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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문(12)- 김창걸선생과 그의 처녀작문제
2006년 10월 01일 00시 00분  조회:4538  추천:75  작성자: 리함
김창걸선생과 그의 처녀작문제



리 함



필자의 말:
올해 2006년은 고 김창걸선생 문학창작활동 70돐이 되는 해이다. 이런 뜻깊은 해를 맞으며 필자는 이미의 평론글들에 기초하여 쓴 논문 《김창걸선생과 그의 처녀작문제》를 《연변문학》9월호에 실었다.

다 알다싶이 김창걸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선구자이고 개척자이며 우리 향토문학의 정초자로 높이 받들린다. 이런 선생이 용정은진중학교 1학년을 다니던 1926년 14살 어린 나이때부터 벌써 학교학생회에서 꾸리는 벽보—《은진시보》에 수십편의 시와 시조, 잡문을 발표하더니 3학년때인 1928년 1월에 쓴 산문시 《동색》(즉 겨울색)은 혁명시인의 기질이 있다는 아주 높은 평가를 받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선생은 문학창작에 헌신하려는 욕망으로 가슴을 불태웠지만 7~8년이란 기나긴 방랑생활을 거치다나니 1936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문학도의 문학창작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39년 양력설 그때의 《만선일보》에 실린 처녀작 《건설보》를 계기로 선생은 창작의 황금기를 맞아 수십편의 작품을 창작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86년에 연변에서는 김창걸선생문학활동 50돐기념행사를 가지고 10년후의 1996년에 또 김창걸탄생 85돐 대형기념세미나를 가지였다. 올해 김창걸선생문학창작활동 70돐을 맞으며 필자는 연구문집 (2)의 첫편으로 《김창걸선생과 그의 처녀작문제》를 넣으면서 선생의 문학창작활동 70돐을 기념하는바이다.



1.서론




김창걸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선구자이고 개척자이며 향토문학의 정초자이다. 이를 두고 연변대학 고 정판룡교수는 김창걸선생탄생 85돐에 즈음하여 이렇게 지적하였다.

1970년대까지도 김창걸선생은 일찍 1930년대중엽부터 글을 썼던 작가 혹은 소설《암야》의 작자로만 알려진것이 1980년대 중국조선족문학사가 정리되면서 부터는 해방전 조선족소설문학의 대표작가의 하나로 부상되였으며 최근에는 암흑기 조선족문학사의 맥을 잇는 《일제통치하의 재만문학의 대표작가》로, 일반적인 조선문학으로부터 점차 중국특색을 가진 조선족문학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선구자적역할을 한 작가라는데로 의견이 점차 모아지고있다.①

그러면서 정판룡교수는 김창걸선생을 우리 문학의 선구자이며 개척자, 해방전 중국조선족문학의 대표작가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그대로 중국조선족문학계의 기성정론이기도 하여 1996년 김창걸탄생 85돐기념세미나에서 일치한 견해를 보이였다. 그만큼 김창걸선생의 우리 문학사적위치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김창걸선생과 그의 작품을 두고 여러가지 부동한 견해들이 존재하는것은 사실로서 가장 관심사로 되는 쟁점의 하나는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라고 할수 있다. 이는 연변대학 권철교수의 지적처럼 《아주 정상적인 현상》②으로서 이같은 문제를 풀며 탐구하는것은 중국조선족문학사의 맥락을 옳바르게 파악하는 면에서도 필요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이에 본문에서는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를 두고 제나름의 견해를 내놓으려 한다.

확실히 우리 문학계에는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를 가지고 같지 않은 두가지 관점이 존재하고있다. 처녀작이란 일반적으로 말해 작가가 간행물에 발표한 첫 작품이란 의미를 띠고있고 또 문단에 들어선 첫 작품이란 뜻도 갖고있다. 다시 말하면 창작활동의 시작이라고도 할수 있다.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는 또 광복전 전반 중국조선족문학, 더우기 소설사의 개척과도 관련되기에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면 안된다.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를 두고 한가지 견해는 1939년 1월에 《신춘문예지》에 발표한 《건설보》가 처녀작이라는 부류이다. 이 견해를 견지하는 이들은 김창걸선생 본인을 망라하여 원 《연변문예》편집부의 강장희선생, 연변대 현룡순교수, 원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의 림연연구원 그리고 필자 등을 들수 있다.
다른 한가지 견해는 1936년에 창작된 미발표작 《무빈골전설》(단편소설)을 처녀작으로 보는 견해로서 우리 문단의 주류를 이루고있다. 이 견해를 견지하는 대표적 이들은 연변대 권철교수를 중심으로 북경의 박충록교수, 연변대 전국권교수 등이다.

상술한 두가지 설법은 림연선생이 1996년 7월에 김창걸탄생 85돐기념세미나때에 김창걸선생의 학력과 처녀작문제에 관한 의문을 과제로 내놓았고 김창걸의 《절필사》에서 해석의 근거를 찾았다. 림연선생은 또 《건설보》의 류실에 유감을 표시하고《무빈골전설》이 처녀작으로 된 기성사실을 묵인하였지만 1939년에 발표한 《건설보》를 처녀작으로 할것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기성연구를 보면 김창걸의 처녀작은 연구자의 연구시각이 다름에 따라 부동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전자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처녀작의 표준을 신문간행물에 발표되어 독자와 대면한 여부에 따라 그 처녀작표준을 가늠하였지만 후자는 그 시각을 창작조건과 발표조건의 제약성을 강조하는데 두었다. 전자는 거의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한 실정이고 후자가 공인되어 기성사실로 굳어진 상황이다. 1996년 7월에 열린 김창걸탄생85돐기념세미나의 개막사에서도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하였고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도 《김창걸은 1936년〈무빈골전설〉을 창작하여서부터 자기의 진정한 창작생애를 시작하였다.》③고 밝히였다.

이 같지 않은 두가지 견해를 두고 필자는 본문에서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는 마땅히 객관사실을 존중하는 토대에서 실사구시하게 역사사실문제를 구명하는 원칙에 따라야 하고 문학사적인 연구에서도 이런 원칙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보면서 필자나름으로의 견해와 주장을 펴보려고 한다.




2.처녀작문제를 둘러싼 같지 않은 두가지 견해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를 두고 먼저 기성사실로 문단을 휩쓰는 후자견해를 보기로 하자.
후자견해의 대표자는 권철교수라 할수 있다. 권철교수는 김창걸선생과 그의 문학연구에서 우리 문학의 선구자, 개척자로 끌어올린 위인이지만 처녀작문제에서는 미발표작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주장하고있다. 그는 1986년의 한편의 글《우리 향토문학의 개척자》에서 《작가의 창작생애는 1936년 처녀작 <무빈골전설>을 내놓은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쓰고있다.④ 이는 권철교수의 일관한 주장으로서 조선족문학계의 기성사실로 굳어지도록 했다. 이에 따라 문학계는 이 주장을 따르게 되는데 장백일 서명으로 된 《김창걸단편소설연구》⑤는 보다 발휘되는 양상을 보이고있다.

1936년 처녀작 《무빈골전설》(명동야학교의 교재, 김창걸 50주년기념 기점작)을 시작으로 창작활동에 들어갔다.

작가 김창걸의 단편소설은 1936년 용정명동에서의 야학교교재로부터 시작된다. 그점에서 처녀작 《무빈골전설》은 그의 작가생활 50주년 기념의 기점작이 된다.

이같이 처녀작 《무빈골전설》주장은 널리 동조되고있는데 북경의 박충록교수는 《해방전 김창걸의 작품세계》에서 《처녀작 <무빈골전설>(1936년)은 이주초기 빈부의 모순과 계급모순을 보여준 작품》⑥이라고 했고 연변대 전국권교수는 《일제치하 암흑기 간도땅 인간운명의 항쟁등불》에서 김창걸선생은 《처녀작 <무빈골전설>(명동야학교 교재)을 시작으로 창작생활에 들어갔다.》⑦고 쓰고있다. 이들은 모두 이미 굳어진 기성사실을 그대로 따르고있을뿐이다.

상기 실례들은 1936년 미발표작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보는 대표적주장이고 견해들이다.
그럼 전자의 견해로 되는 1939년 《건설보》 주장을 어떠하고 역사의 사실은 또 어떠한가?

1981년, 김창걸교수는 《중국소수민족현대작가략전》에서 《당시 장춘에서 발간된〈만선일보〉에서 양력설이 되면 신춘문예발표장을 벌렸는데 1939년 1월에 나의 단편소설〈건설보〉가 입선되었다.》고 썼다.
1981년, 바로 새해벽두에 《연변문예》편집부의 강장희선생이 작가 김창걸, 시인 리욱 선생 방문기 《로작가 탐방기》를 《연변문예(1981.4)》에 발표하였다. 방문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김선생은 1936년부터 창작에 몰두하여 1939년 1월에 마침내 《만선일보》(신춘문예)에 첫작품을 발표하였다.

1982년, 현룡순선생은 《김창걸과 그의 단편소설 〈암야〉》에서 《김창걸은 1939년 신춘문예에 처녀작 〈건설보〉를 발표해서부터 3년사이에 22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현룡순선생은 평론과 론문에서 줄곧 이 관점을 견지하였다. 문학계에서《건설보》를 처녀작으로 보는분은 현선생 한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1986년에 이르러 현룡순선생도《현실주의작가 김창걸》이란 글에서 김창걸의 처녀작을 《무빈골전설》로 고치였다.

1981년 7월, 필자가 연변대학에서 공부할 때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7차례나 김창걸교수를 직접 취재한적 있고 10여만자에 달하는 취재방문기를 남기였다. 그때는 가치를 많이 가늠 못했지만 지금 보면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때 김창걸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1926년에 은진학교를 다닐 때 작문을 잘 써 벽보〈은진시보〉에 몇십편의 시조와 잡문을 발표하였다. 산문시 〈겨울색〉은 전문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선생을 위해 썼는데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선생님은 〈군에게 혁명시인의 기질이 있으니 앞으로 더 노력하시오.〉란 평어를 달아주었다. 이때부터 마음속으로 문학창작을 하려는 욕망이 움텄다. 1936년부터 노트에 발표할 가능성이 많지 않은 작품을 적잖게 창작하였으며 1938년까지 견지하였다. 1939년 봄에 이르러 만주조선문문예보에 즉 〈만선일보〉에 〈건설보〉를 발표하게 되었다.》

상술한 자서전과 강장희, 현룡순 선생들의 글과 필자의 취재록을 보면 모두 1939년에 발표한 《건설보》를 처녀작으로 하고있다. 진정 처녀작은 1939년에 발표한 《건설보》이다. 이는 의심할바없는 사실이다. 원고의 류실을 여러 경로를 거쳐 해결할수도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필경 발표작이기에 세상 어디에나 남아있을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이든 처녀작은 특수한 의미를 상징한다. 처녀작은 작자가 문단에 등장함을 의미하므로 리정비적인 뜻을 가지기도 한다. 김창걸선생 역시 그러하다. 그는 자기의 《절필사》에서도《무빈골전설》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았지만 《건설보》에 많은 필묵을 들이였다.

필자가 탐방할 때 그는 《1936년에 다시 붓을 들었다.》고 강조하였다. 김창걸선생은 최초에 많은 자서전체작품을 썼는데 발표할 가망이 없었지만 드팀없이 문학창작에 집착하여 노트에 적었다. 그때 만주에 조선문 문예판 —《만선일보》하나밖에 없었기에 입선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건설보》는 도시교원이 촌에 가서 계몽교육을 하는 내용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작자는 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서부터 창작의 황금기를 맞아 몇십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3.《무빈골전설》은 1982년도 발표작




앞에서 언급하다싶이《무빈골전설》은 작자가 1936년에 창작하였지만 그때는 미발표작이였다. 1982년에 와서 료녕민족출판사에서 《김창걸단편소설집》을 출판할 때에야 해빛을 보게 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1936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무빈골전설》은 비록 1936년에 노트에 적은 작품이라고 하지만 1982년에 소설집을 낼 때 작자가 그때의 창작과정을 회상하여 재창작한 작품이다. 본인의 말을 빈다면 (1) 1982년에 발표한 소설집에서 3분의 1은 간행물에 발표된것이고 (2) 3분의 1은 원고가 류실된 상황에서 그때의 창작을 되살려 회상하며 보충, 창작한것이다. 《무빈골전설》은 두번째상황에 속한다. 그러므로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보는것은 억지적인 감이 없지 않다고 본다.

이를 두고 필자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사이트에 올린 평론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에 대하여》에서 무빈골전설은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이 아니라고 지적⑧한바 있다. 김창걸선생의 창작생애를 돌이켜보면 이는 불보듯뻔한 일이라는것을 쉽게 가려볼수가 있다.

ㄱ.김창걸선생의 경력담

김창걸선생의 생전취재에 따르면 선생은 1911년 12월 21일(양력)에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인생의 노를 잡게 되었다. 6살 되던 해 1917년에 부모를 따라 당년의 화룡현 지신사 명동에 자리를 옮겨앉았다. 적절히 말하면 명동에서 3리 되는 고장—장재촌 수남마을이였다. 선생은 겨울철에만 꾸리는 당지의 구학서당에서 이태 겨울 공부하다가 1919년에 6년제 명동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 생활난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일년간 구수하 구가지팡에서 지팡살이를 한데서 선생은 횡도하자 구학서당에서 반년간 공부를 하다가 다시 명동에 돌아가서 2학년 공부를 시작하였다.

소학교공부를 마친것은 1926년 3월이였다. 이해 3월에 김창걸선생은 용정에서 중학시험을 보고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 은진중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여느 학생들과 더불어 대성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던 이해 1928년 9월에《제2차 간도공산당사건》으로 망명하여 소련 연해주 블라디보스톡로 갔다. 그때부터 선생의 7년간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다. 때로는 돈화땅에서 지하공청에 가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울과 조선 흥남, 원산 등지를 떠돌기도 하였다.

1934년 봄에 김창걸선생은 집에 돌아와 명동학교에서 한 10리 떨어진 신동학교에서 5년간 교편을 잡았다. 1940년 봄에는 페결핵진단으로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그래서 목단강에 가서 북만무역주식회사 사무원으로 뛰다가 1940년 11월에 교하현 황송전에 갔고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김창걸선생의 창작생애는 어떠했을가, 이를 알려면 선생의 중소학교시절을 살펴보는것이 좋을듯싶다.
김창걸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일찍 소학교시절부터 글짓기를 꽤나 잘한 모양이다. 1926년 용정은진중학교 1학년시절에는 작문을 잘지어 더욱 소문이 났다.

1학년시절의 어느날 하학후 상급생들이 우루루 선생을 에워쌌다. 김학천(그때 이름)이 누군가 보자는것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작문선생이 김창걸선생이 쓴 작문을 상급생들 반에 가서 범독,소개한데서 상급생들의 인기를 끈것이였다. 한데서 선생은 은진중학교 1학년 첫 학기, 14살 어린나이에 학교학생회에서 꾸리는 《은진시보(时报)》의 벽보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시와 시조 그리고 잡문 수십편을 벽보에 발표하였다. 3학년때인 1928년 1월에는 《동색(冬色)》이란 작문을 썼는데 작문선생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작문선생은 선생의 작문에 《혁명적시인의 색채가 농후하다. 힘써 정진하도록 하라.》는 평어를 써주었던것이다.

이것이 김창걸선생의 창작생애의 한단락 역사이다. 그뒤 7~8년이란 방랑생활이 시작되면서 글을 쓸 시간적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선생의 말씀을 빈다면《방랑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는 문학을 할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없었다.》

했으나 방랑생활가운데서도 글을 써보자는 생각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이 기간 선생은 최서해와 리광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만큼 선생은 이들의 글을 많이 읽었던것이다. 더우기 방랑생활과 창작생활은 말그대로 선생의 문학창작의 밑거름으로 되었다.

ㄴ.《무빈골전설》의 진실한 발표이야기
상기 《ㄱ》가 김창걸선생의 경력담이라면 《ㄴ》는 《무빈골전설》의 진실한 발표이야기를 밝히게 된다.
1928년 9월부터 시작된 7~8년의 오랜 방랑생활끝에 김창걸선생은 명동일대의 신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뭔가 써보겠다는 욕망을 다시 불태우게 되었다. 김창걸선생은 1936년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흥미를 느낀것이 소설이였다. 발표할 가망이 없었지만 내처 노트에 쓰기만 하였다. 그래서 만 이태만에 수십편을 써보았다. 선생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으면 《1938년까지 3년동안 습작을 해본셈》이다.

그 시절에 조선사람들에게 만주로 불리운 동북에는 조선신문 문예면이라야 신경(즉 장춘)에서 꾸리는 《만선일보》뿐이였다. 그때 만선일보에서는 해마다 신춘 원단이면 응모활동을 벌리군 하였다. 이에 솔깃한 김창걸선생은 1938년 겨울에 3만여자나 되는 단편소설 《건설보(建设谱)》를 투고해보았는데 이 소설이 기적적으로 만선일보에 발표되었다. 1939년 새해 첫날에 신춘현상문예당선결과가 발표되였던것이다. 그때로부터 1942년까지 선생은 만선일보의 문예란에 대표작이라고 불리우는 《암야(暗夜)》와《세상인심(世情)》,《락제(不及格)》, 《청공(晴空)》,《편운(片云)》,《마리아》 등 10여편의 단편소설을 륙속 발표하여 작가로 이름을 떨치였다.

하다면 이른바《처녀작》으로 불리운 《무빈골전설》을 언제 발표하였는가, 알고보면 이 단편소설은 미발표작이였다. 그대로 솔직히 여쭈어본다면 습작으로 노트에 적어본 상태였다. 그나마 선생의 양동생이라고 불리운 양군이 습작품을 적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다가 해방때에 분실한데서 찾을길이 없었다. 헌데 어이하여 분실된 습작품─《무빈골전설》이 처녀작으로 되였는가? 이를 알자면 지난세기 80년대초로 돌아가야 할것 같다.

1980년 10월에 김창걸선생은 당시의 료녕인민출판사로부터 광복전 소설집을 무을 청탁을 받았다. 연변대학의 권철교수님이 료녕출판사의 박화선생한테 소개하여 이루어졌던것이다. 박화선생은 연변의 동성용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9년에 료녕출판사로 전근된 시인이였다.

그 시절 김창걸선생은 시안의 한 초라한 단층집에서 생활하였는데 연변대학치고 제일 추운 집이라고 하면 선생의 집이였다고 한다. 때는 한창 겨울철이라 너무도 추워서 이불을 쓰고 밥상에서 글을 써야 했다. 장장 8개월동안 매일 앓는 몸으로 두세시간씩 써내려갔는데 즐기는 산책도 하지 못하여 말이 아니였다. 선생은 필자의 취재때 정말 4월과 5월은 죽게 보냈다고 실토하였다. 출판사에 원고를 띄운 날은 1981년 5월 31일 오후 2시였다. 이렇게 출판된 소설집이 1982년 출판으로 된 《김창걸단편소설선집》(해방전편)이였다. 《무빈골전설》은 이 소설집에 첫편으로 수록되였는데 작자가《1936년 명동에서》라고 서명한데서 료녕인민출판사에서는 소설집의 후기 작자소개에서 《무빈골전설》을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으로 소개하고말았다.

여기서 밝힐것은 이 소설집에 실린 13편의 단편소설들은 발표된 작품과 노트습작품이 산실된데서 거의가 회상으로 당년의 스토리를 되살려 정리하였다는것이다. 한데서 김창걸선생은 소설집의《작품집을 내면서》에서 《다시 새로 창작하는듯한 공력이 들었》다고 솔직히 터놓았다. 19세기 이주개척시기 조선족농민의 피눈물나는 운명을 다룬《무빈골전설》은 습작품인데다가 작품을 적은 노트를 잃어버린데서 회억을 더듬으며 다시 써서 소설집에 올리여야 했다.

이것이 《무빈골전설》의 진실한 발표이야기다. 사실 1936년에 습작으로 써보았지만 재창작으로 발표된것은 1982년이였다. 선생의 첫 작품으로 불리운 《무빈골전설》이 1936년에 창작되었다 하여 1936년이 김창걸선생의 창작생애의 시작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1986년에 김창걸선생의 문학활동50돐기념행사가 마련되었다.
이상에서 무빈골전설의 진실한 발표이야기를 헤아려보았다. 《무빈골전설》이 사실 1936년에 습작으로 써보았지만 재창작으로 발표된것은 1982년이다. 하기에 필자는 《무빈골전설》은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4.1936년처녀작 형성원인과 무리




세상, 더우기 문학에서의 모든 견해와 주장은 제나름의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무빈골전설 주장도 례외가 아니다. 이 주장의 원인을 두고 림연선생은 《문학과 예술》 1996년 제5호에 실은 한편의 글에서 이렇게 분석하였다.

첫째,《김창걸단편소설집》을 펴낼 때《무빈골전설》을 첫 소설로 수록하였다. 그 창작년대는 1936년으로 하여《건설보》보다 이르다.

둘째,《건설보》의 원고가 류실하였기에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우리는 부득불《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대할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것은 인위적인 처녀작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처녀작이 아니라고 보지만 김창걸선생 문학활동종사 50돐을 앞두고 몇몇 권위인사들은 《무빈골전설》이 당년 명동일대 농촌야학실교재로 쓰였다 하여 처녀작으로 인정할수 있다고 보았었다. 이는 억지가 아닐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의 처녀작이라면 지상발표가 아닌 등사본도 처녀작이요, 타자본도 처녀작이 될것이다. 그런 의미라면 김창걸선생이 은진중학교시절 벽보란에 발표했다는 글들이나 3학년때인 1928년 1월의 《동색》이란 작문—산문시도 처녀작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가. 더우기《동색》은 필경 당시 독자와 대면하여 독자들의 공명을 자아냈고 전문가의 평어가 있을뿐만아니라 일정한 범위에서 센세이숀을 일으킨것만은 사실이기때문이다. 이를 두고 김창걸선생은 자기의 《절필사》에서 이렇게 쓰기까지 했다.

산문시《동색》은 혁명적색채를 띠었다고 평가되였는데 이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이것을 금은보화로 생각하였다.

허나 1936년도 미발표작 습작품《무빈골전설》이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으로 될수 없듯이 은진중학교시절 벽보란의 글들이나《동색》산문시도 처녀작으로 될수가 없다. 원인은 단 하나, 공개출판을 통한 지상의 정식발표가 아니기때문이다.




5.결론




본문에서 필자는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무빈골전설》을 둘러싸고 선생의 창작생애를 돌이켜보면서 서로 같지 않은 두가지 견해, 무빈골전설은 1982년도 발표작이라는것, 1936년 처녀작 형성원인과 무리 등을 서술하여보았다. 무조건결론을 내려보라면 필자의 결론은 역시 전자의 견해대로이다.

《무빈골전설》은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이 아니고 1982년도의 발표작이라는것, 처녀작은 1939년 1월의 단편소설 《건설보》라는것이다. 이는 또 김창걸선생의 생전의 뜻이기도 하다. 김창걸선생은 1981년 필자의 취재를 접수할 때 자기의 처녀작은 1939년 1월에 발표된 《건설보》라고 거듭 명확하게 언급하였었다. 여기서 지적할것은 1939년 1월의 《건설보》가 처녀작이라 하여 김창걸선생의 문학창작활동이 1939년으로 되는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로서의 김창걸선생의 창작년대와 창작활동은 두말할것 없이 1936년 미발표작 《무빈골전설》 습작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김창걸선생은 1936년부터 3년간 본격적인 문학창작(물론 습작)에 정진한끝에 처녀작의 발표결실을 보게 되였기때문이다.

올해 2006년은 김창걸선생 문학창작활동 70돐이 되는 해이다. 김창걸선생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이 론문을 김창걸선생 문학창작활동 70돐에 삼가드린다.



【주해】

① 문학과 예술, 1996년 제5호
② 권철, 김창걸과 그의 소설문학, 중국조선민족문학대계 11, 소설집 해제에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년 12월
③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7월 제222페지
④ 천지, 1986년 8월호, 제 12페지
⑤ 대형문학총서 두만강 제5호, 료녕민족출판사, 1996년 10월, 제168페지, 188페지
⑥ 문학과 예술, 1996년 1월호, 제73페지
⑦ 연변문학, 1998년 2월호, 제260페지
⑧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 사이트 www. koreancc.com
문학코너 2004년 4월 24일

연변문학, 2006년 제9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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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 ]

4   작성자 : 두만강
날자:2006-10-20 08:33:55
그래도 내 형제,내 지기들이구려!!!
3   작성자 : 상공
날자:2006-10-20 12:53:57
두만강님, 이 글은 쓴지 오래신걸로 기억되는데요. 하여간 반갑습니다. 멀리서도 열심히 활약하시는 모습이 눈앞에 얼른 거립니다. 좋은 성과 기대하겠습니다.
2   작성자 : 두만강
날자:2006-10-03 08:50:17
이슬비 글을 보니 보는것 같습니다. 댓글을 올려 주어 감사합니다. 사방대는 정말 가고 펐는데 기회가 없었습니다. 여기 와서 잘 지내고 있고 또 등산과 유적답사를 이어가고 잇어유. 이제 글과 사진들이 막 오를 겁니다. 오늘 항주 서호에 가서 고려사를 답사하고 돌아 왔습니다. 때때로 댓글도 올리고 소식 오갔으면 합니다. 하는일 뜻대로 순리롭기를 기원해 봅니다!!!
1   작성자 : 이슬비
날자:2006-10-02 09:23:30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십니다 요즘 잘 지내시는지요? 선생님 소식 무지 궁금합니다 며칠전 사방대 등산때에도 연우식구들 선생님을 외우셧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나마 글을 읽을수가 잇어서 다행입니다 시간나면 종종 좋은글 올려주십시요 몸조심하시구요 늘 풍요로운 하루하루가 되시길 기원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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