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의 항일투쟁사를 펼치면 성서처럼 드팀없는 《해란강대혈안》이란 참상이 떠오른다. 이에 따르면 지난 30년대초에 일제놈들과 그 주구들은 당년의 연길현 해란구, 즉 화현리일대에 대해 전대미문의 94차의 포위토벌을 감행하여 1700여명의 혁명자와 무고한 백성들을 마구 살해하였다고 한다. 정말 그러한가, 알고보면 이는 놀라웁게 과대된 어처구니 없는 수자가 아닐수 없다.
연변 당조직의 한 구위 이름으로 역사에 실재했던 연길현 해란구는 실상 화련리를 가리킨다. 화현리는 당년 국자가 동쪽방 해란강과 부르하통하가 합류한 지방에 자리잡았는데 해란강을 거스르면서 20리쯤을 사이에 두고 여러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용정시 당시연구실에 의해 정리된 한편의 글①과 해당자료에 의하면 화련리는 수침통, 류정촌, 학교촌, 상중개동, 하중개동, 북화련리, 남화련리, 상촌, 중촌, 농골, 계림촌, 로가촌 등 12개 마을, 200여세대②로 되어있지만 다른 해당자료에는 9개 자연툰에 180여세대③가 살고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지난 60년대 초에 연길시 장안진 마반 1대 서운파가 48살되는 때에 서술한 것인데 그의 증실자료는 비교적 실사구시적으로 되어있다.
화룡 베개봉에서 발원하는 해란강은 화룡시 평강벌과 용정시 세전이벌을 적시며 흐르다가 원 석정향의 구간을 지나서는 산간 지대를 따라 흐른다. 원 석정향 구룡촌을 벗어나서는 해란강은 두산사이 좋은 계곡을 따라 동으로 흐르다가 갑자기 방향을 북으로 꺽으며 10여리 흐르고 다시 우중충한 산들에 막혀 방향을 남으로, 서쪽으로 돌리며 오늘의 연길시 동쪽 하룡촌에서 부르하통하와 합수한다. 이렇게 동으로, 북으로, 남으로, 서로 흐르는 해란강 20리쯤 구간은 두산이 서로 맞대인 산간지대로서 이 좁은 계곡 사이에 9개 자연툰이 차례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합수목에 자리잡은 하룡촌의 여러 마을외 그제날 다른 마을터들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화련리 여러 마을들이 해란강을 따라 자리잡았다하여 해란구로 불리우고 광복직후에는 화련리대혈안대신 해란강대혈안으로 불리웠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화련리 여러 마을들이 자리잡은 지대는 두산 사이에 끼인 해란강의 좁은 지대이며 인구라야 200세대쯤밖에 안된다. 한세대에 평균 5~6명으로 계산한다해도 전체인구가 1000명좌우밖에 안된다. 헌데 이런 화련리에 1700여명이나 살해되었다고 하니 말이 아니다. 화련리 전체 인구를 들이밀어도 근본 1700여명에 이르지 못한다.
하다면 1700여명 대혈안설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고 이 수자가 어찌하여 어처구니 없는 과대수자라고 할가, 이를 알자면 당년의 연길현 화련리로 돌아가 그 전후관계를 헤아리지 않으면 안된다.
2. 화련리 항일투쟁과 적들의 첫 “토벌”
1930년 연변 《5.30》폭동이후 화련리일대에 조직된 우리 당조직은 계림촌에 조직된 중공당소조이다. 이 당소조는 화첨자당지부에 소속되어 중공의란구위의 지도를 받다가 1931년 11월 초부터 새로 건립된 중공해란구위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신생한 해란구위는 산하에 동성용지부, 화첨자지부, 화련리지부 등 3개지부를 두었는데 구위서기는 리상근이 아니라 오현정이였다. 리상근(1908년생)은 화련리사람으로서 당구위가 조직될 때 공청단구위서기 책임을 맡았다. 구위 조직위원은 세린하에서 화련리로 온 장상순이 맡고 선전위원은 김정규가 맡았다. 구위는 화련리 류정촌에 자리잡았다.
1931년 가을 온 연변땅을 휩쓴 추수투쟁의 불길은 화련리일대에서도 세차게 타올랐다. 11월 5일, 해란구와 연길구의 농민대표로 무어진 《소작투쟁위원회》 5명성원들이 소영자의 대지주 송보승과 담판하다가 시거우공안분주소에 체포되었다. 이 소식이 화련리 여러 마을들에 전해지자 화련리의 군중들은 구위의 지도하에 시거우공안분주소로 달아갔다. 해란구와 연길구에서 모인 군중은 2000여명에 달했다. 덴겁한 공안분주소 소장은 2명 대표를 내놓았으나 3명 대표는 이미 국자가 연길공안국에 넘어갔다고 실토하였다.
이날 밤, 분노한 시위대렬이 2개구위의 지도밑에 홰불을 들고 공안분주소 소장을 앞세우고 소영자로부터 국자가로 향할 때는 그 수가 5000여명에 달했다. 근 만명으로 치달았다고도 한다. 수천명 군중들이 위연길현부를 겹겹히 에워싸고 《농민대표를 내놓으라!》, 《현장을 불러내라!》하고 구호를 부르니 위현장은 할수없이 체포한 3명대표를 내놓고 군중들이 제기한 소작료 3.7제, 4.6제의 정당한 요구를 접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시위대렬은 그길로 소영자의 대지주 송보승의 장원을 에워싸고 곡식낟가리를 헤쳐 비례대로 소작농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듬해 1932년 봄에 동만특위에서 춘황투쟁(즉 기민투쟁)을 호소하자 화련리의 농민들은 구위의 지도밑에 재차 일떠났다. 그들은 친일주구인 화련리의 툰장 김성기, 하동촌의 주구 허병팔, 계림촌 촌장 겸 조선인민회 참의원이며 일본의 훈팔급(勋八级) 수훈자인 김동후 등을 붙잡아 끌고다니며 투쟁하였다.④ 그리고 친일지주와 지주들의 식량, 재물을 몰수하여 빈고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화련리와 그 일대의 추수춘황투쟁은 적들을 놀래웠다. 일제놈들은 1932년 3월, 화련리에서 무장자위단을 조직한뒤 이놈들을 선두로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한데서 1932년 음력 3월 28일(양력 5월 1일)에 화련리는 첫토벌의 세례를 겪게 된다.⑤
이날 50여명의 적들은 마차에 앉아 오는 도중 남화련리에서 청년 김룡수를, 중촌에서 중의 김도제를, 류정촌에서 리삼달의 부친 리동근을 체포하여 가지고 학교촌으로 내려왔다.⑥ 학교촌에는 6년제 사립명신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무렵에 학교촌의 등산보초는 김하연의 딸이였다. 소녀는 산동성이에서 나물을 캐는것처럼 가장하고 보초를 서다가 일제토벌대놈들을 보자 저고리를 벗어 흔들며 마을에 암호를 띄웠다. 토벌대놈들은 낌새를 채고 이 소녀를 붙들어 갖은 심문과 구타를 들이댔다. 했건만 소녀는 나물을 캐다가 더워서 옷을 벗어흔들었다고 할 뿐이였다.
적들이 학교촌에 들이닥치니 사람들은 소녀의 암호에 의해 대부분이 이미 피신한 터였다. 이때 미처 피하지 못한 리호일과 석건평에서 온 리동근이 불행히 체포되었다. 이날 화련리일대에서 체포한 동지들은 도합 21명이였다.⑦ 적들은 이들 21명을 월청사 우리골에 끌고 가서 체포된 사람들을 저저마다 구뎅이를 파게 한뒤 저고리고름이나 동정을 뜯어 눈을 가리게 한 다음 군도로 개개의 목을 쳐죽이였다.⑧
3. 해란구유격대 활동과 《8.7》참안
무장한 적은 무장으로 대처하여야 했다. 1932년 5월, 중공해란구위에서는 계림촌의 김순덕(렬사)을 대장으로 하는 해란구적위대(후에 유격대로 불리움)를 조직하여 적들의 학살과 역청산에 맞서 나섰다. 김순덕 등은 구위의 지도하에 류정촌, 중촌, 상촌과 계림촌 삼호동네의 심산속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큰칼, 단도, 날창 등 원시적인 도창무기를 만드는 한편 적위대를 이끌어 무기탈취투쟁을 줄기차게 벌린다.
그 나날에 김순덕과 그가 이끄는 적위대는 짧디짧은 두달동안에 30여자루의 보총과 권총, 목갑총을 갖게 되었다.⑨ 이에 따라 그해 7월에 해란구적위대는 구유격대로 개편되었다.
해란구유격대의 활동은 일제놈들의 두통거리로 되었다. 빈번히 유격대의 타격을 받은 적들은 일본군토벌대와 무장자위단을 내몰아 화련리일대에 련속 덮쳐들었다. 이자들은 1932년 5월1일부터 시작하여 1933년 2월에 이르는 기간에 화련리 일대 9개 자연툰을 참빗질하며 무려 50여차 토벌을 감행하여 혁명자와 군중 170여명을 학살하고 많고많은 집들을 불태워버렸다.⑩ 그중 1932년 음력 8월에 있었던 《8.7》참안에서만도 53명이 쓰러졌다. 그중 23명은 연화유격대의 대원들이다.
연화유격대는 1932년 5월에 개산툰에서 정식으로 조직된 연화현유격대로 알려진다.⑪ 중공동만특위에서 《9.18》사변후의 새로운 투쟁정세에 좇아 조직한 유격대인데 그 대원들은 개산툰유격대를 토대로 평강구, 삼도구 등지의 골간들로 무어졌다. 이 유격대는 개산툰일대에서 무기탈취투쟁과 주구청산투쟁을 하다가 해란구유격대, 의란구유격대와 함께 해란구 계림촌에 주둔하는 철도호로대의 40여자루 보총을 탈취하고저 화련리에 오게된다.⑫
8월 6일 저녁 연화유격대는 소홀한 탓으로 문전보초만 세우고 바깥보초를 세우지 않은데서 일이 생겼다. 그들은 리삼달의 집과 리삼달의 큰아버지집, 리삼달의 삼촌집과 리성보네 집 등 여러집에 나뉘여 자게 되었는데 문전보초가 그만 졸게 된데서 적들은 그 틈새를 탔다. 8월 7일 새벽 2시경에 소야평(하남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제수비대 약 50명이 지방자위단놈들의 배합밑에 중기와 경기관총을 가지고 맹렬한 소사를 들이댔다. 연화유격대는 오전 9시까지 반격하며 포위를 돌파하며 피어린 싸움을 벌리였다. 이해 10대 소년에 불과하였던 리삼달의1964년 증실자료⑬에 따르면 유격대는 불지르러 접근하던 적병 두놈을 죽이고 한놈을 부상입히기는 했으나 피동적국면을 근본 돌려세울수가 없었다. 다행한것은 유격대 35명중 12명이 포위를 돌파했고⑭ 해란구유격대의 대원들은 그날 류정촌에 없었던것이다.
역사에 실재했던 1932년 해란구 《8.7》참안의 진상이라 하겠다. 연화유격대가운데서 이름을 찾아볼수 있는 유격대원은 개산툰구 군사부장 김락영과 리동일, 태양욱, 태양윤, 김복만, 김호준, 한익수 그리고 소대장 김마즈, 대장 류기룡, 정치지도원 최병조 등 10명이다. 이 10명중 김락영, 리동일, 태양욱 셋이 포위를 돌파하고 7명은 장렬히 희생되었다. 희생된 유격대 23명중의 7명이다.⑮ 유격대외 알아 볼수 있는 희생자들로는 공청단 해란구위서기 리상근, 당구위조직위원 장상순, 선전위원 김정규, 구위간부 오용묵, 리삼달의 집안사람 10명과 리성보 등으로 나타난다.
4. 《8.7》참안의 두가지 시비
《8.7》참안을 두고 꼭 밝히고 넘어가야 할 두가지 시비가 있다.
첫번째 시비는 연화유격대 대장으로 알려지는 류기룡문제이다. 당년 연화유격대의 대원 태양욱은 지난 60년대초와 70년대 초 두차례의 증실자료에서 류기룡을 그번 참안의 주구로 지적하였다.
60년대 초의 증실자료는 연변주당안관의 자료 《차상춘 등 6명 담화기록》(3060)이다.○16 이 자료에서 태양욱은 이렇게 말했다.
《소선대에 그날 보초정황을 물은즉 대장 류기룡이 보초를 거두라고 하기에 보초를 서지 않았다고 하였다. 유격대가 화련리를 떠난후 류기룡은 지방에 나타나게 되었다. 지방조직에서 가의하여 심문한 결과 류기룡이 일군수비대에 련락하였고 보초도 거두라고한것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군중대회에서 타살하였다.》
70년대 초의 증실자료는 화룡현의 해당자료이다. 이는 1971년 8월 19일의 증실○17로 되었는데 태양욱은 이해 71살이였다. 그는 이 자료에서 이렇게 거듭 말했다.
《이 사건은 류기룡(화련리 웃농골사람)이란 놈이 연길현유격대 대장질하면서 적에게 물어넣어서 생겼다고 한다. 후에 군중들이 그를 때려 죽였다는 말이 있다.》
태양욱이 이 자료에서 연길현유격대라고 한것은 그가 연화유격대를 화룡현유격대와 연길현유격대로 보았기때문이다. 어찌하든 이 자료에는 또 리삼달과 김동진의 증실자료가 첨부되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화련리사람으로서 《8.7》참안 그해 리삼달은 12살이고 김동진은 16살, 후에는 연길현 왕우구근거지에 들어가 소선대와 공청단간부로 활동하던 분들이였다. 이런 경력의 소유자들이기에 그들은 류기룡은 월청구 걸만동사람이고 《8.7》참안시에 희생된 렬사라고 지적하였다.○18 1971년 그해 도문시 민족식당 출납원으로 있던 류기룡의 딸 류인숙도 같은 증명인○19으로 나섰다. 태양욱증실자료외 여러 자료들에서도 모두 류기룡이 《8.7》참안에서 희생된것으로 밝히였다. 태양욱의 증실은 사실을 잘 모르는데서의 오유임이 드러났다.
두번째시비는 주구밀고문제이다. 첫번째시비에서 제대로 밝힌 리삼달, 김동진은 두번째시비에서 《8.7》참안의 주구를 백창헌으로 보고있다. 연변주당안관의 자료ㅡ《리철순(즉 리삼달) 동지 담화기록》(4023)에 의하면 1964년 1월 16일 증실로 된 이 자료에서 리삼달은 《8.7》참안은 《가능하게 백창헌의 수작》으로서 백창헌이 《유격대는 아직 군사기술이 따르지 못하여 군사훈련이 수요된다는것을 구실로 습격날자를 미루었다.》고 하면서 백씨가 자기 처삼촌인 리성보와 매부인 조혜천을 주구와 특무로 내세웠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이 자료에서 리삼달은 또 《백창헌은 일제의 주구로서 그는 1929년ㅡ 1930년 좌우에 체포된후 일제에게 투항하고 연길감옥에서 탈옥의 형식으로 혁명대오에 혼입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1971년의 화룡현 해당자료에서도 백창헌을 주구로 몰았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백창헌은 1932년《8.7》참안의 주구가 아니다. 그는 화룡현 소오도구 (지금의 화룡시 동성진 보성촌)출신으로서 1928년에 벌써 소오도구 명신학교에서 교원질을 하면서 혁명활동에 나선 사람이다. 1930년 7월 10일과 11일, 화룡현 약수동에서 중공평강구위가 조직될 때 그는 소오도구지부대표로 그번 회의에 참가하였다가 공청단구위서기를 맡았다. 이해 가을이후에는 당구위 조직부장,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그는 1931년 음력 3월의 어느날 평강구 포지동의 어느집에서 공청단구위의 백창원, 차정숙, 김갑, 안두천 등과 함께 회의를 하다가 서백리보위단에 체포되어 연길감옥에 압송되었다. 지난 80년대 초에 필자가 이날의 차정숙녀사를 수차 방문한데 의하면 백창헌은 체포된 동지들에게 모든 책임을 자기한테 밀라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리곤 감옥에서 파옥계획을 내밀었는데 파옥3일을 앞두고 비밀이 탄로되어 15년 언도를 받은 모양이다. 15년언도를 받은후 매달 2차의 면회기회에 백창헌은 부친 백태경을 통하여 가족에서 보내오는 음식 또는 옷속에 비밀편지를 주고 받으며 다시 파옥계획을 짜고들었다.
1932년 음력 2월에 백태경은 소오도구의 혁명자 한사람과 함께 바를 가지고 와서 파옥을 도와나섰다. 백창헌은 감옥에서 한달동안 벽을 뚫으며 비밀통로를 만들었는데 감옥내 4명인원과 함께 탈옥하다가 마지막으로 토성을 넘던중 부주의로 벽돌장을 떨구었다. 감옥안에서 호각소리가 나며 놈들이 몰려오는데서 탈옥한 4명과 바깥의 백태경 등은 산산히 흩어졌다.
탈옥한후 백창헌은 곧추 아무도 모르게 화련리의 처삼촌 리성보집으로 갔다. 그는 처삼촌네 집에서 몸조리를 하면서 조직선을 통해 연길현위와 련게를 가지였다. 이럴 때 《8.7》참안이 터지였다. 그때 백창헌은 연길현위 위원이 아니였을 뿐만 아니라 연화유격대를 이래라 저래라할 권리가 없었다. 《8.7》참안후에 백창헌은 조직의 신임으로 연길현위 위원으로 뛰게 되고 1933년 음력 2월에 소오도구의 부친집에 왔다가 용정 총령사관에 의해 귀순하게 되었다. 귀순후 조직의 탄로와 혈채는 보이지 않는다. 1933년 음력 9월에 총령사관의 고등계 부장 최창락을 위수로 한 12명방문단에 섞이여 서울의 일제 조선총독부에 다녀오고 총독부앞에서 사진까지 찍은적이 있었다. 이는 1933년 음력 2월에 귀순한후의 일로서 화룡현해당자료○20인 1971년 1ㅡ1ㅡ4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선색에 따라 필자는 지난 80년대초에 연길과 백성시에서 수차 고창일을 방문할 기회를 가지였다. 그는 당년의 남편 백창헌이 귀순한것은 사실이나 《8.7》참안의 밀고자는 아니며 그럴수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이 단락의 역사를 실사구시하게 밝혀줄것을 필자와 거듭 부탁한바가 있다. 용정에서 찾은 차정숙녀사도 백창헌이 연길감옥에 갇혔을 때와 《8.7》참안시 주구가 아니였다고 찍어 말하였다.
백창헌의 진실한 한단락 역사이다. 리삼달 등의 증실자료는 쟁론할 나위도 없이 부정되어야 한다. 《8.7》참안에서의 두가지 시비는 거두어들일 때가 된것이다.
5. 해란강대혈안의 진상
인제는 해란강대혈안의 진상을 까밝힐때가 된것같다. 진상문제를 두고 한심한것은 당년 화련리일대에서 적들의 50여차 토벌에서 쓰러진 사람이 도합 170여명인데 어찌하여 《0》이 하나 더 붙어 1700여명으로 된것이라 하겠다. 이 수자이면 화련리 9개자연툰 전체군중들이 죽었다는 말과 같은데 허황하기가 그지 없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실사구시하게 씌여져야 한다. 화련리일대 50여차의 토벌에서 가장 많이 쓰러진 한차례가 《8.7》참안의 53명이다. 이날 참안으로 하여 화련리에는 12명의 무명렬사묘○21가 생겨나기까지 하였다. 그뒤 역사를 보면 1932년 10월 12일 토벌에 늙은이와 젊은이 16명이 희생되고 12월 12일의 토벌에 8명이 희생○22되었다. 이렇게 수차의 거듭되는 토벌에서 희생된 사람이 170여명으로 헤아려진다. 이것이 역사이며 이것이 화련리 수차참안의 참기록이다.
본문에서 필자는 역사에 대해 책임지는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 지난세기 30년대 초 화련리 항일투쟁과 해란구유격대 활동, 적들의 련속 토벌과 8.7참안의 전후관계를 그대로 서술하여 보았다. 이런 전후관계 해명을 통해 우리는 당년 연길현 화련리일대에서, 적들의 50여차 토벌에서 쓰러진 사람이 도합 170여명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문제는 이 170여명에 《0》하나가 더붙어 1700여명으로 대거 확대된것인데 이 수자는 상기와 같이 화련리 9개 자연툰 전체인가가 다 죽고도 모자란다는 말과 통한다. 이 엄청난 수자로 하여 광복후 1946년 10월에 연길시 서광장에서 《연길현해란강살인사건청산대회》가 열리고 전대미문의 《해란강대학살》 또는 해란강대혈안으로 번져졌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사실에 따라 실사구시하게 씌여져야 한다. 화련리일대 50여차의 토벌에서 가장 많이 쓰러진 한차례가 8.7참안의 53명이고 이 참안으로 하여 화련리에서는 12명의 무명렬사묘가 생겨나기까지 하였다. 그뒤 1932년 10월 12일 토벌에서 늙은이와 젊은이 16명이 희생되고 12월 13일의 토벌에서 또 8명이 희생된다. 이렇게 수차의 거듭되는 적들 《토벌》에서 희생된 사람은 도합 170여명이다. 이것이 역사진상이며 이것이 화련리수차참안의 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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