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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규는 연변 명동학교출신이라오
1926년에 춘사 라운규 감독, 주연으로 탄생한 영화 《아리랑》은 한국영화사의 일대기를 이루는 획기적인 사변, 그런 춘사 라운규가 연변 명동학교출신이라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허나 이는 드팀없는 역사사실.
춘사 라운규의 출생시간을 두고 1902년설과 1904년설 두 가지가 보이는데 한국 인터넷에서는 1902년 10월 27일로 지적하고 있다. 사망도 1938년설과 1940년설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라운규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이고 약종상 라형권의 6남매 중 셋째아들로 통한다. 이 셋째가 자라면서 회령의 신흥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17년에 조정옥과 결혼한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조혼이래도 엄청난 조혼이겠지만 그 시절엔 남녀 15살좌우이면 의례 결혼해야 하는 줄로 알았다.
결혼 이듬해, 적절히 말해 17살(1918년) 때 라운규는 장남 종익이를 보았고 이해에 배움의 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연변 명동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때 연변에는 명동, 정동, 창동, 광성 등 조선족 4대 중학교가 있었는데 4대 중학교에서도 단연 첫자리에 놓이는 것은 명동중학교였다. 이 학교의 교장이 《동만의 대통령》으로 불리우기도 한 회령출신의 항일독립투사 김약연이다. 이런 쟁쟁한 교장과 라운규가 무슨 인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라운규는 두말없이 명동중학교를 선택했다.
그제날 명동학교는 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자리 잡았는데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의 룡정시 삼합진이고 삼합진 경내에서 북으로 오랑캐령을 넘으면 곧 명동지구에 이르게 된다.
명동일대로 말할 때 1899년은 잊을 수 없는 한해라고 할까. 이해 2월 18일, 종성과 회령의 학자가문이며 우국동지들인 전주김씨 가문의 김약연, 남평문씨 가문의 문병규, 김해김씨 가문의 김하규,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등은 4대 가문의 20여 세대 일가식솔 141명을 이끌고 오늘의 명동으로 집단이주를 단행.1901년에 김약연선생이 장재촌에 규암재를 세우더니 소룡동에 소암재, 영암촌에 오룡재가 꾸려지고 서당교육이 실시되였다. 1906년에 세워진 룡정의 서전서숙이 페숙된 후인 1908년 4월 27일에는 서로간에 힘을 합쳐 명동서숙을 일떠 세우더니 이듬해에는 현대 멋이 물씬 풍기는 명동학교로 떠올랐다.
이해 1909년에 이동휘의 동지이고 신민회간부인 기독교출신의 정재면이 명동학교 선생으로 부임하면서 숙감이던 김약연선생이 교장을 맡고 정재면이 교감을, 문치정이 재정을 맡아본다. 따라서 조선 국내에서 교사진이 대폭 밀려들더니 황의돈선생이 역사과목을 맡고 주시경의 제자 장지영선생과 한글학자 박태환선생이 국어과목을, 일본 와세다대학출신의 김철선생이 법학과를 맡았다. 1910년에 연변 최초로 중학부가 증설되더니 1911년 3월에 리동휘가 명동에 와서 김약연과 손을 잡은후 정신태, 리의순(리동휘의 차녀), 우봉순 녀교원이 부임하면서 녀학부가 설치되어 녀성교육이 막을 열었다.
쟁쟁한 교사진은 쟁쟁한 명동학교를 떠올렸다. 동북 내 남북만에서, 조선 함북에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김약연선생의 증손자 김재홍선생(한국)이 주도하여 서굉일교수와 함께 펴낸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에서는 그 세월 “명동으로 가는 길에는 인적이 그치지 않았으며 시베리아에서도 학생들이 10명에서 15명씩 떼를 지어 왔다.”고 그리였다. “학생들이 온다면 규암(김약연선생을 가리킴)은 20리밖 마을어구까지 마중” 나갔다고 한다. 아마도 1910년대 그 시절에 회령출신의 라운규도 시대의 흐름인 명동행 학생대렬속에 끼이여 명동에서의 학창생활을 시작한 것 같다.
《규암 김약연선생》과 새로 나온 《문익환평전》에 따르면 라운규는 명동학교시절에 많은 일화를 남기였는데 그중 수학시간의 일화는 지금도 대표적인 일화로 흥미진진하게 전해지고있다. 그 일화는 대개 이러하다.
라운규는 수학시간이 되면 공부는 하지 않고 뒤줄에 혼자 앉아서 웃음연습에 열중하였다. 어떤 날은 수학선생이 이상하여 슬그머니 다가와 본 즉, 책상 위에 거울을 꺼내놓고 허연 이발을 드러내며 벙긋벙긋 웃음연습을 하고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약연선생은 “망나니는 망나니지만 그 애가 장차 뭔가 될 거야” 하며 웃음으로 넘기었다.
《그애가 장차 뭔가 될 거야!》 과연 스승다운 스승이요, 제자다운 제자다. 그후 라운규는 김약연선생이 예견한 것처럼 끝내는 한국 영화사상 선두주자로서의 자리를 굳히고야말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라운규의 나날은 순탄치가 않았다.
명동중학교 입학 이듬해 1919년 연변 룡정에는 천지를 진감한 3.13독립만세운동이 맹렬히 터져올랐다. 2만 여 명 군중이 참가한 이 만세운동에서 명동중학교의 학생들이 선두에 나섰는데 이 운동에서 라운규도 주동자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피신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방랑 중 러시아 백군에도 입대하고 1920년에 홍범도의 독립군에 가담했으며 1921년에 서울에 가서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이해 재학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 받고 청진형무소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감옥에서 독립투사 리춘식으로부터 《춘사》라는 호를 얻은 것은 이 시기의 일이다. 만기출옥한 후에는 회령에 돌아와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고 부산 조선 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배우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에 앞서 명동학교를 마치고 일본 도꾜 영화학교에 지원하여 시험을 볼 때의 일화도 명동시절의 일화 못지 않게 감미롭다.
시험문제가 또한 기발한 것이여서 1분 안으로 눈물을 흘리고 울어보라는것이였다. 다른 응시생들은 울기는커녕 픽픽 웃는 판에 라운규는 정말 눈물을 짜며 1분 안에 울었다. 아마 그는 명동에서 공부할 때 학자를 조달하기 위해 어머니가 회령에서 간도까지 소금밀수를 하던 일을 추억하고 울었는 지도 모른다.
진짜 흥미롭기도 하고 눈물나기도 한 일화이다. 명동에서 공부하는 아들의 뒤바라지를 위해 회령에서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으로 드나들며 어려운 소금밀수에 나섰다는 라운규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눈앞에 방불히 보는 것만 같다. 이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김약연과 같은 스승이 있었기에 라운규는 영화인으로서의 인생을 떳떳이 살아간 것이 아닐까.
춘사 라운규가 영화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24년(23살)으로 알려진다.이해 라운규는 부산의 조선 키네마에 입사하여 제2회 작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영화에 데뷔한 후 《농중조》, 《심청전》, 《개척자》, 《장한몽》 등에 주연하여 뛰어난 연기를 보이었고 1926년에는 자신의 원작인 《아리랑》을 감독, 주연하여 선풍적 인기를 얻는다.
한국 해당 인터넷에 따르면 《아리랑》의 영화내용은 어느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광인 청년과 그의 여동생, 광인의 친구, 여동생을 탐내는 부자집마름 사이에 벌어지는 러브스토리와 살인에 관한 것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청년 영진은 마을을 휘젖고 다닌다. 그런 영진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여동생 영희의 가슴은 쓰리고 답답하기만 하다. 부자집 마름 오기호는 빚독촉으로 영진의 아버지를 채근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희를 탐낸다. 영희를 아내로 준다면 빚도 대신 갚아줄 수 있다고 회유하는 마름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 현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영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반갑게 맞이하지만 영진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마을에서 풍년잔치가 열리던 날 마을 사람들이 흥에 겨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오기호는 혼자 집에 있던 영희를 욕보이려 덤벼든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영진은 오기호에게 달려들어 싸움을 벌이던 끝에 낫으로 그를 죽이고 만다. 갑작스런 충격으로 제정신을 찾은 영진은 당황스러워 하지만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다.
흥겹던 마을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지고 포승에 묶인 채 순사 손에 끌려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을 바라보며 아리랑노래를 구슬프게 부른다.
n 자료 출처: 나운규. 조희문 지음. 한길사
연변 명동학교출신의 춘사 라운규가 감독, 주연한 일생일대의 명연기가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1936년 《오몽녀》를 마지막으로 제작하기까지 춘사 라운규는 15편이 넘는 영화의 원작, 감독, 주연, 제작을 맡은 휘황한 성과를 올리었다. 이밖에 그는 모두 26편의 영화에 관여하면서 한국 영화사상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었다.
한국 영화계의 선두주자이고 항일독립투사인 춘사 라운규, 그는 명실공히 30여 년의 주어진 생애를 민족과 영화에 불태운 연변 명동학교 출신의 《아리랑》감독이요, 영화제작인이다!
( 2005년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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