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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돐특집】(16) (론문) 윤동주는 우선 먼저 우리 조선족시인(2)
2007년 04월 10일 10시 54분  조회:3496  추천:149  작성자: 리함

4. 왜서 윤동주는 먼저 조선족시인인가?

 

우에서 필자는 윤동주시인평가가 민족시인으로부터 조선족시인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간의 변화과정을 개략적으로 검토하여 보았다. 그럼 어찌하여 윤동주는 우선 먼저 조선족시인이여야 하는가? 이는 학계나 어느 개인이 윤동주시인의 실제를 떠나서 자기나름대로 지적할수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를 알자면, 설복력있게 보여주자면 윤동주가족의 이주와 가족관계, 중국적에로의 가입, 청소년시절의 윤동주시인의 실태를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안된다.

 

(1)    이주와 가족관계

 

이땅의 조선족력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것은 19세기 60년대부터라고 해야 할것이다. 18세기 중엽이후 조선북부의 빈고농민들이 리조조선의 엄격한 국경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섰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인 이주는 아니였다. 19세기 초엽이후 수가 늘어갔다해도 본격적인 이주붐이 일지 않았다. 1861년과 1863, 1866년에 대수재가 조선북부지구를 휩쓸고 1869년과 1870년엔 련속 대한재가 덮치자 조선북부의 많은 농민들은 생활고를 헤치고저 분분히 두만강을 건너섰다. 두만강이북에로의 력사적인 대이주시작인데 그후 조선 회령부사 홍남주로 인한 월강해제소식과 1885 청정부의 봉금령페지는 대이주붐을 일으켰다. 윤동주의 선조들도 이같은 이주의 물결을 탔다.

윤동주시인의 윤씨가문은 파평윤씨로 알려진다. 이들 《윤씨가문은 본래 종성사람들이지만 회령에서 살다가 넘어갔기 때문에 그후 회령 윤씨가문으로 통했다.》⑮ 그러니 함경북도 회령서 살다가 종성으로 갔다는 말인데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1886년에 4 1녀를 데리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섰다. 처음 자리잡은 곳이 두만강 중류대안인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이다. 그때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이 겨우 11살밖에 안되였다.

그후 1899 2 18일에 종성과 회령의 우국동지들인 김약연 4대가문의 대소가문 스물두집의 식솔 도합 141명이 두만강을 건너 오늘의 명동, 장재에 와서 자리잡았다. 소식을 들은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은 일가식솔들을 거느리고 이듬해 1900년에 지금의 명동촌으로 이사하여 왔다. 한데서 명동촌에 삶의 터전을 닦은 5 가족⒃은 김약연의 전주김씨가문, 문병규의 남평문씨가문, 김하규의 김해김씨가문, 윤하현의 파평윤씨가문, 남위언씨의 남씨가문 등이였다. 윤동주는 1917 12 30일에 아버지 윤영석(18951965) 어머니 김룡(18911948)사이 맏아들로 태여났다. 어머니 김룡은 열렬한 민족독립선구자이고 교육가였던 김약연선생의 누이동생이였다.

이런 실정은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도 중국태생이고 윤동주도 중국태생임을 알려준다. 이로부터 보면 윤동주시인은 정판룡교수의 지적처럼 《전형적인 중국조선족초기이민의 후손》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첫째가는 근거라 할수 있다.

 

(2)    중국적에로의 가입

 

1885 청정부의 봉금령정식페지와 함께 두만강 이북, 해란강 이남의 길이 700, 너비 40~50리되는 지역이 조선이주민의 개간구역으로 되였다. 1890년에 이르러 무산으로부터 종성대안에 이르는 200 두만강이북이 전부 개간되고 조선이주민의 거주지구는 두만강대안으로부터 해란강, 부르하통하, 가야하류역일대로 점차 확대되였다. 이에 따라 시기시기에 따른 조선이주민들의 토지소유권문제와 입적문제가 크게 대두하였다.

1909 말에 청정부에서 최초의 국적법—《대청국적조례》를 제정하였다. 그뒤 이곳 간민회의 주요책임자인 김약연과 리동춘 등은 서로 토의하고 리동춘과 김립이 함께 만세대의 조선이주민을 대표하여 1914년에 북경에 가서 민국국무원에 《만호청원귀화입적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간민회의 친중배일(親中排日) 적시적인 조치였는데 이는 중화민국 국무원의 비준을 받았다. 조선이주민들은 개인신분으로 입적수속을 할수 있게 되였으며 정식으로 국가법률의 보호를 받았다.

만호청원귀화입적 비준과 때를 같이하여 명동촌의 김약연 전주김씨가문과 윤하현의 파평윤씨가문 5대가족은 물론 명동일대 조선이주민들이 모두 중국적에 가입하고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되였다. 이는 간민회책임자들인 김약연과 리동춘의 연구자료와 김약연의 증손자 김재홍선생의 연구문집, 증언을 보면 보다 뚜렷해진다.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은 선참 중국적에 가입한 사람으로서 조선족초기이민의 후손인 윤동주는 1917년에 중국조선족의 가문에서 태여나 조선족으로 자라게 되였다.

이밖에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과 모친 김룡은 이땅에서 광복을 맞이하고 조선족가문을 이어갔다. 모친 김룡이 1948년에 사망하고 부친 윤영석은 1965년에 룡정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앞서 윤동주의 셋째동생 윤광주(1933년생) 광복후 아버지와 같이 지내며 시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2년에 페결핵으로 타계함을 보인다. 손아래 녀동생 윤혜원과 둘째동생 윤일주는 광복후 한국행에 올랐고 윤혜원녀사는 지금도 연변출신의 남편 오형범선생과 같이 오스트랄리아에서 살고있지만 《난 지금도 <이랬슴둥>, <저랬슴둥>하는 연변사투리를 곧잘 씁니다. 우린 연변사람이니다. 윤동주도 연변사람입니다.》⒄하고 말한다.

이같은 사실은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임을 지적하고도 남음이 있다. 윤동주시인이 중국조선족이라는 둘째가는 주요근거라 하겠다.

 

(3)    윤동주생애 20 8개월 연변에서

 

어떤 이들은 윤동주시인은 평양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사망한것을 리유로 한국이나 조선의 사람으로 착각한다. 어떤 이들은 민족시인 평가에만 류의하고 조선족시인으로는 평가하려하지 않는다. 윤동주는 확실히 평양, 서울, 일본에서 공부하였지만 이는 학문을 닦기 위해 떠난 공부행이였지 이주살이로 평양이나 서울, 일본 등지로 간것이 아니였다. 물론 공부하고 어디에 떨어지는가 하는것은 다른 문제이다.

본고는 윤동주시인의 생애를 두루 시간적으로 점검해보았는데 윤동주는 27 2개월(해수로는 29) 생애를 살다가 떠나간 사람이다. 그중 생의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보냈다면 생의 20 8개월을 연변땅에서 보내였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윤동주시인은 소학교와 중학교시절을 명동소학교와 달라자 현립1, 룡정은진중학교에서 보냈다. 평양숭실중학교 시절은 7개월, 서울 연희전문학교시절은 33개월, 일본 도꾜 릿꾜대학 문학부시절과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시절은 36개월—이 세곳 공부시절을 모두 합쳐보아야 6 4개월밖에 안된다. 과연 생의 20 8개월을 연변땅에서 보냈다는 말이니 시인 윤동주는 명실공히 손색없는 연변의 아들, 중국조선족의 아들이다.

누가 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가, 한국에서는 우리 민족의 시인이라고 민족시인으로만 받들어왔고 이땅에서는 력사적인 분석도 없이 민족시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했으니 윤동주는 마치도 중국조선족이 아닌것으로 착각되였다. 한국에서 발굴되고 연구되고 연변에 전해졌다하여 중국조선족과는 인연이 없는 시인으로만 알았다.

 

5. 맺음말

 

본고는 우리 민족의 일류 시인 윤동주를 두고 머리말, 윤동주시인 부름의 변화과정, 2005년도의 획기적인 변화, 왜서 윤동주는 먼저 조선족시인인가 등으로 나누어 윤동주는 당당한 중국조선족시인임을 여러모로 검토하여 보았다. 조선족시인이 옳음을 사실로 보여주기에 힘쓰면서 중국으로 볼때 모호한 민족시인개념을 더는 쓰지 말고 조선족시인으로 평가하여 자리매김을 할것을  희망하였다. 이는 1995 룡정서 가진 윤동주 50주기 기념학술토론회에서 정판룡교수님께서 벌써 첨예하게 지적하였다할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것이다. 조선족시인인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옳히 자리매김하지 못한 차실은 윤동주시인에게 더없이 미안한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시인 윤동주는 확실히 조선족시인이 옳다. 그렇다고 하여 시인 윤동주를 조선족시인만으로 평가와 정의를 내릴 의도는 꼬물만치도 없다. 다만 윤동주는 우선 먼저 조선족시인임을 자리매김하려는것뿐이다.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시인이면서도 전체 우리 민족의 시인이며 세계적인 시인으로 존경을 받으며 각광받고있는 분이다.

본고는 맺음말의 최후부분을 연변대 정판룡교수의 말씀으로 마무리지으려  한다.

《가장 민족적인 시인만이 세계적인 시인으로 될수 있으며 모든 세계적인 시인은 우선 먼저 민족적인 시인으로 되여야 하는것처럼 시인 윤동주도 우선 먼저 우리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민족의 시인이라는것이다.》⒅

 

 

 

 

 

 

주해: 

 

     정판룡, 중국조선족과 시인 윤동주, 민족시인윤동주50주기기념학술토론회 론문집(1995)    

     우와 같음. 

     《문학과 예술》(1985 5)

     《종합신문》(1987 7 29,  82일부 3)

     《천지》 (1987 12)

     《문학과 예술》(1988 3)  

     임범송 권철 주필, 《조선족문학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1989.6)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 7)     

     민족출판사, 1991 7, 526페지

     2003년급 조문학부 석사연구생 오광욱의 론문

     룡정문화총서, 일송정 5, 연변교육출판사, 2002 8

     문화산맥 사이트 www.koreancc.com 2004 10 23

     20세기 코리아문화양상과 전망 (2004 12 17)

     2005 2 17 기사

     서굉일 김재홍 지음,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한국 고려글방, 1997 10, 96페지

  우와 같음, 96페지

  2005 7 8일부 연변일보 3 《연변이 낳은 시성 윤동주》 (김철호 기자)

  민족시인 윤동주 50주기기념학술토론회 론문집, 8페지

 

 

                                                 2005 8 5

 

                    윤동주서거60돐 중한학술세미나 발표론문

                                한국 "서시" 2005년 가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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