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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진실 (8) 북로군정서 지도자 결책자는 서일장군
2010년 11월 18일 16시 44분  조회:3483  추천:23  작성자: 리함


  【편자의 말】

   청산리 대첩 90돐을 둘러 싼  "력사의 진실"--우리 력사 바로 잡기는 이 글을 계기로 여기에서 한단락을 고하려 합니다. 한마디 부언하여 둠은 이 글은 지난 9월에 련재로 올린 서일장군의 중복이지만 력사의 진실 련재의 수요로 다시 올린다는 점입니다. 너그러운 리해를 기대하면서 그 동안 이 련재글을 열성껏 보아주시고 성원하여 주신 여러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북로군정서
지도자  결책자는 서일장군

 

 

1919 룡정 3.13반일운동이후 연변을 중심으로 동북각지에는 30여개의 조선인반일무장단체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북로군정서는 주요한 반일무장단체중의 하나였다. 반일무장단체의 지도자 결책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장군으로서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를 광명과 승리에로 이끈 력사의 주역이였다.

그러나 사상과 리념의 편견, 력사시각의 차이로 말미암아 한국독립운동사나 한국 국내 출판물들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장군이 력사의 저편으로 몰리고 서일장군이 북로군정서군 사령관으로 초빙한, 장군의 수하 장령 김좌진장군이 마치도 북로군정서를 이끈듯이 나타나며 청산리전투를 승리에로 이끈 주장으로, 절세의 영웅으로 나타난다. 력사는 외곡되여도 너무도 외곡되였다. 실상 력사는 덮어감추지 못하거늘 서일장군과 김좌진장군의 대비속에서 보면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를 광명과 승리에로 이끈 력사의 주역이였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력사속으로 들어가보면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반일독립운동 진영에서 찾아 보기힘든 문무겸비의 인물로서 북로군정서의 전신은 장군이 1911년에 왕청현 덕원리에 세운 《중광단》(重光團)이였다.

서일장군의 력사는 1881년부터 시작된다. 이해 2 26, 장군은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에서 인류력사속에 등장하였다. 장군의 본명은 서기학이고 초명(初名) 서정학(徐正學)이요, 호는 백포(白圃), 본관은 리천(利川)이다. 족보속에서는 아간공(阿干公) 36세손이고 량경공파(良景公波), 양근(楊根) 계렬의 함흥문중 사람으로 알려진다.

1992 6 29일부 《리천서씨종보》 4면에 따르면 서일장군의 선친은 서재운이고 아들은 서윤제(1969년에 62살로 사망), 손자로는 서경섭(중국 할빈에 거주), 서만섭(1991 9 한국가서 인천거주) 두분이 있었다.

서일장군은 소년시절에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漢學) 배웠다. 몇년 서당공부끝에 경성함일사범학교 전신인 《유지의숙》에 입학하여 배움에 몰두하였다. 유지의숙은 함경북도 근대화운동의 선구자 이운섭선생이 창설한 의숙인데 몇해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로 개칭되였다. 학교는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키운 의로운 학교이기도 한데 간도국민회군 사령 안무,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간부 김병철, 서대문순국자 김학섭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학교 출신들이다.

1902 봄에 서일장군은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0 한일합방때까지 10년간 지방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0년은 조선민족이 일제에 의해 나라잃은 경술국치해, 이해 장군은 30살의 조선남아였다.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길없은 서일장군은 이듬해 1911 가족과 함께 결연히 두만강을 건넜고 연변의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를 잡았다.

왕청현 덕원리는 천교령 부근에 발원지를 가야하와 십리평, 소왕청쪽에서 흘러나오는 대왕청하와 합수되는 부근 동북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주 그해(1911) 3월에 서일장군은 대종교인들인 독립운동가 현천묵, 계화 등을 골간으로 반일독립단체—중광단을 조직하고 동지획득투쟁과 반일투쟁에 나섰다.

중광단을 말하자면 대종교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대종교의 전신은 단군교로서 조선의 유구한 민족종교로 나타난다. 전하는데 의하면 상원(上元) 갑자 10 3일에 단군이 령산 백두산에서 탄생한후 3천단부를 설치하고 고조선을 건립했는데 고조선의 태양숭배의 원시신앙이 종교로 발전하니 종교가 단군교라 한다. 단군교가 력사속에서 력대로 부름이 서로 달리 불려지며 고려에서는 왕검교로 불리우다가 고려원종 시절에 몽고의 침입으로 페교되고말았다.

그러다가 1909 음력 정월 15일에 이르러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라철선생에 의해 단군교가 재생되였다. 이날 라철선생은 동지들은 오기호, 강우, 최전, 류동, 정중모, 리기,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수십인과 함께 서울의 취운정아래 6간초가집에서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하였으니 이날 정월 보름날이 단군교의 중광절로 되였었다.

1910 8 5일에 단군교는 일제놈들의 시선을 따돌리고저 대종교로 개칭되고 1911년에 대종사 라철선생 등에 의해 대종교 총본사는 서울로부터 두만강 북안 화룡현 청파호에 자리를 옮기였다.

력사는 라철선생의 전이나 서일장군의 이주가 모두 1911년임을 알리였다. 1912 10월에 서일장군은 대종교에 입교하고 이듬해 10월에 대종교 시교사로 떠올랐다. 시교사를 알자면 다시 총본사로 돌아가야 한다.

라철선생은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를 둔후 총본사 산하에 동도본사(왕청현), 서도본사(상해), 북도본사(로령 소학령), 남도본사(조선 경성) 4 도본사를 설치하고 각지에 시교당 48개소 (연변에 22개소) 하였는데 서일장군이 왕청현의 동도분사를 주관하며 시교사로 나섰으니 장군의 위인됨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대종교의 력사는 중광된 그날부터 일제의 식민정책과 날카롭게 대립한 력사이고 피로 물든 반항의 력사임을 알려주고있다. 서일장군이 자기 반일독립단체의 이름을 중광단이라고 함도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나라는 잃어도 조선의 , 민족의 혼은 앗아가지 못함을 선언하는 뜻에서였다.

서일장군은 1912년에 명동학교를 꾸리고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대종교 교리저술사업에 몰두하여 짧디짧은 몇년사이에 《삼일신교》, 《회삼경》, 《구변도설》(九變圖說), 《진리도설》, 《신리주해》(神理注解), 5대종지강연》, 31답》상하편, 《신사기의절안교정》 등을 저술하였다. 그중 《삼일신고》와 《회삼경》은 대종사의 《신리대전》, 무원종사의 《신단설기》와 더불어 대종교의 4대경서로 받들리였다.

1916 8월에 1세교주 라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하고 2세교주로 김헌이 등극하였다. 1919 초에 무원종사로 있던 김헌이 교통을 서일에게 전수하려하니 서일장군은 교주의 간곡한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투쟁준비에 심신을 쏟아부었다.

교통이란 대종교를 떠메고나갈 교주를 말한다. 서일장군이 교주추대를 잠시 미룬것은 무장투쟁을 위해서였다. 1919 이해 조선에서 3.1운동이 폭발하고 룡정에서 3.13운동이 일어나자 마침내 10년만에 력사의 기회를 만났다.

1919 3.1운동직후 서일장군은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확대, 개편하고 단장으로 나섰다. 대한정의단은 《민보》와 《신국보》를 꾸리며 결사대원을 모집하였는데 응모, 등록한 결사대원이 1037명을 이루었다.

대한정의단은 1919 8월에 산하에 독립무장단체—《대한군정회》를 조직하고 신민회계통의 무관출신들인 김좌진, 조성환, 리장녕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보도록 위임하였다. 독립군편성을 위한 서일장군의 전략적결책이였다.

1919 봄에 상해에서 대한림시정부가 수립된후 서일장군은 지도를 받기로 하고 이해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의 창립에 기여한 주요인물로는 서일,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리장녕, 계화, 리범석, 박성태, 정신, 박두희, 리홍래, 윤창현, 라중소, 김성 등으로 알려진다.

1919 12월에 대한군정부는 《국무원 205호》 지시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부름을 바꾸었다. 남만으로 불리운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있은데서 대한군정서는 대칭으로 북로군정서로 불리였다.

북로군정서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다.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참모장 리장녕

사단장 김규식

려단장 최해

련대장 정훈

련성대장 리범석

사관련성소장 김좌진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 본부를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에 설치하고 사관련성소도 부근에 세웠다. 십리평은 지금의 왕청현성 서쪽가인 덕원리에서 동으로 강을 거슬러 수십리 상기한 산간지대인데 잣덕은 십리평에서도 동쪽으로 몇리 떨어진 산언덕에 위치하고있었다.

현지답사와 력사고증에 의하면 사관련성소 예비훈련반은 북로군정서와 300메터 떨어진 남쪽의 넓은 평지에 자리잡았고 사관련성소는 잣덕에서도 동북쪽골안을 따라 15 들어간 곳에 자리잡았다. 사관련성소 소장은 상기에서와 같이 김좌진장군이 맡아보았다.

김좌진장군은 자는 정원, 호는 백야(白冶)로서 1889 11 24, 충청북도 홍성군 고도면 갈산리 량반가정 출신이다. 선친 김형규는 30여명의 머슴을 두고 2000여쌍 땅을 가진 갈산리의 갑부로 헤아려진다.

김좌진장군은 5살때 벌써 서당에서 공부하고 《삼국연의》, 《손자병법》, 《륙도삼략》 병서까지 읽으며 래일의 위인으로 자라났다. 장군의 위인됨을 세상이 알기에 따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1906년에 80여간 집을 내서 《호명학교》를 꾸리고 교장으로 나서 빈부귀천없이 학생을 받아들였다는것은 그지없이 존경심을 자아낸다. 서울시절의 대한협회 골간으로, 서울무관학교의 입학생으로, 리동휘가 이끄는 서북학회의 주동자로, 오성학교의 교감으로, 광복단의 일원으로 뛰고뛴 발자취가 력력하다.

그러던 김좌진장군은 1917 11월에 조국을 떠나 중국 동북방명길에 올라야 했다. 길림에서 대종교에 가입하고 려준, 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 1919 초에는 김교헌, 려준 39인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혈전독립의 무장투쟁기치를 드니 위상이 돋보이기만 한다.

1919 8, 김좌진장군은 길림을 떠나 왕청행에 올랐다. 장군은 왕청땅에서 서일장군이 조직한 대한정의단에 가입하고 서일장군에 의해 대한정의단 산하 독립무장단체—대한군정회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초빙된다. 여기에서 지적하고픈것은 김좌진장군은 길림서 왔고 서일장군의 초빙을 받아 대한군정회에 나섰고 사관련성소 소장으로 임명되였다는 것이다. 그뒤의 북로군정서도 총재가 서일장군이고 김좌진은 수하의 장령으로 활동했을 뿐이다.

김좌진장군은 사관련성소 소장직무를 충실히 리행했다. 사관련성소는 선후로 40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이고 1920 9 9일에 1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여 북로군정서의 무장력량건설에 힘을 보태였다. 이들이 그해 10월에 있은 유명한 청산리전투에서 중추적 역할을 놀았다고 하니 김좌진장군의 군사적재질을 너무나 헤아릴수 있다. 하기에 서일장군은 이에 앞서 1920 7 초에 김좌진장군을 사관연성소 소장 북로군정서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지적할것이 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도 김좌진장군이 조직자, 결책자로 되고 사령관으로 된것이 아니라 서일장군이 산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선에서 군사를 통솔하게 력사사실이다.

이쯤하면 서일장군과 김좌진장군과의 관계를 리해할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북로군정서 지도자와 결책자는 총재 서일장군이였고 김좌진장군은 수하의 충실한 장령이였을 따름이다.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의 총재일뿐만 아니라 군사총지휘, 군통수, 동북반일무장독립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의 한분으로서 말그대로 당시 독립무장투쟁진영에서 《찾아보기 힘든 문무겸비의 인물》이였다.

이제 다음 글에서 서술하겠지만 유명한 청산리전투도 서일장군의 전이방침과 전략부서에 따라 진행한 전투였다. 1920 10월의 청산리전투후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9 독립무장단체의 3500여명 대오가 밀산에 모여 대회합을 이루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을 총재는 서일장군이였다.

이것이 력사이며 이것이 서일장군의 모습이다. 이런 력사현실을 무시하고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의 성과를 서일장군의 수하 장령인 김좌진장군 한사람에게 분칠하는것은 옳바른 력사사관이라고 말할수가 없다. 외곡된 력사를 바로 잡아야 때가 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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