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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은 심양 9.18사변지
9월 29일 오전 8시, 나는 심양 서탑에 자리잡은 주숙지 서울호텔을 떠나 택시를 잡아타고 곧추 9.18사변지로 향하였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의 일원으로 나는 조성일 회장, 한정자 사무국장 등과 더불어 한국 주심양총령사관의 특별초대로 심양에 가서 국경초대연에 참가하는 행운을 지니였는데 이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
약 반시간만에 이 거리 저 거리 동북방으로 6킬로메터 달려 심양시 대동구 망화남가 9.18사변지에 이르니 그제날 철길가 풀밭은 언제런듯 새로 일어 선 《9.18력사사박물관》이 반겨맞았다. 9.18력사박물관은 심양북역에서 할빈으로 통한 철길과 시내신작로사이에 길이 500메터도 훨씬 넘게 뻗어있었다. 출입구 첫 구간은 휘넓은 광장이였다.
나의 첫발목을 잡은것은 광장의 출입구 맞은켠에 세워진 거대한 종이였다. 동으로 주조된 종에는 9.18사변기록과 함께 《국치를 잊지 말자》(勿忘国耻)는 한자 네글자가 박히여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심양 동융신형건축자료유한회사에서 1999년 9월 18일에 헌납한 《경세종》(警世钟)인데 9.18사변지를 찾는 사람마다 선참 찾아보고 기념촬영을 남기는 곳이라고 한다. 경세종 오른쪽가에 《9.18사변 류조호폭파지점비》가 옛 력사 모습대로 누워있었다. 너무도 눈에 익은 류조호폭파지점비였다.
내가 심양 9.18사변지를 처음 찾은것은 9.18사변 50돐을 맞던 해인 1981년으로 거스른다. 졸업을 한해 앞둔 우리 연변대 조문학부 78년급 심양소조는 그해 9월 14일부터 10월 16일까지 심양시 조선족1중에서 졸업실습을 하게 되였는데 조문학부를 다니며 언녕 우리 력사에 빠져 버린 나한테 심양의 9.18사변지가 어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10월 12일, 주제반회 재검토를 마치고 나는 끝내 홀몸으로 9.18사변지를 바라고 떠났지만 물어보는 심양시민들마다 거의가 9.18사변지를 모르고 있었다. 시내뻐스를 세번이나 갈아타며 묻고 물어서야 마침내 《류조구》와 북대영을 찾을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것은 철길가 풀숲에 처박힌 지금의 9.18사변류조호폭파지점비이고 주위에는 북대영 낡은 건물들과 농촌채소밭들 뿐이였다.
콩크리트로 된 류조호폭파지점비는 9.18사변지의 유일한 견증물인것 같았다. 지점비에는 《9.18를 잊지 말고 피눈물의 원한 아로 새기자!》 (不忘九一八,牢记血泪仇)는 검은 붓글씨가 씌여 있었다. 별수없이 처박힌 지점비를 사진찍고 귀로에 오르다가 부근의 류조호대대를 찾아 선후로 한족로인 세분을 방문하였는데 뜻밖에도 수확이 컸다. 모든 력사책들과 력사서술에서 9.18사변지는 류조구(柳条沟)로 되여 세상사람들은 류조구로 알고있었지만 세분 로인들은 9.18사변 그때를 망라하여 여기는 류조호(柳条湖)로 통했지 류조구가 아니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새로운 발견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누가 뭐라하든 9.18사변 관련 모든 글들에 류조호라고 썼는데 이번에 보니 9.18사변지 주위 도로표식이나 소개글들에 모두 류조호라고 밝혀져있었다.
이런 연고로 류조호폭파지점비는 인상깊은 력사의 고장이라 하겠다. 허나 다시 찾은 사변지에서 지점비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20여년전의 검은 붓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흔적조차도 알리지 않아 그 앞에 세워진 안내글을 보고서야 9.18사변 류조호폭파지점비가 옮음을 확인했다. 안내글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밤에 일본군은 저들이 남만철도 심양류조호구간을 폭파하고 중국군대의 소행이라고 중상하고는 이것을 구실로 무장으로 중국 동북을 침점하였다. 후에 폭파지점 옆에 목제표식패를 세우고 《소화 6년 9월 18일 지나병선로 폭파지점》이라고 하였다. 1938년에 또 이곳에 작탄꼬리깃형 세멘트비를 다시 세웠는데 비의 높이는 7메터이고 아래 제형받침자리에 《폭파지점》이라고 썼다.
폭파지점비 오른쪽 광장복판에 9.18사변의 시간을 알려주는 《잔력비(残历碑)》가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잔력비, 즉 일력비는 네모반듯한 돌들로 쌓은 웅위로운 건축물이였는데 비의 정면에는 1931년 9월 18일 일력이 그대로 새겨지고 왼쪽켠에 밤 10시라고 밝힌 모습이였다.
일력비를 에돌면 또 광장이고 광장 동북쪽켠은 철길따라 길게 뻗은 9.18력사박물관 주체건물로 이어진다. 박물관내에 들어서면 널다란 대청—서정(序厅), 서정은 사면벽을 감싼 흰색의 산모양조각품과 검은색의 대리석지면이 조화되여 백산흑수(白山黑水)의 장려한 경상을 그대로 나타내면서 아름답고 부요한 동북의 산천을 상징하고 있다면 대청 한쪽가에는 동으로 주조된 누운비가 있고 비의 중간에는 꺼질줄모르는 화염이 불탄 모습으로 나타나며 동북인민들의 불굴의 투쟁정신과 민족기개를 상징하고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8개전람청과 10여개 대형장면들이 줄줄이 이어선다. 9.18력사박물관 안내글을 보니 이 력사박물관은 원명이 《9.18》사변박물관으로서 1991년 9.18사변 60돐을 계기로 착공하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건축물이라야 9.18를 나타내는 웅장한 일력비뿐이였다. 그래서 일력비 건설시간을 1991년이라고 밝힌것이였다. 그로부터 수년후인 1997년 9월에 심양시에서는 9.18력사박물관을 확건하기로 결정짓고 2년간의 간고한 시공을 들여 신관을 일떠세우고 1999년 9월 18일에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하였었다.
새로 일떠세운 신관은 9.18사변일력비, 경세종정(警世钟亭), 주관(主馆), 승리기념비 등 특이한 풍격의 건축군들로 구성되여 있었다. 이런 신관은 총 점유면적이 3만 5000평방메터, 건축면적이 1만 2600평방메터, 전람면적이 9180평방메터로 헤아려진다. 상기와 같이 전람청은 8개전람청에 10여개 대형장면으로 이루어졌다면 관내 진렬연장선은 510메터로서 진귀한 력사사진 800여점, 문물과 자료 500여건, 대소 력사장면 재현 19개이고 담당구내 방송계통, 중앙에어콘계통, 영시(影视)보고청, 전자열람실, 다매체 인터넷계통, 네트워크 등 시설이 구전하다. 그만큼 관내 진렬은 1931년 9.18사변 이전으로부터 1945년 일제패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력사가 재현되여있어 그 교육가치와 감상가치가 대단히 높았다.
나의 마음을 사로 잡은것은 신관(新馆) 진렬청 여기저기에 꾸며진 우리 조선족들의 영용한 투쟁모습이였다. 나의 시선은 《동북군민의 항일투쟁》 진렬청 동북항일련군 각군 장령 18명 사진에 멈추어졌다. 양정우, 주보중 등과 더불어 우리 겨레인 항일련군 제7군 대리군장이며 참모장인 최석천(최용건), 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두분의 사진이 모셔진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진렬청의 한쪽벽에는 또 조선족항일련군전사들이 총닦는 모습의 사진, 밀영의 조선족전사들, 남만의 철도선에서 전투하는 항일련군전사들 등 세 사진이 다른 사진들과 함게 진렬되여 있었다. 세 사진 모두가 조선족항일련군전사들의 모습들인데 김일성장군의 부인 김정숙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사진에 남만철도선의 항일련군 전사들이라고 밝히니 유감스럽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는 강사한테 이 점을 지적했더니 그런가고 대꾸할 뿐이였다.
《동북군민의 항일투쟁》부분에는 3개조로 묶어진 소형 립체 조각품이 붉은 색 조화속에 실모습처럼 진렬되여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3개조 중 2개조가 우리 조선족항일전사들의 생생한 모습.《<토벌대>를 매복습격하다》립체조각상은 그 설명에 1933년 3월에 조선족 량성룡, 김일성의 령솔하에서 왕청유격대가 소왕청근거지에 기여든 적 토벌대 300여명과 이틀간이나 싸워 20여명을 소멸하고 적들을 격퇴시키는 모습이고 《항일화장(化裝) 선전대를 조직하다》 립체조각상은 1932년 음력설기간에 중공탕원현위서기 배치운(조선족) 등 항일화장선전대가 반일선전을 벌리면서 항일의 불길을 지피는 모습이였다.
(우리 조선족의 투쟁모습도 끼이였구나!)
나는 다소 마음의 위안을 느낄수 있었다. 그것이 쌀속의 늬라해도 좋았다. 조선족의 투쟁모습이 없는 동북군민의 항일투쟁은 상상할수도 없기 때문이였다.
어느덧 두시간이 훌쩍 지났다. 귀로에 올라야 하는 나는 웅장한 일력비 앞 광장에서 서성이였다. 수백으로 헤아리는 한패 또 한패의 붉은넥타이들 답사행렬이 그칠줄 몰랐다. 답사자들속에는 중년과 로년들 40대~60대가 가끔 보이였고 공청단기를 앞세운 공청단원들의 모습도 보이였다. 9.18를 잊지 않으려는 그들, 대를 이어나아가려는 그들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그래, 오늘의 우리 행복은 쉽게 오지 않았지, 그속에는 우리 조선족투사들의 피와 생명도 섞이였지…)
9.18사변 50돐 첫 답사에 이은 24년만의 광복 60돐 맞이 9월의 두번째 답사였다.
2005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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