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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교수는 광복 직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의 첫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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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이와 철수>
“학교교육은 가장 중요한 나랏일이다. 바람직한 학교 교육은, ‘교원’과 ‘학생’, 그리고 ‘교육과정’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 맺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교육에 기본이 되는 알짬이 교과서이다.
교과서는 학교 교육은 물론, 사회, 문화 주요 매체로 지식과 정보 원천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지식과 기능을 얻고, 바르게 사는 길을 깨닫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알았다.
교과서에는 우리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고, 한겨레 얼이 서려 있다. 이번에 제정하는 ‘교과서의 날’은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뒤 문교부가 최초로 발행한 ‘초등 국어1-1’ 교과서 편찬일인 1948년 10월 5일을 기리는 뜻에서 10월 5일로 한다. 10월은 개천절과 한글날이 나란히 하는 ‘문화의 달’이기도 하여 더욱 뜻 깊다.” 2006년 제정된 ‘교과서의 날’ 취지 간략이다.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은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부르는 노래다. 지금이야 교과서를 물려받을 일이 없지만, 5, 60대 사람들은 딱히 교과서가 아니더라도 전과나 자습서, 위인전을 물려받아 쓰던 기억이 아슴아슴 피어나리라.
물려받은 책과 몽당연필, 그리고 구겨진 양은 도시락과 보자기 책보, 조개탄 난로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추억거리. 대한민국 장년이라면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중한 추억이리라. ‘국어1-1’이다. 여기에 나오는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는 어릴 적 동무마냥 살가운 이름들이다.
철수가 말한다. “영이야, 이리 와 나하고 놀자.” “영이야 이리 와 바둑이하고 놀자.”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영이가 영희로 바뀌었다. 그때 초등학생들은 철수처럼 착하고, 영희처럼 곱기를 꿈꿨다. 그래서 철수와 영희는 ‘국민 이름’이었다.
반마다 큰 영희, 작은 영희로 부르는 촌극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1960년대 시골이나 서울변두리 아이들은 거개가 검정 고무신을 신었던 터라 삽화에 나오는 철수와 영희가 신은 운동화가 몹시 부러워했다. 그만큼 교과서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마치 일제강점기를 거친 적이 없는 애처럼 밝고 씩씩하다. 이 책을 펴낸 박창해(朴昌海 1916-2010)는 1916년 만주 지린성 룽징(吉林省 龍井)에서 태어났다.
당시 길림성 용정은 민족의식이 강한 기독교 세력이 뿌리를 내려 윤동주, 문익환 같은 이들을 낳은 곳이기도 하다. 넉넉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박창해 말에 따르면 강아지를 동생처럼 키웠으며, 온 식구가 두레반상에 빙 둘러앉아 밥을 먹고, 할아버지 등에 올라타 말 타기를 하고, 아버지와 숨바꼭질도 하며, 동네에서 일본, 러시아, 중국, 동무들과 어울려 놀았단다.
여느 한국인들과는 달리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도 식민지 의식이 거의 없이 자랐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았기에
철수와 영이가 그토록 밝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가 외솔 최현배 선생을 만나 드물게 우리 정수인 한글 정신을 몸에 익혀 우리 얼을 품을 수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뽑힌 박창해는 우리나라 최초 교과서 집필을 이끌었다. 박창해가 이끌어 펴낸 우리 최초 국어교과서는 ‘가갸거겨’ 따위 자모음 모양과 이름순으로 글씨만 배우던 그때까지 방식을 털어내고 “바둑아, 바둑아 나하고 놀자.”처럼 소리와 글씨, 낱말을 한꺼번에 아울러 가르쳐 놀라운 혁신을 이뤘다.
특히 박창해는 첫 단원에서 끝 단원까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 전개 방식을 펼쳐 교과서를 만들었다. 60여 년 전에 박창해는 이미 스토리텔러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국어교과서는 문화바로미터로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한국 사회 말과 글 그리고 생각 프레임을 결정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창해가 펴낸 국어교과서야말로 나라사람을 도타이 보듬는 나라 대한민국을 알리는 문화선포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1959년 연세대산하기관으로 한국어학당을 세운 뒤, 초대 학감을 맡아 외국인 한국어교육에 힘을 쏟았다.
환갑이 되던 1976년 연세대를 떠나 미국 하와이 대학에 가서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열두 해 만인 1988년 다시 돌아와 일흔이 훌쩍 넘긴 나이에도 <한국어 구조론>, <현대 한국어 통어론 연구>, <한국어 집중 강습(An Intensive Course in Korea)>를 펴내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2010년 6월 14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흙으로 돌아간 박창해. 너나들이 헐벗고 모든 것이 모자라던 때. 열심히 글을 깨우치고 배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를 헤쳐 나갈 꿈만으로 허기진 배를 달랠 수밖에 없고 변변한 읽을거리조차 없던 그때 그 시절, 교과서는 살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지식과 정보, 정서를 채워주는 보물창고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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