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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서문
김병민 (연변대학 총장, 교수, 박사)
2001년 봄인가 제자 류연산씨의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재판본에 서문이라고 써준 바가 있다. 이태만에 또 제자 리광인씨의 청탁을 받고 《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전 4권)서문을 쓰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것도 력사학부출신도 아닌 조문학부졸업생이 성과작들을 내게 되니 더욱 그러한가부다.
내가 리광인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여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대혁명》후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될 때 나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선생이였다. 1978년 10월에 조문학부 78년급 (대학시험제도 회복후의 두번째기) 학생들이 입학한 후 나는 이들의 담임교원을 맡게 되였다. 그때 학급에는 리광인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나와 불과 몇해 년하였다. 헌데 어딘가 얼굴에 그늘이 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알고보니 그는 1976년 가을에 뜻하지 않은 《억울한 사건》으로 무르익던 입당은 고사하고 공청단조직에서까지 쫓겨나고 거듭되는 비판, 투쟁 끝에 한시기 류치장신세까지 져야 했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여러 모로 《신소》했으나 해당 부문에서는 알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알고보니 기막힌 일이였다. 앞길이 창창한 20대 젊은이에 대한 무단적인 결론은 나를 분노케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대학 공청단위원회 서기로 뛰던 로동문선생을 찾았고 공청단연변주위를 찾았다. 드디어 리광인씨는 억울한 루명을 벗게 되고 명예를 회복하게 되였다. 늦게야 공청단원마크를 다시 달게 된 리광인씨는 나를 찾아 거듭 감사를 표시하였는데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내 잊지 못해하고 있다.
나와 리광인씨의 류다른 인연이라 하겠다. 그뒤 내가 받은 강한 인상이라면 리광인씨는 조선족항일력사소설을 쓰겠다며 력사공부에 손을 댔다가 너무 깊숙이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작자의 허구에 의한 력사소설이 아니라 진실한 력사를 쓰겠다는 것이 리광인씨의 소신이였다. 그러던 그는 과연 대학 재학시절에 벌써 항일인물과 이야기를 써서 척척 신문, 잡지와 책들에 발표하기 시작하더니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연변일보사 기자로 뛰다가 아예 연변력사연구소로 넘어가 조선족투쟁사연구에 몸을 잠군 것이였다.
그로부터 10년세월이 흐른 1992년, 대학 졸업 10돐 때 보니 리광인씨는 중국 국내는 물론 멀리 일본과 조선까지 드나들며 국제학술세미나와 교류에 뛰어들었고 발표한 논문과 력사소재 글은 무려 100여만 자에 달해 동기동료와 선후배들 가운데서 탄탄한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여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주임 현룡순선생은 1994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가 걸어온 45성상을 한부의 걸작 《겨레의 넋을 지켜》(42만여 자)로 펴내며 조문학부 제25기생(즉 78년급)을 서술할 때 성과가 뛰여난 몇몇 학생들을 언급하면서 리광인씨는 《조선족역사연구에 달라붙어 숱한 항일이야기를 써낸》 학생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한데서 리광인씨는 중급직함도 동년배들 이르게 받았고 력사연구분야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리광인씨가 사단법인 조선민족력사연구소를 꾸리겠다고 직장에 적을 두고 나오더니 거의 10년간 소식이 끊기였다. 이를 두고 리광인씨를 알고있는 교수, 학자님들이나 동료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도 명색이 담임교원이라는 나도 아쉽기가 그지 없었다.
그러던 2003년 10월 17일,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제7차대표대회가 연길호텔에서 성황리에 열리였는데 이 대표대회 주석단손님으로 초대된 나는 우연하게도 협회부비서장으로 뛰는 리광인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또 사단법인 중국조선민족사학회의 부비서장이기도 했다. 오랜만의 상봉이였다. 리광인씨는 이번에 한국서 여러 권의 조선족력사저서를 펼치게 된다면서 먼저 출판하게 되는 인물편인 《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도합 4권)서문을 부탁하는 것이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비로소 리광인씨가 《잠적》한 10년사이 거의 10권에 달하는 저서를 집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졸업 20년 중 전 10년에 이미 조선족력사글 100여만 자를 정리, 발표했다면 《하해》(下海)한 후 10년간에는 전 10년의 100여만 자를 훨씬 능가한 알찬 성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나는 그의 헌신적노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는 남성편 상하권, 여성편, 소년아동편 도합 4권으로 무어졌는데 여기에 오른 항일렬사는 무려 130~140명에 달한다. 내가 알건대 지난 80년대이후 20년간 중국 경내에서 정리, 발표된 겨례항일렬사전기가 180명 좌우에 달하는데 이번에 출판되는 전 4권까지면 항일렬사전기발표는 도합 240여 명이다. 그중 140명 전기가 리광인씨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후세에 이름도 없이 쓰러질번 했던 조선족항일렬사 140명을 단신으로 살리고 해빛을 보게 하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뒤미처야 이를 알고 내심의 기쁨을 금할 수가 없다. 지금은 중년에 들어선 리광인씨와 같은 이런 제자들이 조선족력사연구를 망라한 여러 분야의 중임을 떠메고 나간다는 것이 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지금 중국조선족력사연구는 모진 진통을 겪고있다. 새 일대 연구일군들이 고갈되고 있다면 조선족력사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갈수록 적어지고있다. 이러한 때《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전 4권)이 출판된다는 것은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의 정신은 민족의 력사 속에서 숨쉬고 그것은 력사를 새롭게 창조하려는 지성인들에 의하여 이어지고 있다. 민족의식의 함양과 고양에 있어서 력사교육보다 더 유력한것은 없을것이다. 나는 이 책들의 출판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격변기의 진통을 겪고 있는 조선족력사연구에 생기와 활력을 부여하기를 희망한다. 한편 리광인씨가 조선족력사연구에서 보다 큰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하면서 자라나는 우리 후배들이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건실히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않는다.
2003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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