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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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 감자
2005년 08월 21일 00시 00분  조회:3692  추천:70  작성자: 리경호
-민족융합과 문화브랜드에 대한 사고

감자는 조선인에게 독특한 의미가 있다.

19세기 조선시대 백성들이 전염병과 굶주림에 허덕이며 끼니마다 무엇으로 빈창자를 달랠가 근근하고 있을때 전라도감사 서유구가 감자를 배양하는데 성공하여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해냈다. 이때로부터 감자는 우리민족의 생활과 떼여 놓을래야 떼여 놓을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이조말기 더는 굶주림과 조정의 등살에 배겨내지 못하게 된 조선농민들은 가만히 월강하여 중국의 간도지방에 와서 밭을 일구고 감자농사를 시작하였다. 그때 월강하면 목숨이 위험했다. 청정부는 조선농민을 발견하기만 하면 가차없이 붙잡아 월강죄로 투옥시키고 지어는 목 숨까지 빼앗아갔다. 그러나 굶어죽느냐 붙잡혀 죽느냐하는 두개의 갈림길에서 많은 조선농민들은 그래도 후자를 택했다. 그것은 굶으면 무조건 죽지만 월강을 하면 붙잡히지만 않으면 살아남을수가 있기때문이다.

19세기 80년대초 청정부에서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면서 동북지구개발에 대한 조선인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합법적으로 거주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일본인들의 조선침략으로 인하여 더욱 많은 조선의 난민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그때 월강하여 연변에 와 정착하였다. 내가 어릴때 많은 식구로 무어진 우리집은 구차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감자는 이때에도 우리가족의 주요한 식품의 하나였다.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구차해진 시기에는 우리들 생존에서 감자의 가치가 더 높아졌다. 우리집에서는 늘 감자를 주식으로 삶아먹고 구워먹고 하기가 일쑤였다. 쌀이 매우 긴장한 시기라 쌀한알이라도 누룽지로 붙을가봐 어머니는 늘 감자를 엷게 썰어서 가마에 펴놓은 다음 쌀을 넣고 밥을 하는 것이였다. 이렇게 하여 생긴 누룽지를 우리는 감자가마치라고 불렀는데 맛이 참 좋았다. 생활이 부유해진 지금도 그 옛날의 감자가마치를 회상하면 군침이 저절로 돈다.

감자는 통화식물목 가지과의 식용식물인데 여러해살이풀로서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의 고원지대이다. 조선의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사화전설집 제13집에는 ‘서유구와 종저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야기는 1831년 전라감사 서유구가 강필리의 저서 ‘감저보’에서 감자에 관한 내용을 보고 어떻게 싹튀우는 방법을 고안해내 감자를 키우는 방법을 보급함으로써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해주었는가 하는 내용을 적고 있다.

감자는 올감자와 늦감자로 나눈다. 올감자는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찍 성숙되여 8월이면 파서 먹을수 있다. 늦감자는 벼가을이 끝나고 나서 10월이면 파내는데 잘 보관하여 두면 온 겨울뿐만 아니라 이듬해 봄까지도 먹을수 있다. 감자는 추위를 무서워 하는데 얼면 빨리 변하여 썩을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일부러 감자를 얼구어 언감자떡이나 언감자밴새를 해먹을 때도 있다. 겨울감자가 어는것을 막기 위하여 보통 김치움에 구뎅이를 더 깊게 파고 묻거나 임시 먹을 감자는 아예 부엌에 뭍거나 쌓아두고 먹을 때도 많다.

모든 식물은 4계절을 타는데 봄이면 싹트고 여름이면 성장하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으며 이는 기후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후란 기온의 변화를 말한다. 그런데 부엌은 실외의 추운날씨와는 달리 부엌아궁이와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늘 더운 기온을 보존하고 있다. 이리하여 부엌의 감자는 늘 봄이 온것으로 착각하고 때이르게 싹트고 생장한다. 그러나 식물이 정상적으로 싹트고 성장하려면 해빛과 기온, 토양 등 조건이 모두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싹트고 있는 식물에게 있어서는 해빛이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부엌밑에 무슨 해빛이 있겠는가?

해볕을 받지 못한 감자싹은 푸른 물을 좀처럼 써보지 못하고 해쓱하게 자란다. 잎도 나지 못하고 모든 정력을 아끼고 집중하여 해빛을 찾아 온갖 간난신고를 다 겪으며 끝없이 끝없이 줄기만 뻗힌다. 희미한 불빛이 보여도 그쪽으로 뻗는다. 때문에 부엌의 감자줄기는 긴것은 1메터 이상씩 뻗어나가는데 빛을 찾기 위하여 그 무거운 석탄덩어리 사이를 용케 비집고 나오다나니 곧게 나오지 못하고 꼬불꼬불하다. 어릴때에는 그것이 희한하고 재밌고 또 그 생명력에 감탄하기도 했었다. 생명의 힘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얼마전 친구의 소개로 연우포럼이라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연변대의 허명철씨가 쓴 ‘사과배와 조선족문화’라는 글을 읽어보게 되였는데 어쩐지 저도 모르게 그 옛날의 부엌의 감자가 회억되였다. 내가 부엌의 감자를 회억하게 되였던것은 아마 연변의 조선족문화와 부엌의 감자사이에 어떤 류사점때문이 있기때문이 아닌가 싶다.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고 월강하여 중국땅으로 이주해온 조선사람의 신세가 어찌보면 빛을 찾아 헤매는 부엌의 감자 같다. 위로는 청정부의 혹독한 억압과 착취, 아래로는 생존의 강한 욕구, 살려면 반드시 빛을 찾아야 한다.

빛, 빛, 빛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족들은 민족과 민족사이의 차별과 학대도 운명 적으로 달갑게 받아들이며 또 그것을 감소하기 위하여 이민족들과 동거하면서 이 중국의 동북땅에 새로운 문화를 펴나갔다. 빛은 어디에 있는가? 빛을 찾기 위해 조선족은 용케도 청정부의 멸망과 위만주국의 멸망도 지켜보았으며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목숨걸고 싸우기도 하고 장개석과의 중국해방전쟁에도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어는 조선전쟁에까지 참가하면서 끝내 중국에서의 자기의 자리를 찾고 조선족자치주를 건립했다. 이는 연변의 조선족들의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기념비’의 대가이다. 이 모든것을 어찌 조선족들의 빛찾기 운동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그 뿐만아니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중국혁명은 연변에서 하고 연변의 혁명은 연변의 조선족이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앞다투어 공산당중앙의 호소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고 맹세도 보였다. 이러한 피타는 노력으로 연변의 조선족들은 중국땅에서 많은 승인을 받고 있다. 중국인민지원군군가도 우리 조선족이 지은것이고 또 적잖은 장군과 과학가들도 배출하였다. 어찌보면 연변의 조선족은 중국이라는 이 낯설은 땅에서 부엌의 감자싹과도 같이 자기의 재능을 힘껏 과시하면서 살아 왔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이 거룩하고 눈부신 업적의 건너편에는 컴컴한 터널이 놓여있다. 그것은 조선족인구의 감소와 조선족민족문화의 소실이다. 허명철씨의 ‘사과배와 조선족문화’는 이러한 현실에 눈을 뜨고 빛을 애타게 찾으려 모지름쓰는 울부짖음이다. 하긴 그렇다. 짐을 배에 실으려면 먼저 든든하고 넉넉한 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라는 이 짐을 실을 배——조선족이 지금 아주 급속한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하여 총인구가 하강선을 긋던 조선족은 설상가상으로 빛을 찾기 위해 한족과의 통혼이 늘어나는가 하면 한족화 되기 위하여 조선학교를 퇴학하고 한족학교에 전학하거나 아예 직접 한족학교에 진학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족문화로 무장된 이런 새일대들을 보노라면 저절로 한숨이 나간다. 문화를 실어야 할 배가 점점 헐망해 지고 없어져 가니 허명철씨를 비롯한 지성인들이 어찌 조선족문화의 앞날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허명철씨는 우리민족의 빛을 찾는 도경을 새로운 브랜드전략에 기대해본다. 참으로 안광이 있는 제의라 하겠다. 우리 연변을 놓고 보면 자원의 우세와 교통의 편리와 지리적위치 등 방면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우월한 점이없다고 한다. 우리 연변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조선족자치주라는것이고 그 다음은 연변의 자랑인 장백산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목재가 많이 났는데 이젠 그것도 옛날 소리이다. 이러한 연변의 실정에는 브랜드전략이 제일 알맞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글을 쓸때도 사람들은 감자와 사과배와 민족문화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고 묻군 하였다. 나의 이러한 다른 사람들과는 틀리는 생각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배척하기를 습관화한다. 지금의 현대문명은 남들과의 차이가 현저할수록 매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청년들은 괴상한 옷을 지어 입고 괴상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괴상한 신을 신고 다닌다. 자기의 특유의 매력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이다. 비록 년세가 드신이들에게 있어서는 못 마땅한 일이지만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인기이다. 그리고 지금은 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특유의 상표, 눈에 확 뜨이는 이름을 선택하여 짓곤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비판의 문화환경속에서 살아 온 우리 중국의 조선족은 이를 무서워 한다. 혹시 누가 정치범이나 외국특무의 명목으로 신고하지나 않을가 하는 우려심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의 매력은 바로 남과 다른데 있다고 본다. 오늘날 브랜드가 이렇듯 사람들에게 흡인력이 있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민족의 고유의 특성을 살려 다른 민족과 지역과는 다른 어떠한 특정을 보여주었을 때 그 생명력은 오히려 생각보다 더 커지는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조선의 각종 물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김일성마크, 김정일마크, 각종 우표, 신문 등이다. 이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는 도리를 증명한다. 중국말의 物以稀爲貴라는 속담이 이런 것을 가르키는 것이다.

아래에 문화의 브랜드를 찾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에 대하여 미천한 견해를 밝히려 한다. 즉 문화의 융합문제이다. 이는 오히려 브랜드문화의 발전에 역효과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하다싶이 민족은 그 민족문화를 실은 배와도 같기 때문에 문화의 융합을 다루기 전에 그 민족을 꼭 언급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융합의 뜻을 알아보자. 융합이란 말의 뜻을 고찰하여 보면 두가지 이상의 금속같은 고체의 물질을 액체상태로 될때까지 가열하여 녹인후 골고루 잘 섞어서 하나의 물체로 만드는것을 의미한다. 철을 고온에서 녹이고 거기에 적당한 량의 탄소를 넣으면 강철이 되기도 하고 눅쇠가 되기도 한다. 또 다른 금속들을 섞으면 스테인레스도 된다. 지금 우리 주위의 많은 물질들은 융합을 통하여 만들어 진것이다. 물론 사과배도 돌배와 사과의 겐의 융합을 통하여 만들어 졌다고 볼수 있다.

문화의 융합과 민족의 융합은 어떠한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민족과 문화의 융합은 물질의 융합과 마찬가지로 99%철, 1%탄소 하는 형식으로 영원히 고정되여 있지 않고 선진적이고 우세를 점한 하나의 민족과 문화가 후진적이고 열세에 처한 다른 민족과 문화를 동화시켜 버리는점에서 유사하다. 융합의 열매는 민족문화의 동화이다. 민족의 융합은 결과적으로 민족의 동화이다. 중국의 한족은 지금까지 거대한 불랙홀처럼 주위의 허다한 소수민족을 흡수하면서 자기를 살찌워 왔다. 홍콩의 한 학자가 통계한데 의하면 지금의 한족가운데의 80% 정도는 다른 민족이 동화된것이지 순수한 한족 즉 황제의 자손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도 처음에는 지금의 우리 중국의 조선족처럼 빛 찾기 운동에서 모대기다가 결국 부지불식간에 동화되여 간 것이다. 김용의 소설속의 모용씨의 가족이 바로 그 예이다.

그렇다면 민족과 문화의 융합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차이점이 시간상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민족의 융합이 실현되기전에 문화의 융합이 먼저 진행된다. 문화의 융합은 서로 다른 두가지 민족을 먼저 커뮤니케이션하게끔 하는데서 나타난다. 이러한 민족문화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두가지 민족의 거부감이 점차 사라지고 호상 대방을 이해하고 승인하게 된다. 이러는 중에서 약소민족은 강한 민족의 우월한 점을 보아내고 강한 민족의 문화를 접수하기 시작한다. 다시말하면 공동언어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이쯤하면 우리는 문화의 융합이 시간저군제임을 볼수 있다. 민족문화의 융합은 민족의 융합에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민족문화가 통하니 민족도 점차 차이를 좁히면서 나중에는 민족의 융합을 이루어 낸다.

민족의 융합과 민족문화의 융합은 서로 융합을 추진하는 작용도 한다. 민족의 융합의 진행은 민족문화의 융합을 더욱 촉진하여 그 템프를 가속화시킨다. 다른 한방면으로 민족문화의 융합은 더욱더 민족의 융합 즉 동화를 가속화시킨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옛날 일제가 조선 강점시기 때처럼, 또 동북의 홍산문화가 사라진것 처럼, 마치 3000년전 동이문화가 사라진것처럼 결국에는 약소민족의 민족문화는 사라지면서 강대민족의 민족문화로 대체되고 약소민족은 점차 동화되여 사라지고 만다. 결국 민족문화를 실을 배—민족이 없어지므로 민족문화도 결국에는 사라지고 마는것이다.

때문에 나는 연변문화의 양식을 한민족과 한족문화의 특색을 살려가면서 새로운 제3자의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견해와 의견을 달리 한다. 나는 그 결과는 반드시 중국의 2백만 조선족인구의 동화로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마치 부엌의 감자를 감자라고 할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현실은 부엌의 감자보다도 엄준하다. 부엌의 감자는 그래도 생활환경이 악렬할뿐 다른 잡종은 안 섞였는데 우리민족은 생활환경이 저기압일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와 혈연의 침투로 인해 동화하여 나가기 때문이다(혹시 어떤 사람은 생활환경이 저기압이라는 말에 반대 의견이 있을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자기의 민족학교로 가지 않고 타민족학교로 전학해 나가는것은 우리민족의 언어를 가지고는 장래에 진학이나 승진에 있어서 제한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수는 없다. 이런 무형의 기운을 나는 저기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민족은 자기의 빛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융합해야만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화는 융합하는 수도 있지만 공존하는 수도 있다. 나는 연변의 상황에서는 융합보다도 공존하는편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인디안인처럼, 중국의 많은 소수민족들처럼 그렇게 동화되지 않고 자기의 문화를 지켜나갈수도 있다.

그렇다면 연변조선족문화는 어떤 속성을 가져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하느님의 자손이며, 단군의 자손이다는 우리민족의 신화를 계속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우리에게는 우리의 고유문화가 있다. 즉 풍류도의 정신과 화랑도의 정신, 거기에 지금까지 선지자들이 유불선문화를 쪄내서 만든 문화를 지켜야 한다.

셋째, 우리의 명절과 풍속을 잊지 말고 지켜나가야 한다.

넷째,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계속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의 문화는 이러한 속성을 주추돌로하는 전제하에서 새로운 길을 탐색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빛을 찾아 살길을 찾아 헤매도 남의 아버지를 제 아버지로 알고 모시며 자기의 친 아버지를 오랑캐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자기가 모르고 한 일이라고 해서도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의 빛찾기 운동은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계속 되고 있다. 그러나 그 형세는 갈수록 더욱 엄준하여 진것 같다. 우리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허명철씨는 브랜드문화를 펼쳐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 또한 동감을 표시한다.

기실 언녕부터 브랜드 문화를 중시하고 발전시켜야 했다고 본다. 브랜드문화를 성공적으로 펼치려면 무엇보다도 문화의 차이점에 모를 밖고 그 차이점을 융합시키고 동화시키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차이점을 클로즈업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연변에서 여러차례의 문화행사가 있었지만 어찌보면 그 효과가 그다지 리상적이지는 못했다고 볼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문화적 행사에 있어서 우리 특유의 문화를 선보인다면 오히려 사람을 흡인하는 큰 자원이 될수 있지 않겠는가고 생각한다. 우리민족의 특유의 가야금, 퉁소, 장단 등을 대폭적으로 보급하여 아주 초대규모로 펼쳐보이고 또 거기에다 다른 민족의 문화행사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면 큰 효과를 일으킬수 있다. 그리고 민속복장도 그렇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우리민족의 옷단장을 세상에 자랑하는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기에 탈명절, 민족씨름절, 그네뛰기절 등등 을 보편화 규모화시키면서 나아가면 끝내는 민족의 브랜드를 훌륭히 이루어 낼것이라고 생각한다. 차이점을 융합시키거나 축소시킬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점을 확대화시켜 남다른 이미지로 우리의 경제와 문화를 구축해나가야 하는것이다.

솔직히 브랜드문화의 건립과 문화의 융합의 문제는 모순되는 문제이다. 문화가 융합되면 차별이 없어지므로 결국에는 브랜드문화의 건립을 이룰수 없다. 브랜드문화는 차별을 확대화하는 것이므로 또 융합도 이루어 낼수 없다.

허명철씨는 조선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면 나의 존재에는 조선족다운 그 무엇이 체현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족의 일원이란 조선족의 피가 섞여있음을 말하고 조선족다운 그 무엇이란 자기의 아비를 알고 섬겨야 함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총체적으로 중국의 조선족이 빛을 찾자면 문화의 융합의 길을 걸어서는 안된다. 문화는 공존을 쟁취하고 될수록이면 자기 문화의 우점을 살리여 차이점을 확실히 하는 점에 모를 박고 브랜드문화를 펼쳐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하여야 만이 자기 민족의 존엄을 지키고 피의 순결성과 민속의 정통성을 지켜낼수 있다. 또 자기의 진정한 조상을 잊지 않음으로써 후손만대가 떳떳하게 살아나아 갈수 있게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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