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몇번이고 다녀오는 윤동주생가지만 광복 60돐 8.15에 찾아가는 윤동주생가가 그리도 정다울수가 없다. 광복 60돐을 맞는 날이자 윤동주 조선족시인 서거 60주기, 조선족사회에 알려진 20주기가 되는 해여서 더욱 그러했는가부다.
오전에 연길시에서 윤동주서거 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를 성과적으로 가진 주최측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와 연변대학 조선한국학중심, 한국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서시》 문학 해당인사들과 세미나 부분적 참가자들은 오후에 또 올들어 보기드문 무더위에도 전용뻐스로 룡정 명동에 가서 윤동주생가를 찾았다. 답사자일행의 모습들엔 윤동주시인에 대한 다함없는 추모의 정이 그대로 흘러 넘치었다.
일행가운데서도 선배어른들이신 중국측 조성일회장님과 한국측 한국 해외한민족 교육진흥회 이사장이고 전 민주당총재인 이기택 이사장님, 한국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님 등 분들은 흐르는 땀을 연신 훔치며 석연한 기분속에 빠져들었다. 숱한 연변의 문화행사와 시상식 후원 외에도 10여전에 벌써 이곳 윤동주생가와 룡정 대성중학교 옛터 교정에 윤동주시비를 세우도록 성금을 지원했다는 이윤기소장님, 연변 민족교육진흥에 힘다하는 이기택 이사장님은 인차 깊은 회포와 감회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윤동주생가는 1994년 8월에 그때의 룡정시 지신향정부와 룡정시문련,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의 후원으로 윤동주시인의 옛집터에 복원된것으로서 두만강가 삼합진 강역 5대의 조선족 옛기와집을 사고 헐어다가 생가자리에 살손을 댄것이였다. 이날 윤동주생가 뒤쪽 백양나무 숲속에서 가진 시인윤동주컵 조선족민속씨름경기도 흥미를 끌었지만 생가 동쪽가에 복원된 옛우물이 특히 짙은 흥미를 자아냈다.
그제날 명동에서 태여난 윤동주(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는 어린시절에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같이 과수원울타리로 되여있는 뽕나무 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리곤 하였다.
그때 그 시절을 두고 윤동주시인의 친동생 한국의 고 윤일주교수는 그제날 생가와 우물 등을 두고 이렇게 회상하였다.
…우리 남매들이 태여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였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밭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보는듯이 생생히 그려낸 옛모습이다. 지금은 복원된 집이고 집뒤에 자란 애어린 살구나무와 앵두나무들이 반겨주었지만 올해 봄 이전까지만도 잡초가 우거지고 무너져내린 쓸쓸한 우물터가 옛모습 그대로 다시 복원되니 그지없이 반가왔다. 어린 시절 우물가에서 뛰놀던 윤동주시인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었다.
알고보니 옛우물복원은 이번 윤동주세미나 주최자와 후원자측의 하나인 한국스포츠외교문화원 박영우원장과 한국 엔티에스 대표이고 공학박사인 김정윤선생의 정성에 의해 옛모습을 갖추었었다. 이에 감동된 한국시인협회 리근배선생은 우물가에 자리한 바위비에 친히 우물복원글을 쓰고 정면에 윤동주 시 《자화상》의 편단을 새기기까지 하였다. 바로 8.15 60돐을 하루 앞둔 일이라 한다. 시 《자화상》은 시에 나오는 우물이 어디 우물이겠는가고 시비가 있기도 하지만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다 하여 더욱 인상적이다.
복원된 옛 우물가는 물마이는 사람들로 조용할줄 모른다. 깊은 우물의 시원한 물을 드레박에 올려 바가지로 마시는 이들속에는 무더위 씨름경기에 나선 젊은 씨름군들도 있고 한국서 오신 손님들도 있으며 세미나 참가자들도 있어 흥미를 무척 끌었다. 저저마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드레박에 바가지로 물마이는 기분이 별기분이라며 차디찬 물맛이 좋고 더위를 가신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올해 48살에 난다는 룡정시 지신림장의 리종화씨는 끊임없이 드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며 손님들을 반기였다. 그는 명동이웃 마을인 주용촌(명남)에서 태여나 얼마안되여 부모님을 따라 윤동주시인 생가로 이사하여 7살까지 바로 이 원 생가에서 생활하였다면서 열성을 보이였다.
전용뻐스는 잠시후에 룡정시가지 묘소로 통한 언덕길에 들어섰다. 전용뻐스가 언덕길에서 물러서자 소형뻐스로 대신할수밖에 없었는데 묘소에 이른 이들은 숭엄한 기분속에 시간가는줄 몰랐다. 답사자들 모두가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시인이 아니면 문인들이라 그 감정이 특이했다. 윤동주묘소를 처음 찾은 한국문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윤동주묘소는 룡정 동산의 그리스도묘지에 자리잡았는데 묘소량켠의 잎이 무성한 살구나무와 비술나무가 그늘을 지어주고있었다. 일행은 먼저 리근배시인 선생의 사회와 박영우원장의 주선으로 윤동주묘소에 생화를 드리고 묵도하고는 술병을 터뜨려 묘소에 부으며 추모의 정을 표달하였다.
답사자일행속에는 중국측인사들인 연변대 권철교수와 해마다 이곳 묘지에 모셔진 부모님들 묘소로 청명, 추석에 다닌다는 길림신문사 류일석기자도 섞이였다. 70고개를 넘긴 권철교수가 20년전 1985년 4월에 일본에서 오신 오오무라교수와 연변대 리해산교수, 룡정중학교 한생철선생 등과 함께 동산묘지를 쓸며 윤동주묘소를 처음 찾아내던 이야기를 떠올려 답사자일행의 깊은 경의와 감회를 자아냈다. 한국시인이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서시》문학 총무국장인 김영은녀사는 연신 고개를 끄떡이였다.
윤동주묘소참배의 클라이막스는 한국서 오신 편정옥 녀류시인이 금방 쓴 시 《시인의 사후》였다.
꽃보다 아름다운 청년 민족시인 윤동주 조국과 겨레 앞에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 육신은 한줌 흙으로 산화하셨어도 이승의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평화로운 용정 동산에서 그리운 어머니와 만나 생그런 흙내와 풀향에 묻혀 살벌한 세상소식 귀를 닫고 만년설이 녹아든 산소같은 시를 쓰며 날이새도록 별을 헤고 계십니까
참으로 별의 시인 윤동주에 대한 추모의 정이 듬뿍 어린 절절한 시였다. 그래서일가, 답사자일행은 《날이 새도록 별을 헤고 계》실듯한 시인을 그리며 이윽토록 윤동주묘소를 떠날줄 몰랐다.
세미나와 답사의 하루는 8.15날 윤동주시인을 다시 찾은 사람들의 사랑과 추모속에서 빨리도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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