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일기
올가 그레벤니크 글·그림|정소은 옮김|이야기장수|
“내 나이 서른다섯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의 책 <전쟁일기>는 이 같은 ‘작가의 말’로 문을 연다. 지난 2월24일 오전 5시, 그는 폭격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완전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 짐을 챙기기 시작한 그는 아홉 살과 네 살 아이의 팔에 이름과 생년월일, 연락처를 적는다. “혹시나 사망 후 식별을 위해서”다. 그러나 “왜 적는 거야?”라고 묻는 네 살 딸에겐 솔직히 답하지 못한다. “우리, 지금 놀이를 하는 거야.” “무슨 놀이?” “‘전쟁’이란 놀이.”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5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의 삶도 뿌리째 뽑혔다.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나고 자란 그레벤니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작가는 “전쟁 전 우리 삶은 마치 작은 정원 같았다”고 말한다. “그 정원에서 자라는 모든 꽃들은 각자의 자리가 있었고, 꽃피우는 정확한 계절이 있었다. 사랑으로 가득했던 우리 정원은 날이 가면 갈수록 풍성하게 자랐다.” 그랬던 그는 이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완전히 무너진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전쟁일기>는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 전쟁으로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연필 한 자루로 기록한 책이다. 전쟁 발발 후 지하실을 방공호 삼아 8일을 보내고, 가족과 이별한 채 피란을 떠나는 과정이 일기 형식으로 담겼다. 이 책은 먼저 출간된 원서 없이 한국에서 처음 나왔다.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출판이 어려운 상황이기에, 한국 출판사의 편집자·번역자가 작가와 직접 소통하며 작가가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보내온 그림의 연필선을 살려 책으로 펴냈다. 평소 풍부하고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 작업을 해오던 작가지만 전쟁통 와중 연필과 종이만이 그의 작업 도구가 됐다. 그레벤니크는 “바깥에서 전투기들이 우리 집을 폭격할 때 그림은 나만의 내면세계를 향한 유일한 통로가 되어주었다”며 “내 모든 두려움을 종이에 쏟아부었다”고 썼다.
책에는 폭격이 시작된 날부터 3월 중순까지 작가의 일기가 담겼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이들 가족은 9층 집에서 지하실로 달려내려 간다. 지하실은 마을 사람들의 방공호가 됐다.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폭격이 길어지면서 이들의 ‘지하 생활’도 길어진다. “거리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우리집 바로 옆이다.”(2월27일) “미사일이 옆집에 떨어졌다. 두려움은 아랫배를 쥐어짠다. 날이 갈수록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짧아진다.”(2월28일) “지하 생활 6일 만에 우린 바퀴벌레가 되어버렸다.”(3월1일)
은행이 문을 닫고 카드 거래가 정지되며 현금이 없어 생필품을 사지 못하고, 동물 먹이로 쓰려던 빵 조각을 씹으며 연명한다. 딸 베라는 말한다. “엄마, 난 초콜릿을 오래 아껴 먹을 수 있어. 볼 안쪽에 붙여두었어.” 지하실에 분필을 가져가자 아이들은 암벽화처럼 벽에 그림을 그린다. 아이들은 폭격 소리를 들으며 벽에 ‘평화’라고 적는다.
거친 연필선의 글과 그림이 가득한 책장마다 전쟁의 공포가 묻어난다. 작가는 점점 가까이서 울리는 폭격 소리에 지하실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폭격은 ‘러시안 룰렛’ 같다. “5분 후 어디선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건 제비뽑기, 아니 러시안 룰렛이다. 오늘 넌 타깃이 되지 않았어. 이제 내일까지 꼭 살아남아.” 결국 전쟁 9일째가 되던 날, 그의 가족은 도시를 떠나기로 한다. “내 인생 35년을 모두 버리는 데 고작 1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배낭 하나만 짊어진 채, 목적지도 모른 채로 무작정 뛰어든 피란 열차는 “이 세상 모든 눈물로 가득”하다. 가족과 생이별한 사람들이 눈물을 삼키며 아이들을 달랜다. 성인 남자는 국경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계엄령으로 인해 작가도 곧 남편과 이별한다. 하루키우에선 거동이 불편한 외조부·외조모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엄마와도 헤어졌다. 탈출 후에도 아슬아슬한 순간은 계속된다. “우리가 지옥에서 탈출한 것은 기적이다. 우리가 지나온 후 이르핀 지역에서 철도가 폭발했다.”
무사히 국경 밖으로 탈출했지만 이제 ‘전쟁 난민’이 된 작가와 두 아이는 폴란드 바르샤바를 거쳐 현재 불가리아의 한 소도시에 임시 난민 자격으로 머물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가족들과 고향 하르키우 소식을 매일 애타게 기다린다. 작가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책 출간 소식을 전하며 “내가 가진 것은 노트와 연필뿐이었지만 목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았다”면서 “나의 주된 메시지는 사람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 전쟁을 멈추라는 것”이라고 썼다.
/선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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