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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발자취】(4) 남창봉기 곳곳에 발자취 남기다
2011년 06월 16일 05시 03분  조회:7119  추천:18  작성자: 리함

【장정발자취】(4) 

 
             남창봉기 곳곳에 발자취 남기다



1927 8 1일에 일어난 남창봉기는 중국혁명사에 길이빛날 위대한 봉기이다. 81일은 후에 우리 인민해방군의 탄생일로 되였는데 바로 80여년전의 위대한 봉기는 어쩌면 오늘의 세대—청소년들에게는 거리가 멀어보일수도 있지만 우리 겨레의 열혈청년들도 참가하여 피를 흘렸다고 할  때는 느낌이 확연히 다를것이다.

1926 7월에 정식으로 시작된 기세드높은 북벌전쟁은 혁명세력을 주강류역으로 부터 장강류역에로 발전시켰다. 혁명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고 전국이 희열과 흥분에 잠기였다. 바로 이러한 국민당내의 장개석과 왕정위집단은 1927 4 12일과 7 15일에 선후로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원과 혁명군중에 대해 피비린 체포와 도살을 감행하였다. 중국의 절반땅을 휩쓴 북벌전쟁은 중도에서 실패되고말았다.

중국혁명은 칠성판에 올랐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을 만구하기 위하여 우리 당의 영향과 장악하에 있는 부분적 국민혁명군, 북벌군으로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엽정이 지휘하는 2방면군 11군의 24, 섭영진, 주사제 등이 지휘한 4 25, 하룡이 지휘하는 20군은 우리 당이 장악한 무장력량이였다. 주덕이 령도한 3 군관교육퇀, 무창국민정부 경위퇀, 중앙 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도 우리 당의 지도를 받았다. 상술한 병력은 3만여명으로 헤아려졌다. 그중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가 북벌에 참가한 동지들이였다.

1927 8 1 새벽 2, 세방의 총소리가 이른새벽의 대기를 썰며 남창시를 들깨웠다. 몇발의 붉은 신호탄이 새벽하늘을 헤갈랐다. 엄밀히 대기하고 있던 우리 봉기군은 주은래를 서기로 하는 중공전적위원회와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 등의 령도하에서 비호같이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엽정부대 11 24사는 적의 중요거점인 천주교회당과 광려중학교를 맹공격하였다. 부대 72퇀의 박인, 김철강 조선인전사들은 전우들과 함께 3 23퇀과 24퇀을 답새겼다.

두개퇀은 적군 주력이였다. 헌데 간밤에 23 퇀장과 24 , 퇀장 셋이 주덕이 베푼 《연회》에 끌려들었기에 지휘자를 잃었다. 적들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몽땅 들리였다. 화룡현 개산툰 정동학교 출신인 박인은 전투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치였다. 6 57퇀이 봉기군의 진격로를 막아 나서자 봉기군 24 71 3영은 인차 돌격대를 무어가지고 천주교회당의 대문을 짓부시며 들어갔다. 돌격대의 조선인 방월성은 전우들과 더불어 정면공격을 들이댔다. 다른 봉기군부대가 배후공격을 들이대자 적들은 투항하는수밖에 없었다.

하룡부대 20군은 적의 5방면군 총지휘부를 들이쳤다. 적의 총지휘부는 봉기군 20 지휘부와 거리 하나를 사이두었는데 거리 서쪽에는 성루가 솟아있었다.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화력으로 성문을 봉쇄한데서 봉기군은 쉽사리 뚫고나갈수 없었다. 하룡과 류백승은 몸소 전투를 지휘하였다. 20군의 조선인전사 강석필, 홍범기, 김래준 등은 탄우속을 헤치며 성루에 뛰여올랐다. 높은 지세는 싸움에 유리했다. 분노의 총탄은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적들은 배겨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봉기군 20 교도퇀과 6퇀은 적군 9 79, 80퇀을 소멸할 과업을 맡았다. 81 새벽 이들은 적과 하나를 사이두고 대기하고있다가 불의습격을 들이댔다. 적의 군영은 수라장을 이루었다. 적의 군영에 뛰여든 조선인 김래준 등은 적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79퇀의 적들은 거개가 옷도 바로 입지 못하고 손을 들어야 했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불과 4~5시간만에 3000여명을 섬멸하고 남창시를 공제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실제부대는 2만여명인데 그중 조선인전사가 수십명이다. 4군교도퇀의 박영, 리용 200여명 조선인전사들은 국민당신군벌 장발규의 강박하에 부대와 함께 남하하였다가 광주봉기의 주력으로 되였다.

8 2 남창시 5만여명 군중들은 새로 창립된 혁명위원회의 지도밑에 성대한 집회를 가지고 남창봉기의 위대한 승리를 열광적으로 경축하였다.

8 3일부터 6일까지 기간에 봉기군은 남창에서 물러나 광주로 남하하였다. 봉기군은 남하하는 도중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여 손실을 당했다. 남창봉기에서 용맹을 떨쳤던 연길현 동불사사람 김철강, 훈춘현 대황구사람이고 룡정 은진중학교출신인 강석필, 왕청현 라자구사람 리범홍, 밀산현 사람 홍범기 조선인전사들은 해륙풍지구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남창봉기는 국민당반동파에게 첫총을 쏘았다. 남창봉기는 우리 당이 무장투쟁을 독립적으로 령도하기 시작하였다는것을 세상에 장엄히 선포하였다. 주덕, 진의가 거느린 일부 부대는 1928 4 정강산에 이르러 모택동이 령도하는 추수봉기부대와 합치여 로농홍군 4군으로 편성되였다. 8 1일은 후에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절로 되였다.

중국혁명사에 길이 빛날 남창봉기—이 봉기에는 박인(화룡현), 김약산, 성준용, 김철강(연길현), 방월성, 강석필(훈춘현), 홍범기(밀산현), 김래준, 리범홍(왕청현), 김영준(동녕현), 방국성(녕안현), 김강(녕안현), 권상선(녕안현), 전승익(화룡현), 최관일(훈춘현) 수십명 조선인전사들이 참가하였다.

력사, 력사는 그들을 잊지 않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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