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세기 1931년 9.18사변전후 동북의 동만, 남만, 북만 등지에는 보편적으로 조선족 중공당원들을 선두로 한 당조직이 뿌리 박히고 우리 당이 지도하는 항일유격대 조직들이 활동하고있었다. 이런 유격대를 9.18사변전에는 흔히 《반일》 또는 《홍색》,《로농홍군》 등으로 불렀는데 그 조직자, 지도자들이 상당수가 일찍 광주황포군관학교나 중산대학 등을 졸업하고 북벌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족 열혈청년들이다. 이는 드팀없는 역사적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이에 중시를 돌리고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이가 거의 없어 하나의 역사적공백으로 남아있었다.
황포군관학교는 일찍 중국혁명을 위하여 많고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키워냈다. 그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피끓는 조선족열혈청년들로서 중국의 절반 땅을 휩쓸었던 북벌전쟁 그리고 남창봉기, 광주봉기에서 귀중한 생명을 바치였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살아남은 일부 조선족열혈청년들은 천신만고끝에 동북에 돌아왔다. 그들은 황포군관학교의 혁명정신과 광동 등지의 혁명경험을 동북에 갖고와 연변과 남북만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면서 당의 기층조직과 무장대오를 건립했으며 당조직과 항일무장대오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았다. 일제놈들을 몰아내는 가렬처절한 싸움터에서 그들은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에 불멸의 기여를 하였고 영광스런 혁명렬사로 되었다. 황포계출신의 그네들은 중국조선족의 자랑이고 중화민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이에 비추어 본문에서는 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들과 동북항일무장투쟁이란 주제로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일으킨 황포계출신들의 역사적역할과 불멸의 기여를 서술하면서 1931년 9.18사변전후시기를 배경으로 동북의 여러 당조직과 유격대조직, 그 활동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들의 헌신적투쟁을 전면적으로 검토해보려 한다.
2.황포군관학교와 조선족청년들
다 알다싶이 1924년과 1925년은 중국혁명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해이다. 1924년 1월, 중국혁명의 선행자 손중산선생은 중국공산당의 방조와 협력하에 광주에서 공산당인이 참가한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를 열고 련소, 련공, 부조농공의 3대정책을 확정하였으며 국민당을 개조하고 제1차국공합작을 실현하였다. 이해 5월, 군사정치간부양성을 취지로 한 황포륙군군관학교가 건립되었다.① 이듬해 1925년 7월 1일에는 광주에서 국민정부가 건립되고 산하의 부대를 국민혁명군으로 편성하였다. 광동의 국민정부는 중국공산당이 배합하에 국민정부를 엄중히 위협하는 진형명 등 각파 군벌을 소멸하고 광동 전 성을 통일하였다. 1925년 3월, 손중산선생이 북평에서 불행히 서거하였지만 광주는 의연히 혁명의 대본영이였으며 국제공산당의 지원을 받았다.
광동혁명정세의 신속한 발전과 황포군관학교의 영향은 대단했다. 혁명의 봉화를 본 조선족 선진분자들은 《국공합작》, 《타도군벌》, 《타도제국주의》의 불타는 념원을 안고 조선, 만주, 소련 극동 등지로부터 광주에 모여들었다. 그 진두에는 리용 등이 서있었다. 리용은 조선 함경북도 북청군사람으로서 중국 운남강무학교 출신이다. 그는 1920년 6월, 왕청 봉오동전투때 벌써 독립군 작전참모로 있었으며 1922년 원동 블라디보스톡 쟁탈전때 조선인 홍군총지휘로 명성을 떨치였다.② 그는 중국인민의 북벌을 지원할데 관한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들고 1925년에 중국에 건너와 조선족청년들을 동원하여 상해로 보냈다. 상해 프랑스조계지안의 복신로 182번지 2층에는 조선공산당지하지부가 있었다.③ 이 지부의 서기는 려운형인데 후에 제3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원칙에 좇아 1927년 9월, 이 지부의 당원전체가 개별수속을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강소성위 홍남구한인지부를 구성하였다. ④ 조선족청년들은 흔히 이 지부를 거쳐 광주로 향발하여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거나 국민혁명군에 가입하였다.
당년 많은 조선족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거나 중산대학 등에서 공부하였다. 소련공청단원이며 블라디보스톡 쌍성자 출생인 최정무는 1926년에 원동의 조선인공산주의자 박우의 소개로 다른 소련공청단원 5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 갔고 동북 경내의 《적기단》 등 여러 반일단체와 조공당 여러 파들은 자기 산하의 조선족청년들을 동원하여 광주로 보냈다.⑤ 동만만 보더라도 화룡현 개산툰 회경의 장자관, 자동의 박의정, 한영섭, 김영식, 광소의 주봉석⑥과 훈춘현 대황구 북골의 엄상호, 리태훈, 리상준, 강석필⑦ 등도 조직의 파견을 받고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가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후날의 중공화룡현위 제4임서기 김철산, 중공연길구위서기 조기석, 중공훈춘현위 제1임 군사부장 신춘, 중공화룡현위 제1임군사부장 방상범 등도 그 시기에 광주로 가서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들어갔다. 1925년 가을, 조선족 김산(후날 중공북평시위 조직부장, 렬사)이 광주에 갔을 때 조선인이 60여명뿐이였는데 1927년에 이르러서는 800여명으로 늘어났다.⑧ 김산이 소개한데 의하면 일본에서 간 조선인이 약 20명, 소련 원동에서 간 조선인이 100여명, 조선서 간 조선인이 100여명, 모스크바에서 간 조선인이 30명, 만주에서 간 조선인이 약 400명이였는데 거개가 공산주의사상을 따랐다고 한다.⑨
대혁명시기 광주의 조선인들을 보면 주요하게 황포군관학교, 광동대학, 항공학교와 국민혁명군 각 부대에 분포되었다. 황포군관학교 본교 및 부속부대에만 해도 조선청년들이 200명을 웃돌았다.⑩ 원 호남농학원교수였던 조선인 류자명선생이 《나의 회억》에서 밝힌데 의하면 당년 2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중 1924년부터 1927년까지 황포군관의 역사자료를 엮은 《황포군관학교자료》동창록에 조선인이라고 밝힌것만 해도 제3기생에 4명, 제4기생에 24명, 제5기생에 6명이나 된다.⑪ 그 시기 황포군관학교는 또 조주, 남녕, 장사, 무한 등지에 허다한 학교를 증설하였는데 이런 분교들중 조선청년들은 제1차국공합작시기의 무한분교에 많이 집중되었다.⑫ 그들가운데는 포병훈련교관, 소련고문의 통역 등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교도퇀의 중대장, 대대장을 맡은 사람들도 있었다.
1926년 5월 20일,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골간으로 한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독립퇀이 선참으로 호남으로 진격하여 북벌전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7월 9일에는 북벌선서대회가 열리고 10여만에 달하는 국민혁명군 8개 군이 서로, 중로, 동로 세개 로로 나뉘여 북벌의 원정에 올랐다. 수백명의 조선인들도 대부분이 제4군에 편입되고 일부가 주배덕의 제3군, 정잠의 제6군, 당생지의 제8군 등에 편입되어 광주를 떠나 북상하였다.⑬
중국공산당의 영향과 추동,인민군중의 지지밑에서 북벌군은 반년 남짓한 기간에 오패부, 손전방 등의 수십만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중국의 절반 땅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927년 4월과 7월, 장개석이 상해에서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고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가 7월 15일 무한에서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한데서 국공합작이 파렬되고 기세드높던 대혁명도 실패로 돌아가고말았다. 허나 투쟁의 시련을 겪은 거의 모든 조선인들은 확고부동하게 중국공산당켠에 섰다. 그중 수십명이 남창봉기에 참가하고 대부분이 남하하여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는데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인혁명자들만 해도 200여명에 달하였다.
1927년 남창봉기와 광주봉기이후 살아남은 소수의 조선인혁명자들중 오성륜(전광), 진공목(리병희), 박봉, 최석천(최용건), 마천목, 신춘, 방상범, 김철산, 조기석, 리창혁, 장자관, 박의정, 김영식, 반경유, 리계동 등은 천신만고를 겪으며 수로(水路)와 륙로를 통해 남만과 동만, 북만으로 돌아왔다. 그들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동북 당조직의 건설과 항일무장투쟁에서 크나큰 역할을 놀면서 불멸의 기여를 하게 된다.
3. 황포계 출신들과 동만항일투쟁
역사적원인으로 하여 황포군관학교출신의 중국조선족혁명자들이 얼마이고 동북, 더우기 연변에 돌아와 항일투쟁에 뛰여든 동지들이 얼마인가 하는 똑똑한 통계자료가 없다. 그러나 10여명 황포계 조선족혁명자들이 동만, 즉 연변에 돌아와 항일투쟁에 참가한 사실은 비교적 명백하다.
양림은 원명이 김훈으로서 양주평, 양녕, 필사제 등 이름을 쓰기도 했는데 1919년에 망명하여 조선서 길림성 통화현 하니타에 왔다가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1920년 2월에는 왕청현 서대파 북로군정서 사관학교에서 군사교관을 맡았고 그해 6월과 10월에는 독립군부대를 따라 도문일대의 봉오동전투와 화룡일대의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뒤 운남강무학교에 들어갔다. 1924년초 졸업할 때 강무학교에서 교관으로 남을것을 바랐으나 그는 완곡히 사절하고 결연히 광주로 가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 1월,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 학생대 제4대 상위대장으로 임명되어 동정에 참가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그해 11월에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즉 엽정독립퇀) 제3대대 대대장 겸 중공당소조당을 맡았다.⑭ 1927년 4월,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한후 그는 당조직의 파견으로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 륙군보병학교에 가서 2년간 정치와 군사를 배운 뒤 1930년 여름에 상해에 돌아왔다. 이해 8월에 그는 중앙군위의 지시로 동북에 파견되어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를 맡았다.
1930년 10월, 양림은 성위의 파견을 받고 연변에 와서 중공동만특위 군위서기책임을 맡았다. 그는 신춘 등 황포계출신의 동지들을 찾아 동만특위 군사위원회를 조직한 뒤 연변 4개 현에 군사부를 설치하고 방상범 등 동지들을 화룡현위 군사부장 등으로 임명(1931년 봄.)하였다. 동지들의 노력으로 수십명으로 헤아리는 특위직속유격대가 조직되었다. 1931년초에 양림은 훈춘현 밀강일대에 가서 수백명 군중을 동원하여 당지의 악패지주장원을 포위하고 숱한 무기와 총을 압수하였으며 많은 량곡을 몰수하여 빈고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양림은 유격대건설의 여가에 친히 《동만유격대사업요강》⑮등 일련의 중요한 문건을 써내였는데 이런 문건들은 연변의 유격대건설에서 중요한 지도역할을 놀았다. 9.18사변후 그는 중공만주성위의 소환으로 계속 성위 군위서기를 맡고 남만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을 힘있게 지도하였다.
조기석은 1912년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삼촌을 따라 조선에서 두만강을 건너 연길현 동성용에 이주, 연길현 현립 제2소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에 용정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에 그는 일본 도꾜에서 고학할 때 중국 북벌전쟁이 곧 개시된다는 소식에 접하고 연변에 돌아왔다. 그는 조공당 엠엘파의 파견을 받고 리창혁(후날의 중공훈춘현위 조직부장), 강현철의 동생 등과 함께 광주로 달려가 황포군관학교 교도대에서 학습하였다. 1927년초에는 강서성 구강주둔 국민당 등연달부대에서 활약하였다. ○16 북벌전쟁이 실패한후 병을 구실로 등연달부대에서 나와 용정에 돌아왔다. 1929년초에 그는 연길현 세린하공립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으면서 지하혁명투쟁에 뛰여들었다. 1930년 2월에 학생들은 조기석의 지도하에서 투도구로 달려가 반일학생시위투쟁을 벌리였다. 이해 5월에 그는 동만 5월 투쟁행동위원회의 파견을 받고 왕청현에 가서 5.30폭동을 지도하였다.
1930년 여름에 조기석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봄이후 그는 중공연길구위 제1임서기 겸 동만특위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해 가을에 그는 연길구와 해란구의 수천명군중을 불러일으켜 추수투쟁을 성공적으로 지도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또 성세호대한 춘황투쟁을 벌리고 주구청산투쟁을 지도하였다. 이 투쟁가운데서 조기석은 적들에게 불행히 체포되어 28명 동지들과 함께 연집강에 끌려가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때 그는 28살이였다.
신춘은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1927년 12월 11일에 그는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 제2중대(중대장은 최용건.) 조선인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뛰여들었다. 연변에 돌아온후 신춘은 1930년 5월에 화룡현 약수동과 그 일대 군중들을 지도하여 반일반봉건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해 5월 27일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약수동쏘베트를 조직하고 대규모의 시위투쟁을 벌리였다. 약수동쏘베트는 동북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인민의 정권이였다. 1930년 7월 10일에 중공평강구위가 조직되고 신춘이 평강구유격대 대장을 맡았다. 이달말에 평강구유격대가 조직되였는데 이 유격대는 대오로 로농홍군, 연화유격대로 통했다. 8월초에 신춘은 상급의 명령을 받고 100여명 유격대를 이끌고 돈화, 액목 일대의 8.1길돈폭동을 지원하러 가다가 연길현 도목구(오늘의 안도현 석문진 경내.)에서 우세한 동북군벌의 포위에 들어 참패했다. 신춘은 전투중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도 침착하게 전투를 지휘하여 유격대를 사경에서 구해냈다. 약수동에 돌아온후 그는 다리를 치료하는 한편 불철주야로 사업하면서 동지들과 더불어 이해 9월 7일에 평강구쏘베트정부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1930년 10월에 신춘은 신생한 중공연화현위 제1임군사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달에 그는 중공훈춘현위 첫 군사부장으로 전근되였으며 무기탈취투쟁과 주구청산투쟁을 활발히 지도하였다. 1931년초에 신춘은 훈춘현 대황구에서 적들에게 불행히 체포되어 연길감옥에 갇히였다. 그는 옥중의 동지들과 함께 옥중투쟁을 드세게 벌리다가 1934년 6월에 연길일본헌병대 특무들에게 암해되었다. 희생될 때 그는 28살이였다.
장자관은 1928년 봄에 개산툰에 돌아와 자동의 정동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학교내에 보습반을 꾸리고 자동, 회경, 학성 등지의 한패의 골간청년들을 받아들이였으며 그들을 제때에 혁명의 길로 이끌었다. 1930년 4월에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6월에 개산툰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이 유격대는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연변의 첫 반일유격대 조직이였다. 1931년초에 장자관은 중공평강구위 제4임서기로 활동하다가 적에게 체포되어 용정을 거쳐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었다.
김철산은 동지들로부터 《꼬마레닌》으로 불리였다. 그는 1926년에 조공당 서상파의 파견으로 남하하였다가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연길현 왕우구로 돌아온후에는 사립학교 교장을 맡고 혁명투쟁에 뛰여들었다. 1930년 7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왕우구지부서기를 맡았다. 1931년 4월에는 중공의란구위 제1임서기로, 1931년초에는 중공연화현위서기, 중공화룡현위 제3임서기로 임명되었다. 그는 밤낮없이 동분서주하면서 적들에게 파괴된 당조직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방상범은 방창범이라고도 하는데 당년 연길현 의란구 (오늘의 연길시 의란진.) 태평동사람이였다. 1926년 여름에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고 1927년 12월 11일에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1928년초에 연길현 의란구로 돌아왔다. 그는 당지에서 반일계몽운동에 종사하다가 1930년 5.30폭동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의란구위 제1임군사부장을 맡았다. 1931년 봄에는 양림의 추천으로 중공화룡현위 제1임군사부장으로 제발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한때 당내 《좌》경로선의 지도로 흐지부지해졌던 유격대조직들이 생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32년 봄이후 화룡현의 평강구, 삼도구, 달라자구, 개산툰구에 모두 당이 지도하는 항일유격대가 회복되었다. 그와 현위동지들의 노력으로 이해 가을이후 어랑촌에 화룡현의 첫 항일유격근거지가 서게 되고 화룡현유격대가 조직되었다. 1933년 음력 1월 18일, 300여명의 일제토벌대놈들이 어랑촌에 덮쳐 들었을 때 방상범은 13용사전투를 지휘하여 근거지를 지켜냈다. 이해 2월, 그는 적후투쟁에 나섰다가 적들에게 불행히 희생되었다.
진공목은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남만의 반석현 연통라자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30년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만주성위 소수민족위원회 위원으로 뛰였다. 1931년초에는 성위의 파견을 받고 안도현 대사하, 소사하 일대서 20여명의 중공당원을 발전시키고 중공안도현위를 조직, 현위서기책임을 짊어졌다. 안도현위가 파괴되자 그는 활동지대를 연길현으로 옮기였다가 중공연화현위 제5임서기로 부임되었다. 1931년 4월 8일, 진공목은 적들에게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었다.
4. 황포계 출신들과 남, 북만 항일투쟁
1927년 남창봉기와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소수의 조선족동지들이 동북의 남만과 북만으로 돌아왔다. 오성륜(전광), 진공목(리병희), 박봉, 최석천, 마천묵, 반경유, 리계동 등이 그 걸출한 대표들이다. 그들은 중공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동북 당조직의 건설과 항일유격대 건설에서 한몫을 맡아나섰다.
1925년부터 1930년초사이 동만과 남만, 북만을 포괄한 동북의 광활한 농촌들을 보면 특정된 역사적원인으로 하여 소수의 중공당원들만이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고 비밀활동에 종사하고있었는데 그들은 아직 광범한 군중들속에 깊이 뿌리를 박지 못한 상태였다. 그대신 동만을 중심으로 한 동북의 농촌들에는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이주민들이 많이 생활하고있은데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및 그 산하의 군중조직이 맹활동하고있었다. 이럴 때인 1930년 1월, 황포군관학교출신이고 중공당원이고 조공당 만주총국(엠엘파) 주요인물인 오성륜이 상해로부터 만주에 왔다. 그는 당중앙의 지시로 봉천(심양)에 자리잡은 중공만주성위와 련계한후 성위산하에 중공만주성위 소수민족위원회(일명 소수민족부)를 설치하였는데 오성륜, 진공목, 박윤서가 소수민족위원회 사업위원으로 임명되고 각기 남만, 북만, 동만의 순시원(일명 특파원)을 맡았다.
반석현은 남만혁명의 발원지이다. 1929년 당조직에서는 황포군관학교출신들인 박봉형제를 이곳에 파견하여 조선족들가운데서 중공당원을 발전시키게 하였다. 그들형제와 오성륜 등의 노력으로 1930년 6월까지 반석현에는 중공당원이 40명으로 늘어났는데 그들 모두가 조선족들이였다.○17
남만에서의 중공당원발전사업은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변시키는데 훌륭한 토대를 마련하여주었다. 1930년 3월과 4월, 원 조선공산당 엠엘파만주총국과 화요파만주총국 동만도 등은 국제공산당이 제기한 《일국일당》 원칙을 접수하고 각기 해산선언을 발표한 뒤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엠엘파계통 조공당원은 43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에 토대하여 중공만주성위에서는 1930년 7월부터 10월까지 사이에 강삼, 료여원 등 동지들을 조선족이 집거해있는 남만과 동만, 북만의 농촌들에 순시원으로 파견하여 당지의 조선족중공당원들을 도와 중공현위와 구위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1930년 7월과 8월기간에 강삼의 지도밑에 황포계출신 박봉을 서기로 하는 반석중심현위와 리창일을 서기로 하는 류하현위, 안일상을 서기로 하는 청원현위, 김만성을 서기로 하는 해룡 중심현위가 륙속 조직되었다. 1930년 여름 원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중대 중대장이였던 최석천(최용건)은 북만의 요하현 조선족집거구에서 당의 선전, 조직 사업을 잘하여 조선족당원을 위주로 한 중공요하현위를 건립하였다. ○18
북만에서 황포계출신들은 항일무장투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조선태생이고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리계동(일명 리유백)은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가 동북에 돌아온후 선후로 료녕의 흥경현, 흑룡강의 녕안현 동경성, 아성현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참가하고 1932년 9월에 주하중심현위 위원책임을, 1933년 10월에는 주하반일유격대 군수공급책임을, 1934년 6월에는 주하유격대로 개편된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 경제부장 책임○19을 맡고 주하반일유격대와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1934년 7월에 그는 특무 주광아에 의해 불행히 살해되었다. 그때 그는 38살이였다.
반경유(본명 리기동, 렬사)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북벌전쟁과 남창봉기에도 참가하고 소련에 가서도 공부한적 있는 조선족혁명가이다.○20 지난 30년대초반에 그는 선후로 중공녕안중심현위서기, 중공수녕중심현위서기, 중공길동국 조직부장 등 요직에 있으면서 1934년 5월에 동지들과 함게 녕안반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21 이 유격대가 1935년 2월에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최석천(당년 부른 이름은 김지강.)은 1933년 4월에 요하에서 요하농공의용대를 조직하고 대장직을 맡았다. 이 의용대가 1934년 2월에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로 개편되었다가 1936년 11월에 동북항일련군 제7군으로 발전하였다. ○22그때 최석천은 군 참모장이였는데 1937년에는 군당위서기 겸 대리군장으로 부임되었다. 동북항일련군의 11개 군가운데서 기본주력은 제1군부터 제7군까지인데 북만의 제5군, 제7군은 진짜 쇠소리 쟁쟁나는 항일부대였다.
5. 결론
본문에서 필자는 동만, 즉 연변을 중심으로 남만과 북만으로 나누어 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혁명자들의 동북에서의 항일활동형편을 두루 살펴보았다. 유감스러운것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상기 동지들을 제외한 기타 황포계출신들에 대해 서는 모르고있는 실정이다.
황포계 출신들이 동북항일무장투쟁에서 일으킨 역할은 간과할수 없다. 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혁명자들은 연변과 남만, 북만의 당조직건설, 유격대건설, 항일무장건설에 중대한 기여를 하면서 일본침략자들과의 피어린 싸움에서 불가결의 역할을 함으로써 항일유격대의 토대와 연변 당조직의 토대를 굳게 다져주었다. 이는 지난세기 30년대중반이후 동북항일련군투쟁의 견실한 기초로 되였는바 동북항일투쟁에서 정초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인민들은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일으킨 상기 황포계출신들의 역사적공훈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다.
【주해】
① 중공당사강의(讲义)(신민주주의 혁명시기).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982년 7월 제32페지 ② 원 연변역사연구소 자료, Ⅳ-A14 ③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조선문).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제69페지 ④ 관내지구 조선인반일운동자료 회편(한어문, 상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⑤ 원 연변역사연구소 자료, IV-A14 ⑥ 연변 주당안관자료:3060 ⑦ 원 연변역사연구소 자료 Ⅱ-C44 ⑧ 김양, 복찬웅, 김우연. 광주봉기와 조선용사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3년, 제145페지 ⑨ 김산. 중국혁명대오에서(한어문). 향항 남월출판사, 1977년 ⑩ 권립. 중국조선민족사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3년, 제145페지 ⑪ 황포군관학교 자료. 광동인민출판사, 1982년 2월, 제93페지 ⑫ 한준광. 중국조선족인물전.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제107, 17, 31페지 ⑬ 조선족백년사화 제2집. 료녕인민출판사, 1984년 4월, 제22페지 ⑭ 한준광. 중국조선족인물전.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제107, 17, 31페지 ⑮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조직사. 연변인민출판사, 1991년 6월, 제60페지 ○16 리광인방문. 유영효 취재기. 1981. 5.25 ○17 1987년 11월 5일부 흑룡강신문 ○18지부생활. 1986. 제7호, 제47페지 ○19 김우종, 원인산, 리영옥 번역. 불멸의 투사. 북경: 민족출판사, 1982. 제123페지 ○20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3) 제83페지 ○21 흑룡강당사자료 제1집. 1985년 4월, 제87페지 ○22 흑룡강당사자료 제1집. 1985년 4월, 제148페지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