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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발자취】(36)
설두산 설두사서 의천님 떠올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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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3일, 항주의 현장님이 승용차를 몰고 소흥 절강월수외국어대로 왔고 우린 다시 녕파 봉화의 계구(溪口)진으로 달리였다. 계구진은 장개석어른의 고향으로 해내외에 널리 알려진 력사의 고장으로서 이 고장 사명산의 설두산에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귀국길에 참배한 설두사가 있었다. 천대산에 이은 설두산 의천 대각국사님 발자취 답사라지만 설두사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난다.
절강으로 온지도 3~4년이 잘된다. 이 몇년래 의천 대각국사님이 참배한 설두사에 주의를 돌리였지만 설두사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수가 없어야지. 그러던차 2009년 10월 5일 온가족과 더불어 두번째로 장개석고향 유람길에 올라 보았는데 장개석과 아들 장경국의 발자취 어린 설두산 산정의 천길 천장암(千丈岩)폭포와 묘고대(妙高臺) 부근 산정평지에 일어선 불교사찰이 설두사라고 하지 않는가. 설두사라면 근 1000년전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참배한 사찰을 말하는데 려행사 유람팀을 따라 설두산에 오르니 그날 관광코스가 아닌 설두사를 돌아 볼 시간상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설두사를 곁에 두고 지나쳐야 하는 그때 그 마음 어떠했는지는 나만이 알뿐이다.
두어시간을 달렸던지, 녕파시 구내 봉화시 계구진 설두산풍경구 정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때는 오전 11시경, 우린 설두산풍경구 정문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우고 설두산행 관광버스를 바꾸어 탔다. 두루 문표만도 매인당 인민페 200원을 넘었으나 우린 개의치 않았다. 관광버스는 11킬로미터 산길을 한식경에 조여준다.
관광버스가 멈추어선 곳은 장개석과 송미령, 장경국이 일찍 거처, 산책, 휴식을 취하던 천길 벼랑가 묘고대 주차장. 묘고대와 묘고대에서 서북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이름난 폭포 관광명승지 삼은담(三隱潭)을 도보로 유람하고 돌아오니 오후 2시가 훨씬 넘어선 시점. 우리가 걸음을 멈춘 자리는 설두산 관광명승지의 산정평지로서 이곳 가까이에 천장암폭포와 묘고대가 있고 서안사변후 장학량장군 연금지와 중국내 제5대 불교명산 -- 미륵도장이라 불리우는 설두사 등이 있어 관광과 휴식의 리상적인 명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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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촐촐해 난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어느 농가식당에서 대충 식사를 하고는 장개석과 비슷하게 생긴 분장장개석과 분장 장개석비서와 함께 사진을 찍으니 기분이 별로이다. 이어 설두사 쪽으로 움직이니 “사명제1산”이라는 금빛편액이 설두사 첫 정문에 걸리고, 드디여 설두사를 찾았다는 흥겨움이 가슴을 들먹인다.
설두사 정문에 들어서니 또 우람진 담장이 앞을 막아선다. 담장에는 “미륵도장”(彌勒道場)이라는 중문 네 글자가 박히여 여기가 둘레 400킬로미터를 이루는 절강의 명산 사명산, 사명산은 280개 봉우리로 이루어지고 봉화 구역에만 70봉우리 , 70봉우리 중 가장 이름난 봉우리가 설두산임을 알리어 주고있었다. 이런 이름난 설두산에 미륵도장 설두사가 있으니 설두사의 사찰시작은 유구하여 불교가 봉화에 들어오던 동진시기 설두산 첫 “폭포원”으로 거스른다.
사찰다운 사찰이 수건된것은 기원 841년으로 알려진다. 그후 세월속에서 수차 수건을 거치며 소실되고 하다가 1163년에 다시 확건되어 남송시기 천하선종(禪宗)10사찰중의 하나로 떠오른다. 1288년과 1643년에 두차례 또 훼멸되였다가 청나라 순치년간에 복원, 20세기 60년대 전례없는 문화대혁명 속에서 다시 훼멸의 운명을 거듭하니 오늘의 사찰규모로 수건된것은 1986년이라 한다. 설두사의 흐름으로 보아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천대산을 거쳐 사명산 설두사를 참배하던 1086년 여름은 999년 북송황제 송진종 조항이 “설두자성선사”(雪竇資聖禪寺)사찰편액을 하사한 뒤여서 설두사가 흥성의 일로를 걷던 시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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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도장 담장안에는 불교사찰의 기본을 이루는 미륵보전과 천왕전, 대웅보전, 장경루(藏經樓)가 차례로 나타났다. 인상적인 것은 미륵보전 앞 하늘을 떠인 두 그루 은행나무 고목에 이어 나타나는 장경루 앞 두 그루 녹나무라 할까. 이 두 그루의 녹나무는 1936년 화청지—서안사변의 주인공이였던 장학량장군이 도로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여 설두산에 거처(1937.1ㅡ9)할 때 늘 설두사를 거닐다가 심어놓은 녹나무였다. 장학량장군을 연금한 장개석도 고향 계구로 오면 늘 설두사를 거닐군 하였다나.
하나 또 하나 이어서는 불교사찰 구내를 벗어나니 사방이 훤히 트인 넓고넓은 미륵대불 구간이다. 천하제1이라는 미륵대불은 평지에서 언덕따라 산아래 더기에 자리잡았는데 멀리에서도 그 웅장함이 그대로 안겨 들었다. 그때는 이미 오후 3시를 넘긴 때라서 온 하루 흐리던 날씨가 거무칙칙 번져오다가 차가운 비를 내리며 11월 잡아 첫 찬기운이 극성하여 카메라를 든 손이 어찌도 시린지 사진한장을 찍기도 쉽지가 않았다.
미륵대불 앞 올리막 층계를 올라 미륵대불 아래에 서니 그 웅장함은 이루 형용할수가 없다. 미륵대불의 전체 높이가 56.74미터, 그중 좌불의 높이 33미터, 불상존안의 높이만도 10.5미터, 미륵대불 전체 차지면적이 6600평방미터를 이룬다니 그 규모의 방대함을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다. 미륵대불의 밑부분은 3~4 계단 높이를 이루는 원형모양으로 되여 있는데 유람객들은 제일 밑변에서 실내계단을 따라 미륵대불—좌불 발치에까지 오를수가 있다. 좌불의 몸체도 엄청이여서 좌불은 1200톤의 강재결구와 석, 청동으로 완미하게 주조되여 황금빛을 뿌리고있었다.
미륵대불 발치에서 설두사 산정의 평지와 그 평지에 자리잡은 설두사를 내려다보면 그 장쾌한 풍경앞에 뉘 감탄하지 않으랴 싶다. 그만치 미륵대불은 산정의 평지 설두사보다 높이높이 솟아 있는데 미륵대불을 이루는 수치 또한 보다 감탄을 자아낸다.
ㅡ 미륵대불의 전체높이 56.74미터는 56억 7천만년후에 미륵이 성불(成佛)이 되여 내림을 나타낸다.
ㅡ 미륵대불의 불상높이 33미터는 미륵의 신체 33층천(層天)을 나타낸다. 봉화는 미륵불이 전세(轉世)했다는 불가의 땅이여서 봉화에서 전해지는 포대(布袋)미륵이 원적(圓寂)한 날이 3월 3일이기도 하다.
ㅡ 미륵대불을 받쳐주는 56송이 련꽃은 중화 56개민족의 조화로운 공존을 나타낸다.
관련 수치로 보는 설두산 미륵대불, 눈으로 보는 미륵대불의 웅장함---그야말로 장관, 신성, 웅위, 높고큼을 일체화한 천하 미륵대불의 으뜸이 아닐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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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현장님은 미륵대불을 받드는 56개 련꽃의 유람대에서 설두산 산정의 평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의천 대각국사님을 다시 화제로 삼아보았다. 설두산 산정에서 설두사가 보이는 평지를 내려다 보면서 의천 대각국사님이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우리는 하나같이 귀국을 앞둔 의천 대각국사님이 천대산의 불룡---진각사 지자대사 육신탑 앞에서 서원한 것처럼 “고향에 돌아가면 목숨을 다해 크게 떨쳐 대사의 중생을 위한 가르침 베푸신 로고에 보답하고자”결의로 가슴을 불태웠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진정 그러했으리라. 의천 대각국사님이 참배한 적이 있는 설두산 설두사는 절강 봉화의 사명산 70봉우리 중 가장 이름난 봉우리—설두산의 정상평지에 자리잡은 사찰이요, 절동(浙東) 제1명사찰(名刹)로 불리우니, 미륵의 도장으로도 이름높은 설두사거늘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이 어찌 참배하지 않으리오. 설두사에서 의천님 떠올려보는 마음 뜨겁기만 하다.
다시 보면--설두산 설두사를 한품에 안은 강남의 사명산은 둘레가 400킬로미터, 봉우리만 280개, 절동 이름난 관광성지로 받들리는 봉화 계구진과 설두산 주위는 사명산 뭇산들로 둘러있으니 사명산 남록에 위치한 설두산에서 봉화현성까지는 서북 15킬로미터요, 녕파까지 서남 39킬로미터라 의천 대각국사님이 설두사에서 녕파, 그젯날 명주까지 39킬로미터 거리도 도보로 행했다니 그 옛날, 그 모습이 우렷히 안기여 든다.
어느덧 오후시간도 4시를 가리킨다. 설두산 설두사를 떠나야만 하는 우리는 찬바람, 찬기운 속에서 거닐다가 산아래 설두산 정문앞에서 다시 기념사진을 남겨서야 직성이 조금이나마 풀리는것 같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설두산에 올라 볼까, 언제 다시 설두사에서 설두사 참배 의천님 떠올려 볼까~~그러노라니 가슴이 아련히 아리어온다.
2010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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