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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련수(沈連洙, 1918년 5월 20일 ~ 1945년 8월 8일)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 교육자이며 조선인 반일(反日) 저항 시인의 한 사람이다. 니혼 대학졸업 후 교육활동에 종사하였고, 1945년 룡정으로 귀향하던 길에 불심검문을 받던 중 살해되었다. 본관은 삼척으로, 아호는 청송(靑松)이다. 강원도 강릉 출신이다.
청송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조선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 삼척 심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심운택(沈雲澤)과 어머니 최정배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심대규(沈大奎)는 명주군의 유학자였고, 그의 숙부 심우택(沈友澤)은 홍범도 등과 함께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소작농으로 생계를 영위했고, 자투라기 땅은 척박하여 소작료를 내고 나면 생계를 영위하기에는 부족하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조모와 모친은 밤낮으로 길쌈을 하였다. 조부는 1925년 가족을 이끌고 로씨야 울라지보스토크로 이주했고, 숙부 심우택은 이때 홍범도 등과 함께 항일 의병에 가담하였다.
1931년 로씨야 원수 이오시프 스탈린은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집행하면서 조선인들을 먼 내지로 집단 이주하게 되면서 그의 가족은 9.18사건을 전후하여 다시 만주로 내려와 중국 흑룡강성 녕안현 신안진 공제촌(共濟村)으로 이주하였다.[1] 신안진에 2년 반 남짓 있을 때 심련수는 사회주의 이념을 접하고 당시 북만지구 조선인협회 회장이며 항일투사로 그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김수산(金洙山)의 문하생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받았다. 그 후 심씨 일가는 다시 길림성 룡정시(당시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경화촌 길안툰)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룡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7년에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 12월 6일에 졸업하였다. 동흥중학교 재학 중 그는 문학에서 그 재능을 보여 문예반장으로 활동하면서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여창의 밤”등 5편의 시-소설을 게재했다. 동흥중학 재학시 학교 교무주임인 장하일(張河一)의 부인이며 "인간문제"를 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가 강경애(姜敬愛)와 교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련수는“나는 문인이 부럽다. 문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써 나타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랴.”라고 일기문에 적으면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소설과 시, 그리고 잡지와 영화를 무척 즐기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졸업후 심련수의 집안은 무척 가난하여 생업이 곤란하였으나, 그의 가족은 심련수를 도일시켜 유학하게 했다. 부친 심운택은 굶어죽는한이 있더라도 공부는 끝까지 시키겠으니 걱정 말고 일본으로 가서 청운의 뜻을 펴라고 아들을 격려하였다. 동생들도 자기네가 뒤를 섬길테니 꼭 일본으로 유학을 가라고 형님의 등을 떠밀었다. 가족의 후원으로 심련수는 1941년에 일본 유학의 길에 올라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원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1943년 심련수는 서둘러 룡정으로 귀향했다. 원래는 3년제였던 예술대를 태평양 전쟁 시국과 동원령 때문에 학제를 2년 6개월로 줄여서 조기 졸업하게 되었다. 1943년 학도병 징집령이 떨어지자 그는 징집을 피해 은신하며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동 기간 중 그는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소학교 교사를 지냈다.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을 지내던 시기 학생들에게 반일 사상을 깨우쳐 준 것이 죄가 되어 두 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석방 후 1945년 2월 고향에 돌아왔다가 집안의 주선으로 백보배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돌아갔다. 7월 경 그는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패전 직전의 혼란기를 틈타 다섯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도보로 국경을 넘어 룡정으로 되돌아가다 8월 8일 왕청현(汪淸縣) 춘양역(春陽鎭) 근처에서 일본군의 불신 검문을 받던 중 피살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의 피살 소식을 접한 심련수의 아버지가 달구지를 몰고 현장에 가자 그는 트렁크 가방 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한다. 트렁크가방과 시체를 같이 싣고 와 트렁크 가방을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고 한다. 현재 전해지는 원고는 대부분 그때 그가 들고있던 트렁크 가방 안에서 발견된 것들이라고 한다.
1946년 3월 시인의 시신이 수습되어 룡정 외곽의 토기동 선영에 매장되었다. 심련수가 요절한뒤 얼마 안 되어 유복자 심상룡(相龍)이 태어났다. 심상룡은 1966년 문화대혁명때 조선으로 이주, 현재 교포총국에서 중국 교포를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남동생 심학수(學洙)는 흑룡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김일성의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해져 후에 동서지간이 되었으며 큰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고 막내동생 해수(海洙)는 해방 후 연변에서 문인으로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을 지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무렵 그의 가족은 일본특무에 부역한 가정으로 치부되어 큰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이 무렵 동생 심호수는 반란파들에게 물매를 당하면서도 비닐에 꽁꽁싸서 항아리속에 넣은후 땅속 깊이 파묻은 형의 귀중한 옥고를 내놓지 않았다. 그가 영면한 후 55년이 지난 뒤, 2000년 그의 동생 심호수가 항아리 속에 간직해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던 심련수의 시와 작품 편지 등의 유작을 공개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보존해온 그의 작품이 비로소 연변 사회과학원의 “문학과 예술” 잡지에 실리자 학계는 흥분했다. 일제 강점기 “엄청난 력사적 격변과 부담감이 주는 충격을 미학적인 위안으로 치유해”낸 그의 글들은 가히 “저항문학”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연변과 한국의 학계는 그를 동시대를 호흡한 윤동주, 송몽규 등과 함께 저항시인의 한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연변에서는 “심련수 문학작품연구소”가 세워져 그의 작품 전반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시적으로는 시인 이은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심련수의 유작은 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평론 등 312편에 이른다. 이밖에 그가 창작 공부를 위해 베껴 쓴 창가노트 1권, 미술 습작을 한 노트가 더 있다. 편지 200여통과 일기, 기행문도 남아 일제 당시 생활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룡정이 낳은 또 한명의 시인 심련수, 그의 이름과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주옥같은 시편들은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을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중앙대학교 교수 이명재는 그의 작품들은 “미학적 특성과 문학사적 의미에서 분석할때 실로 식민지시대 항일문학의 전형”으로서 “그 시대 민족이 품고 있던 본원적인 기대와 갈망, 고향에 대한 자연회귀의식 등 다양한 정서가 표출”이라 평가하였다. 관동대학교 교수 엄창섭은 “일제 강점기 그만의 빛나는 서정은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하였다.
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에서 그는 조선총독부 치하의 좌절과 어둠 속에서도 봄(해방)을 기다리는 의지를 은유했으며 “고집”에서는 친일파들의 아부에 풍자를 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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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철학연구] 발굴자료 민족시인 심련수 시해설 |
민족시인 심련수의 대표시 해설
시 : 대지의 봄
여기 이 시를 발표한 만선일보란 우리 민족의 서러운 역사가 스며있던 치욕의 기록이기도 하다.
심련수 아버지는 심운택이며 심련수시인의 남동생 심학수는 당시 흑롱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이 소중한 자료는 수학여행 일정과 당시 풍물을 담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기행시 뿐 아니라
이 자료들 속에는 윤동주가 스스로 스크랩해서 만든 일제 당시 우리 국내주요 일간지에 실린
l. 심련수 시인을 중심으로
1936년 일본은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앞세워 <내선융화, 선만일여, 일시동인>이라는 통치방침을 표방한다.
보다 철저한 우리 민족말살과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는데 면 단위마다 신사 설치를 하게 하고 l937년부터는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어휘력은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 시적 주제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자적 언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시기에 흔히 나타나기 쉬운 무슨 애련이나 자연을 감상하는 감각적 시풍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서 문학혼을 불태울 삶의 결연한 사실주의적 경향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
심련수 시인의 시적 자아가 비교적 직설적이며 작품이 생경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그 예술성에 있어서는 감칠맛이 덜 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시어의 선택과 배열, 배합을 보면 단순미와 함께 절대생활용 어미의 변용을 보편적인 일상용어로 다스려나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내적 의지를 본질로 하는 순수함이나 긴요한 정직성과 그 독창적인 시작법은 시적 공감에 따른 윤리적 교훈뿐 아니라 고귀한 의지의 언어 경험을 감득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통한 근대정신이라 할 휴머니즘의 시적 주제의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련수 시인의 문학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나 그 의식구조가 인간 중심적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립해야 한다는 민족의 중심성을 실현코자 하는 시적 휴머니티가 돋보인다.
또한 일본 유학 시기와 유학 후에 창작된 시편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문학 공부를 하던 것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서 공부한 문학의 정보 역량에 따른 차이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은 시의 종결어미에 있어 남다른 언어 씀씀이를 보이고 있다.
들으라, 부르라, 보라 할꼬. 배였구나, 설레인다, 가누나, 가버린다, 주려무나, 스며든다, 찾더라오,
이러한 언어의 씀씀이는 주의시적 의지의 시풍을 형성하는 데 있어 사용되는 시적 용어임을 알 수가 있다.
심련수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특징은 시의 직설적 표현 기법을 쓰고 있음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시풍이
주의시적 표상과 끈질긴 서장적 자아
..........이 재 호시인 선정 심련수 대표작............
소년아 봄은 오려니
봄은 가까이에 왔다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시가 별로 없었던 시기에 <소년아 봄은 오려니>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듯이 소년과 봄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시구 풀이는 민족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리얼하게 암묵적
이 시에서 백미를 장식하는 6행에서 16행까지의 시적 긴장감은 투사적 언어 씀씀이가 그 위대성을 발휘하고 있다.
고집
고집을 써라 끝까지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선쟁의 의도는 절개와 같은 것이다.
선생은 <고집>이라는 이 시에서 그 저항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면서 차라리 꺾어질지라도 타협하거나 일제에 순종하지 말 것을 고집이라는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길다란 턴넬
시의 본성, 곧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떤 예술인가? 시는 어떤 언어인가? 시는 어떤 역사와 사회적 문화 현상인가? 시는 어떤 심혼의 소산인가?
“길다란 턴넬(=일제의 오랜 억압) / 캄캄한 굴 속(=일제 식민 치하에서의 생활) / 자연이 가진 신비를 / 뚫어 놓은 미약한 힘(=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
일제는 그들의 야욕을 위해 철도를 건설했으나 철로에 놓인 침목의 수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것은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 울부짖는 소리”
읽고서 알았쇠다 ─ 원문(당시 사용되는 언어)
─ 수정(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봄을 뜻으로 풀이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전체 6행의 시적 언어 의미가 ‘알았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명의 광야를
현실적인 명제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이 가능성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암흑을 익힌 개선장병아 / 분투의 앞에 굴복한 과거는 / 캄캄한 어둠 속에 쓰러졌다 / 승리자여, / 만난을 극복한 투사여” 오래지 않아 서광이 비칠 것이니, 이때 마음 속으로 웃고 그 섭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존엄의 거룩한 등불이
그 등잔에는 기름도 많이 있고
이 시의 시적 언어의 특성은 함축적인 의미의 서정을 예언자적 목소리로 표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정적
임자 모를 불
언제까지 이 들판에 살아 있을지
l945년 2월 16일, 이 날은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날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윤동주의 동생과 심연수의 동생은 서로 친구 사이였고 그렇다면 윤동주의 집안에서라도
지사적 시인의 면모가 잘 드러나 보이는 이 <들불>이라는 시에서 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은 위대한 분노인 것이다. |
젊은 혈기가 왕성했던 심련수는 닥치는대로 배우고자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먼저 시와 시조, 소설, 평론, 수필(서간문,기행문,일기) 그리고 희곡 등 무려 300여편에 이르는 초장르적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는 40여편의 시작이 남아 있을 뿐이다. 윤동주는 프랑시스 잠, 장 꼭도를 좋아했지만 심련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투르게네프,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등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심련수에게 영향을 준 국내 시인들은 김기림,정지용,이육사,한용운,백석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문학에 대한 선행 작업으로 시인이었지만 소설과 잡지 영화를 통해 문학에 대한 꿈을 다양하게 키웠다. 이러한 폭넓은 예술적 취향은 심련수의 시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젊은 넋이 안고 있는 회의와 처절한 고독과 번민속에서 조국광복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새벽을 꿈 꾸는 그의 시정신으로 나타나는 시적 의지야말로 올곧은 그의 성품이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시대를 통찰했다. 일컬어 심련수는 그의 역사적 자아를 정신적 지향점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심련수가 일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게 된 배경도 우리는 다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가 동서양 문학공간을 뛰어 넘으면서 알고자 했고 영향받았던 수많은 작품 설렵에서도 나타난다. 밤을 밝혀가면서 탐독했던문학과 사상과 철학의 폭넓은 세계는 심층적이었다. 이것은 비교적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인간 심련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것에 대한 자아인식의 추구가 얼마나 깊고 애절했다면 도 우리 민족에 대한 조국광복 의지가 얼마나 투철했다면 일제 저항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하기를 갈망했단 말인가? 윤동주와 틀린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윤동주는 부농의 아들로 일제 징병을 피해 일본 유학을 선택하지만 가난하기만 했던 심련수는 일제 징병을 피한 유학이 아니라 조국광복을 앞당기기 위해 치열한 저항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일제의 탄압은 구체화 되기에 이르고 이 저항정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심련수의 준엄하고 비장한 저항성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각오해야 하는 인간미 넘치는 우리 민족의 서정성과 같았다. 여기에서 윤동주의 시 빨래와 심련수의 시 빨래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빨래줄에 두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 하는 오후/ 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말린다/ .................윤동주 빨래 전문.......... 빨래를 생명으로 아는 조선의 엄마 누나야 아들 오빠 땀젖은 옷 깨끗하게 빨아 주소 그들의 마음 가운데 불의의 때가 묻거든 사정없는 빨래방망이로 두드려 씻어 주소서 .....................심련수 빨래 전문............ 다음에는 윤동주의 편지라고 하는 시 전문과 심련수의 편지라는 시 전문을 감상해 보자. 누나/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숙하게 그대로/ 편지를 붙일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편지 전문............ 새로 뜯은 봉투에서 떨어지는 글자 없는 편지 아아 그것은 간절한 사연 설움에 반죽된 눈물의 지문 떨리던 그 쪽 마을 여기에 씌어졌구나 ..............심련수 편지 전문............... 두 시인의 예시를 의도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시의 현대성과 우수성, 그리고 비중을 가름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두 시에서 보이고 있는 이미지의 형상화, 시적 관념성, 시적 처리에 따른 기법, 일제 치하에서 느끼는 시인의 시적인식의 세계에 대한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삼가 심련수시인의 민족애 앞에 우리는 옷깃을 여미어야 할 것이다. |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고있는 심련수의 시선집 《비명(碑铭)에 찾는 이름》출간기념회가 일전 연길에서 펼쳐졌다.
시선집은 심련수시인의 최종본으로 확정된 250여편가운데 《대지의 봄》, 《소년아 봄은 오려니》, 《비명에 찾는 이름》, 《환마》 등 그의 시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면서도 작품성이 뛰여난 작품 70편을 선정해 묶었다. 또한 작품에는 그의 생애와 시세계에 대한 평문을 첨부해 심련수시인과 그의 시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국 인하대학 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이며 이 책의 편저자인 황규수는 심련수의 생애 및 작품에 대한 정보가 미흡한 상태에서 연구가 진행되다보니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적고찰은 어려웠다고 밝히면서 책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심련수의 생애 및 시작품 원전에 대해 좀 더 실증적으로 고찰한 내용을 토대로, 그의 전기적사실과 관련하여 시세계를 구체적으로 살폈다고 결어에서 쓰고있다.
또한 1943년부터 피살될때까지, 창작시가 없는 점으로부터 미루어보아 심련수 작품에 대한 발굴사업도 지속되여야 한다고 적으며 이 책의 간행이 올해(2010년 8월) 65주기를 맞이하는 시인의 유가족들에게 작으나마 기쁨과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
일제감정기 혜성처럼 살다간 시인 심련수의 작품집-”청송(青松) 심련수시조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원 연변사회과학연구원 문학예술연구소 연구원이며 평론가인 김룡운과 룡정출신의 문인 박용일의 편저로 된 시조집은 144쪽에 도합 15만자, 시조, 시조평, 새로 정리된 심련수 략력, 후기 등 5개 내용으로 구성되였다. 시조집에는 특별히 새로 발굴된 심련수의 시조 6수를 보충하여 실었다.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한국 강릉에서 출생, 1930년 중국(당시 만주국) 흑룡강성 밀산을 거쳐 1936년 룡정으로 이주하였다. 1940년경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려창의 밤” 등 시편들을 발표하였다. 1943년 7월 일본류학을 마치고 일제의 학병 강제징집을 피하여 룡정으로 귀환하였다. 영안현 신안진 등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45년 8월 8일 귀향 도중 왕청현 춘양진에서 일제에 의해 피살되였다.
2000년 7월 룡정시 길흥촌에 거주하는 동생 심호수에 의해 55년간 항아리에 담겨 비밀리에 보관되어 오던 육필 유고가 공개되면서 마침내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였다. 현재 심련수의 문학과 삶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시인은 윤동주에 버금가는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시조집에 “청송 심련수와 그의 시조문학”이란 평론문장를 곁들어 실은 편저자 김룡운은 “심련수의 시조를 읽으면 해방의 기운을 기다리는 신념과 함께 시대의 어둠을 뚫는 융융한 남성적의지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강하게 나타남을 느낄수 있다”고 말했다.
심련수에 대한 연구론문 등 저서들이 해내외에서 적지않게 발간되기는 하였지만 단독 시조쟝르로 묶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혁 기자
“민족시인 심련수 시작연구” 출간 | ||
2010-09-10 |
일제강점의 암흑기 민족문학의 불씨가 사그라져 가던때 연변땅에서 민족문학을 지켜 “제2의 윤동주”로 지칭되고있는 심련수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어지고있는 가운데 전국권 평론가의 저서 “민족시인 심련수 시작연구”가 한국학술정보에 의해 출간되였다. 평론집 “민족시인 심련수 시작연구”는 “심련수 시작의 의미와 그 문학사적 위상 “,“심련수시인의 특징적 시어 의미 풀이”, “심련수 시: 민족의 정과 대륙정의 융합체” 등 10개의 장절로 세분하여 심련수의 삶과 문학을 다각적인 시야로 다루고있다. 전국권 평론가는1940년 2월 화룡현에서 출생, 1963년 연변대학 어문학부 조선언어문학과 졸업 후 선후로 북경 중공중앙 외사기관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에서 정책연구사업에 종사하다가 1973년 연변대학 조문학부로 전근, 대학가에서 문예리론강좌 강좌장, 연변대학학보 주필등직을 맡아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연변 작가협회 부주석, 중국작가협회 회원 등 직을 력임했다. 저서로는 “시창작과 감상”, “민족문학연구”, “민족문학의 지평”, “글쓰기학”, “시창작 예술연구” 등 다부가 있다. 퇴임후에도 문필활동과 연구생활을 계속하면서 문인된 보람을 찾고 있는 전국권 평론가는 현재 연변로교수협회 회장 및 음악문학연구 총편집을 맡고있다.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은 서문에서 “민족문학사의 새 지평으로 떠오른 심련수는 항일민족시인으로 제대로 자리매김을 해줘야 한다. 그의 민족문학사적 위치설정은 삼천리반도 남북문학은 물로 또한 중국조선족문학사 연구가들의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이 저서의 출간은 자못 의미가 깊은 일로서 민족문학사연구에 큰 보탬이되리라 믿는다”고 저서의 학술적 가치를 평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08-21 |
룡정이 낳은 또 한분의 시인-심련수는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시로 하여 영원히 우리 민족의 문단에 하나의 큰 별로 빛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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