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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의 말:
오늘은 안중근 순국 100돐이 되는 잊을수 없는 날이다. 안중근 순국 100돐을 기념하면서 필자는 “안중근연구 빈구석” (1~2~3)을 조글로에 륙속 올리게 된다.
안중근연구는 우리 피어린 항일투쟁사에서 한국을 중심으로 하여 국내외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연구분야이고 그 성과는 이루다 말할수가 없다. 그러나 그 연구흐름에 있어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에 의한 이등박문 격살이 흔히 안중근이 혼자서 주도하고 행동한 것으로만 흐르고 있어 유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등박문 격살은 러시아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에 본부를 둔 항일독립단체 한민회의 소행이였고 그 총지휘는 이름난 항일독립운동가 김치보건만 연구가들은 흔히 이를 잘 모르거나 외면하여 안타까움을 주는 실정이다. 안중근연구의 빈구석이 아닐수 없다.
이에 필자는 지난 2009년 10월 안중근 할빈의거 100돐을 맞으면서 조글로에 한편의 글을 올린바 있다. 또, 이에 앞서 2005년이든지 “흑룡강신문”에 이미 실은 바도 있다. 오늘 다시 조글로에 올리면서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외 관련연구가들의 주시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제 필자는 안중근연구의 빈구석을 전문 여러 편의 론문으로 완수하여 안중근연구에 힘을 보태고저 한다.
【안중근연구 빈구석】(1)
1909년 안중근의사의 할빈의거를 두고 중국, 한국, 로씨야를 비롯한 학계에서는 같지 않은 견해가 존재하고있다. 이런 견해들 가운데서 안중근을 비롯한 우덕순 등 《대동공보》직원들이 중심이 돼 이뤄졌다는 견해와 최재형, 리범윤 등 의병련계속의 조직적거사라는 견해가 주축을 이루는것 같다. 허나 필자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필자는 상기 두가지 견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안중근의사의 할빈의거는 항일운동가 김치보를 회장으로 한 한민회 관계속의 조직적거사가 주축이고 이등박문 격살 때 파견된 소조가 안중근 할빈소조 뿐이 아닌 장춘, 심양 등 여러 개의 소조가 파견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싶다. 이를 헤아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등방문 격살 총지휘 김치보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김치보는 원적이 조선평양이고 1860년 음력 9월 17일 태생이다. 조선서는 김성준으로도 통하고 만주와 로씨야에서는 김감령으로도 불리웠다. 그의 경력으로 보면 김치보는 조선 리조말기의 4품관으로서 선후로 평양군수와 종성군수로 지내기도 했다. 지난 90년대 초반에 필자가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김치보의 가족을 찾았을 때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여 보았다. 그들 가족에서는 김치보의 종성군 군수 임명장을 1968년도까지 줄곧 정히 건사하였었는데 창호지(백지)에 씌여진 임명장은 길이가 600미리메터(mm), 너비가 400미리메터였다고 한다. 임명장에는 구한말의 외부대신, 학부대신이였던 리완용의 도장(길이와 너비 각기 90미리메터)까지 찍히였단다.
1905년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리완용이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으로 떠오르자 김치보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군수고 뭐고 죄다 내동맹이 치고 결연히 로씨야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항일독립단체 《한민회》를 꾸리고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민회지휘부는 김치보가 독립운동후원을 목적으로 꾸린 《덕창약국》(德昌葯局)에 설치되고 김치보가 친히 한민회의 재무와 후근, 무기공급을 도맡았다.
한민회는 항일구국의 기치를 든 철저한 독립운동단체로서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주요회원으로 나섰다. 1909년 새해 첫날 그들 12명은 회장 김치보와 함께 연해주 연추(즉 노오끼엽스크)부근의 카리란 마을(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다)에 모이였다. 자연히 1908년 한해동안의 로고가 회고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나중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며 일제놈들과 계속 싸우자는데로 모아졌다.
일이 이쯤 번져지자 안중근은 피로써 서약하는 혈맹을 맺자고 제의하여 나섰다. 모두가 호응할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그들의 앞에는 인차 안중근이 품에서 꺼낸 태극기가 놓여졌다. 안중근이 먼저 조막도끼로 왼손무명지의 손마디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조선독립》이란 네글자를 쓰고 서명하자 모두가 그대로 행하였다. 지금까지 력사자료 서술이 이러하다. 하지만 필자는 이에 짙은 의문점을 갖고있다. 김치보의 집에서 그의 한민회수하에서 활동을 벌린 안중근은 김치보와 19년의 격차를 두고있는데다가 회장인 김치보와의 사전토의도 없이 김치보가 앉은 자리에서 안중근이 먼저 단지혈맹을 제의하면서 주도했다는것은 믿기가 어렵다.
알고보면 김치보와 안중근은 뜻이 맞는 동지이자 막연한 지기였다. 그들은 나이 거의 20년 격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울려 돌아갔다. 어느덧 한민회에서 반일독립을 도모한지도 옹근 2년, 김치보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조선인학교를 꾸리며 단체의 후근일에 몸을 잠굴 때 안중근은 그를 도와 대업을 받들며 매일 륙절포(권총)사격연습을 늦추지 않았다. 하도 이악스레 접어드니 술병을 공중에 던지고 쏘아도 백발백중이였다.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산새들도 쏘아맞혔다는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러니 잠도 포근한 모양이였는데 잠잘 때면 베개를 뺴내여도 그는 세상모르고 잠만 잘잤다고 한다.
드디여 기회가 왔다. 1909년 10월 20일, 일본 추밀원 원장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이 로씨야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를 만나려고 10월하순에 할빈에 간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이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등박문을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휘로 하는 이등박문암살지휘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등박문의 할빈행이 어느길인가가 밝혀지지 않은데서 그들은 여러 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등박문이 어디에서 나타나면 어디에서 죽여버릴판이였다.
력사는 안중근에게 기회를 내주었다. 이해(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등박문은 끝내 할빈역두에서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죽었다. 이 희소식이 전해지자 김치보는 누구보다도 더 기뻐하였다. 이날을 위해 김치보는 안중근 등과 더불어 얼마나 신고하였는지 모른다. 지난 2년간 안중근은 줄곧 김치보의 집에 머무르면서 대사를 도모하며 피어린 항쟁에 나섰고 사격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허나 력사는 편면적으로 안중근에게만 기울어져 안중근이 주도하고 의거한것으로만 알려졌고 이등박문격사를 위해 김치보를 수령으로 하는 한민회에서 면밀히 짜고들었고 한민회 소속 여러 개 소조가 할빈, 장춘, 심양 등지로 파견되였다는것을 외면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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