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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발자취】(3) 북벌영웅 김준섭렬사 모셔진 곳
2011년 06월 13일 05시 34분  조회:7898  추천:17  작성자: 리함

              북벌영웅 김준섭렬사 모셔진 곳



【편자의 말】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그 세월 8.1남창봉기기념관을 처음 찾았을 땐 북벌영웅으로 불리우는 겨레 김준섭렬사가 여기 남창봉기기념관에 모셔지고 있었는데 28년후 다시 찾으니 남창시 81대도 399번지--강서혁명렬사기념당 한 구간에 모셔지고 있었다. 필자는 시름을 놓았다. 우리 겨레렬사를 강서 렬사들과 더불어 같이 모신 강서 사람들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이에 고 현룡순교수의 정리로 된 김준섭렬사 전기를 이곳에   올리여 본다.

 

 

북벌전쟁에는 수백명의 조족전사들이 참가하였는데 우수한 공산당원이며 조선족청년인 김준섭도 그가운데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북벌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6 2월에 국민혁명군의 기관총 교관으로 배치되였다.

김준섭(金俊燮, ?--1926)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오동리 사람으로서 조선 3.1운동후 동북에 들어와 혁명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에 들어가서 군관학교의 기관총전문과에서 학습하였다. 그는 혁명에 참가한후 사업의 수요에 의하여 강화일이라고 변성명하여 적들과 결사적투쟁을 하였으며 북벌전쟁에서 빛나는 공로를 세운 우수한 조선족혁명투사이다.

김준섭은 쏘련으로부터 중국의 광동성에 이르렀을 때 광동혁명정부는 제2차동정을 끝내고 잠시 휴전하였다. 혁명정부는 이 기간에 혁명군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여 6개 군단으로 편성하였다. 김준섭은 국민혁명군 제6군 제55퇀 기관총련의 소좌 교관으로 배치받았다. 당시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는 북벌전쟁을 대폭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많은 우수한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국민혁명군에 파견하여 군사지휘와 정치사업을 맡게 하였다. 김준섭이 속한 제6군에는 림백거가 정치부 주임을 담당하였으며 제2군의 정치부 주임은 리부춘이 담임하였다. 국민혁명군내에서 공산당원들이 정치상, 군사상에서 일으킨 핵심적역할은 북벌전쟁이 승리할수 있는 결정적요인으로 되였다.

국민혁명군은 부대를 정돈하고 재편성하면서 북벌전쟁의 준비사업을 다그쳤다. 6군의 각 퇀에는 기관총련이 조직되였다. 그런데 기관총련의 지휘관들과 기관총수들은 정규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으므로 전술상에서나 무기를 다루는 기술면에 있어서 아주 서툴렀다. 그리하여 우선 기관총련의 지휘관들에게 군사기술을 시급히 전수시킬 문제가 급선무로 나섰다. 6군에서는 광동성 혜주현에 기관총훈련소를 꾸려 각 퇀 기관총련의 련장, 패장, 반장들을 집결시켜놓고 군사기술을 배워주었다. 김준섭은 기관총훈련소의 교관으로 초빙되여 석달동안 낮에 밤을 이어 온갖 심혈을 기울여 사업하였다.

기관총훈련소의 학원들은 모두 한족이였고 조선족은 김준섭 한사람뿐이였다. 군사훈련에서 가장 큰 난제라면 언어문제였다. 김준섭은 한어를 잘 알지 못했던것이다. 그가 쏘련에서 기관총에 대해 전수받은것이라면 전적 로어로 받았는데 그 지식을 한어로 옮겨놓는다는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도 기관총을 다루는 기술지도라면 괜찮은편이였다. 기관총의 부속품들을 하나하나 뜯어 분해하였다가 도로 맞추면서 몸짓, 눈짓 손시늉하면서 벙어리강의를 할것 같으면 학원들은 대강 알아들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리론강의는 도무지 시늉으로 대체할수 없었다. 그는 부대내의 한어에 능숙한 조선인을 찾아 강의내용을 그자신이 우선 조선어로 번역한후 대방에게 한어로 번역케 한 다음 한어발음을 한마디한마디씩 배워가면서 강의를 계속하였다. 물론 맨처음에는 그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고 학원들은 더구나 알아듣지 못하였다.하지만 학원들은 강의가 끝나면 열렬한 박수로써 교관을 고무하여주었다. 김준섭은 학원들의 학습열정에 감화되여 짬만 있으면 학원들에게서 한어를 배웠다. 김준섭과 기관총훈련소의 학원들사이에는 서로 선생이 되고 서로 학생이 되여 서로 배워주고 서로 배우는 혁명적동지관계가 건립되여 아무런 허물없이 친밀하게 지냈다.

6군의 각 퇀에 배치된 기관총들은 그 대부분이 두차례의 동정을 통해 진형명의 군대에서 로획한것으로 그것은 미국과 영국에서 들어온 무기들이였다. 부분적 기관총은 봉계군벌 장작림의 손을 거쳐 입수한 무기도 있었다. 이러한 기관총들은 제1차세계대전에 쓰던것으로 새무기는 별반 없고 거의 낡은 무기였다.

김준섭은 낮엔 학원들에게 기관총에 관한 리론지식과 사용방법을 배워주었고 밤에는 늦도록 전군의 고장난 기관총을 하나하나 수리하였다. 그가 류숙하고있는 방엔 매일밤 자정이 넘도록 등잔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것을 알게 된 어떤 학원들은 교관의 건강을 념려하여 일찍 주무시라고 권고하였으며 어떤 학원들은 자원적으로 그와 함께 기관총을 수리하였다. 짧디짧은 훈련기간에 김준섭교관의 드높은 책임성과 학원들의 학습열정에 의하여 예기하였던것보다 더욱 큰 성적을 거두었다. 학원들은 학습임무를 완성하자 기관총도 교관의 손에서 말끔히 수리되였다.

1926 5, 북벌에 관한 결정에 이어 7월에 광동국민정부에서는 《북벌선언》을 공포하였다. 광주에 집결하여있던 국민혁명군 6개 군 및 후에 혁명의 편에 기울어진 광서군과 호남군의 2개 군을 합하여 8개군의 10여만명의 병력은 몽땅 북벌전쟁에 동원되였다. 북벌군은 3로로 나뉘여 진격하였다. 북벌에서 김준섭이 양성하여낸 각 퇀의 기관총련은 매우 큰 위력을 나타냈다.

동년 8, 호북성의 정사교를 공격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정사교는 월한철도에 있는 중요한군사거점으로 3면이 물로 둘러싸였고 한면은 높은 산이 깎아세운듯 우뚝 솟아 천험지로 이름 높았다. 방어하기 쉽고 진공하기 어려운 이 험지에 직계군벌 오패부는 주력군 2만여명을 끌어넣어 지키게 하였다.

 북벌군은 12차나 공격하였으나 번마다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김준섭이 소속한 부대는 서로의 총예비대로 있다가 엽정이 지휘한 《철군》으로 불리우는 제4군 독립퇀과 배합하여 유명한 정사교공격전에 참가하였다.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적의 화구들을 막았다. 불벼락을 퍼붓는듯한 기관총의 엄호하에서 엽정부대가 우회작전하여 우익으로부터 맹렬히 공격하여 이 거점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난공불락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오패부의 《철옹성》은 끝내 함락되고야말았다. 이 격렬한 공격전에서 김준섭이 지휘한 기관총련은 《철군》과 배합작전을 잘하였다. 그리하여 김준섭은 부대의 표창을 받았다.

3전선에 속한 국민혁명군 제2군과 제6군은 강서성에 쳐들어가 강서의 남부와 서부를 점령하면서 남창을 핍박하였다. 김준섭은 부대를 따라 서로로부터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향해 진격하여 들어갔다.

동년 8 14, 북벌군은 제1차로 남창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제1군에서는 공산당원들을 배척하였기때문에 전투력을 잃게 되였다. 그 결과 직계군벌에 속하였다가 당시 독립적일파를 이룬 군벌 손전방부대에게 격파되였다. 손전방부대는 승리한 그 기세로 남창을 포위하게 되자 북벌군은 하는수없이 거기에서 철퇴하여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이 긴요한 관두에서 김준섭이 소속한 부대가 후위를 섰다. 김준섭이 지휘한 제6 55퇀의 기관총련은 후퇴전에서 또 한번 그 위력을 과시하였다. 적의 포위망을 뚫고 철퇴하는 가렬한 전투에서 기관총련은 완강하게 적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서서히 후퇴하였다. 김준섭의 지휘하에 있는 기관총련은 진공전에서 영용하게 적의 화구를 제압하였을뿐더러 후퇴전에서도 침착하게 엄호하여 혁명군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기관총련은 전군의 후퇴를 엄호하면서 완강하게 싸우다가 탄약이 떨어지게 되니 대오를 뒤따라 안의를 거쳐 봉신으로 철퇴하였다. 기관총련은 후퇴전에서 완강하게 싸우면서 적지 않은 병사를 잃었다. 김준섭은 봉신에 머물러있는 동안 새 전사를 받아들여 훈련을 다그쳤다.

3전선에 소속된 부대들은 무한 3진을 점령하고 남하한 제1전선의 제4군 등 부대와 협동작전을 하였다. 북벌군은 11월초에 또다시 남창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각 군은 수차의 전투를 거쳐 손전방의 부대를 각곳에서 격파하면서 남창으로 죄여들었다. 6군은 악화역전을 공격하는 전투임무를 맡았다. 김준섭은 3정의 기관총을 지휘하여 역전에서 내뿜는 적의 화력을 제압하였다.

1926 11 19일 오후였다. 악화역전을 고수하고있던 적들은 좀처럼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김준섭은 적정을 살펴본후 3정의 기관총을 대각선으로 걸어놓고 적의 보루에 몰사격을 퍼부어 진격로를 헤쳐놓으려는 생각으로 우박처럼 퍼붓는 적탄도 헤아리지 않고 뛰여다니다가 그만 복부에 중상을 입었다. 전우들은 군사상에서는 그렇게도 엄격하였다가 생활상에서는 그처럼 살뜰한 교관의 상처입은 몸을 보고 몹시 근심하였다.

《강교관!강교관!

(당시 김준섭은 강화일이라고 변성명하였다) 상처를 입고 풀밭에 누워있던 김준섭은 조용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푸른 하늘이 보이고 전우들의 정다운 얼굴들이 보였다. 김준섭은 전우들의 손을쥐고 미소를 지으면서 힘겨웁게 또박또박 말하였다.

《전우들! 혁명은 피흘리게 마련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우!

당시 국민혁명군에는 전선구호사업이 잘 조직되여 있지 않았으므로 김준섭은 제때에 치료를 받을수 없었다. 지나치게 피를 흘린 그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북벌군의 전우들은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차렷자세로 모자를 벗어들고 머리를 숙였다. 전우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교관을 잃은 전우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왔으랴? 더구나 제6군 각 퇀의 기관총련 장병들의 가슴은 찢어지는듯 아팠다. 하지만 그들은 교관의 유언대로 슬픔속에 잠겨있을수만 없었다. 혁명은 피를 흘리게 마련되여있지 않는가! 국민혁명군의 장병들은 결연히 일떠섰다.

《강교관의 복수를 하자!

《군벌을 타도하자!

북벌군의 구호소리는 하늘을 찌르듯하였다. 전사들의 멸적의 기세는 더욱 높고 사기는 더욱 왕성하여 싸우면 싸울수록 세차게 불타올랐다. 6군은 그 기세로 맹공격하여 그날 오후에 악화역전을 점령하였다.

김준섭의 시체는 매령기슭에 있는 적전초에 안장하였다. 북벌군이 남창을 점령한후 국민혁명군 제6군에서는 남창에서 규모가 방대한 추도회를 열었다. 그런후 그의 시체를 다시 희생된 북벌군의 장병들과 함께 청운보에 이장하였다. 그리고 남창시 진현문밖에 있는 피장구에 그의 비석을 세웠다.

북벌전쟁의 포화속에서 희생된 김준섭은 우수한 공산당원이였으며 자랑찬 조선족의 혁명전사였으며 전문적훈련을 받은 기관총지휘관이였다.

그의 혁명투쟁정신은 영예로운 중국혁명의 력사와 함께 오래오래 전하여내려갈것이다.

 

                                         현룡순, 조선족백년사화(2),

료녕인민출판사, 198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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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두만강
날자:2011-06-13 14:43:12
보아 주고 글까지 올려 주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좋은 건의인데요. 우리 북벌영웅 김준섭렬사는 이미 "겨레 항일지사들" (전4권의 3권)(민족출판사, 2007년 10월 출판)에 실리었습니다. 이 겨레 항일렬사전기들은 1~4권이 끝이 아니고 5권, 6권 계속 출판하게 됩니다. 참고로 드립니다. 우리 렬사들에 관심을 돌리여 감사, 감사합니다 !!!
1   작성자 : 강초
날자:2011-06-13 12:50:01
소중한 글입니다. 우리의 렬사들을 하나 하나 그 력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업적을 기록해두면 어떨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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