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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신과 우리 겨레 관계연구
1. 들어가기
현대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와 사상가, 혁명가로 불리우는 로신(원명 주수인, 1881―1936)은 절강성 소흥출신으로서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그 시절의 리대소, 진독수 등 허다한 선진적인 지식분자들과 더불어 글을 쓰고 잡지를 꾸리면서 중국 신문화운동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로신은 문학에 투신한후, 1918년에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봉건을 반대한 첫 백화문(白话文)소설로 불리우는 “광인일기(狂人日记)”를 발표하면서 로신이란 필명을 처음으로 쓰게 되고 이어 “공을기”, “약”, “아Q정전” 등 허다한 소설과 잡문, 수필, 평론, 시들을 써내여 명실공히 중국 신문화운동의 선구자,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로 떠오른다.
이와 더불어 로신의 작품들은 이웃 조선과 일본 등 나라들에 전해져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인민들을 크게 고무한다. 이를 두고 조선의 저명한 작가 한설야는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에 한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의 위대한 사실주의작가이며 중국 신문학의 창시자인 로신의 이름이 우리들에게 친숙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로신의 이름은 그가 잡지 《신청년》에 관계하고 그의 첫 단편인 “광인일기”를 비롯하여 불후의 로작 “아Q정전” 등이 발표되면서부터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졌다.[1]
조선작가 한설야의 이 한단락 말은 로신이란 이 이름이 20년대 그 시절 조선사람들에게 친숙히 알려져있음을 잘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로신을 중국의 대문호로 숭배하면서 그의 사상, 그의 작품을 따르는 문인들이 늘어가고 중국의 북경이나 상해, 광주 등지에서 로신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거나 1936년 서거후 로신을 추모하고 따르는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본문에서는 로신과 관련되는, 조선문인들의 사실과 글 이모저모를 력사적으로, 개략적으로 밝히면서 로신선생이 우리 겨레와도 관련되며 그의 문학이 조선(한국) 현대문학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치였음을 서술해보려 한다.
2. 로신의 작품을 접촉한 사람들
본문 서두에서와 같이 조선의 저명한 작가 한설야는 상기의 글에서 또 이렇게 말하고있다.
로신은 중국에서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 알려진 20세기의 탁월한 사실주의작가이다. 그의 이름은 이미 20년대 초기부터 조선인민에게 친숙되여왔다.
이는 로신의 이름이 지난 20세기 20년대 초기부터 조선에 알려졌음을 단적으로 증명하고있다. 살펴보면 중국 로신의 이름이 당시 조선에 알려지게 됨은 국내 번역을 통한 로신작품의 접촉, 중국내에서의 직접 접촉, 일본에서의 접촉 세갈래로 나타나고있다.
1) 조선(한국)국내를 통한 접촉
조선(한국)에서 로신을 제일 먼저 소개한 글은 량백화(梁白华, 1889-1944)가 1920년 《개벽》 제8호에 발표한 “호적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 문학혁명”으로 밝혀지고있다.
소설로 로신은 미래가 유망한 작가이다. 그의 “광인일기”와 같은것은 한 박해광의 공동적인 환각을 묘사하여 지금의 중국 소설가의 미도한 경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로신의 “광인일기”가 1918년 4월에 씌여지고 그해 5월 “신청년”(제4권 제5호)에 발표되였다면 그로부터 2년 남짓한 뒤 로신에 대한 평가의 글이 발표되였다는 말이니 로신에 대한 량백화의 이같은 평가는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접촉이 매우 빨랐음을 알려주고있다. 그뒤 로신의 대표작 “아Q정전”이 또 량백화에 의해 23회에 걸쳐 《조선일보》(1930. 1. 4―2. 16)에 번역,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실 로신의 작품이 조선(한국)에 처음으로 번역, 발표된것은 1927년이다. 이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류수인의 번역으로 1927년 8월에 서울에서 발행되는 《동광》잡지에 로신의 소설 “광인일기”가 발표되였었다.
2). 중국내에서의 직접 접촉
로신작품의 중국내 접촉은 류수인[2]의 회억에서 그대로 잘 드러난다.
나와 많은 조선 청년들이 1920년초에 연길 도립제2중학에서 공부할 때 진보적교원을 통하여 《신청년》에 실린 “광인일기”를 읽었다. 처음에 우리들은 읽어도 뜻을 알수 없었다. 여러번 읽고 몇차례 의논한후에는 너무도 격동되여 거의 미칠 지경이였다. 로신선생은 중국의 미친 사람들을 썼을뿐만아니라 조선의 미친 사람도 썼다는것을 인식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로신선생은 우리들이 숭배하는 첫번째 중국사람으로 되였고 나의 마음속에는 로신선생을 만나뵈고싶은 생각이 생겼다.[3]
지난 세기 20년대를 헤아리면, 조선(한국)사람들에게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땅에는 19세기 60년대 이후부터 살길을 찾아서 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삶의 무대를, 투쟁무대를 중국으로 옮긴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다. 류수인도 그런 조선이주민의 한사람으로 중국인중학교를 다닌데서 중문으로 된 로신의 작품을 직접 읽을수 있었다. 로신의 작품을 중문으로 읽은 사람이 류수인을 비롯한 많고많은 젊은이들임은 두말할것도 없다. 20―30년대 중국의 북경이나 상해, 남경, 광주 등지에서 공부하는 조선류학생들이 많았다는것을 념두에 둘 때, 광주 중산대학에만도 50여명에 달했다는것을 념두에 둘 때 더욱 그러하다.
3). 일본 국내에서의 접촉
20년대와 30년대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일본으로 떠났다면 공부하기 위해 일본류학길에 오른 젊은이들도 많았다. 당시 일본은 로신의 “아Q정전”을 제일 먼저 번역, 출판한 나라여서 일본문으로 출판된 로신의 선집, 문집, 단행본들이 적지 않았다. “아Q정전”만 해도 15가지의 서로 다른 번역본이 있었다고 하니 일본에 류학한 조선류학생들이 로신의 작품을 얼마든지 접촉할수 있었다. 20―30년대는 아니지만 40년대에 일본에 류학한 한국류학생 리병주(李炳注,1921―1992)는 1941년 12월에 도꾜에서 로신의 작품을 접촉하였다면서 그의 《리병주 고백론》[4]에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신전의 서점에서 몇권의 책을 샀다. 그 가운데 낀것이 《로신선집》이란 문고본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나는 프랑스문학과 일단 결별하고 로신에 몰두하게 되였다. 고서점에서 《개조사》판의 대로신전집을 구할수 있었던것도 하나의 행이였다.
한국류학생 리병주의 글은 일본에서 로신의 작품을 접촉한 생동한 실례로 되고있으며 일본에서 로신열이 대단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3. 로신을 만난 우리 겨레
로신의 작품이 조선 독자들과의 만남을 중국, 조선, 일본 등 세갈래로 나누어 두루 살펴보았다. 그중 조선에서만도 일제치하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조선총독부 단행본 금지목록”에 로신의 “아Q정전”, 《현대소설집》, 《로신선집”》, 《로신문집》, “로신 유작” 등을 금지도서목록으로 기재하였다는것으로 보아 일제치하의 조선에서 로신의 작품이 얼마나 널리 읽히였는가를 헤아릴수가 있다.
조선사람들, 더우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이런저런 관계로 중국에 온 젊은이들 가운데는 로신과 로신작품에 대한 관심이 독서와 숭배로부터 직접 찾아뵈려는 마음으로 번져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지는데 의하면, 그중 6명의 지식인들이 끝끝내 로신선생과의 만남을 실천했고 일부는 만남을 이루지 못한 유감을 남기고 일부는 로신선생의 강의나 강연을 직접 듣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로신과 로신작품에 대한 숭배와 관심이 그대로 잘 보여진다.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였던 리정문(李政文)생은 한편의 글에서 중국측 우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로신선생과 래왕하였던 조선벗들이 구경 얼마나 되는지 알수 없으나 필자는 리우관(李又观), 김구경(金九经), 류수인(柳树人), 리륙사(李陆史) 등 네분을 확실히 알고있다”[5]고 밝힌바 있다. 그후 중국인학자 양소전(杨昭全)도 “로신과 조선작가”[6]란 글에서 지금 알고있는 사료에 의하면 로신과 래왕한 조선벗들이 리우관, 김구경, 류수인, 리륙사 등 4명이라고 지적하였다.
하다면 리정문, 양소전 등은 로신을 만난 조선벗들이 4명이라는것을 어떻게 알았을가? 그들은 약속이나 하듯 그 근거를 로신의 일기에 두고있다. 《로신일기》(상, 인민문학출판사, 1976년)에 의하면 리우관, 김구경, 류수인과의 만남이 기재되여 있다.
1923년 3월 18일: 개임, 휴일 휴식. …오후에 리우관군이 왔다.
1928년 9월 1일: 개임, 오후…류수인이 왔다.
1929년 5월 31일: 개임, 오후 김구경…이 왔다.
관련자료를 보면 리우관(1897-1984)은 원명이 리정규(李丁奎)이다. 그는 1919년 일본에 가서 류학하던중 조선의 3.1운동소식을 접하고 중국에 와서 독립운동에 뛰여든 형님 리을규(李乙奎)을 찾다가 1921년에 중국에서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게 된다. 그의 “년보(年谱)”에는 리회영, 신채호, 북경사범대학 교수 로신 형제(주수인, 주작인, 주건인), 대만 혁명동지 범본량(范本梁) 등과 래왕하였다는것이 기록되여있다.[7]
류수인(원명 류기석, 1905-1980)은 그의 저서 《중국을 찾아온 조선의 옛사람들》(13)에 실린 저자 략력에 따르면, “1905년 1월 조선 황해도 출생,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 1926년 북경 조양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그후 중학교 교원, 교장 및 《천진상업보》, 《하남민보》, 《중한월간》 등의 편집, 주필을 담임. 또 하남대학 농학원, 강소교육학원, 남통학원 농업경제학부 교수 력임, 1952년부터 1980년까지 강소사범학원 력사학부 교수”라고 되여있다. 그는 대학시절에 리우관을 따라 무정부주의자련맹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뛰여든 사람인데 언제부터 로신의 원명인 “수인”을 자기의 호로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김구경(1900-1950)은 1926년에 일본 교또에서 대학을 졸업, 귀국후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8년에 중국으로 건너와 북경의 “미명사(未名社)”에 거주하였으며 북경대학에서 일본어와 조선어를 강의하였다. 그 시절 로신이 상해에 있었으나 연경대학과 북경대학의 초청으로 북경에 가서 강연하기도 하여 김구경을 알게 되고 수차의 만남을 가지게 되였다.
리륙사(원명 리원록, 1904-1944)는 조선(한국)의 이름난 애국시인으로서 일찍 20년대에 중국에 와서 북경대학 사회학부에 다니였고 귀국하였다가 1931년에 다시 중국으로 와서 독립운동에 뛰여들었다. 그후 1933년 6월에 적들에게 피살된 중국인권보장동맹 부주석 양행불(杨杏佛)의 상해장례식에 참가하였다가 송경령, 로신과 맞띄우게 되고 벗의 소개로 로신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게 된다. 그러나 로신은 기억하지 못하였는지 그날 6월 20일의 일기에 리륙사와의 만남을 기록하지 않았다. 로신의 일기에서 찾을수 없는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여기까지 보면 로신을 만난 조선사람으로서 1923년 3월 18일의 리우관이 처음이였을가? 리우관의 자작 “년보”에 의하면 리우관이 로신을 만난것은 1923년이 아닌 1922년이다. 원인은 1922년에 쓴 로신의 일기가 전부 산실되여 고증할 방법이 없기때문이다. 다행한것은 로신의 동생의 《주작인일기》가 1996년에 대상(大象)출판사에 의해 출판된것인데, 주작인은 일기에서 로신과 자기가 만난 조선인 5명의 이름을 적고있다. 흥미로운것은 1922년 4월 14일에 조선인 오공초(吴空超)가 북경의 로신선생저택을 방문하여 로신을 만난것인데 주작인은 오공초가 로신을 방문한 첫 조선인이라고 일기에 적은것이다.
그해 1922년 5월 8일에는 오공초가 리우관을 안내하여 로신저택에 가서 로신형제한테 인사를 시키고 8월 3일에 로신네 가족, 벗 등 19명과 더불어 북경의 향산을 유람했다[8]고 하니 1922년에 로신을 만났다는 리우관의 “년보”는 틀리지 않는다. 이같이 오공초는 주작인의 일기에 로신을 만난 첫 조선인으로 선후 5차나 만난 사람으로 기록되고있다.
오공초(1894-1963)는 원명이 오상순이고 일본에서 대학 종교학부를 다닌 졸업생이다. 그는 1922년에 북경으로 갔다가 “새마을운동”을 이끄는 주작인을 찾고저 1922년 4월 14일에 로신의 저택을 찾았고 로신형제 셋을 만나게 된다. 그후 또 리우관과 같이 로신저택을 찾은후 귀국길에 오른다.
중국과 한국 여러 관련학자들의 노력으로 1922년부터 로신이 만난 조선인들이 오공초, 리우관, 김구경, 류수인, 리륙사 등 5명으로 밝혀졌다. 그외 또 한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신언준(申彦俊, 1904-1938)이다. 그는 1923년에 중국 동오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꾸린 흥사단(兴士团)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가 1929년에 《동아일보》사 남경, 상해 특파원으로 활약한다. 1933년 5월 중국좌익작가련맹 녀작가 정령이 국민당정부에 불행히 체포된후 《동아일보》사에서는 로신선생을 취재하라고 한다. 신언준은 채원배의 도움으로 로신의 저택을 알게 되고 이해 5월 16일에 편지로 만날것을 요구하나 국민당정부의 체포를 피해있는 로신의 거절을 당한다.
5월 22일에 신언준은 로신의 가까운 일본친구가 꾸리는 로신저택 부근의 서점 2층에서 끝내 로신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이 1934년 4월의 《신동아》잡지에 “중국의 대문호 로신 방문”으로 실린다. 5월 22일 만남에 앞서 로신과 신언준이 주고받은 편지날자가 1933년 5월 16일, 17일, 18일, 19일의 로신일기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이러면 로신이 만난 조선사람은 6명으로 나타난다. 이밖에 더 있는것으로 보이나 현재로는 아직 더 밝혀지는 사람이 없다.
3. 로신의 강연을 들은이들
필자가 지난 몇년래 로신의 발자취를 쫓아 중국내 소흥, 북경, 하문, 광주, 상해 등지 로신기념관이거나 박물관을 전부 답사한데 의하면 로신은 북경, 하문, 광주, 상해 등지에서의 대학 재직생활과 거주생활시에 대학의 연단들에서 많은 강연을 하였는데 북경과 광주 대학생활시기에 그의 강연을 들은 조선인들이 적지 않은것으로 알려진다. 정래동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한국 김시준(金时俊)교수의 론문소개에 따르면, 정래동(丁来东, 1903―1983)은 일본 도꾜 대성중학 출신으로서 1924년에 중국 북경에서 한해 중국어를 배운후 1925년에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 1930년에 졸업하고 무정부주의자단체에 가담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는 1929년 7월부터 《조선일보》에 12기에 걸쳐 “중국 현대문단개황”을 련재하고 1931년 1월 14일부터 그달 30일까지 또 《조선일보》에 장편평론 “로신과 그의 작품”을 련재하였다. 그는 비록 중국의 대문호 로신선생을 직접 만날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로신이 1929년 5월 29일과 1932년 11월 22일 북경대학 제3원에서 두차례 강연을 할 때 두번 다 강연을 들은 행운을 가지였다.
이밖에 로신은 1927년 1월부터 1927년 9월까지 광주 중산대학 재직시절에 1927년 1월 25일과 3월 11일 중산대학 종루례당에서, 1927년 4월 8일에는 황포군관학교에서 “혁명시대의 문학”이란 강연[9]을 가지였다. 그때 중산대학에는 수십명의 조선청년들이 공부하고있었고 황포군관학교에는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정치를 배우고 군사를 배우고있었는데 로신의 강연을 들은 조선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더우기 중산대학에서 로신이 “중국문학사”, “문예론” 등 과목을 강의할 때 그의 강의를 선택한 학생들이 200여명에 달하고 사회의 많은 문학애호청년들까지 참가하여 서당(西堂)의 문과교실이 비좁아 종루례당에서 강의할수 밖에 없었다.
4. 로신을 만나려던이들
다 아는바와 같이 로신은 중국의 대문호로서 로신을 만났거나 강연을 들었거나 만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가인 김학철(1916-2001)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김학철은 1936년 여름 어느날 리수산이라는 조선청년과 함께 상해 대륙신촌 9번지에 있는 로신선생저택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러던 그들 둘이 로신저택 문앞에 이르러 걸음을 주춤하였다. 그때까지 시 한수, 수필 한편 써본적이 없은데서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로신이 가끔 다닌다는 부근의 우찌야마서점에 가서도 책도 사지 않으면서 기웃거리고싶었으나 책도둑으로 몰릴것 같아 또 물러설수 밖에 없는 그들, 그뒤 10월 20일에 전날 19일 로신선생이 병으로 서거했다는 부고를 접하고 그들은 놀랐다. 장례식에라도 참가하려니 그들 소속단체의 책임자가 일본 특무, 경찰들이 우글대는 판에 조선인으로서 어디를 가겠는가고 호통치는통에 이 념원도 접어야 했다.[10]
중국에서 “영화황제”로 불리우는 조선인 김염(1910-1983)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김염은 원명이 김덕린. 일찍 학생시절부터 로신선생의 “납함” 등 작품을 즐겨 읽으며 존경한 김덕린은 로신의 이름에서 신자를 따서 김신이라고 지어보았으나 대문호의 필명을 그대로 옮긴다는것이 당돌하다고 생각되여 마음에 드는 별호를 찾던중 젊은이들의 정열을 상징하는 불꽃 “염(焰)”자가 마음에 들어 김염이란 별호[11]를 택했다. 그때부터 김염으로 통했으니 서울태생인 그는 상해시절에 첫 계몽스승인 중국 현대연극의 정초자이며 걸출한 희곡작가인 전한의 도움으로 영화예술인으로 성장하며 그와 더불어 상해의 중국좌익작가련맹 회원으로 활약한다. 그런 김염이, 그토록 로신을 숭배하던 김염이 좌익작가련맹의 지도자의 한사람인 로신선생을 모르고 지냈을가, 대답은 로신과의 어울림이다. 그러나 관련자료가 보이지 않아 로신과의 인연을 긍정적으로 밝힐수가 없어 유감스러울뿐이다.
그외 광복전에는 독립운동가로, 광복후에는 중국에서 저명한 교육가와 농학교수로 활약해 온 류자명교수가 또 있으니 그는 로신 다음으로 손꼽히는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인 파금과 절친한 관계였다. 지난 30년대 상해 시절, 적절히 말해 상해 좌익작가련맹시절 로신이 가장 아끼는 문학도도 파금이요, 파금이 가장 존경하는 중국내 선생이 로신이라면 류자명이 로신을 숭배하고 존경하도록 이끈이는 분명 파금이였다. 이런 류자명이 로신과의 관계에서 한획을 그으니 다음 론문에 그 한부분으로 전문 밝혀보려 한다.
5. 로신 추모에 참녜한이들
중국의 20세기는 위인을 수요로 하는 20세기였으며 위인을 배출한 세기이기도 했다. 로신은 이 세기에 걸맞는 중국 사상문화분야의 위인답게 1918년부터 1926년 기간에 신문화운동, 혁명문학운동에 나서 인생의 휘황한 10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향년 56세로 1936년 10월 19일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에 조선인들도 비통해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등 추로글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1). 리륙사
1936년 10월 20일, 상해의 여러 신문들에 로신 별세부고가 실리자 로신을 숭배하며 로신을 마음으로 받들던 조선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1933년 6월 20일, 상해 만국빈의관 양행불(중국인권보장동맹 부주석, 민국혁명의 원로)장례식에서 로신을 만난적이 있는 리륙사는 조선 국내서 로신서거소식을 접하고 로신추모문인 “로신론”을 써서 그해 1936년 10월 23일부터 7일간 《조선일보》에 련재하였다. 장장 1만여자에 달하는 “로신론”은 로신의 략력, 로신을 만난 경과, 로신 작품의 연구와 평가 등으로 씌여졌는데 일제의 검열도 마다하고 비교적 공정한 태도로 “로신론”을 게재했다는것은 웬간한 사람으로서는 행할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해 12월 또 로신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여 《동광》잡지에 련재하기도 했다.
2). 한설야
일찍 1925년에 조직되고 1927년에 개편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지도자의 한 사람이였던 한설야는 로신서거소식을 접했을 때의 정황을 1956년 10월호 《조선문학》에 발표한 “로신과 조선문학”에서 이렇게 썼다.
로신 서거의 부음(讣音)이 전해오자 조선 작가들은 전체 조선인민과 함께 애도의 정을 금할수 없었으며 23일 신문지상들에는 로신에 대한 추모문들이 발표되였다.
한설야는 이 글에서 1936년 이 한해에 조선의 작가들은 “사회주의사실주의문학의 창시자인 고리끼와 중국의 고리끼로 불리우던 로신 두 위대한 문호를 잃게 된 슬픔을 참을 수 없”었고 이 슬픔속에서 자기도 추모의 글을 썼다고 스스로 밝혔다.
3). 야생=류자명?
로신이 서거한 이튿날 10월 20일, 야생(也生)이라고 필명을 단 한 조선청년이 만장과 함께 “로신선생을 애도한다”는 시 한수를 써서 상해의 로신장례위원회에 드리며 로신서거에 대한 자기의 애끓는 심정을 나타내였다.
고리끼선생이 돌아갔습니다
로신선생이 또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념합니다
그들이 끝내지 못한 일
그들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어갑니다[12]
…
이 한편의 추모시에서 추모자는 야생이라는 필명을 쓰면서 로신을 쏘련의 고리끼와 병행시키며 중국의 대문호 로신을 심심히 애도하였다. 다른 글에서 전문적으로 서술하겠지만 이 야생이 다름아닌 독립운동가 류자명으로 알려져있다.
6. 나오면서
본문에서 필자는 로신과 우리 겨레 관계연구란 과제로 로신의 작품을 접촉한 사람들, 로신을 만난 사람들, 로신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 로신을 만나려 했던 사람들, 로신 추모에 참녜한 사람들 등으로 나누어 로신과 관련되는 우리 겨레의 이모저모를 처음으로, 전방위적으로 고찰하여보았다.
이 가운데서도 보다 힘을 기울인 부분은 로신을 만난 사람들과 로신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다. 자료의 부족과 자료의 한계로 로신을 만난 사람들과 강연을 들은 사람들을 더 이상 서술하지 못하였지만 기필코 더 많으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이는 로신연구의 보다 심층연구를 통하여 규명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며 로신과 우리 겨레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싶다. 이는 또 우리 겨레 로신연구가들이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모름지기 가르치는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로신은 정말 중국 현대의 위대한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로 되기에 손색이 없으며 그가 남겨놓은 정신적유산은 우리 조선민족을 포함한 우리 전체 인류의 재산임을 말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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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1] 《조선문학》 1956년 10월호, 제 189페지
[2] 류수인(1905―1980)은 조선 황해도태생 독립운동가. 중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1922년 7월 24일에 북경에서 처음 로신을 만났다.
[3] 리정문, “로신과 조선사람”, 《연변문예》 1981년 10월호, 제49페지
[4] 《이병주 고백록》 기린원, 1983. 제11페지
[5] 리정문, “로신과 조선사람”, 《연변문예》 1981년 10월호. 제49페지
[6]양소전, 《외국문학연구》 1984년 제2호
[7] 북경로신박물관 편, 《한국로신연구론문집》, 하남문예출판사 2005년 7월. 제58페지
[8] 김시준 “중국에 망명한 한국 지식분자와 로신”, 북경 로신박물관 편, 《한국로신연구론문집》, 하남문예출판사, 2005년 7월. 제54페지
[9] 광주로신기념관 장경 편저 《광주로신옛집》(수정본), 광동과학기술출판사. 제25페지.
[10] 김호웅 김해양 편저 《김학철 평전》, 실천문학사, 2008년 7월. 제86-88페지
[11] 김창석 저 《동방명주를 빛낸 사람들》, 연변인민출판사, 2009년 10월. 제51페지
[12] 중국사회과학원 로신연구실 편 《로신연구학술론저자료휘편》(제2권), 문련출판공사, 1986년. 제286페지
연변문학 2010년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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