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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밀림속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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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이후 이땅의 조선인반일지사들은 각지에서 반일독립단체를 무어가지고 무장항쟁의 길로 나아갔다. 우리가 이번 1989년 여름 답사길에서 조사한 《북로군정서》가 바로 그 시기의 유력한 반일독립단체이다. 경술국치직후에 조직된 북로군정서는 대종교의 《중광단》이 발전한것,1910년 8월 이른바 《한일합방》에 의해 삼천리강산이 빛을 잃은후 후날의 북로군정서—총재 서일은 일제와의 항전을 도모하다가 1911년 초에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두만강 이북 망명길에 올랐다.
백포 서일은 1881년 2월 26일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출생하였다. 소시적에 고향에서 서당공부를 하며 한학을 배웠던 그는 반일운동의 요람으로 불리운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가 10년간 계몽교육에 종사하며 반일의 힘을 키웠다. 그러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여 두만강을 건너와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잡게 되였다.
덕원리는 지금의 왕청역에서 북으로 약 7~8리 되는 곳에 자리잡은 마을인데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이주민들이였다. 서일은 이곳에 발을 붙인후 이해 3월 재기를 도모하는 반일의병들과 대종교인들인 현천묵, 계화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단체 《중광단(重光團)》(중광이란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민족의 혼이 의연히 살아있다는 뜻)을 조직하고 본영을 덕원리에 두었다. 그에 따라 우리가 답사한 서일관련 첫 답사지는 왕청현성 북쪽 가까이 덕원리. 대흥구 쪽으로 향하는 산언덕 길가에서 옛 마을들이 언녕 사라진 북쪽 산밑의 덕원리 옛터를 바라보는 우리한테는 서일장군의 모습이 환히 안겨오는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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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0월, 서일은 대종교에 정식으로 입교한뒤 일부 동지들을 대종교의 포교활동에 내세워 덕원리와 그 일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을 대종교에 포섭하였다. 한편 1913년 4월 1일에 5년제 《명동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17년 명동학교에 중학부를 설치하였다. 교사는 토목구조로서 소학부는 류수하 동쪽기슭에, 중학부는 서쪽기슭에 자리잡았다. 중학생이 가장 많을 때는 외지 류학생들을 포괄하여 100여명에 달하였다.
1913년 10월 서일은 대종교의 시교사를 맡아보게 된후 학교교육에 정진하는 한편 교리저술에 뛰여들어 《삼일신교》, 《회삼경》등 방대한 경전을 지술하였다. 《삼일신교》와 《회삼경》은 다른 두 경서와 더불어 대종교의 4대경서로 되였는데 이로하여 서일은 3년반만에 7년반이 되여야 승질할수 있는 상교로 되고 한달후에는 또 사교로 되였다. 1916년 4월 13일에는 경각의 특선사교로 되였다. 1919년초에 대종교의 제2세 교주 김헌이 서일에게 교통을 전수하려 하였으나 서일은 제2세 교주의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항쟁준비를 활발히 퍼나갔다. 덕원리는 이같이 서일과 관계되고 서일을 통해 반일종교—대종교가 뿌리 내린 유서깊은 고장으로 알려진다.
그때 전민족적인 《3.1》운동이 터지였다. 이에 지대한 고무를 받은 서일은 1919년 4월에 원 《중광단》의 토대우에서 대종교 교인들을 핵으로 하고 반일의병과 공교회 회원들을 더 규합하여 《대한정의단》으로 확대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일은 정의단내에 조선글신문 《민보》와 《신국보》를 꾸리고 반일사상을 널리 고취하면서 독립을 위한 대가는 오직 혈전항일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뒤 서일은 구한국무관학교 출신이며 신민회 계통의 무관인 김좌진 등을 초빙하여 1919년 8월 7일에 《대한정의단》산하에 《대한군정서》를 설치하고 그 책임을 김좌진에게 맡기고 군사훈련과 독립군편제를 다그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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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전후하여 《대한정의단》은 본영을 왕청현 서대파구에 두고 연변 각지에 5분단, 70여지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지(斷指)결사대》1천여명을 두었다. 그들은 주야로 군자금, 군량 등의 모집과 무기구입에 전력하면서 유력한 항일독립군단으로 발족하였다.
같은해(1919년)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부》로 개편되여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을 군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12월에 《대한군정부》는 상해림시정부의 명령에 의해 그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있는데 비추어 《대한군정서》는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을 가지였다. 그 부서를 보면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현천묵, 참모장에 리장녕, 사단장에 김규식, 려단장에 최해, 련대장에 정훈, 련성대장에 리범석, 사관련성소 소장에 김좌진이였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동북의 조선인 반일독립단체가운데서 가장 정규적이고 가장 유력한 무장단체로서 500~600명 병력에 보총 500여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을 가지고있었다.
헌데,《북로군정서》의 본영문제를 두고 개별적인 저서와 자료들은 왕청현 십리평이라고 하고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를 비롯한 대부분 저서와 자료들은 왕청현 서대파라고 하면서 시비가 엇갈렸다. 하여 우리는 덕원리에 이어 서대파로의 답사길에 올라 보았다. 서대파촌은 왕청현성에서 동쪽으로 25킬로메터가량 되는 곳에 자리잡은 산간마을이다. 현성에서 뻐스를 타고 약 한시간만에 서대파에 이른 우리들은 서대파의 지리적위치에 매혹되고말았다. 서대파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였는데 골짜기는 동서로 유유히 뻗어있었다.
(군사적요새지로선 제격이구나!)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서대파의 산야를 둘러보며 흘러간 력사의 갈피갈피를 되새기면서 마을에 이른 우리는 서대파마을 로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만 실망하고말았다. 당지 로인들은 독립군의 근거지가 십리평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서대파가 본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군사적요새지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찬탄해마지 않던 우리의 열정은 대번에 사그라졌다. 그래도 내친 걸음이라 우리는 서대파촌에서 20킬로메터 가량 떨어진 십리평향으로 가보았으나 안내자를 찾지 못한데서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우리는 다방면으로 각종 자료를 헤아리며 선색을 더듬고 일면 왕청현에서 다년간 현안의 력사와 교육사연구에 종사해 온 문호갑 등 로선배들을 찾아뵙는 가운데서 북로군정서의 본영은 서대파가 아니라 왕청현 십리평향 잣덕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개별적 자료들에서 본영을 십리평에 두었다고 하는것은 다소 차이가 보이긴 하나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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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구러 세월은 살같이 흘러 어느덧 3년이 지났다. 1991년 12월 7일 우리는 십리평을 다시 찾았다. 십리평향에 이르러 도로켠의 지명패를 보니 《장영촌》이라고 박혀있었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이 촌은 워낙 향소재지였는데 몇년전에 향정부를 태평촌으로 옮긴후 지난해 마을 이름도 장영촌으로 고치였었다.
장영촌과 향소재지와의 거리는 1킬로메터반 정도밖에 안되였다. 우리는 이 구간을 걸으면서 십리평의 이모저모를 익혀두기도 했다. 그날따라 매서운 칼바람이 일신을 사정없이 들이박았지만 북로군정서의 본영—잣덕을 찾아냈다는 희열은 우리의 걸음을 재우쳐 주었다.
십리평향소재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이 향의 간부들한테서 향안의 경작지는 420헥타르로서 인구당 16.7아르 돌아가며 죄다 척박한 모래불땅이여서 강냉이, 콩, 조이의 아르당 소출은 내내 10킬로그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것을 알았다. 행정구역은 22개사로 나뉘여지고 인구는 2887명에 달하는데 조선족은 겨우 20여세대밖에 안되였다. 광복전에 십리평이란 이 버덕안에 조선인 약 200세대가 살고있었다는것에 비해볼 때 너무도 적은 수자가 아닐수 없었다.
(여기엔 필경 원인이 있을텐데?)
우리의 의문은 68살인 백원옥 안로인의 집을 찾은데서 스스로 풀리였다. 우리는 함경도식의 수수한 조선집 가마목에서 이 로인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원옥은 조선평안도 순천군태생으로서 그가 십리평에 들어선것은 광복직전이였다. 그해 그는 18살이였는데 한해 먼저 십리평에 와 자리잡은 시아버지를 따라 이주길에 올랐었다. 시할아버지는 본세기 10년대에 벌써 십리평사람이된데서 백원옥으로 말하면 십리평이 그리 생소한 지대가 아니였다.
당년 십리평의 조선사람은 약 200세대에 달했다. 그때 이 일대는 밀림지대였다. 하여 일제놈들은 여기에 큰 목재판을 앉혔는데 조선사람거개가 목재채벌과 가공판에서 막벌이일을 하고 있었다. 큰 목재판이라 지금의 장영촌에 일본분주소가 도사리고 앉아 여기(향소재지)에 경찰대대를 세우고 사금구에 경찰소대를 세웠다. 8.15광복을 맞은후 조선으로 돌아가고 여기저기 흩어진데서 조선사람 수십세대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니 20여세대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십리평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생긴건지요?》
《듣자니 독립군때부터라오. 그때는 이 지대가 나무로 꽉 찼는데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소생했다더구만. 십리평이란것도 이 벌의 길이가 10리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오.》
《그렇다면 잣덕이란 어디를 가리킵니까?》
《그젯날 여기(향소재지)를 잣덕이라 했소. 보다싶이 저 북쪽산기슭은 온통 잣나무로 덮였고 또 이 지대가 저 아래 십리평마을에 비해 언덕진곳에 자리잡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오. 잣덕이란 지명도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지은거라오.》
백원옥 안로인과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시야는 훨씬 넓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몇해전에 향소재지가 들앉기까지 이곳을 태평촌이라 했는데 그것도 광복직후 그의 시할아버지 조병선로인(당시 60여살)이 지은것이다. 그때까지 이 일대의 사람들중에 중병으로 앓거나 때이르게 죽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해서 시할아버지가 태평촌이란 이름을 제기했는데 당지의 한족들도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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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가의 서쪽언덕에 오르니 잣덕의 북쪽산과 펑퍼짐한 산기슭, 그 아래변두리에 자리잡은 향소재지의 전경이 눈앞에 환히 펼쳐졌다. 저기 건너편 북쪽산엔 그젯날의 잣덕유래를 나타내는듯 잣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었다.
북로군정서는 바로 이곳 잣덕의 저 북쪽 펑퍼짐한 산기슭 밭가운데 자리잡고있었다. 어느한 자료에 의하면 본부와 병영은 5~6헥타르에 달하는 산허리를 평지로 만들어 건설했는데 나무를 찍어만든 중국식 6칸집 5개와 5칸집 2개로 이루어졌다. 본부와 조금 떨어진 남쪽의 광활한 평지에 사방 100메터 좌우의 련병장 두개가 건설되였다. 독립군전사들은 이 두개의 련병장에서 매일 긴장히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창격술을 익히며 실탄훈련에 뛰여들었다.
당년 십리평에서 잣언덕까지는 소수레가 다닐만한 길이 한구간 있고 그 나머지는 한사람이 다니기도 불편한 오솔길이였다. 한데서 북로군정서는 숱한 인부를 동원하여 소수레가 다닐수 있는 길을 닦았다고 한다. 사관련성소는 잣덕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동북쪽계곡에 설립했다고도 하고 잣덕에 설립했다고도 하며 본부부근에 설립했다고도 하는데 딱히 어느곳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사학가들은 자료를 놓고 의론할 따름이지 그 누구도 준확한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우리가 자료에 의거하여 동북쪽계곡을 따라 산굽이까지 올라가 보아도 묘연하기만 했다.
1919년 12월에 《대한군정부》가 《대한군정서》 즉 북로군정서로 개칭된후 북로군정서 앞에는 대오를 보다 늘이고 각종 무기장비를 충족히 마련하며 군사적중견들을 키우는 번중한 과업이 놓여졌다. 하여 서일은 사관련성소를 세워 군사골간을 양성하는 한편 재무부장 계화와 함께 병력확대와 무기구입에 전력을 다하였다. 1920년 6월, 총재 서일과 계화가 무장경비대를 인솔하여 로씨야연해주에 가서 무기를 많이 운반해옴으로 하여 사관생들은 전부가 무장을 지니게 되였다. 일제측의 자료—《간도에 있어서의 불정선인단의 상황》에 의하면 1920년 8월 현재로 북로군정서의 무력은 독립군 약 1,600여명, 군총 1,300자루, 기관총 7정이라고 밝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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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에서의 독립군의 흥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대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자들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뒤 7월에 《간도지방불정선인초토계획》을 꾸리고 동북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서북간도에 대한 련합토벌을 강요하였다. 장작림이 길림성 성장과 연길도윤에게 일본군과 협동작전하여 조선인 반일무장대오를 취체하라는 령을 내린것은 두말할것도없다. 그러나 조선인의 반일활동을 언녕부터 동정하고있던 연길도윤과 륙군퇀장 맹부덕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것을 바랐다.
1920년 9월 5일에 맹부덕퇀장산하의 중국군 160여명이 십리평 잣덕에 가서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을 찾았다. 그들은 일본측의 강경한 교섭하에 중국측에서는 부득불 토벌하지 않을수 없음으로 연길도윤 도빈과 맹부덕퇀장의 명령에 좇아줄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군정서간부들은 처음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중국측에서 북로군정서의 철퇴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답복하니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럴 때 국민회계통의 독군부사령관 홍범도한테서도 일본군이 대거침공해오는 형편에서 국민회계통의 독립군부대가 장백산방향으로 진출하니 같이 이동하다가 기회를 보아 침략자들을 섬멸하자는 밀서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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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무기구입에 나섰던 총재와 재무부장 등이 들어오자 북로군정서는 9월 9일 오전 10시에 본영에서 제1회 사관생졸업식을 앞당겨 가지고 298명을 졸업시켰다. 이날 졸업식은 군정서산하 성원들과 래빈들이 운집한 가운데 열리였다. 사관졸업생 일동이 군례를 올리고 《독립운동가》 등을 높이 부르자 대회장은 들끓었다. 이어 소장의 졸업식례식과 총재, 부총재의 훈시, 래빈의 축사, 최우등생 김옥현의 답사가 있은뒤 김좌진소장이 졸업증을 수여하였다. 마지막에 만장일치의 《만세!》소리가 터져올랐다. 저녁 7시엔 또 무대를 꾸미고 《독립혼》이란 연극을 공연하였다. 철거전의 분위기는 자못 긴장하였으나 제1회졸업식은 이토록 성황을 이루었다.
북로군정서의 1000여명 무장대오는 선발대와 본대로 나뉘여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소수레에 싣고 9월 17일부터 근거지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처음 선발대는 대감자로, 본대는 유수천방면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이때 유수천방면에 이미 중국군이 동원되였다는 정보가 전해지게 되여 본대는 서대파의 세번째 부락에서 숙영하고 18일에 대감자의 한 마을에 이르렀다. 부대는 이곳에서 땅속에 묻은 총기 50여자루와 탄약 1000여발을 파냈다. 또한 군정서 간부들은 회의를 가지고 당지에 100여명 대오를 남기였다.
부대가 다시 머무른곳은 위자구였다. 21일 부대는 위자구를 떠나 남양촌을 거쳐 연집의 신흥동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다음날 부대는 팔도구부근을 거쳐 차조구일대로 우회하면서 화룡현청산리 일대로 움직이였다. 우리는 북로군정서의 뒤를 따라 청산리에 대한 답사를 계획하면서 십리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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