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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el Peace Prize(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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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노벨상 제정과 함께 수여되기 시작한 평화상은 평화 증진에 현저히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되는 권위 있는 상이다. 노벨 평화상은 1901년 국제적십자위원회 설립자인 스위스의 장 앙리 뒤낭과 국제평화연맹 설립자인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파시의 공동 수상을 시작으로 2021년까지 총 102차례 수여돼 개인 109명, 단체 28곳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1915년‧1916년‧1918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던 1939~1943년에는 수상자 선정이 없었다. 또 1923년‧1924년‧1928년‧1932년‧1955년‧1956년‧1966년‧1967년‧1972년에도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았다. 1948년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유력한 수상 후보로 꼽혔으나 암살당하면서 그해 노벨위원회는 "살아 있는 후보 중 적절한 인물이 없다'며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았다.
다른 노벨상이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 한림원(스웨덴 아카데미) 등에서 선정하는 것과 달리 노벨 평화상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선정과 시상 권한을 갖고 있다. 이는 노벨상을 제정한 노벨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노벨 평화상은 노벨상 내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이에 따라 다른 부문의 시상자 선정과 수상식은 스웨덴에서 하는 것에 비해, 평화상 수상자 선정과 시상식은 노르웨이에서 이루어진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결정에 관한 전권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갖고 있는데,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출된 5명의 위원은 후보자 추천 작업과 선별 검사, 최종 결정 과정에서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보장받는다.
매년 10월 노벨위원회는 각국 전문가 1000여 명에게 서한을 보내 평화상 후보를 추천받는다. 후보자 추천권은 ▲노벨위원회 전‧현직 위원 및 노벨연구소의 자문관 ▲각국 의원 및 정부 각료와 국제 의회연맹 회원 ▲국제 중재재판소 및 국제 사법재판소 재판관 ▲국제 항구평화사무국 위원 ▲국제법 연구소 연구위원 ▲현직 법학·정치학·역사학·철학 교수 ▲노벨 평화상 역대 수상자 등에 있다.
서한을 받은 후보 추천위원은 다음해 2월 1일까지 추천 이유서를 첨부해 추천한다. 추천위원이 자신을 추천할 수는 없다. 노벨위원회는 전문가의 조언을 받고 후보 범위를 좁혀가며 선별작업을 벌인다. 최종 수상자는 노벨위원회 5인 전체 회의에서 결정하며 수상자의 신원은 발표 전까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다. 수상식은 노벨 사망일인 12월 10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열린다.
한편, 노벨상은 생존자 개인에게 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평화상은 단체나 조직에도 수여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2021년 기준으로 미국이 23명으로 가장 많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이어 프랑스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수상자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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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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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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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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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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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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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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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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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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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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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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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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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벨기에, 아일랜드, 이스라엘,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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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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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아르헨티나, 북아일랜드, 이집트, 폴란드, 동티모르, 라이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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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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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덴마크, 네덜란드, 캐나다, 북베트남, 일본, 인도, 멕시코, 코스타리카, 티베트,
미얀마, 과테말라, 팔레스타인, 한국, 가나, 이란, 케냐, 방글라데시, 핀란드, 중국, 파키스탄, 콜롬비아, 콩고 민주공화국, 이라크, 에티오피아,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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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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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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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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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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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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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샤오보(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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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기본 인권 신장을 위한 비폭력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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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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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 존슨 설리프(라이베리아),
레이마 그보위(라이베리아), 타와쿨 카르만(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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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권을 위한 비폭력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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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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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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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평화와 화합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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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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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무기금지기구(OP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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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화학무기 폐기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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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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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랄라 유사프자이(파키스탄),
카일라쉬 사티아르티(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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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청소년의 인권 향상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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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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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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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의 민주화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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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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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누엘 산토스(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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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의 평화협정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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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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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폐기 국제운동(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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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관련 활동 반대 운동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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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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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 무라드(이라크),
데니스 무퀘게(콩고 민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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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성폭력 종식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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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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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아머드 알리(에티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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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와 수십 년을 이어온 오랜 분쟁을 종식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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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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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식량계획(W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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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를 퇴치하고 분쟁지역 평화에 기여해 굶주림이 전쟁과 갈등의 무기로 활용되는 것을 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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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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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레사(필리핀),
드미트리 무라토프(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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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영구적 평화의 전제조건인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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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노벨 평화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1901-2017년까지 시상횟수 : 총 98회
1, 2차세계대전 기간을 포함해 19년은 선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4-1916, 1918, 1923-24, 1928, 1932, 1939-43, 1948, 1955-56, 1966-67, 1972) 그리고, 1925년과 1962년에는 수상자는 선정되었으나, 시상이 1년 연기되었다.
총 98회의 전체 수상자 수 : 131
2017년 현재까지, 개인은 104명, 단체는 27개가 수상. 단, 국제적십자위원회가 3번 수상 (1917년,1944년,1963년), UNHCR이 2번 수상 (1954년,1981년), 따라서 실제 단체의 개수는 24개.
수상자가 1명(개)인 경우 vs 여러 명(개)인 경우
수상자의 평균 연령: 62세
남성중심성과 더불어 백인⋅서구중심성은 노벨평화상 비판에 빠지지 않던 단골 메뉴였다. 1901-2017년 사이 전체 수상자 중 서유럽과 북미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65%에 달한다. 가장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도 미국(21명), 프랑스(9명), 영국(7명) 순이다. 특히 초기 50년간 북미와 서유럽이 아닌 곳에서 수상자가 배출된 경우는 1936년 아르헨티나의 사베드라 라마스 단 한 번뿐이었다. 아프리카인이 최초로 선정된 것은 1960년, 아시아인은 1974년에 와서다.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 인권의 시기에 이르러 남성중심성과 더불어 개선되기 시작한다. 특히 21세기에 와서는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의 수상 비율이 약 70%, 미국과 유럽은 약 25%로 완전히 역전되었다.
1901년부터 2017년까지 총 104명의 수상자 중 여성수상자는 16명으로 전체의 15.3%에 불과하다. 특히 처음 75년간 여성수상자는 단 3명으로, 그마저 모두 유럽과 미국 출신이었다. (이는 노벨위원회 구성과도 관련된다. 약 50년간 노벨위원회는 단 1명의 여성위원도 갖지 못했다. 현재는 총 5명 중 3명이 여성이다.) 하지만 1970년대 인권의 시기를 거쳐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대(2001-2017)만 따졌을 때 여성 비율은 35% (총 17명 중 6명)로 과거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다.
1973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리더 레 득 토의 수상 결정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노벨평화상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경우로 꼽힌다. 두 사람은 같은 해 파리에서 이루어진 베트남 평화협정을 성사시킨 공로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두 전쟁 당사자 간의 다분히 정치적인 협상에 노벨평화상이 수여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사람들은 nobel 평화상이 아니라, 전쟁상 또는 ‘ig-noble’ 평화상이라고 조롱했다.
뿐만 아니라 레 득 토는 아직 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는 수상자로 지명된 최초의 아시아인이자, 최초의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이를 거부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람이라는 영예(?)를 얻는다. 키신저는 수상을 허락했지만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 이후 노벨평화상을 반납하고자 했으나, 거부당했다. 이 사건으로 노벨위원회 위원 2명이 위원직을 사임했다.
당연히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거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인도의 간디와 러시아의 톨스토이다. 간디는 무려 5번이나 후보명단에 이름을 올리고도 끝내 받지 못했다.(1937-39, 1947-48년) 노벨평화상은 물론, 노벨문학상의 강력한 후보이기도 했던 톨스토이는 평화상도, 문학상도 받지 못했다. 특히 ‘평화와 비폭력의 아이콘’인 간디가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상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수상이 유력시됐던 1948년에도 간디가 상을 받지 못한 것은 발표 몇 달 전 그가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적합한 후보자가 없다”며 수상자 없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1961년 스웨덴 출신이자 노벨재단 이사장 아들이었던 D. 함마르셸드에게는 사후수상이 허락된 바 있다. 또 위원회가 사후수상 불가를 정식으로 공식화한 것도 간디 사후 거의 30년이 지난 1974년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간디의 수상실패를 그의 갑작스런 죽음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간디 지지자와 반대자로 나뉘었다. 후자는 비폭력 원칙에도 불구하고 간디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더 큰 폭력과 유혈을 야기했다는 점 (특히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과 관련해), 그가 지나친 인도 민족주의자라는 점 등을 근거로 간디의 수상을 반대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보다 더 문제적인 것은, 노벨위원들의 그런 견해가 노르웨이와 영국 간의 전통적인 우호관계, 당시의 백인우월주의나 서구중심주의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간디의 사례는 ‘노벨평화상의 가장 큰 실수’, 또는 ‘노벨평화상의 수치’로 불린다.
히틀러, 스탈린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는 1939년 스웨덴 국회의원에 의해, 스탈린은 2차대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45년과 1948년 두 차례나 후보에 올랐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한국의 전두환도 추천된 바 있다.
그 외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한 유명인으로는 윈스턴 처칠(대신 처칠은 2차대전 회고록으로 헤밍웨이를 제치고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 아르헨티나의 후안 & 에바 페론, 세계 평화학의 아버지 요한 갈퉁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벨평화상: 기록과 역대수상자 - 노벨평화상 수상에 얽힌 다양한 기록들 (세계평화인물열전, 이문영,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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