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1910년대 북간도지역에서의 항일운동은 기독교를 떠나서 운운할 수 없다. 당시 서양문화의 상징으로 된 기독교는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의 이주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마음과 생활의 피난처가 되고 보호자가 되고 안식처가 되었으며 항일민족운동가들에게 있어서는 서양문명의 전달자로, 애국계몽운동의 수단으로, 항일구국운동의 구심점으로 되었다. 한데서 이 땅의 조선족들은 삶의 터전을 닦아가기 위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항일운동가들은 기독교란 이 교회조직을 기반으로 조선족사회를 통합하면서 그 뭉친 힘으로 1920년도까지 이어보는 1910년대 항일운동을 거세차게 밀고 나갔다.
기독교로 뭉쳐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은 항일운동가들과 조선족민중의 공동의 마음의 발로였다. 본 논문에서 펼쳐 보이는 1910년대 거창한 항일운동—이상설과 서전서숙, 양정학당과 4대중학교, 간도교육회와 간민회, 나자구사관학교와 철혈광복단, 용정 3.13운동과 간도국민회, 국민회군과 봉오동, 청산리 전투, 15만 원 탈취거사, 경신년 “대토벌”과 반 “토벌” 등은 모두가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이 주체가 되어 이뤄지고 추진되었다. 1910년대 조선족사회를 이끈 이런 굵직굵직한 항일역사사건들이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기독교출신의 동지들에 의해 펼쳐졌다는 것은 꾸밈이 아닌 역사의 진실이다.
했으나 지금까지의 1910년대 조선족 역사연구, 항일운동사 연구는 거의 모든 연구가들에 의해 항일역사의 흐름대로 펼쳐졌으나 이 모든 굵직굵직한 항일역사사건들을 하나같이 시종 기독교와의 관계속에서 펼쳐 보이지 못하였다. 기독교의 항일을 운운했다 해도 개개의 사건과 흐름이고 총체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1910년대 북간도 항일운동의 거창한 사변들을 기독교와의 관계속에서 하나하나 펼쳐보려 한다. 그 속에서 서전서숙이 떠오르고 명동을 주체로 한 최초의 4대중학교가 떠오르고 철혈광복단이 떠오르고 15만 원 탈취거사가 떠오르고 조선족 사회를 밀고 나간 간도교육회와 간민회, 간도국민회가 떠오른다. 이런 항일역사의 주인공들은 기독교출신의 동지들이다. 그네들은 기독교를 통한 민중의 뭉친 힘에 의해 용정 3.13운동을 조직하고 무력항쟁으로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펼치었으며 치 떨리는 1920년 경신년 “대토벌”에 맞서 일제침략군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웠다.
하다면 서양문화의 상징으로 받들린 기독교가 어느 때 북간도에 들어왔고 언제부터 조선족사회에 받아 들여졌는가? 이를 알자면 20세기 초엽 전후시기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북간도라 하면 흔히 화룡, 연길, 왕청, 훈춘 4개 현을 가리키지만 돈화도 사실 북간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료에 의하면 오늘의 연변땅 범위 내에서 기독교가 가장 일찍 밀려든 것이 돈화이다. 아편전쟁 후 기독교의 신교파 여러 종파들이 육속 중국에 밀려들기 시작했는데 돈화는 벌써 19세기 말엽으로 보이는 광서년간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었다.(1) 돈화의 기독교는 장로회파로서 시초 지금의 돈화려사부근에 초가집 세칸을 잡고 길림교회의 관할 밑에서 활동을 벌리었다. 광서 26년인 1900년에 의화단운동이 돈화까지 미치면서 목사는 자취를 감추고 교회당이 타버리고 신도 12명이 살해되었다(2)고 한다. 청정부에 의해 교회가 다시 선을 보인 것은 광서 29(1903)년이다.
돈화에 이어 안도현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진다. 명월진기독교의 흐름을 보면 1900년 전후로부터 성결교, 감리교, 장로교, 조선기독교, 동아기독교 등 5대 교파(3)가 나타나게 되었다. 영국 예속지인 캐나다 장로파교회 해외 선교부는 1898년에 연변에다 선교구를 정(4)하고 1903년부터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벌리었다. 이들 기독교선교부는 외국인들이 북간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대본영으로서 용정에 자리 잡은 10여 명 캐나다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조선의 원산, 성진 등지에서 여러 해 전도활동(5)을 하다가 조선이주민들을 따라 1903년에 북간도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1905년에 일제침략자들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이른 바 “을사보호조약”은 캐나다 기독교선교사들의 지대한 불만을 자아냈다. 이들 선교사들이 조선민족에 대한 왜놈의 탄압을 반대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조선이주민들의 반일감정과 독립염원을 동정하고 지지하면서 조선족사회의 실제에 맞게 전도활동을 펼치니 대단히 인심을 샀다. 허나 북간도 교회의 중추세력을 이루며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되고 조선족사회에 널리 접수된 것은 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출신의 이동휘, 김약연, 구춘선, 황병길 등 쟁쟁한 항일운동가들에 의해서이다.
당시 북간도 조선족사회의 수령으로, 조선족사회를 이끈 이동휘(1873년도 생)는 다 알다시피 함경북도 단천군출신으로서 1902년에 벌써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되어 어전을 지켜섰다가 1905년 11월에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니 이에 반기를 든 사람이다. 이동휘는 1907년 7월에 또 나라가 군권을 잃고 국군까지 강제 해산 당하니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07년 9월에 양기택, 신채호, 이갑, 안창호, 이승훈 등과 함께 비밀단체 서북학회의 토대 위에서 비밀정치단체 “신민회”를 조직하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동분서주하면서 각지에서 학교를 꾸리며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자유롭지 못한데서 1910년 봄에 이동휘는 안창호, 최석하, 이갑 등 신민회간부들과 긴급회의를 가지고 해외망명을 결의하고 여러 패로 나뉘여 해외망명길에 올랐다.
1910년 6월, 중국 청도에서 신민회 간부회의가 열린 후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의 주요활동무대는 중국의 북간도였다.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자면 급선무로 나서는 것은 조선족사회의 조직화였다. 당시 중국과 일제의 압력으로 공개적인 정치, 사회 단체를 조직할 수 없는 실정에서 가장 좋기는 기독교가 지닌 신성불가침의 힘과 영미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입장을 실제에 맞게 활용하여 교회란 이 끈끈한 힘으로 뭉쳐세우는 것이었다.
이에 이동휘는 조선 성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캐나다 선교사 구례선과 토의하고 동지들인 김립, 윤해, 계봉우, 정연호, 장기영, 고명수, 오영선, 유예균, 마진, 서상용, 김하석, 김하구 등과 함께 연해주, 북간도, 함경도를 포괄하는 한·중·노 기독교 선교단을 조직(6)하고 동지들과 더불어 북간도에 진출하여 포교활동을 본격적으로 내밀었다.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학교를 세워라, 자녀를 교육시켜라, 그래야 우리도 서양문명국과 같이 잘 살 수 있다. 삼천리강산 한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삼천 개의 교회와 학교가 이룩되는 날이 독립되는 날이다. (7)
눈물에 젖은 이동휘의 피타는 호소는 인심을 크게 샀다. 게다가 그가 북간도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신도 100만 명이 이룩되는 날이 나라가 독립되는 날이다!” 라는 구호를 내거니 북간도에서 일대 기독교운동이 일어났다. 훈춘현에서는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의 1910년부터의 전도에 힘 입어 항일운동가 황병길, 오병묵 등이 호응하여 훈춘기독교 강학당을 설치하고 교우회를 조직(8)하면서 반일사상으로 꽉 찬 본격적 선교활동을 밀고나갔다. 특히 북간도 기독교운동의 선두에서 달린 사람은 북간도 교회의 대표적 인물 김약연이다. 김약연은 1899년 2월에 종성과 회령의 4대 학자가족과 함께 명동, 장재에 집단 이민한 후 항일구국에 뜻을 두고 1901년에 규암재 등을 꾸리다가 서전서숙이 폐교된 후 1908년 4월 27일에 힘을 합쳐 명동서숙을 꾸렸는데 1909년에 이동휘가 파견한 신민회 회원 정재면이 명동학교 교원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권유로 김약연은 유교사상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학교와 마을을 기독교화하기에 이르렀다. 잇따라 김약연은 이동휘의 동지가 되고 집단이주시 성원들인 문치정, 김하규, 남위언 그리고 박무림, 김영학, 유찬희, 구춘선, 강백규, 마진 등과 더불어(9) 북간도 조선족사회를 거창한 항일에로 이끄는 민족지도자로 떠올랐다.
기독교 전도와 항일운동은 모순체가 아니라 동일한 성격이고 일본제국주의란 대적을 두고 중국과 조선은 동병상린인데서 중국의 지방관리들은 기독교도들을 우대하였다. 한데서 기독교는 여느 교보다도 더 빨리, 더 크게 북간도 조선족사회의 구심점으로 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해당통계자료에 따르면 1903년에 훈춘현에서 기독교 포교활동이 시작되어 1906년에 용정교회가 세워졌는데 1921년에 이르러 전 북간도에 교회 63개 소, 신도 6,442명으로 발전하였다. 1925년에는 교회가 85개 소, 신도가 10,277명, 가장 흥성기를 보였던 1932년에는 교회가 105개 소, 신도가 21,142명으로 치달았다. (10)
이같이 북간도의 기독교전도는 항일의 주선율을 타고 1910년대 초기와 중기의 발전을 거치면서 이동휘와 그의 기독교계열의 동지들에 의해 조선족사회와 교육사회를 이끄는 간도교육회와 간민회로 발전되었다. 이 조직구심점이 1919년 3.13반일운동을 계기로 다시 간도국민회로 이어지면서 간도국민회는 명실공히 북간도만이 아닌 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족 반일단체가운데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영향력이 가장 큰 반일무장단체로 발돋움했다.
본 논문은 이동휘와 그의 기독교 계열동지들이 전개한 1910년대 북간도의 중요한 항일활동과 역사사건들을 개략적으로 훍어보면서 그 시기를 1910년대를 중심으로 20세기 초엽부터 1920년 경신년 “대토벌”시기까지 잡아보았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1910년대 북간도 조선족의 항일투쟁을 시종 기독교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 초점을 두고 1910년대 역사연구를 하나로 일맥시킨 것은 본고가 처음이라고 보면서 1910년대 조선족사 항일연구에 도움을 주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2. 리상설과 서전서숙
20세기 초는 연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기독교가 항일운동의 발자국을 뗀 첫 출발시기이다. 첫 출발의 기꺼운 장이 바로 서전서숙의 등장이라 하겠다. 조선족역사연구가들은 다 알다시피 조선 반도서 살던 우리 겨레가 살길을 찾아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에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예로부터 문화를 숭상하고 교육에 남다른 중시를 돌려온 이 땅의 조선족들은 매일 끼니를 겨우 이어가는 상황에서도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잊지 않았다. 당시 조선이주민들이 모여사는 마을마다에서는 훈장을 모셔다 서당을 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최초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서당의 형태는 각이하여 온 마을이 힘을 합쳐 서당을 꾸리기도 하고 몇몇 사람들이 모여 서당을 꾸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여러 유형의 서당이 우후죽순 일어섰는데 연변의 서당교육은 20세기 초까지 흥성의 일로를 걸었다. 해당자료에 의하면 1914년 연길현에 조선족이 꾸린 서당만 해도 116개 소에 달했다고 한다.(11) 그 시절에 시대사조인 사립학교가 흥성해 짐에 따라 서당교육은 된 충격을 받았으며 점차 근대학교교육으로 번져갔다. 근대학교교육의 선두에 선 학교 중의 하나가 용정에 일떠선 서전서숙이다.
1905년 11월 이른 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수많은 항일민족운동가들이 해외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위해 그 당시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으로 망명하여 왔다. 그 중의 한사람이 의정부 참찬 이상설인데 그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여 싸운 것이 죄로 치부되어 옥에 갇혔다가 1906년 봄에 석방되자 비밀리에 가산을 처리하고 이해 4월 18일(음력), 이동녕과 함께 인천항에서 중국 상선을 타고 상해를 거쳐 청도에 갔다. 이상설은 청도에서 여러 동지들을 만나 상론한 뒤(12) 그길로 러시야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갔다가 이해 8월에 (10월이라고도 함)에 동지들인 이동녕, 정순만(왕창동), 황달영(전공달), 김우용(김동환), 여조현(여준), 박정서(박무림), 홍창섭 등과 더불어 용정촌에 왔다. 이상설은 선뜻 자금을 내놓아 기독교신자 최병익이 갓 지은 팔간집을 사서(13) 서전서숙을 꾸리었다. 이상설과 그의 동지들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인데서 최병익과 의기투합 되었다. 연변에서 실천적으로 펼쳐지는 기독교와 항일투쟁의 기꺼운 출발이었다.
이상설은 친히 서전서숙의 숙장을 맡고 교원까지 담당하였다. 그는 이동녕, 여조현, 김우용, 황달영, 정순만, 박정서, 홍창섭 등을 교원으로 초빙하였다. 규암 김약연선생 서거 55주년기념세미나문집에 실린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윤병석선생의 글 “북간도의 민족주의교육”에 의하면 이동녕은 이상설과 함께 활동하다가 3.1운동 이후 상해에서 의정원의 의장직을 맡아 임정을 세운 독립운동계의 원로이고 정순만은 서전서숙 후 연해주 《해조신문》주간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고취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여조현, 즉 여준은 서전서숙에 이어 서북간도 각지에서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다가 서로군정서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던 인물, 박정서, 즉 박무림은 서전서숙 폐숙후 장재촌의 김약연선생과 같이 명동서숙을 세우고 숙장이 되어 서전서숙을 정신적으로 계승한 인물이다. 이 같이 서전서숙의 교원들은 일제하 항일운동의 인재를 키우는 최전열에 나선 쟁쟁한 인물들이였다.
서전서숙은 첫 시작에 학생 22명을 받아 들이고 글을 가르쳤는데 이상설은 사재를 서슴없이 서숙의 운영경비로 내놓았다. 시초 학생모집이 어려울 때 명동 장재에서 규암재를 꾸리던 김약연이 사촌동생인 김학연과 남위언을 서전서숙에 보내주었다.(14) 어떤 글에서는 명동일대서 만도 20여 명 학생을 서전서숙에 입학(15)시켰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사실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일찍 서굉일교수와 함께 “규암 김약연선생”을 내놓은 김약연의 증손자 김재홍선생은 2004년 10월 중순에 명동, 장재촌 답사 시 필자와 당시 김약연선생이 보낸 학생은 김학연과 남위언이였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사실을 보아도 시초 모집수가 22명이라 할 때 명동일대서 20여 명을 보냈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학연과 남위언은 젊음이 넘치는 청년들이고 또 남위언은 영암촌에 서당을 베풀어 한학을 가르치던 사람이고 보면 윤병석선생의 지적과 같이 서전서숙에서 갑반에 20세 전후의 청년들도 받아들였다는 것이 맞아 떨어진다. 항일운동가 양성이 목적이였으니 말이다.
서전서숙은 학생들을 갑반(고등반)과 을반(초급반) 두반으로 나누고 역사, 지리, 산술, 정치학, 국제공법, 법률, 한문 등을 가르쳤다. 이상설은 손수 《산술신서》(상, 하 권)를 편집하여 갑반학생들을, 황달영은 역사와 지리과를, 김우용은 초급반의 산술과를, 여조현은 한문, 정치학, 법학 등을 가르쳤다. 교원 모두가 기독교출신의 열렬한 항일민족운동가들이라 서전서숙의 실시는 철저한 항일민족교육이었다. 더욱이 항일인재를 키운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본다.
헌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고종황제의 밀사로 선정된 데서 서전서숙 운영은 말 그대로 큰 타격을 받았다. 1907년 4월 초순 경에 이상설이 비밀사명을 띠고 떠나자 서전서숙은 재정난으로 몇 개 월을 지탱치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여러 가지 자료에 따르면 서전서숙의 일부 교원과 재학생들은 훈춘현 탑자구에 옮겨가 서전서숙을 회복하고 학생을 더 모집하여 1년 간의 수업을 거쳐 3개 반 학생 74명을 졸업시키고 해산하였다고 한다. 서전서숙의 교원 박무림과 학생 김학연, 남위언 등은 명동에 돌아가 김약연선생을 도와 명동서숙 설립에 나섰다. 현재 서전서숙의 학생으로 이름이 전해지는 것은 갑반에 윤정희, 이병징, 윤규한, 김정문, 남세극, 채우석, 이한용, 구자승, 구정서이고 을반에 김학연, 박일병, 오병묵, 이정징, 박효언, 구자익, 박세호, 남위언은 반이 알려지지 않는다.(16)
어찌하든 서전서숙은 신학문과목에 중점을 두고 철저한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독립군양성소의 성격을 지닌 신형의 학교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조선족 교육사연구와 더불어 1904년에 세워졌다는 훈춘현 동광학교가 나타남에 따라 서전서숙은 첫 조선족근대학교의 월계관을 고스란히 내놓아야 했지만 조선족사립 학교교육 운동과 항일민족교육의 서막을 본격적으로 열어놓은 그 의의는 더욱 크다. 서전서숙은 기독교와 항일운동의 신성한 결합물이었다.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