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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청산리 백운평대참안???
2006년 07월 17일 00시 00분  조회:3903  추천:119  작성자: 리함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11)

청산리 백운평대참안???

리 함


일전에 필자는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순위로 《〈해란강대혈안〉진상》 이란 글을 사이트에 올린바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른바 《해란강대혈안》자체에 의문을 던지면서 이 《대혈안》에서 간악한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살해된 해란구의 혁명자와 백성이 1700여명이 아니라 170여명이라고 밝히였다. 헌데 올 여름이래 청산리전투나 경신년대토벌을 엮은 글들이 가끔 발표되면서 이런 과대서술이 다시 란무하는데 대하여 경악하지 않을수 없다.

아래 청산리전투를 취급한 두편의 인용문을 보기로 하자.

—백운평전투때에도 적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사람들을 젖먹이까지도 빼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휘둘러 쏴죽이고는 시체를 불속에 집어넣었다.

—당시 백운평에는 인가가 50,60세대가 살고있었다고 한다. 한세대당 5명으로 쳐도 백운평참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300여명 된다. 오붓한 조선족마을은 일제의 야수같은 만행으로 하루아침사이에 이 세상에 종적을 감추고말았다. 놈들은 청산리마을뿐만아니라 그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

백운평참안을 다룬 두편 글의 해당 인용문이다. 참으로 놀라운 과대서술. 웬간한 참안이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겠지만 우리 겨레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획을 그을 청산리전투의 백운평 주요전적지이니 단순히 스쳐 지날수가 없다. 백운평은 우리 겨레의 반일투쟁사상 잊을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여서 더욱 그러하다.

그럼 어찌하여 백운평대참안은 놀라운 과대서술이라고 하는가? 이는 당년 력사의 진실을 펼쳐보이면 스스로 풀리는 문제이다.

당년 오늘의 화룡시소재지—삼도구, 즉 충신장(忠信場)에서 청산리 백운평까지는 27-28킬로메터 거리였다. 이 50여리 구간은 충신장과 지금의 송하평사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십리 골짜기였다. 이 골짜기에는 송월평, 라월평, 십리평, 평양평(즉 청산촌), 백운평 등 조선이주민들 마을이 있었고 백운평 동북쪽에 베거우 (北沟)와 쟈피거우 등 조선인마을이 있었다. 그중 평양평은 조선의 평양이주민들이 이주한 고장이여서 평양평이라고 불리였는데 1984년에 출판된 《화룡현지명지》에 의하면 평양평이 청산리로 이름을 바꾼것은 1932년이라고 한다. 백운평은 평양평(청산촌)에서 서쪽으로 7~8킬로메터 떨어진 산간마을이였다.

백운평마을의 형편과 청산리 전투때의 형편은 연변주보관서류국(당안관)의 혁명력사자료-3061에 잘 반영되였다. 이 3061에 반영된 자료는 당년 1920년 10월 백운평참안을 겪은 이 마을의 력사의 견증자들이 직접 구술한 자료들인데 이 자료들에 의하면 당년 백운평마을의 인가는 50~60세대가 아니라 22~23세대였다.

력사를 펼치면 1920년 10월, 송월평으로부터 청산리백운평에 이르기까지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부대들이 쫙 덮히였다. 서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는 워낙 충신장아래 토산자 관문에 진을 치고 뒤따르는 일제침략군을 일망타진하려다가 그 일대 군중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싸움터를 지금의 청산쪽으로 돌리였다. 그들은 충신장의 대진창에서 점심을 치르고 이 늘찬 수십리 서쪽골짜기에 들어섰는데 삼도구일대 국민회계통의 군중들은 국민회와 군정서간의 계선을 타파하고 독립군에 초신, 의복, 정보 등을 전하고 식량을 거두어 부대주둔지로 운반하였다. 송월평의 조선사람들은 큰 소 한마리까지 잡았다. 그때 적들이 계속 뒤쫓는데서 서일과 김좌진장군은 송월평군중들이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부대를 인차 해란강을 거슬러 계속 올라가게 하였다.

일제침략군이 새까맣게 밀려든것은 독립군부대가 떠난뒤였다. 통역 한놈이 송월평의 한 군중을 붙들고 독립군이 어디로 갔는가고 물으니 그 군중은 《우리 백성들이야 어찌 알겠소.》하고 대꾸하였다.

이때 마을 뒤켠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리였다. 적들은 김좌진과 동성동명인 한사람을 묶으며 야단법석이였다.

애매한 군중이 욕을 보는 판이였다. 이때 일본말을 아는 마을의 김천일농민이 일본군장교한테 다가가 경례를 굽석하고 무어라 여차여차 하자 일본군장교는 고개를 끄떡이며 김좌진군중을 풀어놓게 하였다.

이는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송월평에서 전해진 일화이다.

이미 전에(즉 송월저수지가 앉기전에) 전용뻐스로 수차 답사해보니 그때의 화룡현성에서 청산리까지 2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20킬로메터를 반시간안에 달린 것이다.

전용뻐스는 청산에 잠간 멈춰섰다가 베개봉밑으로 뻗은 서쪽 산길을 들추더니 10분만에 청산촌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백운평 마을옛터에 이르렀다. 백운평 마을터는 베개봉밑의 좁은 개활지에 놓였는데 개활지바닥으로는 작은 개천에 지나지 않는 맑은 해란강물이 골따라 졸졸 흐르고 북쪽켠엔 북쪽골이라 할만큼한 골이 가로 뻗어있었다.

다시 력사의 현장에 다가서면 송월평을 급급히 떠난 북로군정서부대는 백운평마을에 잠간 머물렀다가 베개봉아래 직소(直沼)부근에서 밤을 새웠다. 직소란 로일령에서 발원한 해란강이 이 계곡사이로 흐르다가 이곳 바위에 이르러 내리 꼰지며 꽤나 큰 소를 이룬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때는 마가을이라 독립군장병들은 저마다 오스스한 한기에 시달려야 했다. 적의 대부대를 지척에 두고 모닥불 한무지 피울수 없었던것이다.

당년 력사견증자들의 회억자료에 의하면 새날이 밝아오자 백운평마을의 조선사람들이 아침밥, 초신 등을 갖추어가지고 몇리 떨어진 계곡의 부대주둔지를 찾았고 식사가 끝난후 어떤 군중들은 돌아서다가 골안의 웃북골 다리목에서 조선 라남주둔 제19사단 73련대의 400여명 일제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고 한다. 적들이 어디로 갔다오는가고 물으니 그들은 안도로 갔다온다고 했고 독립군을 못 보았는가고 하니 모르쇠를 댔단다. 결과 놈들은 시름놓고 골안으로 올라가다가 우리 독립군부대의 매복에 들어 불과 얼마안되여 전멸당하고 겨우 마병 셋이 살아달아났다고 백운평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해당자료들도 약 400명이 전멸당했다고 전하고있다. 10월 21일 아침 8시경에 야스가와 (安川)소좌가 인솔한 야마다(山田)련대의 전위부대가 백운평을 지나 얼마안되여 북로군정서 부대매복에 들어 거의 반격도 못하고 약 200명이 무리죽음을 당했다. 야마다련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 산포 등 중무기를 앞세우고 발악적으로 달려들다가 역시 200~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말았다. 이러고보면 당년 백운평사람들의 증실이 력사자료와 기본상 어울린다. 서일, 김좌진의 독립군부대는 청산리대첩 첫 전투에서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을 흔히 백운평전투라고 한다.

일본침략군은 미쳐 날뛰였다. 적후원부대는 백운평사람들 때문에 저들 부대가 녹아났다면서 백운평마을에 달려들어 그 분풀이로 이 마을 22-23세대의 녀자들을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로 생긴건 어른이고 아이고 몽땅 집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력사의 진실이 바로 이러하다. 온 마을 남녀로소가 아니라 남자들만 말이다. 집안에서 뛰쳐나오는 남자들에 대해 적들은 총창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기관총을 내둘렀다.

허나 남자들이라하여 모두가 죽은것이 아니였다. 김응준이라는 어린이와 이 마을의 민간의사 리희보 및 그의 셋째아들 셋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는 어찌된 일인가, 백운평사람들의 증실자료에 따르면 김응준어린이의 집은 마을 뒤켠의 외딴집이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가슴으로 원쑤의 총창을 막아나서며 시간을 지연시켰기에 김응준은 달아나 나무밭에 몸을 숨길수 있었다. 리희보는 북쪽의 쟈피거우에 왕진을 갔기에 살았으며 6살난 그의 아들은 리희보의 안해가 재빠르게 녀자옷을 입힌데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외 남자라는건 전부가 불속에 꺼꾸러졌다.

이는 당년 일본침략군의 만행에서 살아난 백운평마을과 그 주변마을사람들의 진실한 증언이다. 이 자료가 지금 연변주보관서류국에 보관되여 있다. 하기에 필자는 백운평의 당시 인가를 50~60세대로, 한세대당 5명으로, 전체 살해를 300여명으로 지적한것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한다. 모르면 추측으로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학자의 준칙아닌 준칙이건만 때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남자셋에 녀자들이 살아남은것은 백운평의 당시 현실이다. 그리고 백운평일대와 청산리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는것은 모르는 소리이다. 20여년간 이면에 주의를 돌리였어도 백운평을 제외한 마을들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송월평 등지 군중들의 증실자료에도 이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다. 백운평의 민간의사 리희보가 북쪽의 쟈피거우에 왕진을 갔다가 살게 되였다는것도, 송월평, 라월평, 십리평 등 마을의 군중들이 청산리전투와 경신년대토벌을 증실한 자료를 보아도 이런 마을들이 일본놈들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좋은 근거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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