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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랑촌13용사는 누구일가?
2006년 07월 08일 00시 00분  조회:3541  추천:123  작성자: 리함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3)

어랑촌13용사는 누구일가?

리 함


화룡시체육장 남쪽언저리에는 어랑촌《13용사기념비》가 우뚝 솟아 길손들의 발목을 잡는다. 하늘을 떠이며 소소리높이 솟은 이 13용사기념비에 새겨진 12명이름중 3명 이름이 잘못 새겨졌다면 그대들은 믿을수 있겠는가? 허나 이는 드팀없는 사실이다. 력사의 진실이 바로 그러하다.

1

1932년 12월에 산구에 자리잡은 화룡현 어랑촌에 항일유격근거지가 거연히 일어서자 적들은 안절부절 못하였다. 일제놈들은 1933년 1월 25일(음력 12월 30일)의 첫 토벌에 이어 2월 12일(음력 1월 18일)에 또 300여명의 병력을 풀어 어랑촌근거지를 삼면으로 에워쌌다. 이날 이른 새벽에 화룡현유격대 2소대 대원들이 여느때처럼 일찌기 근거지아래 동쪽의 왕지평으로 바깥보초를 나갔다가 길가에 어지러이 난 일제토벌대놈들의 숱한 발자국을 발견하고 련방 총성을 울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룡정, 투도구 방면과 삼도구방면에서 몰려든 적토벌대들은 진작 근거지를 삼면으로 포위하고 날밝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사태는 삽시에 험악하게 번져갔다. 근거지안에는 병력이라야 현유격대 1소대에 편입된 중대장과 정위까지 하여도 13명유격대원밖에 없었다. 반군사력인 근거지적위대는 본부의 여기저기서 보초를 설따름이였다. 그나마 사정이 급한데서 통일지휘를 할 겨를이 없었다. 현과 평강구의 간부들과 혁명군중들의 포위돌파를 엄호하는것이 요긴했다. 유격대원들이 저마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을 신고 총을 쥐고 밖으로 내달으니 결과는 유격대실을 중심으로 세갈래대오가 형성되였다.

한갈래는 유격대실에서 자던 중대장 김세와 정위 김씨, 전사 안흥원 셋이였다. 선참 유격대실 팔간집을 박차고 나간 그들 셋은 서북쪽 산비탈을 바라고 내달았다. 등성이에서 내려다보니 상부는 많이 빠졌으나 하부는 별반 빠지지 못하고 서성대고있었다. 그들 셋은 급기야 돌아서서 등성이에서 총을 발사하면서 내려왔다. 그들은 유격대실로 기여드는 놈들에게 멸적의 총탄을 퍼부었다.

다른 한갈래는 현위 방상범군사부장이 직접 지휘한 갈래이다. 여기에는 군사부장외에도 채동식, 김준덕, 김만선, 천국선 등 4명 대원이 망라되였는데 그들 5명은 유격대실 앞 빈집을 차지하고 적들과 생사판가리싸움을 벌리였다. 적들은 그들 기세에 눌려 웅뎅이에 떨어져 눈먼총질을 해댈뿐이였다.

또 한갈래는 유격대실을 짓쳐나가 동쪽의 어느 한 집을 차지한 리구희소대장의 갈래이다. 이 갈래가 그중 많은 축인데 리구희에 류택규, 류만길, 리길원, 정두호, 김국진 등 5명대원까지 합치니 6명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동쪽의 그집을 차지하고 뒤산에서 총질하는 적들을 향해 반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날 전투는 날이 밝자 시작되였다. 전투가 한창 처절하게 벌어질 때 남산봉을 차지한 삼도구일제수비대놈들이 학강대장의 명령에 따라 박격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남산에 해가 떠올라서인데 이날 적들은 남산에서 수십발의 포를 쏘았는데 첫발이 마을 서쪽 밭지경에 떨어졌다. 산아래 웅뎅이에서는 룡정방면의 수비대놈들이 기관총을 걸어놓고 맹사격을 들이댔다.

바로 이때 서북쪽의 골홈에서 총소리가 콩볶듯이 요란하게 울리였다. 방상범군사부장은 적아를 분별하기 위하여 그쪽을 향해 붉은수건을 흔들게 했다. 그쪽에서도 이쪽을 향해 붉은수건을 흔들었다.

찰나 서북쪽골홈에서 김세중대장이 벌떡 일어서더니《내총 받아라!》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단번에 일제수비대 다섯놈을 쓰러눕히였다.

세개방향의 유격대원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적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하였다. 룡정방면수비대의 거의 모든 주의력이 김세네쪽에 쏠린데서 다른 두갈래의 유격대원들은 음페지를 조절하면서 숨을 돌릴수 있었다.

진짜 생사결단의 소싸움이다. 적의 기관총사격에 벽은 채발처럼 구멍이 숭숭했다. 헌데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매 대원들에게 20여발의 탄알밖에 없었다. 황포군관학교출신의 방상범은 구들돌을 들어 막으라고 웨치면서 들어오는 놈을 어김없이 한방에 한놈씩 쏘아눕힐것을 요구하였다. 불을 지르러 들어오던 놈, 시체가지러 기여들던 놈들이 하나둘 꼬꾸라졌다.

전투는 갈수록 치렬하고 집에는 어느결에 불이 달리였다. 불타는 집에서 밖으로 뛰쳐나간 방상범과 그의 전사들은 집을 둘러싼 돌담장에 의지하여 계속 피어린 싸움을 벌리였다. 같은 시각 서북쪽과 동쪽방향에서는 김세패와 리구희패가 적에게 호된 불벼락을 안기고있었다.

리구희는 뒤산과 남산아래쪽을 향하여 반격하다가 집벽이 뒤숭숭한 구멍들뿐이니 구들장을 뜯어 제끼라고 명령하였다. 한편 만일을 고려하여 1소대 녀작식대원 원희숙을 뒤쪽으로 해서 빠지라고 귀뜸하였다. 원희숙은 버섯골골안쪽으로 정신없이 내달았다. 도중에 그는 어느 돌틈에 몸을 숨긴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어느덧 리구희네 집에도 불이 달리고 지붕이 허궁 내려앉았다. 리구희 등은 기여서 밖으로 나가 계속 완강히 싸우다가 탄알이 떨어지니 사용하던 총들을 전부 마사버리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간 김세는 또 적 두놈을 쏘아죽이였다. 나중에 탄알이 고갈되니 역시 쌰창 등을 마사버리고 모두가 비장한 최후를 마치였다. 후에 싸움터를 수습하면서 보니 김세중대장은 적탄에 일곱발이나 맞았었다. 적들은 그의 호주머니를 샅샅이 뒤져 시계와 혁띠, 돈 전부를 가져갔다. 남은것은 사용하다가 박산낸 쌰창과 어수선히 널린 철편들뿐이다.

벌써 시간이 퍼그나 흘러갔다. 인젠 군사부장쪽 전사들에게도 탄알이 몇알 남지 않았다. 방상범은 탄알을 아끼라고 재차 주의를 주었다. 우리 전사들의 사격이 적기관총수에게 쏠리자 적기관총수는 웅뎅이로 몰리였다.

이때다. 총소리가 뜸해지는사이 방상범은 채동식에게 옆집의 짚가리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하였다. 연기가 자오록히 피여오를 때 방상범은 제때에 퇴각령을 내리고 하나하나 기여나가라고 명령하였다. 옆집을 벗어나니 이번에는 달으라고 하였다. 세집을 벗어나니 버들숲이다. 이들 5명은 버들숲을 따라 무사히 어랑촌 서쪽 뒤산덕에 오르고 2소대 대원들을 만났다. 때는 오후 3시 좌우였다. 어리석은 놈들은 그때까지도 한걸음 전진하지 못하고 눈먼총질을 해댔다.

2

당년 이름난 어랑촌보위전, 13용사전투의 참모습이다. 13용사란 바로 이날 전투에 참가한 1소대 13명 유격대원을 가리킨다. 했으나 어랑촌13용사를 두고 해방후 50년대 후반부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거듭 생겨났다.

1957년 여름의 어느날, 조선중앙고찰단 일행이 어랑촌에 들어섰다. 고찰단책임자는 당년 화룡현 덕신사 금곡촌출신의 유격대원 박영순이였는데 그는 어랑촌에 13용사가 나타났다고 말하였다. 동행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항일로간부 강위룡도 이를 긍정하면서 13용사를 빨리 알아내여 비석을 세울것을 희망하였다.

이럴 때 서성구 구산촌에 계시는 차병헌로인이 13용사이름을 안다는 소문이 들리였다. 어랑촌에서는 민병련장 리경섭을 보내여 차로인한테서 13용사이름을 적어왔다. 때는 1957년 6월이였다. 7월초에 촌의 회계 유정학이 전화로 수차 문의하니 리경섭의 료해와 같았다. 이 형편을 현에 회보했으나 현에서는 시원한 답복을 주지 않았다.

1958년 봄이후 연변대학의 사생 126명이 와룡향에 가서 농업실천에 뛰여들게 되였다. 그때 주 민정처책임자 강위룡이 와서 어랑촌13용사보고를 하여 진동이 컸다. 당지에서는 어랑촌근거지 형편을 잘알고있는 차병헌로인과 룡문향 아동촌에서 생활하는 당년의 화룡현유격대 대원 김창선의 증실을 거쳐 13용사명단을 작성하고 현과 공사의 비준을 거쳐 나무비석을 해세웠다. 1963년 9월에는 주와 현의 해당지시에 의하여 나무비석을 취소하고 돌과 세멘트로 새 비석을 일떠세웠다.

했으나 어랑촌 13용사이름은 시초부터 빗나갔다. 차병헌로인과 김창선이 제공한 이름을 보면 지금의 《13용사기념비》에 새겨진 이름중 김세와 류억만 둘밖에 없었다. 그외는 모두가 어랑촌일대와 안도일대에서 희생된 다른 렬사들이였다. 지어는 주민정처 강위룡의 이름까지 박히였다. 1959년 7월에 조선서 항일전적지 답사단이 왔을 때 동행한 강위룡은 13용사명단에 자기이름이 있는것을 보고 잘못되였다면서 강일렬사로 바꾸라고 지시하였다. 그래도 13용사명단은 엉망이였다.

1970년과 1971년 이른바 계급대오청리학습반이 성세를 일구었다. 그번 학습반에서 당년의 화룡현유격대 전사들인 채동식과 전하섭, 평강구간부 김정한 등은 13용사기념비에 새겨진 대부분 이름이 틀린다고 주장하였다. 결과 소선대원 차정숙이 빠지고 13용사전투에서 체포되여 희생된 원 중공삼도구구위 제1임서기 안학선과 어랑촌적위대원 리명배가 새로 들어갔다. 이쯤되니 비슷한것 같았지만 알고보면 사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개혁개방의 물결속에서 화룡현에서는 1981년 8월 1일에 성대한 집회를 가지고 지금의 《13용사기념비》를 일떠세웠다. 13용사명단에는 당년 13용사전투에서 희생된 김세 등 9명유격대원과 현위서기 최상동, 적위대원 류억만, 소선대원 차정숙 등 12명이 올랐다. 현과 주의 해당부문에서는 많은 조사와 증실을 거쳐 확인한것이므로 절대 자신이 있다고 믿었다. 한데서 1980년부터 어랑촌 13용사조사에 나섰던 연변박물관 관장 김만석은 자신만만하게 글을 써서 연변일보와 길림영렬전, 렬사전《장백의 투사들》제1집 등에 실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기념비에 올린 13용사명단이 흔들리라곤 생각지도 못하였다.

3


1983년 12월 20일에 화룡현위 당사자료수집판공실에서는 깊이있는 조사와 증실을 거쳐 현당위 상무위원회에 보고를 올려 《어랑촌 13용사》의 틀린부분을 바로 잡을것을 건의하였다. 그때 필자는 이 판공실에 근무하면서 보고작성에 직접 참녜하였었다. 1981년 8월 1일에 세운 기념비가 잘못된것은 시대적제한성으로 말미암아 13용사를 무조건 13렬사라고 인정한데 기인되였다.

용사와 렬사는 련계되면서도 구별되는 두개의 개념이다. 용사는 어느 한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희생되였거나 산 전사들을 가리키지만 렬사는 희생된 사람만을 가리킨다. 용사는 모두가 렬사만을 가리키는것이 아니다. 용사에는 살아있는 동지들도 속할수가 있다.

화룡현에서는 이점을 홀시한데서 크나큰 유감을 빚어냈다. 13용사를 13렬사라고 점찍고 찾으니 어랑촌 13용사전투에서 희생된 김세, 정위, 리구희, 류택규, 류만길, 리길원, 정두호, 김국진, 안흥원 등 9명유격대원은 쟁론할 나위도 없으나 살아난 채동식, 김준덕, 김만선, 천국선 4명이 문제로 나섰다. 《어랑촌13용사》는 당년의 어랑촌추도식에서 그날 전투를 몸소 지휘하였고 채동식 등 4명을 거느리고 사선을 헤치고 나온 현위군사부장 방상범이 《우리 어랑촌에 13용사가 나타났다!》고 선포한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13용사의 함의는 화룡현유격대 1소대의 13명전사들을 뜻한다. 헌데 1981년의 화룡현에서 당년의 채동식 등 살아난 그날의 4명을 13용사에 받아들인다는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그날 희생된 17명가운데서 찾아낸것이 현위서기 최상동, 적위대원 류억만, 소선대중대장 차정숙이다. 그나마 한사람은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여 밝히지 못하고 미결로 남기는수밖에 없었다.

화룡현위 당사판공실의 노력으로 1984년 4월 17일에 연길시 하남의 민족식당 508호실에서 정중한 회의가 열리였다. 이날 회의에는 13용사가운데의 한사람인 채동식로인과 주박물관 관장 김만석, 주민정국 정과장, 화룡현위와 화룡현 당사판공실의 왕청산 등 4명이 참가하여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 13용사의 진정한 함의를 회복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회의에서 채동식로인과 《오늘부터 아바이를 13용사의 한사람으로 인정한다!》고 했을 때 아바이는 눈물이 글썽하여 감사하다고 거듭 되뇌이였다.

그러나 회의후 주민정국에서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회의합의를 실시하지 못하고 《13용사기념비》를 방심한채 내버려두었다. 어느덧 20년 세월이 흘렀다. 누가 말하는 사람도 없으니 세상사람들에게는 력사적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어랑촌 13용사의 본래의 면모를 회복할 때도 된것 같다. 지나간 력사에 대한 연구는 어디까지나 진실을 요하는 엄숙한 사업인만큼 력사의 진실을 그대로 밝힐 의무가 우리 이 세대에게 있다고 본다. 채동식 등 4명 유격대원이 군사부장의 지휘하에서 사선을 헤치고 나왔다 하여 13용사에 들지 못한다는 리유는 없다.

어랑촌 13용사는 누구일가, 13용사는 바로 1933년 음력 1월 18일 근거지에 달려든 300여명의 일제토벌대와 가렬처절한 혈전을 벌린 당년의 1소대13명 전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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