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장군은 레닌을 만난 첫 조선인이 아니다. 이는 시비할 나위조차 없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력사사실을 모르는데서 인기된것이기에 당년 홍범도장군에 앞서 국제공산당 제1차, 제2차, 제3차 대표대회 등에 참가하여 레닌의 접견을 받은 조선인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면 스스로 풀이된다. 흘러간 력사는 언제나 진실로 통하는 법이다.
지금까지 알려지는데 의하면 가장 이른 시기에 레닌을 만난 조선인은 강상주로 나타난다. 물론 이면에 대한 자료가 따르지 못하기에 누가 첫 사람이라고 찍기는 어렵지만 강상주는 1894년 울라지보스또크 태생이다. 그는 어부, 터널작업 토역군으로 일하던중 제1차 세계대전초기에 징병에 끌려 서유럽전선으로 갔다가 1918년에 모스크바 조선인로동자사회조직에 참여, 1919년에는 볼쉐위크당원으로 이해 3월에 국제공산당 제1차총회(즉 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연설까지 한다. 총회기간의 어느날, 레닌이 보통 총회대표자들이 식사하는 장소에 나타나 대표자들과 스스럼없이 롱담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총회 어느 휴식시간에 한 대표자 집단이 레닌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제의하자 레닌은 동의를 표시하며 《멀리 떨여져있던 강상주를 가리키면서 합류할것을 요청했다》고 한다.④ 강상주의 추억속에 남은 위대한 혁명지도자 레닌의 풍모이다.
국제공산당 제2차 총회는 1920년 7월 19일부터 8월 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리였다. 조선인 박진순이 제2차총회조선인대표였다. 박진순은 1897년 연해주태생인데 그를 알자면 리동휘의 한인사회당을 언급해야만 한다.
1918년 4월 28일(로씨야력으로 보면 5월 10일), 로씨야 하바롭스크에서 리동휘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인사회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였다. 한인사회당은 조선민족의 첫 사회주의정당인데 박진순은 이 당의 비서부장이였다. 이 당의 창립에서 리동휘를 도와 결정적역할을 논 인물은 저명한 국제주의혁명가이며 조선인인 김알렉산드라 녀사이지만 중요한 역할을 논 또 한사람은 박진순이다.
박진순은 짜리로씨야시대에 벌써 모스크바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사회주의리론에 비교적 숙달한 인테리였다. 리동휘를 볼쉐위크당에로 이끈 길잡이는 다름아닌 박진순이다. 리동휘는 박진순을 통해 하바롭스크 볼쉐위크당의 지시를 전달받았으며 박진순을 통역으로 내세우기가 일쑤였다. 그만큼 박진순은 조선혁명에 대해 일가견을 가진 조선인혁명가였다. 1919년 4월 25일, 리동휘는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에서 한인사회당 대표자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는 국제공산당에로의 가입신청을 위해 박진순, 박애를 대표로 내세웠다. 어떤 자료에서는 박진순, 박애, 리한영이라고 알려진다. 박애는 한인사회당의 부위원장이고 리한영은 정치부장⑤이다. 그런데 쏘베트로씨야는 제국주의개입군들과 백위군의 봉쇄작전에 처했기에 모스크바행은 비밀리에 행해져야 했다. 도중 예까쩨린부르끄에서 박애가 병이 난데서 박진순은 혼자서 천신만고를 겪으며 1919년 11월경에야 모스크바에 이를수있었다. 어떤 자료는 박애도 모스크바에 간것으로 알려진다.
1920년 7월 19일부터 8월 6일까지 사이 국제공산당 제2차총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자 박진순은 한인사회당 대표로 이 대회에 참가하였으며 결의권을 행사할수 있었다. 결의권은 국제공산당에 무조건가입을 성명한 당에만 주었다고 하는데 박진순은 리동휘의 당을 국제공산당성원으로 등록하는데 성공하였다. 또 대회에서 원동문제를 가지고 훌륭한 연설을 하여 대회참가자들의 이목을 끌고 레닌의 접견까지 받았다고 하니 그 시대의 조선인으로서 참으로 희귀한 일이 아닐수 없다.
보다 경의로운것은 제2차총회기간 찍은 사진들 가운데 레닌의 집무순간이 담긴 사진하나가 있는데 레닌의 곁에서 사진기정면을 진지하게 주시하는 젊은 조선인이 바로 박진순이라는 것이다. ⑥
1919년 8월 30일, 리동휘는 상해림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해 김립과 사위 오영선 등과 함께 상해로 갔다. 림시정부는 이해 4월 10일에 수립되였는데 이 정부에서 리동휘는 처음 군무총장으로 있다가 몇달후에 국무총리로 추대되였다.
이해 10월, 리동휘는 안창호, 려운형, 리동녕, 리시영, 신규식 등 요인들과 회합을 가지고 모스크바 국제공산당 2차대회에 대표를 보내여 레닌정부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고 독립운동자금을 얻어보자고 하였다. 그 대표로 려운형, 안공근, 한형권이 선출되였는데 결국 리동휘는 정사에 능한 한형권만을 밀파하였다. 이렇게 되여 한형권은 모스크바에 가서 먼저간 동료당원 박진순 등의 협조로 레닌의 접대를 받았고 독립운동 자금 60만루불(40만루불이라고도 한다)을 받았다.
국제공산당 제3차 총회는 1921년 6월 22일부터 7월1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였다. 이르크쯔크파의 남만춘, 한명세, 서초, 장건상, 안병찬 등이 모스크바에 파견되여 제3차총회에 참가하였다. 대회에 앞서 이들은 로씨야 공산당대표 슈미야스끼의 도움으로 5월 말에 레닌을 만나게 되였다.⑦
1921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서로 대립하고있던 리동휘의 상해파와 이르크츠끄파는 1921년 5월에 고려공산당 창립총회를 가지고 전체조선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당으로 떠올랐다. 총회는 남만춘 등을 국제공산당 제3차 총회대표로 선출하였다.
남만춘은 1892년 극동지구의 아무르주 태생이다. 그의 혁명활동은 학업과 더불어 시작되였는데 1920년 1월에는 이르크쯔르크에서 창설된 국제공산주의사단의 참모장 책임을 맡았다. 같은해 3월 그는 이르크쯔크 도당위원회 소수민족부장을 맡아나섰다. 한명세는 연해주 태생이다. 그는 1917년 가을에 사회혁명당에 입당했다가 이 당의 반혁명적 본질을 알고 퇴당하여 1921년 5월 고려공산당 총회에 참가하고 총회중앙위원과 국제공산당 제3차 총회대표로 선출되였다.
상기 남만춘, 한명세, 서초, 장건상, 안병찬 등은 이렇게 모스크바에 가서 국제공산당 제3차총회에 참가했고 레닌의 접견을 받은 조선인으로 되였다. 총회에서 남만춘은 장편연설을 하여 고려공산당의 립장을 천명하였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기간 모스크바와 뻬제르부르그에서 극동민족대회가 열리였다. 홍범도장군은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가 레닌을 뵈울 기회를 가진것 같은데 한명세는 또 극동민족대회 대표로 모스크바에 갔고 《레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행운》⑧을 지니였다. 진짜 행운스럽게도 두번이나 레닌을 만난 조선인으로 되였다.
레닌을 두번씩이나 만난 사람은 한명세뿐이 아니다. 리동휘 한인사회당의 박진순도 또 한번 레닌을 만난 영광을 한 몸에 받아 안았다. 두번째는 혼자가 아니라 리동휘 일행속의 한사람으로 나타났다.
1921년 5월에 리동휘는 조선국내와 중국 동북, 로씨야의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 등지의 대표들 참가하에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당재건을 선포하고 당선언을 채택하였다. 대표자회의는 국제공산당 파견대표로 리동휘, 박진순, 홍도를 선정하였는데 리동휘와 박진순은 이해 6월말에 상해를 떠났다. 바다길을 택해 인도양, 프랑스를 거치는데서 11월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할수 있었다. 홍도는 할빈, 치따를 거쳐 모스크바에 이르렀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기간 그들은 국제공산당 관계자들과 활발한 접촉을 가지면서 국제공산당의 수령 레닌을 만나 뵐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드디여 11월 26일(28일?) 오후 다섯시에 레닌이 리동휘 등 대표를 회견하련다는 통지가 전해졌다. 국제공산당은 리동휘의 당을 조선혁명을 대표하는 조선공산당으로 인정하였다.
아래 리동휘가 지도한 대표단의 통역 자격으로 레닌과의 회견에 참석한 A.A.김의 회고담을 그대로 펼쳐보기로 하자. A.A.김은 1900년에 연해주 하산구역에서 태여났는데 1921년 5월에 이르크쯔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총회에 참가하고 같은 해 11월 모스크바에 가게 되였다.
《…때는 1921년 11월이였다. 나는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와의 관계를 위해 도착했던 조선인사절단의 비서자격으로 모스크바에 갔다. 우리 공산당의 차후활동과 관계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였다. 우리는 이제 극동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떠나기 이전에 우리의 경애하는 지도자 블라지미르 일리치를 만나보고 싶었다. 우리의 이러한 소망은 이루어지게 되였다. 우리의 전화신청에 대해 곧 레닌이 조선혁명가인 우리 사절단의 대표 리동휘와 만나고 싶어한다는 회답이 왔다.
회견은 저녁 5시로 정해졌다. 회견에 늦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한시간전에 크레믈리궁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네사람이였다. 리동휘, 홍도, 박진순, 그리고 나…
우리는 커다란 방으로 통하는 레닌의 집무실로 안내되였다. 우리 모두는 대단히 흥분했다. 여러 반대자들과 투쟁했던 백발의 리동휘도 흥분했다. 다른 동무들도 흥분했다. 나 역시 흥분해 있었다. 내 임무는 통역이였다.
문이 열렸다…막역하고 자애로운 블라지미르 일리치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꿈을 꾸듯이 지도자의 손을 잡았다. 레닌은 우리의 손을 두손으로 쥐면서 우리모두와 따뜻하게 인사했다. 그는 조선식 악수례법을 잘 알고있는듯 했다. 그리고 나서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조선공산당원들을 만나게 되여 정말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등나무 팔걸이의자에 앉더니 그는 손짓으로 우리에게 반대편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우리에게는 30분동안의 회견시간이 주어졌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곧 회견에 들어갔다. 리동휘는 조선어로 말했다. 그는 우리가 레닌의 추종자로서 블라지미르 일리치를 만나러왔기 때문에 레닌과 대단히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레닌은 미소를 띄면서 솔직하게 대답하자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뒤 레닌은 직선적이면서도 공손하게 자신은 극동지방의 제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조선과 린접국가들의 상황에 관해 상세하게 알려줄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될수있는대로 간결하게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적상황을 설명했다. 우리의 정보전달은 간간히 블라지미르 일리치의 예기치 않은 질문으로 중단되였다. 회담과정은 대단히 푸근하고 격의없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레닌은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일본이 조선에서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식민정책에 관해 주의깊게 경청했다. 우리는 책상에 놓여있는 지도를 펼쳐서 조선의 철도배치와 철도구간을 블라지미르 일리치에게 설명해주었다. 또 전차로선의 부설, 일본식민주의자들의 공장개설 등도 알려주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조선 공산주의지하단체의 활동에 관심을 표명했다. 레닌은 1919년 3.1봉기의 패배원인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나서 리동휘에게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조건에 관해 캐물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문화의 중심지에서 살고있는 이때에 당신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추적을 당하면서 산악과 숲을 따라 표류하고 있구려. 그대들을 위해 국제적원조를 조직해야겠군요.〉
이때 한 녀성이 들어오더니 회견시간이 지났다고 알려주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회견시간을 25분 연장하겠다고 말했다.
레닌의 책상에는 문서꾸러미가 놓여있었다. 그 가운데서 나는 예전에 발송했던 우리의 정보문서를 지적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통 그것을 볼 시간이 없었다고 사과했다.》
A.A.김의 이 회고담은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리동휘편에 실리였는데 원문은 《태평양의 별》하바롭스크., 1926년 1월 22일자이다. 면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닌은 하나하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리동휘의 손을 특히 오래잡으며 믿음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홍범도에 먼저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레닌을 만나보았다는것을 알수 있다. 주요한 도경은 국제공산당대표대회거나 기타 대회등이였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19년, 국제공산당 제1차 총회에서 조선인 강상주가 레닌의 접견을 받다. ▲1919년, 조선인 한형권이 리동휘의 파견을 받고 모스크바에 갔다가 레닌의 접견을 받다. ▲1920년, 국제공산당 제2차 총회(7월 19일—8월 6일)에서 조선인 박진순이 레닌의 접견을 받다. ▲1921년, 국제공산당 제3차 총회(6월 22일—7월 12일)기간 조선인 남만춘, 한명세, 서초, 장건상, 안병찬 등이 레닌의 접견을 받다. ▲1921년 11월 26일, 리동휘, 박진순, 홍도, A.A. 김 등 넷이 레닌의 접견을 받다. ▲1922년, 로씨야 극동민족대회( 1월 21—2월 2일)가 모스크바에서 열렸을 때 조선인 한명세가 또 한번 레닌의 접견을 받다. 홍범도장군도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가 레닌의 접견을 받은것으로 알려진다.
여러 자료를 통해 살펴 본, 조선인들이 레닌을 만난 력사사실들이다. 분명히 밝힐것은 이는 필자가 찾은 자료의 범위내에서의 사실이지 레닌을 만나본 조선인의 전체가 아니라는 저이다. 이밖에 레닌을 만나 본 조선인들이 더 있을수 있으나 필자는 아직 이 이상 자료를 더 접촉하지 못했다. 어찌하든 홍범도장군에 앞서 레닌을 만난 조선인들이 수두룩하다는것은 드팀없는 력사사실이라 하겠다.
주 해:
①《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 제 126페지 ②동상서 90페지 ③홍범도장군(한어문),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9월, 제221페지 ④《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 제133-134페지 ⑤한국공산주의운동사(1), 제167페지 ⑥《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 제128페지 ⑦동상서, 제37페지 ⑧ 동상서, 제 139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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