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는 온대지방에서 7~10월의 약 100일간 끊임없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나무라지만 우리 연변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꽃나무이고 화분에서나 볼수있는 락엽활엽관목이기에 무궁화에 대한 직감적인 사랑을 느낄수가 없었다. 그러던 나에게 무궁화라는 이 아름다운 꽃나무가 성큼 다가섰으니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기기묘묘하기만 하다.
지난 10월 13일 남방에서 대학교수를 맡게 된 나는 후배 어린 동료들인 연변대 조문학부 석사, 학사 출신 장국화씨, 김은복씨와 더불어 그 아름다움의 극치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반드시 찾았다는 항주 서호를 유람하게 되였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더니 과연 그른데 없었다. 일대 문인 소동파가 이곳 절도사 시절 서호의 뚝을 막아 서호를 만들었다는 곳, 중국 최고의 차는 단연 서호가의 룡정차를 꼽는다는 곳, 룡정차를 위해 청나라 강희제가 수나라 수양제가 팠다는 대운하를 항주까지 련결했다는 곳, 이 나라 고대 4대미인으로 받들리는 월나라 서시가 놀았다는 곳, 당나라 때 대시인 이태백이 술을 따랐다는 곳ㅡ서호, 서호는 어딜보나 아름다움의 모음터여서 우린 서호에 발을 들여놓는 첫시작부터 들먹이는 심정을 어찌할수 없었다
우리의 첫 발목을 잡은것은 넓다란 잎을 가진 한무더기 활엽관목나무에 화사하게 피어난 주먹크기의 연분홍꽃이였다. 이자 꽃봉오리가 맺혀지기 시작하고 활짝 피어난 꽃송이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처음 대하는 꽃나무가 그리도 좋을수가 없다.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꽃나무와 꽃송이를 디지털사진기에 담아두는데 김은복후배가 기념사진을 남기겠단다. 그래서 잊지못할 기념사진이 찍히여졌는데 우린 이 꽃나무가 여기 남방의 무궁화나무라는것을 알리가 없었다.
그러던 10월 20일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연변팀 등산대원들이 소흥의 불교명승지ㅡ향로봉에 다녀오는데 꽃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있는 정현자선배가 나를 툭 치며 향로봉기슭 강가에 떨기떨기 피어난 꽃나무를 가리키며 저 꽃나무가 바로 무궁화나무라고 한다.
“예?!”
잘못듣지 않았나 제 귀를 의심했지만 눈앞의 꽃나무는 에누리없는 무궁화나무가 옳단다. 그럼 항주 서호가에서 본 꽃나무가 무궁화나무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첫 발목을 잡고 놓질 않았구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더니 생각지도 못한 무궁화나무를 남방 항주와 소흥에서 대하게 될 줄이야!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향로봉기슭 강가의 무궁화나무를 감상하며 사진찍기에 여념없었다. 일행도 다가와 기념사진을 남긴다. 과시 무궁화는 꽃중의 꽃이라더니 하나도 그른데가 없다.
해당자료를 보면 무궁화는 100일간이나 피여나는 꽃나무이고 키가 2~4메터에 이른다. 눈앞의 무궁화도 키가 보통 3~4메터 정도에 이르는데 그루 전체에 털이 거의 없고 한뿌리에서 엄지손가락 정도의 매끈한 가지가 7~80가지나 자라나며 가지마다 하많은 무궁화꽃을 토해낸다. 그에 못지않게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아직까지 무궁화 자생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5종에 달하는 무궁화속 식물이 자라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의 나라꽃ㅡ국화로 받들리는 무궁화도 여기에 포함된다.
돌이켜보면 조선반도(한반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무궁화를 널리 심은것으로 알려진다. 옛문헌에 의한 가장 오랜 기록은 중국의 “산해경(山海经)”에 나타나는 모양인데 나는 아직 원문을 접하지 않았으나 이 산해경 제9권 “해외동경(海外东经)”에는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시든다”고 적혀있고 중국의 “고금주(古今注)”에도 “군자의 나라는 지방이 천리나 되는데 무궁화가 많다” 라고 씌어있다나. 이런 력사기록은 조선반도(한반도)에서 무궁화를 심어온 력사가 수천년으로 거스른다는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아무튼 신라 그 옛시절부터 한반도를 무궁화나라라고 불렀다고 하니 오늘의 한국에서 무궁화를 나라꽃ㅡ국화로 하는데는 력사적 제 원인이 있는것이다
그래서일가, 항주나 소흥에서 대하는 무궁화가 전에없이 가슴에 와닿았다. 10월 20 바로 그날, 나는 일행이 모두 귀가한뒤 공원으로 되여있는 향로봉기슭 강가를 천천히 거닐면서 약속이라도 한듯 한창 활짝 피어나고있는 무궁화꽃을 디지털사진기로 찍고 또 찍었다. 그래도 무궁화를 향한 직성은 다 풀려지지가 않았다. 그러는 나에게는 1910년대 훈춘 독립무장단체의 수령이였던 황병길지사가 떠올랐다.
지난 80년대 초에 훈춘에 가서 황병길기사의 친딸 황정일녀사를 취재할 때였다. 녀사는 연통라자시절의 아버지 황병길과 어머니 김숙정은 집앞내가의 오솔길가에 무궁화나무를 심어놓고 그리도 애지중지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는 그 뜻을 다 읽어내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제의 식민지로 된 조선, 일제놈들이 여지없이 짓밟고있는 무궁화를 훈춘의 한 오지에 심어놓고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의 래일을 무궁화에 기탁했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 하늘을 떠이고 살수없는 일본침략자들은 1910년 삼천리강산을 삼켜버린후 우리 조선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를 여지없이 뽑아버리고 누가 무궁화를 재배하거나 관심을 돌리면 무지곡직 잡아가두지 않았던가…
며칠뒤 10월 26일, 나는 향로봉 기슭강가를 산책하며 무궁화꽃나무를 둘러보았다. 며칠전에 비해 꽃들은 많이 지고있었으나 100일쯤이나 줄기차게 피어난다는 무궁화꽃은 아직도 그 어여쁨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늘도 무궁화꽃나무는 여전히 피여나고있다. 항주, 소흥의 무궁화꽃나무는 마지막 향기를 토해내는 계단이지만 소흥에서 나무로 200~300리 떨어진 국가급관광명승지ㅡ천태산과 그 일대 무궁화나무는 이자 꽃봉오리가 지면서 바야흐로 피여나려 서두르고 있다. 무궁화, 한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는 여기 남방에서도 활짝 피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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