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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속에서] - 한국 최초의 영화관 - 단성사(團成社)
2019년 10월 24일 01시 22분  조회:5100  추천:0  작성자: 죽림

두산백과

단성사

 

 ]

요약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상설 영화관.
구분 영화관
설립일 1907년
소재지 서울 종로3가 지도

1907년에 주승희가 발의하고 안창묵과 이장선이 합자하여 2층 목조 건물로 세웠다. 1909년 이익우가 사장이었으나 한흥석으로 바뀌었고 1910년에는 일본인 후지하라[]에게 넘어갔다. 주로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1910년 중반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1919년 10월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제작된 연쇄활동사진극() 《의리적 구토》를 상영함으로써 한국영화사상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1924년 초 단성사 촬영부는 7권짜리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함으로써 최초로 한국인에 의한 극영화의 촬영·현상·편집에 성공하였고, 1926년 나운규()의 민족영화 《아리랑》을 개봉하여 서울 장안을 들끓게 하였다.

그 후 단성사는 조선극장 ·우미관()과 더불어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일인 영화관인 황금좌()·희락관()·대정관() 등과 맞서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음악·무용발표회 등에도 무대를 제공하여 새로운 문화의 매체로 큰 몫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대륙극장()으로 개칭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하여 악극()을 공연하였다.

2005년 2월 지하 4층, 지상 9층에 7개 관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하였고, 이듬해 9월 3개 관을 추가하여 총 10개 관에 1806석을 갖추고 있다. 2008년 4월에는 멀티플렉스 체인인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 9월 23일 경영악화로 부도처리된 뒤,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성사 [團成社]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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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성사

 

 ]

단성사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동아일보사 /제공.

이칭별칭 대륙극장
유형 단체
시대 근대/개항기, 근대/일제강점기, 현대
성격 연극영화전문극장
설립일시 1907년 6월 4일
설립자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

정의

1907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 있는 극장.

개설

서울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지명근()·주수영()·박태일() 등이 공동 출자하여 기존 목조 2층의 건물을 가지고 세웠다. 무대설비와 대도구 등의 제작은 경성좌() 일본인 무대디자이너가 맡았다.

연원 및 변천

단성사()는 처음에는 기생들의 창이나 무용 등으로 자선공연을 주로 하였다. 1908년 7월 붕괴사고와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908년 10월 문을 닫았다가 곧 다시 개관해서 각종 연희()를 공연하였다. 1909년이익우()가 사장으로 있었으나, 다음해인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경영권이 일본인 후지와라 유타〔〕에게로 넘어갔다가 1911년최우석()·장기형()·박기영() 등 3인 공동경영으로 전환되었다. 1910년대 중반에는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였다. 박승필에게 넘어가기 전 주로 판소리·창극 등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이었고, 가끔 활동사진도 상영하였다.

박승필은 광무대를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단성사는 영화관으로 사용하였으며, 3층 벽돌건물로 개축하였다. 영화전용극장으로 바뀌고 나서도 개화기의 극장들이 연극과 영화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도 많이 공연되었다. 특히 이 곳에서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의리의 구토」가 개봉되어 ‘영화의 날’이 이 날을 기념해서 만들어졌다.

1929년 극단 조선연극사()도 단성사에서 창립공연을 하였으며, 대체로 신파극단들이 이곳에서 연극공연을 많이 하였다. 1930년대에는 외국영화도 상영하였고, 1940년대륙극장()으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단성사로 환원하였다. 2001년 9월단성사 건물이 철거되고 신축공사로 착공되어 2005년 2월 7개관을 갖춘 규모의 멀티플랙스(Multiplex) 영화관으로 개장되었다가 2006년 3개관을 추가하였다.

2008년 4월에는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경영난으로 부도처리되어 같은해 11월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출범하였다.

의의와 평가

단성사는 광복 후 악극()을 공연하였고, 한국전쟁 이후 영화관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단성사는 극장이 드물던 개화기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연극과 영화상영의 주요근거지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 『한국 근대극장 변천사』(유민영, 태학사, 1998)
  • 『한국극장사』(유민영, 한길사, 1982)
  • 『신극사이야기』(안종화, 진문사, 1955)
  • 단성사(www.dansung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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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단성사(경성) 극장 건물의 앞모습

1930년대 단성사(경성) 극장 건물의 앞모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겨레음악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단성사 [團成社]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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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극장

‘수도 서울’ 극장의 자존심: 단성사

 

 

1907년 대한제국 수도 한성에 최초로 민간인이 설립한 실내 극장 단성사가 등장했다. 일제강점기 단성사는 무대예술 공연을 비롯해 영화 제작 및 배급 그리고 상영의 주역을 담당했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외화 상영관의 대명사를 자처한 단성사는 2015년 폐관할 때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 극장으로 존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극장 단성사의 위상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제국 황실 극장 협률사()가 문을 열었다. 협률사가 개관한 지 5년이 지난 1907년 한성의 몇몇 실업가들이 종로에 모여 단성사()를 설립했다. 단성사는 조선이 근대와 제국의 시대로 접어들던 시기에 등장한 극장답게 극장의 운영 방침에 조선인 교육과 자선()을 앞세웠다. 즉,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던 시기, 극장은 흥행장 성격을 넘어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장소가 되었다.

단성사가 자리한 종로3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 종족(ethnic) 간 거주지 공간 분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곳이었다. 일본인이 조선에 이주하면서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촌()과 남촌()이라는 조선인과 일본인 주요 거주지가 각각 나뉘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거주지에 조선인이 설립한 단성사는 불안정한 재정으로 1917년 일본인 다무라 요시지로()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하지만 조선인 박승필이 극장을 운영하면서 조선인 극장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했다.

1910년대 단성사는 극장에서 인기를 누린 서양 영화를 전국 12개 도시에서 순회 상영했다. 단성사가 조직한 지방 순업대() 덕분에 전국을 돌아다닌 작품은 할리우드 유니버설(Universal)영화사의 연속영화(serial film) <명금(The Broken Coin)>(Francis Ford, 1915)이었다. 연속영화는 연속적인 이야기 순서 내에서 짧은 주제의 시리즈로 영화를 구성하고, 각 주제의 시리즈는 위기일발의 장면으로 끝을 맺는 형식을 일컫는다. 이러한 영화는 다음 편 주제에서 전편의 이야기를 이어 가는 ‘감질이 나는’ 구성이어서, 다음 편 내용이 궁금한 관객들이 매주 극장을 찾았고 그 결과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단성사는 할리우드 연속영화의 흥행을 지켜보면서 조선 최초의 영화이자 연쇄극 <의리적 구토()>(김도산, 1919)를 제작했다. 연쇄극은 연극 장면과 영화 장면을 무대와 스크린을 통해 번갈아 가며 보여 주는 형식을 말한다. <의리적 구토>는 한강철교와 장충단 등 경성의 명소를 비롯해 전차와 기차 등 근대 신문물을 담아내어 관객에게 호응을 얻었다. 단성사는 <의리적 구토>의 흥행 이후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19편에 달하는 영화 제작에 참여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 발전의 선봉이 되었다.

또한 단성사는 일제강점기 흥행작 <아리랑>(나운규, 1926)을 상영하고,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1935)을 개봉하면서 신기술 도입에 따른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소개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인 극장의 중심이었던 단성사는 1939년 만성적인 재정난으로 일본인의 손에 흥행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명칭도 대륙극장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한국 영화 중흥 시기 단성사

해방을 맞이하고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은 1946년 3월 1일 단성사는 대륙극장에서 자신의 본명을 되찾았다. 이때 단성사는 개화기 출범 당시 그랬던 것처럼 “계몽 선전 기관”으로서 성격을 다시 부여받았다. 단성사에 대한 공적() 공간으로서 요청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극장은 국방부 정훈국 주최로 일선 사병의 실전() 보고()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다. 하지만 단성사는 기본적으로 흥행 장소였으며, 1953년 영화수입사 불이무역 대표 김인득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으며 본격적인 외화 상영관으로 변했다.

외화 전문 상영관으로서 단성사의 정체성은 1962년 이남규에게 매각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70년대 단성사의 흥행 장르는 홍콩 검술영화 같은 액션 영화였는데, 이들 작품은 인구와 교통의 집산()이 신속히 이뤄지는 ‘종로3가’라는 지리적 상황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흥행 장르였다. 또한 단성사는 극장 인근에 소재한 고등학교 덕분에 학생을 동원한 단체 상영도 가능했다.

1966년 스크린 쿼터(Screen Quota) 제도가 도입되자 외화 상영을 고집하던 단성사도 한국 영화 상영에 동참했다. 국산 영화 보호와 육성을 위해 공보부()가 시행한 스크린 쿼터 제도는 외화 상설관도 연간 4~6편의 한국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만든 조치였다. 이러한 스크린 쿼터 실시 이후 단성사가 처음으로 상영한 한국 영화는 <맹호작전>(김묵 · 설봉 · 박호태, 1966)이었다. <맹호작전>이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반공주의 선전 영화라는 점에서, 단성사의 이 영화 상영은 반공 이념에 기반을 둔 정권에 대응한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

1970년대 초중반에 단성사의 한국 영화 상영은 급증했으나 여전히 흥행을 올리는 작품은 할리우드 영화였고, 그러한 상황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시는 1978년 140일 동안 상영한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Loved Me)>(Lewis Gilbert, 1977)였다.

이후 1990년대 들어 단성사는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대표적인 극장이 되었다. 그 기폭제는 바로 <서편제>(임권택, 1993)였는데, 이 영화는 하루 평균 4318명이 입장해 총 84만6500여 명의 관람 인원을 기록했다. 단성사를 비롯해 서울의 여러 극장에서 상영한 <서편제>는 6개월 동안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이와 같은 <서편제>의 흥행 배경은 일차적으로 영화적 완성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당시 회자된 세계화 구호와 민족주의 상승의 작용 결과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멀티플렉스 시대 단성사의 우여곡절

단성사는 개관 이래 제작과 상영을 아우르며 한국 영화 발전의 중심에 자리하였고,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서울 시내 개봉관 흥행 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강남 개발에 따른 서울 도심의 확대와 1980년대 외국영화 직접 배급의 실시는 단성사를 과거의 명성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급기야 1990년대 후반 스크린을 다수 보유하며 배급 라인을 장악한 대기업의 영화 시장 진출은 단성사의 존립을 위협하였고, 이에 따라 단성사는 극장 회생을 위한 새로운 변신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단성사는 지하 4층과 지상 9층에 7개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했고, 2006년 3개관을 추가하여 총 10개관에 1806석을 갖췄다. 이후 단성사는 멀티플렉스 체인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부도 처리되어 ‘아산엠단성사’로 변했으며, 2016년 8월 복합 귀금속 쇼핑 문화 공간으로 전환했다. 요컨대, 단성사는 연극장으로 출발하여 영화관과 멀티플렉스를 지나 쇼핑 장소로 변한 것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흥망성쇠를 겪은 단성사를 보노라면, 인생사 그것과 다르지 않아 숙연해진다. 건물 외관은 변해도 관객의 기억이 살아 있는 한 단성사는 영원히 극장으로 남을 것이다.

참고문헌

  • 송영애(2016). 1960~1970년대 서울 시내 개봉관 연구: 단성사를 중심으로.
  • ≪2016년 한국영화사연구소 심포지엄 은막의 사회문화사:
  • 개봉관의 등장부터 1970년대까지≫ 자료집, 37~56. 한국영상자료원.
  • 이길성 외(2004). 『1970년대 서울의 극장산업 및 극장문화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 이순진(2011). 『(조선인 극장) 단성사: 1907-1939』. 영상자료원.
  • 이효인 외(2004). 『한국영화사 공부(1960-1979)』. 이채.
  • 한국영화사연구소 주제사채록연구팀(2010).
  • “<주제사> 1960~1970년대 영화관 1: 조상림 · 이용희”. 한국영상자료원.
  • “단성사 신발족”, ≪중앙신문≫, 1946년 3월 1일.
  • “일선사병 실전보고 강연 단성사로 장소변경”, ≪조선일보≫, 1954년 1월 13일 조2면.
  • 한국영상자료원 웹진 www.koreafilm.or.kr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www.kmdb.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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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단성사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동아일보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수도 서울’ 극장의 자존심: 단성사 (한국의 극장, 2017.01.31, 위경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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