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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혁명 실패후 남창봉기, 광주봉기 등에 참가하였던 수십명 조선동지들은 불타는 희망을 안고 중앙혁명근거지로 들어갔다. 무정, 양림, 최정무, 최음파 등 조선인청년들이 그 돌출한 대표로 된다.
1930년 3월, 조선인 최정무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상해를 떠나 서금으로 갔다. 복건성서부를 지날 때 그는 뜻밖에도 엽검영동지를 만났다. 엽검영이 광주봉기를 지휘할 때 최정무는 광주봉기의 보통전사였다. 오래간만에 상봉한 그들은 그날 저녁 한 침실에서 자면서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서금에 간후 최정무는 홍군기계수리공장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때 그는 홍군 후방부대 정치부 주임 모택담을 알게 되였다.
1930년 6월의 어느날, 모택담이 최정무를 불렀다. 무슨 새로운 과업이 있는가부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잉어반찬을 올린 술상이 그를 기다리고있지 않겠는가, 그가 너무 송구스러워 몸둘바를 몰라하고있는데 모택담이 구속없이 대하며 술을 따라주었다. 그들은 술상에 앉아 온 오후 이야기꽃을 피웠다. 최정무로 놓고 말하면 실로 잊을수 없는 하루였다.
1931년 11월 7일,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에서 제1차중화쏘베트공화국 로농병대표대회가 성대히 열리였다. 여러 혁명근거지와 상해, 무한 등 도시에서 온 로동자, 농민, 병사, 혁명적지식인 대표 도합 600여명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최정무가 유일한 조선민족대표로 력사적의의를 띤 그번 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최정무는 쏘련 울라지보스또크 쌍성자 하구촌 출신(1910년생)이다. 10월혁명후 쌍성자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1926년 5명의 조선인 쏘련공청단원과 함께 우쑤리강을 건넜다. 그뒤 상해를 거쳐 광주에 가서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때 그는 조선인 양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광주봉기에도 참가하였다.
최정무는 쏘베트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고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의 말을 빈다면 《참으로 꿈만 같았다.》 그해 20살밖에 안되는 그는 높뛰는 가슴을 안고 대회장소인 서금 엽평의 옛 절간으로 찾아갔다.
최정무는 대회에서 모택동동지와 주덕동지의 보고를 듣고 또 대표발언시 연단에도 올랐다. 발언준비가 되지 못한데다가 감격에 목이 메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주석대에 계신 모택동, 주덕 등 동지들이 그에게 자애로운 눈길을 보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긴장하기만 했다. 그가 몇마디 못하고 연단에서 물러나자 모택동동지는 나이가 얼마며 무슨 일을 하는가 친절히 묻기까지 했다.
회의기간에 모택동동지께서 경위원을 보내여 최정무를 찾았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모택동은 주덕과 이야기를 나누고계셨다. 그는 너무나 흥분되고 긴장한김에 무슨 인사말을 올렸으면 좋을지 몰랐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모택동은 어쩔줄 몰라하는 그를 자애롭게 자기 곁에 앉혔다. 그리고는 가정생활형편, 사업형편을 물으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선청년으로서 중국혁명에 참가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동무는 지금 혁명의 첫 발자국을 내디디였습니다. 혁명의 길은 아직도 멀고도 머니 계속 학습을 잘하여 중국혁명과 조선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잘 싸워야 하겠습니다.》
모택동의 말씀은 마디마디 힘있었고 사랑으로 차넘쳤다.
1932년 봄, 최정무는 모택동동지의 배려하에 중앙쏘베트구역의 홍군군정학교에 가서 제3기생으로 학습하게 되였다. 류백승이 홍군군정학교 교장이였고 무정이 사격훈련교원이였다.
3개월간의 학습이 끝난후 최정무는 선후로 홍군 제22군 제1퇀 제2련 부련장, 지도원 직을 맡고 국민당의 군사《포위토벌》을 물리치는 피어린 전투에 뛰여들었다.
1933년 봄, 최정무는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의 제4차포위토벌을 분쇄하는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홍군 제3병원으로 호송되여 오래동안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조직에서는 그가 다시 전선에 나갈수 없는 형편을 고려하여 홍군 제3병원 제3소 지도원책임을 맡기였다. 후에는 또 병원의 당총지 부서기사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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