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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고백
남영도
드디여 수필 3편을 탈고했다.
해탈감과 함께 아쉬움이 남는데 톱에 싣겠다고 창작담까지 보내오라고 한다.
“내 글을? 톱에?…”
일순간 멍해진다. 문단의 한 귀퉁이에서 나지막한 톤으로 작은 목소리를 내는 수필가일 뿐인데, 치열한 작가정신이란 운운할 것도 없는, 그저 수필이 좋아서 가끔씩 글을 끄적이는 오십대 아낙일 뿐인데 이렇게 톱에 지면을 할애해주셔서 그지없이 황공한 마음이다.
나에게 수필쓰기는 아직도 넘기 어려운 가파로운 열두고개이다. 투고 마감일까지 머리를 싸쥐고 쩔쩔 매는 꼴이란…
몇년 전, 나의 수필집 《문학의 곁에 음악이 흐를 때》가 출간된 뒤 여러가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이제는 원래의 틀을 깨는 시도를 해보라는 기대의 목소리가 컸다. 그런 비평의 목소리에 주목하며 수필기법 면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려고 애쓰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지난해 모 문학지의 청탁으로 수필 12편을 써내려갈 때도 나름 여러가지 시도를 비치려고 하였으나 글을 쓰다 보면 어느덧 원래의 상투적인 기법 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면 꼭 떠오르는 후배의 한마디가 있었으니, 바로 나에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런 재치가 없다”는 사실이다. 천부적인 재주가 없으니 그저 우직하게 진지함을 꾹꾹 담아 또박또박 써내려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늘 그러하지만 나는 수필을 쓸 때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일기를 쓰는 자세로 림하게 된다. 그래서 고백적이고 그래서 진솔함이 묻어날 것이다. 이번에 쓴 수필 〈치타치타〉에서 나는 시어머님과 다투고 사과하지 않은 속사정을 려과없이 그대로 드러내보였다. 이른바 고상한 척을 하는 나 같은 인테리의 진실한 모습을 발가벗김으로써 은퇴를 하고 보면 인테리든, 팔순 할머니든 다 보통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고저 하였다. 작은 시도이지만 쓰고 나니 속까지 다 후련해난다.
그런데 객관적 시각에서 내 문풍을 되살펴보니 나더러 진지함과 경건함을 조금씩 내려놓고 좀더 소탈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한 후배들의 부탁은 오간 데 없고 펜을 들자 가슴은 또다시 뜨거워져 원래의 진지한 모드로 고스란히 돌아와있은 것이다. 못 말리는 벽창호다.
얼마 전 위챗계정의 덕택으로 20여년 전에 쓴 나의 글 〈창에 카텐을 내리우고〉가 재조명을 받게 되였다. <안을 지키는 자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은 글인데 예상 외로 독자들 반향이 좋았고 나 또한 덕분에 다시 읽으면서 옛날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해볼 수 있었다.
30대의 나는 혼자만의 방에 기대여 책을 읽고 음악 속에서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서정적 주인공이였는바 글에서는 나름 절제의 미가 풍겼다.
강산이 두번 변하고도 남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도 변하고 내 문풍도 많이 변해있었다. 30대의 서정적 주인공이 50대의 우아한 사모님으로 변해있었으면 좋으련만 완전 수다쟁이 아줌마로 변해있어서 허구픈 웃음이 나온다. 서정과 랑만과 동경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년륜을 자랑이나 하듯이 온통 추억과 회한과 개탄으로 가득찬 넉두리가 차고 넘친다. 30대의 주인공은 소음과 공해의 도심 속에서도 혼자만의 방을 만들 수 있다고 랑만에 차있는데 50대에 이르러서는 귀청을 째는듯한 웃집의 인테리어 소음에 책을 볼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노라고 마구 토설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아낙으로 변해있었다.
그래도 문우들은 옛날보다 많이 넉넉해지고 구수해졌다고 듣기 좋은 평을 해주지만 이제는 틀을 깨는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시점에 와있음을 나 자신이 잘 안다.
그러한 시도로 세번째 수필 〈독서와 려행이라는 듀엣〉을 쓰게 되였다. 맨처음 제목을 ‘이중주’라고 달았다가 더 포괄적인 의미의 ‘듀엣’이라는 단어를 골라보았다. 요즘 류행하는 말로 “독서와 려행, 육체와 령혼 중 하나는 반드시 길 우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독서와 려행은 인간의 삶에 있어 쌍둥이자매, 려행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책벌레’의 시각에서 설파하고저 하였다. 또한 려행지에서의 자기만의 느낌과 발견을 오롯이 담은 려행기를 써보고 싶은 희망사항을 술회하였다.
요즘 우리는 눈만 뜨면 도처에 글들이 란무하는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다. 자칭 ‘활자’중독이라고 하지만 이제 란무하는 모든 글들을 다 읽어낼 수 없는 이른바 ‘글의 전성시대’에 문학의 효용성 내지는 가치라는 것에 대해 다시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에 마침 조선족‘60후’작가작품연구토론회가 있어 중국현대문학관에 다녀오게 되였다. 고난과 고통이 점철되여있는 삶 속에서 오로지 문학이라는 한 우물만 파면서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배출해낸 그들, ‘60후’ 대표적 작가들에 대한 탄복과 함께 존경심이 인다. 같은 년배이지만 치열한 작가정신을 운운할 수조차 없는 자신을 부끄럽게 돌아보면서 글쓰기에 림하는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재미있고 쉽게 읽혀지는 감동적인 글들은 사실 작가의 깊은 고뇌의 산물이다. 천부적인 재질이 없다면 노력으로 승부할 일이다.
말끝마다 ‘책벌레’라고 하지만 내 독서량의 빈약함을 수시로 느낀다. 쉽게, 함부로 펜을 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자만의 방에 기대여 고독을 즐기며 책을 탐독하고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글로 독자들과 만날 것을 약속드린다.
출처:<장백산>2018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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