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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의 말】
오늘은 새해 2011년 1월 23일, 아침에 방룡남박사와 연길의 우광훈 동갑친구한테서 어제 오후 3시 37분 병환으로 시달리던 류연산친구가 연길에서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하고 가슴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어떤 사이인데, 어떤 친구인데 해종일 연산친구 생각뿐이고 안절부절 일손이 갚히지 않습니다.
6000리 밖이여서 금시 달려가지는 못하고 가슴을 잡아 뜯다가 친구의 명복부터 빌어야 겠다는 생각에 친구와의 이왕지사를 돌이키며 서로의 사진들을 정리하며 2009년 5월 1일에 쓴 수필 글도 찾아 보았습니다. 추모글은 따로 쓰기로 하고, 이미 쓴 글과 연변대 재학시절 사진과 2009년 4월 강남행 사진들을 먼저 조글로에 올리며 눈물속에서 친구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친구여, 친구의 구천길 평안하소서 !!!
먼곳에서 찾아 온 류연산 친구
중국“론어”를 펼치면 첫 구절이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명구가 안겨든다. 그뜻인 즉 “벗이 있어 먼곳에서 찾아오니 이 아니 기쁠손가”라는 말인데 6000리 멀리 내 고향 연변에서 소흥으로 찾아온 대학시절의 고향친구 류연산과 그의 안해 박희옥씨의 경우가 그러한것 같다.
며칠전 연변대 교수로 지내는 류연산친구한테서 관련 학술세미나 참가차 절강 가흥으로 온다는 전갈이 왔다.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세미나가 끝나면 곧추 소흥으로 달려오겠단다. 너무도 흥나서일까, 친구가 오련다는 날—-4월 27일 오후가 무척 기다려지기만 한다.
돌이켜보면 나와 류연산친구와의 본격적인 친구인연 은 대학입시제도 회복후 두번째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던 32년전의 일. 이해 1978년 10월에 나와 류연산은 행운스럽게도 연변대학 조문학부 78년급 대학생으로 되여 대학공부를 시작하였다. 둘다 고향이 연변의 화룡현이고, 그것도 목도고개 하나를 사이둔 해란강반이여서 둘사이의 인연은 남달랐다.
어느날 학급동창들인 료녕 무순의 리봉국이랑 같이 몇몇이 평강벌 상단에 자리잡은 류연산친구의 고향집을 찾았는데 아래 웃방을 가진 아담한 농촌초가집에 웃음이 넘치여났다. 한뉘 농사로 잔뼈를 굳히여온 순박한 류연산의 부모님들은 아들의 대학친구들이 왔다고 두부를 앗는다, 새 이밥을 짓는다 지성이 넘쳐났다. 3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친구부모님들의 살뜰한 보살핌에 따끈따끈한 하들하들 두부에 토장국, 입맛을 돋구는 김치에 근들이 술잔을 나누던 그 나날이 눈에 선하다.
나와 류연산~~우린 이같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내가 몇살 우이라고 형님동생간으로 지내는 막역지우였다.
그러던 1979년 12월에 나는 연변대란 이 과학의 전당에서 지금의 안해—-77년급 한어학부 여대생을 만나 사랑에 빠져 들었는데 류연산친구가 기어이 보자고 한다. 련애초라 사절하니 먼발치에서 모습이라도 눈동냥하자고 보챈다. 고로 우리 둘은 새로 든 새 기숙사 2층의 호실에서 창문밖으로 지나는 여자친구를 곁눈질하게 되였는데 류연산이 “아매같은 여자구만!”하며 손사래를 치지 않는가. 나이보다 숙성해 보이는 20대 중반의 처녀여서 “아매”같이 보인 모양이다. 그만큼 우리 사이는 허물도 없이 믿고지내는 끈끈한 형님동생 사이, 대학을 마친 근 30년 세월속에서도 우리 우정은 드팀없다.
그런 류연산친구가 멀지않은 가흥까지 왔다가 소흥으로 온단다. 론어의 “벗이 있어 먼곳에서 찾아오니 이 아니 기쁠손가”라는 말이 나의 경우를 두고하는 말이렸다. 일각이 삼추같이 기다려지는 나를 어찌할수가 없다.
“집떠나 며칠이라 토장국에 우리 멋의 봄나물, 김치가 생각날테지!”
“글쎄요!”
나는 안해와 주고받으며 섬섬거리다가 졸업반애들의 졸업론문지도수개를 팽개치고 아들애를 끌고 소흥 북쪽변두리의 매산으로 달려갔다. 매산은 국가급 경호습지풍경구의 중심에 우뚝 솟아오른 나지막한 산인데 이 산자락의 어디나 강남의 특유한 곰취가 널리 자라난다. 곰취를 등산가방 하나에 채우고 귀가하니 안해가 미나리김치, 배추김치, 물김치들을 맛갈스레 만들어 놓았다. 무우와 콩나물로 된 물김치에 달래가 들어가야 제격인데 캐온 달래가 동강이 났다는데.
내친김에 나는 잠간 휴식을 취하고는 월수대 캠퍼스 남대문밖 회계산 호수풍경구를 다시 찾았다. 흔하던 달래는 우리 류은종교수님이랑 싹 캐간 모양인지 달래다운 달래가 보이지 않는다. 나무숲속을 샅샅이 헤치며 헤둥거려서야 달래 두어줌을 캐여 들었다. 상상외의 성취라면 유독 한곳뿐인 한마당에서 내 고향 연변의 세투리와 똑같은 생신한 세투리를 처음 발견하고 가득 캐여든 것이라 할까.
집에는 강남 봄나물들인 미나리, 곰취, 고사리, 달래, 세투리 등이 구전하여 기분이 별로이다. 잇따라 4월 27일 오후 늦은 때에 가흥에서 류연산친구가, 상해서 부인되는 사람이 선후로 소흥땅을 밟고 월수대 교수아빠트 우리 집에서 고향 봄나물을 주식으로 하는 만찬이 이루어졌다. 손님으로 모신 분들은 우리 절강월수외대 한국어과의 류은종교수와 부인 량복선, 김성숙교수와 서재학교수, 김덕모교수와 부인 리옥금교수 등. 그중 김성숙, 김덕모, 서재학 교수분들은 류연산 연변대교수와 처음이지만 류은종교수 부부는 남다른 사이였다. 나와 류연산씨가 류은종은사님의 연변대 조문학부 제자라면 류연산씨의 부인과 류교수님의 부인님은 한 직장인이고, 류연산씨와 량복선교수님은 또 화룡서성 한고향에, 1949년에 세워졌다는 서성중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재미나는 것은 안해가 류연산친구한테 술을 부으면서 그젯날 연변대시절 “아매”라고 놀린 에피소드를 꺼내들고 “따진”것, 류연산씨는 나 안해의 돌연습격에 그런 일이 없다고 변명하고, 한자리 손님들은 그런 류연산씨의 말과 행동이 유머를 이루어 한바탕 폭소판이 벌어졌다.
이튿날 점심상과 저녁상은 류은종교수님 댁에서 치러지고 류은종교수님이 돼지순대를 하겠다며 소흥 온시가지를 일주하는 사이 나는 관련 90분강의를 뒤로 미루고 류연산부부를 안내하여 월수대 가까이 대우릉과 대우릉 구역내 석범산정의 대우동상, 소흥도심의 로신선생 고향집을 두루 돌아보았다. 소흥에 처음 오는 이들부부는 연변서 아직 볼수없는 강남의 푸른 록음세계, 아름다운 장미꽃, 월계화 등이 만발한 강남대지, 강남의 특이로움을 드러내는 산과 들, 유구한 력사문화도시—소흥의 대우릉, 로신옛집을 유람하며 내내 감개에 젖어 있었다.
정말이지 머나먼 타향 강남 소흥에서 30년지기 고향친구 부부를 만난다는것이 그리도 좋을수가 없다. 친구따라 강남으로 간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각이다. 친구란 무얼까, 세상사를 헤아리는 40대 그 나이에는 세월속 한때 친구란 개념조차 삭막해 가더니만 50대의 언덕에 올라서면서부터는 친구란 존재가 그지없이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머나먼 강남땅 친구하나 가까이 없는 생활환경이여서 더욱 그러한지, “벗이 있어 먼곳에서 찾아드니 이 아니 기쁠손가”가 피부로 느껴진다.
인생 50대에 이르면 속마음을 벽이없이 털어놓을 친구가 전에없이 소중해지는 가부다. 그래서 한국의 한 박사는 “50대 이후를 편안하게 보내려면 가족과 친구, 취미 이 세가지 마중물을 준비해 둬야 한다”고 이른다. 로후 세가지 마중물의 하나가 친구, 친구의 소중함을 알리는 인생명언이라 받들고싶다.
론어“위정편(爲政篇)”에는“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이란 명구도 있다. 인생 50십에 하늘의 뜻을 깨달았다는 공자님의 얘기인데 공자님의 인생 50십이해와 나의 인생50십 이해가 어울려 돌아가는것 같다. 중년의 생활속에서 몸부림치며 친구의 소중함을 한때는 잊고살다가 50대 언덕에 오르매 친구가 맘속에 꿀맛같이 흘러드니 나도 인제야 사람이 되여가는 모양이다.
먼곳에서 찾아온 내 고향 친구 류연산과 그의 안해, 강남땅 소흥에서 만나 어울리는 그멋 왜 좋기만 할까. 형으로 모시는 서재학교수가 “동생한테 류연산친구와 같은 30년지기가 있다는 것이 부럽기만 하다”고 하니 어깨가 잔뜩 으썩해 난다.
2009년 5월 1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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