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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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진실 (1) 봉오동 청산리 대첩 공동작전의 소산
2010년 10월 21일 18시 19분  조회:4181  추천:25  작성자: 리함

편자의

오늘 10 21일은 1920 겨레 청산리대첩 90 되는 날이고, 올해는 겨레 청산리대첩 90 되는 해이다. 이날, 이해를 기념하면서 필자는 당년  6월의 봉오동전투로부터 경신년대토벌, 청산리대첩에 이르기까지 우리 력사의 진실을 몇회에 걸쳐 다시 펼쳐 보이고자 한다.

이런 과정을 지켜 보면 봉오동전투가 홍범도장군에게만 치우치고 청산리전투가 김좌진장군에게만 치우칠 일이 아니며, 더구나 북로군정서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라고 말할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 김좌진장군은 북로군정서 서일총재가 초빙하고 서일총재 수하의 장령이라는 것과 청산리대첩에서 섬멸한 일본침략군은 2000여명이요,  3000여명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릴수가 있다.

 

 

력사의 진실 (1)

 

 

                 봉오동 청산리 대첩 공동작전의 소산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보면 1920년도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대서특서 되면서 독립운동사를 빛내이고 있다. 허나 이해 6월의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장군한테 치우치고 청산리 전투는 흔히 김좌진장군한테 치우치는데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진면모가 흐려지기가 일쑤이다. 한데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승리에로 이끈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의 역할이 잘 드러나지 않고있다. 이에 필자는 1910년대 연변일대의 겨레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주요역할을 논 간도국민회군을 점검해보면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주력군으로 등장한 국민회군의 역할을 역사적으로, 진실하게 밝히고저 한다.

1919 3.13운동 이후 간도국민회에서는 지령을 내려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 중학부들에서 학생골간들로 연합맹호단, “암살대” 등 반일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용정, 국가가와 투도구 등지에서 친일주구를 체포하거나 경고문을 내어 이런 자들이 친일활동에서 손을 떼도록 하였다. 명동을 중심으로 조직된 충렬대, 단지동맹회, 결사대들도 맹활동을 보이었다. 간도국민회에서 이동휘 등의 지지 밑에 무장투쟁방침을 시달하기 위해 각 지회를 통해 연변 각지에서 결사대원을 널리 모집하여 러시야 연해주에 보내어 군사훈련을 받게 할 때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들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학생들이 분분히 결사대에 참가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데서 러시야 연해주 추풍지역의 도화동, 대지안, 사개정자 등지에서 훈련을 받은 결사대원들은 무려 3,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대장 김하석, 교관 홍군표, 이흥삼, 김일, 오영선, 남공선, 러씨야 귀화조선인 김인수, 최와실린 등 장교들에게서 반일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결사대의 외교와 재무는 연변서 간 박동원, 박경철이 담당하였다.

한편 간도국민회에서는 각 지방총회에 법무부를 설치하고 보편적으로 경호대, 맹호단을 조직, 지도하여 지방을 보위하게 하였고 모연대를 널리 조직하여 군자금 모연에 힘을 기울였다. 창동학교출신이고 철혈광복단 성원이고 간도국민회 총회의 통신원이며 와룡동일대 국민회 책임자인 정기선은 적의 손에서 권총 한자루를 빼앗아 경호대를 조직하였다. 일찍 함경북도 무산지구 진위대 교련관이었던 안무는 1919 4월 이후 간도국민회와 연계하여 화룡현 덕화, 상화, 숭선, 로과 등지에 국민회조직을 확대하면서 부동 등지의 청년들로 경호대를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며 친일주구와 밀정들의 활동을 경계하였다. 각지 경호대는 각 지방총회와 지방회에 분산되어 지방보위에 전력을 다 했다.

1920년 봄 이후 간도국민회에서는 또 각지 경호대를 기초로 국민회군을 조직하였다. 국민회군을 결사대와 경호대의 군사훈련을 책임졌는데 경호대와 국민회군의 조직구성은 아래와 같다.

 

경호대 총사령: 이용

        참모: 주건

 

국민회군 사령: 안무

         부관: 최익룡

         향관: 김석두, 허동규

         중대장: 조권식, 임병극

 

국민회군은 본부를 화전자 명당모에 두고 부동, 명동, 명신, 화전자, 하마탕, 의란구 등지에 부대를 분산, 주둔 시키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군사훈련을 내밀었다. 간도국민회에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키고 국민회군, 홍범도의 의군단, 신민단, 도독부, 훈춘한민회 군사부 등 항일무장단체에 배치하니 국민회군의 병력은 크게 늘어났다. 1920 6월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회군의 총병력수는 400여 명(적절히 말하면 450)이고 무기는 보총 400자루, 권총 160자루, 수류탄 다수였다.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은 군사인재를 양성코저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이용, 채영, 안정근 등의 협조하에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 심산 속에 사관훈련소와 군수창고, 피복공장, 18개 소의 병영을 수축하고 재봉침 13, 군복용 포목 15필을 마련하였다.

1920년 초부터 항일무장단체들 간의 통합과 협동작전이 중시를 받았다. 1919년 하반기에 홍범도부대가 중조국경지구에 출격하여 연속 작전을 펼칠 때 간도국민회에서 적극 받들어 나섰고 1920 1, 조선 국내진공작전을 끝내고 돌아온 홍범도부대는 국민회본부가 설치된 북하마탕에 이르러 국민회간부들과 연합문제를 토의하였다. 그 뒤 2 21, 3 8일-10, 3 25, 간도국민회는 각 항일무장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제1, 2, 3차 하마탕 회의를 연속 소집하고 먼저 의견이 같은 국민회군,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홍범도의 대한의군단과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조직하였다. 같은해 5 11일에는 봉오동에서 군무독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 4개 무장단체 지도자회의를 가지고 연합작전합의를 보았다. 5 28일에는 군무독군부를 북로독군부로 개편하고 북로독군부의 각급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임명명단은 아래와 같다.

 

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

           부관: 안무

정일 제1군 사령: 홍범도

            부관: 주건

            참모: 이병채

            향관: 안위동

        군무국장: 이원

군무국 군무과장: 구자익

군무국 회계과장: 최종하

군무국 검사과장: 박시원

군무국 통신과장: 박영

군무국 치중과장: 이상수

군무국 향무과장: 최서일

군무국 피복과장: 박병극

1군 산하 제1대대장: 이천오

              2대대장: 강상모

              3대대장: 강시범

            4대대장: 조권식

 

북로독군부는 사령부 본부를 봉오동 상촌에 설치하고 병력을 도독부의 병영인 봉오동에 집결시키었다. 신생한 연합부대는 두만강 남안의 온성, 남양, 종성, 회령, 무산 등지에 빈번히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제군경 초소를 습격하였다. 1920 1월부터 6 7일까지 해당 통계에 의하면 연합부대는 상기 조선 국내지구에 26여 차나 진출하였다. 연변 땅에서 일본정규군을 족치는 첫 전투도 무르익어갔다.

동년 6 4, 일본군 남양수비대 아라요시중위가 인솔한 부대는 두만강남안 남양의 강양동일본군초소를 습격한 원 기독교계열의 훈춘 신민단출신인 북로독군부 박승길 등 30여 명을 추격하여 두만강을 건너 삼툰자를 들이쳤다. 19사단 73연대 야스가와소좌가 인솔한 월강추격부대도 남양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섰다. 이 부대는 안산에서 삼툰자전투에 개입했던 아라요시중대와 합류한 뒤 아군의 종적을 찾아 목도고개, 고려령을 넘어 봉오동일대로 진격하였다. 원 국민회군 사령이며 북로독군부 부부장인 안무는 홍범도사령을 도와 6 7일 일본군월강부대 200여 명을 봉오동상촌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1920 6 7, 안무 등은 홍범도사령과 함께 봉오동 여러 마을의 민중을 대피시키고 400여 명 반일부대를 봉오동 상촌 아래 호박골어구의 시루봉과 서산, 남산 고지에 진을 쳤다. 이날 반일부대의 뒤를 밟아 후안산으로부터 쳐들어 온 야스가와소좌와 아라요시중위가 인솔한 일본군 200여 명은 아군의 매복권 내에 들어섰다가 섬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당시 《상해시보》와 《길장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군 사망자가 150, 부상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고 한다. 연변 땅에서 일본정규군을 족친 첫 전투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과 신민단부대는 이 전투에서 큰 역할을 놀았다. 적들의 퇴각시 퇴로를 막아 답새긴 부대가 바로 신민단부대었다.

동년 8월 말 안무는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이청배병영에 주둔하고 있다가 9월에 중국군 맹부덕부대가 일제의 강박으로 토벌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화룡현 어랑촌일대로 전이하여 홍범도부대와 힘을 합치었다. 안무부대는 화룡현 삼도구, 맹가동, 부동과 강장동 등지 지형정찰을 하고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면서 홍범도부대와의 배합작전을 도모하였다.

10 21일 일본군 제19사단 37려단장 아즈마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도처에 불을 지르며 두갈래로 나뉘여 북왈리거우와 남왈리거우에 달려들었다. 홍범도와 안무는 주력부대를 천리봉의 측면고지에 매복시키고 예비대를 중앙고지에 배치하는 전술을 썼다. 이에 속히운 적들은 중앙고지를 주공방향으로 삼고 진공하다가 크게 얻어맞았다. 적 수백 명이 전멸당한 왈리거우(曰日沟) 전투이다. 싸움의 그 나날에 안무부대는 홍범도사령의 지휘하여 봉밀구골안으로 철퇴했다가 천병마냥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와 격전하고 있는 천수동 우측 산마루에 나타났다.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서 결사의 각오로 싸우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는 사기가 충천하였다. 적들은 거듭 패배의 고배만 마시다가 땅거미가 든 후 저들 부대를 어랑촌 쪽으로 돌려세웠다. 이 전투에서 적들은 또 수백 명의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두 독립군부대는 아즈마지대의 포위를 승리적으로 헤치고 서남방향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가 25일 고동하강반에서 또 적들에게 섬멸적 타격을 안기었다.

고동하전투를 치른 후 안무는 부대를 이끌고 맹가골 방향으로 이동하고 홍범도부대는 안도현 황구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안무는 맹가골일대서 북상지시를 받고 소속부대를 여러 소부대로 나누어 돈화, 목릉을 거쳐 밀산으로 철퇴했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여러 반일부대와 더불어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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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우매한 자를 타독이는
날자:2010-10-21 18:41:38
이런게 아주 중요하다. 보통 우리는 군부대들의 활동만 보게 된다. 그 군부대들 뒤에 후근보급에 대해서는 다들 묵과한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이순신이 영웅이라지만 이순신전에 전라수군의 훈련과 보급이 아주 잘 되여있었다. 이순신은 그런데 대해 전혀 근심하지 않아도 될 형편이였다 한다. 청산리대첩도 그런 민중의 기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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