해란강" 등을 랑송하였고 시인의 생애를 반추해 보았다.
 
룡정.윤동주연구회 김혁 회장은 심련수의 짧으나 굴곡진 생애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심련수의 문학은 해방전 연변지역 문학인들의 문학활동을 대중적으로 조명해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심련수는 윤동주와 같은 시간대에 룡정에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를 서정적인 언어로 위무한데에 그 위상과 문학의 류사성이 있다”고 력설하였다.

 
한편 "제2의 윤동주"라 지칭되는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강릉시 경포면 난곡리에서 심운택과 최정배 씨 사이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여나 가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1930년 중국 흑룡강성 밀산을 거쳐 1936년 룡정으로 이주해 왔다.
 
  1937년 룡정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본격 습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22세때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려창의 밤’ 등을 발표하였으며,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학부 창작과를 졸업했다.
 
룡정으로 귀환한후 학병을 피하여 녕안현 신안진 등지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8일 녕안현에서 룡정으로 오던 중 왕청현 춘양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2000년 7월 룡정시 길흥8대에 거주하는 동생 심호수에 의해 55년 간 항아리에 담겨 비밀리에 보관되여 오던 육필 유고가 <20세기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제1집 심련수문학편에 수록됨으로써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였다.

 
"소년아 봄은 오려니", "추억의 해란강" 등 300여수(편)의 시와 기행문,서한이 있다.
 
  한편 “룡정.윤동주 연구회”는 룡정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를 기리고 룡정지역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와 승계를 취지로 한 사단법인 단체로서 몇년동안 꾸준히 민족의 인걸들의 생몰일 기념, 문화총서 발간, 인물전 집필, 문학기념행사조직 등 일련의 사업들을 알차고 활발하게 펼쳐나가 지역사회의 명망있는 문화단체로 부상하고 있다.

///조글로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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